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인연

▲ 김종숙수필가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되었다고 아들이 짐을 챙기며 준비를 했다. 엄동설한의 칼 같은 바닷바람에 고생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자며 말렸다. 중개사 자격증도 있으니 내 사무실에 와서 일을 배우라고 했다. 잠을 설쳐가며 취득한 자격증 썩히지 말고 아버지 사무실에 보기 좋게 걸어놓자고 설득을 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아들이 생각할 시간을 달란다. 하룻밤을 자고 나더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는지 중개업에 대한 업무를 이것저것 물어본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건설회사에 가지 않고 아버지 일을 도우며 열심히 배우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는 아들이 여간 반갑고 든든한 게 아니었다.따뜻한 봄날 여성 손님 두 분이 부동산에 관련하여 상담을 하러왔다. 상담을 마치고 나가는 손님에게 옆자리에 있던 아들이 벌떡 일어나 잘 가시라는 인사를 하니 손님이 돌아보면서 총각이 참 좋다고 했다. 뒤따라 배웅하던 내가 그럼 저 총각 중매 한번 해 보라고 되받았다. 나가다 말고 돌아선 손님이 우리도 딸이 있단다. 그럼 멀리 갈 것 없이 따님 한 번 보자고 했다. 딸은 타지에 있어 방학이라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 기다릴 테니 따님이 오면 연락을 주시라고 다짐을 하고 3개월을 기다렸다.무더운 여름날 그 손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멀리 있는 딸이 고향에 왔다며 아들과 한 번 만나 보자고 한다.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놀러간 아들을 불렀다. 땀을 뻘뻘 흘리는 아들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 손님은 예쁜 딸과 함께 와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인의 장단점이랑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물어보았다. 대답을 하는 말씨와 태도를 눈여겨보니 며느릿감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아서 둘만이 시간을 갖도록 해 주었다.둘이서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헤어졌다는 아들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다. 예쁘고 야무지고 성품도 좋은 것 같으니 한 번 더 만나 보라고, 여자는 한 번을 봐서는 모르는 거라며 채근을 했다. 손님에게 아가씨 한 번 더 보자며 연락을 하였다. 학교로 갔다며 그럼 겨울방학 때 다시 한 번 만나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다.연말이 되어 먼저 전화했다. 아직 딸이 오지 않았는데 오는 대로 연락을 하겠단다. 얼마 후에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 아들과 아내를 대동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이번에는 데이트를 길게 해봐라, 짧은 시간에 여자의 소양을 다 알 수 없다. 여자는 행동과 교양과 지식이 함께 갖추어져야지 지식만 있어도 안 되고 예쁘기만 해도 안 된다. 아버지 이야기를 참고하라며 거듭 당부했다. 함께 다녀온 아내가 다 좋은데 키가 좀 작다며 아쉬워했다. 100%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우리 분수에 그만하면 차고 넘치는 며느릿감이라고 했다.고흥과 포항으로 서로 근무지가 다르다 보니 견우와 직녀처럼 동서를 오가면서 일 년이 지났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교감을 한 다음 두 집 가족들이 다시 모였다. 부족한 것은 서로 이해하고 상의하면서 열심히 잘 살기를 바라며 뜻을 모았다. 일가친척과 지인들의 축복 속에 혼례를 치렀다. 근무지가 달라 한 달에 한두 번 만나기도 힘든 어려움이 있었는데, 일 년 후에 며느리가 포항으로 직장을 옮길 수 있게 되어 드디어 온전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며느리가 포항으로 옮겨오자 금세 손자가 태어났다. 아내가 애지중지 그 손자를 키웠다. 연달아 또 손자가 태어나고, 우리 부부는 복덩이가 셋이나 덩굴째 굴러들어 왔다며 행복감에 힘든 줄을 몰랐다.며느리 역시 요즈음 젊은 사람 같지 않게 효도를 잘한다. 고등학교 교사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을 해서 힘들고 피곤한 중에도 매일 양가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거르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며느리를 늘 고마워하면서 가족의 기념일 때마다 혼자서 음식을 준비해 두 집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그러다 보니 사돈끼리 한 달이 멀다하고 만나게 된다.멀고도 가까운 게 사돈지간이라지만, 이제는 친구처럼 가족처럼 부담과 허물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 인연이라는 걸 특별히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과분한 은총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2016-04-29

