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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 인생

등록일 2016-01-22 02:01 게재일 2016-01-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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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진 수필가
결혼기념일을 맞아 바다 여행을 마련했다. 겨울 파도의 사나운 모습과 제철 만난 게살 맛이 생각난 때문이기도 했고,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전화로만 `친구로 지내자`고 한 스님의 절이 그 쪽에 있으니 내친 김에 한번 만나보리라 작정한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왜 찾아 가냐며 의아해 하는 아내에게 군대 동기 만남의 희귀함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군대 동기이니 우리는 `당연히 친구`라며 일방적으로 반말을 해왔다. 그와 군대 생활을 같이 한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제대 후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한 부대에 있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전화 통화를 자주 하게 되었다. 얼굴 한번 본 일 없었지만, 그가 동기를 강조하는 통에 `됐나? 됐다!`를 외친 이후, 소위 말하는 니네돌이로 말까지 트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가 주지로 있는 절은 대게로 유명한 강구항 인근에 있었다. 작지만 아담한 대웅전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넓은 주차장 위쪽에 정결하게 보이는 요사채가 있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깊숙하고 길다란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받아 평안한 분위기가 풍기는 아담한 절이었다.

합장 인사를 받았다. 친구하자는 예의 그 주지 스님이다. 통통한 양 귓볼이 도드라져 보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인상이다. 내겐 합장이 익숙지 않았지만 처음 대하는 자리인지라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두 손을 모아 인사에 답했다.

전화기로 주고받은 임마, 얌마도 있었지만 군발이 젊은 시절을 같은 부대에서 부대꼈다는 사실 하나가 우리를 스스럼없이 가깝게 했었나 보다. 대면은 처음인데도 호칭부터 서로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한동네 살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허물없는 대화들이 한동안 오갔고, 그는 우리를 자기 거처로 안내했다.

대웅전 입구의 사랑채에 구유 크기의 넓은 차 탁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으니 진입도로 입구부터 건물 전체가 조망되었다. 군대 생활 내내 위병소 근무만 했다던 주지 스님 다운 건물들의 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놓은 차의 맛이 특이해서 재료를 물었더니 감 껍데기 차라면서 그는 스님의 본성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생명체에는 알맹이도 중요하지만 그 알맹이를 보호해 주는 껍데기도 중요하다`고.

거처하는 방은 마치 학생의 하숙방 같이 단촐 했다. 온돌방에 이부자리와 갈색 책상 하나, 그리고 모니터 두 개를 연결한 PC가 전부였다. 벽에는 운동복이 한 벌, 무늬 없는 장롱 두 짝이 윗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옹색하고 초라한 세간이 속인(俗人)인 나의 눈에는 약간 서글프게 느껴졌다.

군 생활 때라며 사진 몇 장을 보여 주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의 배경에 나타난 내무반 풍경이, 우리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업보를 물어볼까. 아니지. 스님이 된 사유나 들어 보자고 해도, 스님 된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해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오랜만의 만남, 아니 얼굴 튼 초면이니 어찌 그냥 있을 것이냐며 스님 손을 이끌었다. `스님은 곡차를 마시시오, 나는 곡주를 드마.`고 했더니 보름 제(祭)마다 제 절을 찾는다는 보살님 식당으로 가잔다. 한상 그득 주안상이 차려졌다. 스님 전용 곡차 병이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찻잔과 술잔이 뒤엉겼다. 몇 순배가 돌자 그가 설파했다. `곡차나 곡주는 원래 같은 것이다. 기쁨을 함께하는 환호의 박수요, 슬픔을 나누는 위로의 손잡이이다. 우정을 묶어주는 튼튼한 밧줄이며 오해를 뚫어주는 송곳이요, 가식과 허례를 벗겨주는 솔직함`이라고….

껍데기 인생을 이야기했다. 자식들을 언제까지 보듬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네는 껍데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취기가 오를수록 나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스님친구는 오히려 나의 껍데기 인생이 부럽다고 했다. 아내가 결론을 내려줬다. `서로를 부러워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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