재래시장

▲ 손달호 수필가 죽도 재래시장에 갔다. 뿌연 새벽인데도 시장 골목이 왁자지껄하다. 장날, 무싯날이 없는 소문난 죽도시장답다.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푸짐하여 마음이 발걸음을 따돌리고 저만치 앞서 갔다. 쫀득한 강냉이를 까먹으며 장 구경도 좋았고 양념 냄새 풋풋한 국수도 사 먹을 수 있어 더욱 신났다. 내 수준엔 이런 재래시장 풍경이 언제나 잘 맞다.아침 공기에 목청이 트인 채소 장수 아주머니의 신바람 나는 노랫소리에 지나가던 손들이 몰린다. 감자, 오이 장사 아주머니도 곁에서 질세라 적재 칸에 올라 앉아 호객에 열을 올린다. 싱싱한 미주구리 파는 할머니의 손길은 이미 바빴다. 마디 굵은 손가락 사이로 집은 것의 반쯤은 흘러내리고 아슬아슬하게 걸린 두어 마리를 덤으로 주면서 덕담까지 건넨다.“무 썰고 미역 좀 넣고 무쳐서 자셔 보라고, 내가 막 퍼 준다 아이가.“어느 장사꾼한테서는 사람들이 물건을 잡아당기며 서로 사 가려고 한다. 손은 부지런히 놀리지만 말은 간간이 오갈 뿐이다. 양파가 불티가 난다. 물건 자랑을 떠벌리는 일도, 값을 흥정하는 일도 없다. 장사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으로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풋풋한 종대 끝에 달린 양파가 밭에서 금방 기어 나온 듯하다. 잘 생긴 놈은 말이 필요 없이 스스로 팔려 나간다.보따리, 리어카 사이로 장세를 거두러 다니는 구청 직원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노점 장세는 오백 원이었다. 봇짐장수에게는 밑천이 안 들어가니 결국 소비자에게 그만큼 덕인 셈이다. 물건 값에 가게 세나 인건비가 끼어들지 않기 때문이다.할머니가 팔러온 시금장 단지 앞에 앉아 시금장 담는 특강을 들었다. 구수한 시금장만큼이나 깊은 맛 나는 할머니의 입담이 정겨웠다. 홀로 사시면서 별로 입 다실 일이 없으셨던지, 내가 잘 들어주자 할머니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했다.얼추 십여 분이나 고분고분하게 잘 들어줬다는 값어치로 마디 굵은 손가락에다 시금장을 쿡 찍어 내 입안에 쑤욱 넣어 주셨다. 토속적인 시금장 맛에다 할머니 손가락의 온기까지 빨고 있으니 문득 옛날 외할머니의 향수가 밀려와 시금장 먹은 속이 시큼했다.어느덧 나는 외할머니의 추억에 젖어 있었다. 이럴 땐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선술집으로 들어가 탁주 한 추발로 속을 헹궈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이 일었다.시장은 우리 삶의 현주소이다. 우리의 정서와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체감하게도 한다. 성실히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에서 희망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그뿐인가. 시장은 소박한 인정이 남아 있는 곳이다. 콩나물 한 옴큼 쓱 집어서 덤으로 얹어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풋고추 몇 개 더 주는 것이 인정이라면, 이것의 실천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요즘 고급 백화점, 대형마트가 성황을 이루고 동네 재래시장이 죽어 간다고 한다. `편리함`에 대한 신드롬이다.더운 날씨에 이 골목 저 골목 다닐 필요 없이 엘리베이터로 한꺼번에 해결된다. 한 곳에서 잡화를 구입할 수 있는 시간의 경제성도 있다. 하지만 비싼 땅, 고급 건물, 수많은 종업원 등은 소비자가 부담해야할 몫이다.새벽 일찍 재래시장에 나가면 생산자로부터 농산물을 받을 수 있다. 밭에서 바로 거둬온, 숨 쉬는 채소들이다. 백화점처럼 비쌀 이유도 없다. 보관대에 넣어 두지 않아 위생을 염려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신선한 것을 싼 가격으로 준다는데 굳이 마트만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땀으로 키운 것을 돈으로 장사하려는 대형마트들. 노지에서 기른 것은 노지에서 사고파는, 인정이 풋풋한 사람살이를 느끼게 해 주는 재래시장을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16-04-22

봄길을 걷다

▲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이웃에 사는 친구와 봄나들이를 했다. 어디라고 목적지를 정하지는 않고 차를 타고 가다가 한적한 시골길에 내려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발길 닿는 대로 한나절을 걸어 다녔다. 길섶에는 파랗게 자란 풀들이 성큼 다가선 봄을 알리고 있었다. 이상기온으로 예년보다 앞당겨진 봄이라고는 하지만 어느새 풀들이 이만큼이나 자랐을 줄이야. 벌써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고 수양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도 연둣빛 새움이 돋아나고 있지만, 수북하게 자라난 풀빛에서 더 봄을 실감하는 것은 내가 시골 태생인 때문일 것이다.파랗게 자란 봄풀은 농사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아낙네들은 보리밭 김매기를 시작하고, 아이들은 겨우내 외양간에 갇혀있던 소를 몰고나가 풀을 뜯기는 계절이 온 것이다. 2월 영동에 며느리들 문설주 붙잡고 운다는 말이 있듯이, 봄이란 그렇게 힘겨운 노동의 시작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산자락에는 진달래가 만개했다. 나에게 진달래는 무엇보다 허기를 떠올리게 하는 꽃이다. 진달래꽃을 흔히 참꽃이라고도 하는 것은 아마도 먹을 수가 있는 꽃이라는 뜻일 것이다. 뒤를 이어서 피는 철쭉은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 없는 것과 구별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춘궁기로 일컬어지던 시절에 나는 배가 고프면 뒷산에 올라가 입안이 퍼래지도록 진달래꽃을 따먹었다. 맛으로 먹어본 게 아니라 허기를 달래려고 먹은 거였다.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 그 꽃을 보면 지금도 구미가 동한다. 어려운 시절에 많이 먹었던 음식들은 질려서 보기도 싫어지는 법이라는데 나는 왠지 그렇지가 않다. 꽁보리밥이든 진달래꽃이든 세월이 가도 그때의 그 절실함이 그다지 퇴색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같다.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그 식욕이야말로 생의 저 밑바닥에 가 닿는 삶의 절실함이 아니었을까. 친구와 나는 진달래꽃 무더기 앞에서 한참이나 꽃을 따먹었다. 마치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에 대한 허기를 채워보려는 것처럼….저수지 가에 선 버드나무에 파랗게 물이 올라 있었다. 물오른 버드나무가지를 보면 버들피리를 만들고 싶어지는 것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의 정서일 것이다.밋밋한 버들가지를 꺾어서 손아귀로 비틀어 속 줄기를 빼내면 굵은 빨대처럼 생긴 껍질이 남는다.그 한쪽 끝을 깨끗하게 잘라서 겉껍질을 살짝 벗기면 그것이 떨판 구실을 해서 버들피리가 된다.버들피리를 만들고 싶은데 칼이 없었다. 깨어진 유리조각이라도 있는가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버들피리 하나 못 만들면 시골내기가 아니다. 어려서 시골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대개 그런 임기응변에는 익숙하다.자기 일은 모두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했던 옛날 시골 아이들이 뭐든지 엄마가 다 챙겨주는 요즘 아이들과 다른 점이다.친구와 맨손으로 버들피리 만들기 시합을 했다. 칼이 없으니 이로 버드나무껍질을 잘라야 한다. 그런데 그 자른 단면이 고르지 않아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내가 먼저 보란 듯이 소리를 냈다. 조금 후에 친구도 성공을 했다.우리는 장한 일을 해낸 아이들처럼 흐뭇해져서 마음껏 버들피리를 불어댔다.버들피리 소리에는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들이 들어 있다. 그 척박했던 삶의 곤고함과 궁핍했지만 질박하고 무구했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그리움의 선율이되어 흐른다.`먼먼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와서 이제는 초로에 접어든 두 남자가 어느 봄날 석양이 내리는 시골길을 버들피리를 불며 가고 있었다.

2016-04-15

냉이

▲ 손진숙 수필가 시장에서 사 온 냉이를 씻는다. 옆으로 벌린 잎에 비해 뿌리는 아래로 벋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뿌리째 먹는 나물로는 냉이가 으뜸일 것이다. 흐르는 물에 잎을 흔들어 씻은 다음 뿌리를 쓰다듬어 내린다. 긴 겨울, 땅속에서 견뎠을 고난이 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온다. 순탄치 못한 삶을 말해 주듯 살갗이 거칠기만 하다. 제법 큼직한 흉터가 나 있기도 하다. 흉터의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싸한 아픔이 가슴께에 밀려든다. 지난날 내가 겪은 상처의 뿌리도 뽑아내면 이 냉이 뿌리와 닮지 않았을까. 상처 난 뿌리에서 향기가 풀려 나온다.소녀 시절, 이맘때면 이웃 또래들과 함께 냉이를 캐러 다니곤 했다. 가까운 밭이랑을 살피며 캐다가 양에 차지 않으면 아예 들로 나갔다. 때로는 철둑 넘어 산비탈 밭을 헤매기도 했고, 강 건너 마을 과수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것은 여자아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새봄맞이 행사였다. 나물 캐기는 여자아이들이 외출할 수 있는 합당한 명분에 속했다.이른 봄의 속삭임을 엿들으러 나선 발길. 강물이 깨어나는 소리, 햇살이 데워지는 기미, 새싹이 꿈틀대는 기척들과 설레는 만남이었다. 밭이랑에 파릇파릇 움터 있는 냉이를 찾는 일은 앳된 소녀들이 희망의 무지개를 찾는 일이었다.사과나무 아래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계집애들은 눈망울을 탐험가처럼 두리번거렸다. 채 물러가지 않은 추위 속에서 냉이를 발견했을 때의 그 기분이라니. 이른 봄의 차가운 기온도, 멀리서 걸어온 피곤도, 스르르 녹이는 환희였다. 땅바닥에 최대한 납작 등을 맞대고 추위를 견디며 무성히 자라 꽃피울 날을 기다리는 냉이. 그 낮은 기다림 속에 시골 소녀의 꿈이 얼비치기도 했다.할머니는 냉이 나물을 좋아했다. 냉이 나물이 밥상에 오르면 맛나게 먹었다. 내가 마구잡이로 캐 담은 냉이 바구니를 던져 놓고 놀러 가버리면 할머니는 귀찮은 줄 모르고 하나하나 다듬었다. 흙을 털어내고, 떡잎을 떼어내고, 잔뿌리를 잘라내어 말끔한 새 인물로 바꾸었다. 활동이 어려워 적적하던 할머니의 소일거리로 안성맞춤이었을까. 할머니는 냉이를 다듬으며 지나가버린 봄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는지도 모른다.냉이를 살짝 데쳐 물에 담가 둔다. 저녁 식탁에 올리려고 나물을 무치려다 보니 담갔던 물이 냉이의 잎보다 더 진한 초록빛이다. 어디서 그런 고운 빛이 나왔을까? 초록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눈을 뗄 수가 없다. 한참만에야 주방의 좁은 창으로 하늘을 내다본다. 연청색 하늘 자락에 구름 조각들이 냉이꽃처럼 피어나 있다.냉이 무침을 식탁에 올려놓으니 집 안에 향내가 넘친다. 들판의 봄이 실내에서 활짝 기지개를 켜는 듯하다. 그 향기로운 맛을 본 가족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오늘, 시장에 들러 냉이를 사온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가족들의 냉이꽃 같은 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 뿌듯하다.냉이 무침에 절로 젓가락이 간다. 입 안에 냉이 향이 가득하다. 고향의 산과 들이 눈에 잡힐 듯 선연하다. 냉이 나물을 씹기 시작한다. 달고 고소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몸 안에 새봄의 기운이 퍼져간다. 냉이 뿌리를 닮은 내 마음의 뿌리에 난 상처에서도 봄 향기가 풍겨 나올 듯하다.

2016-04-08

새봄, 오솔길에서

▲ 강길수수필가 마르첼리노.어린 시절, 이른 봄날 도랑가 오솔길. 개나리꽃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샛노란 빛의 경이로움이 지금도 내 마음 영상에 살아있어. 도랑가엔 흐드러지게 개나리꽃 샛노란 빛의 축제가 벌어졌지. 그 아래 졸졸졸 흐르는 도랑물 사이 돌에 앉아 버들강아지를 따 먹던 시절 말이야. 어느 틈에 수양버드나무가지 꺾어 만든 피리가 아이들 입에 물리고, 순식간에 봄 도랑은 버들피리 오케스트라가 벌어지곤 했잖아.그럴라치면, 숨 쉴 겨를도 없이 산천을 온통 분홍빛 진달래꽃 곧, 참꽃이 수놓아버리고 말았지. 아이들은 참꽃 꺾고, 따먹기에 혼이 나가버려 시간가는 줄도 몰라 점심 거르기가 일쑤였지.“이놈들아, 애들이 참꽃 따 먹으면 문둥이가 잡아먹는다!”어른들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로 아이들을 닦달하였지만, 우리들은 아랑곳 않던 날들. 모두가 입술이 시퍼렇토록 참꽃을 따 먹고, 손에 손마다 가득 꺾어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서던 골목길. 처음엔 꾸중하시던 부모님들도 나중엔 포기하셨는지, 되레 어느 산에 가면 더 붉은 진달래꽃이 있다고 알려주기까지 하셨지.마르첼리노.나의 새봄은 그 때가 최고였던 것 같아. 젊은 날, 조금 쏘다닌 봄도 있었지. 자기가 뭐 문학도나 철학도 라도 된 듯, 제 최면에 걸린 마음을 달고 이곳저곳 쏘다녔으니. 그러나 이미 그 때는 어린 날 같은 순수한 봄은 아니었어. 너도 알다시피 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길을 숨 가쁘게 달리던 봄들이었으니 말이야.자기도 모르게 나이가 들고나니, 왜 자꾸 어린 시절의 봄날들이 떠오르는지…. 역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인가봐. 아니면, 아직도 나는 치기어린 소년에 불과한 거지. 이제 봄은 이만큼 오는데, 내 마음의 봄은 언제 또 오실까. 영영 오지 않으시려는가. 세파의 때가 너무 많이 묻은 게지. 평생 월급쟁이가 무슨 때 낄 여유나 있었느냐고? 그래도 개나리, 진달래 피는 봄은 이처럼 오는데, 참꽃 따 먹던 봄은 오지 않고 있구나.마르첼리노.문자 없는 편지를 왜 너에게 보냈는지 나도 설명할 재간이 없다. 그저 그렇게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아마도 오시는 봄을, 내 하잘 것 없는 언어로 오염시키지 말고 그대로 전하고 싶었는지도 몰라.`할아버지!` 그 어떤 단어보다 연륜의 흐름이 단박 전해왔지. 처음 길에서 아이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며느리 둘을 다 본 아직도, 마음 이편에선 `아니야!`한다. 저편에선 `그래도 세월은 간 거야`하고. `재미없는 늙은이`로 되어 가는 게 인생이라고? 오! 서글픈 내 삶의 오솔길이여.글 주제 정하기가 쓰는 것만큼이나 힘이 드는구나. 정해진 것이라면 잘하든 못하든 쓸 텐데. 어찌 보면 이것도 욕심이지. 연습으로 하는 것이니, 무엇이든 주제삼아 쓰면 될 텐데 말이지.`기쁨은 관계 속에서 온다!`고 하는데, 그런 관계가 이 새 봄엔 샛노란 개나리꽃같이, 분홍 진달래꽃처럼 맑게 너에게도, 또 나에게도 새롭게 오시기를 빈다.새봄, 오솔길에서.오늘 예서 이만 쓸게.안녕!

2016-04-01

회초리

새 학기가 시작 되었다.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학교로 향한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예쁘고 해맑은 아이들을 보니 최근 세상을 경악하게 하는 자녀폭력과 유기에 관한 뉴스들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한다. 몹쓸 짓을 한 가해자들은 어린 시절 가족의 따스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바람직한 부모는 적당한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하리라. 당근만 주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채찍만 가하면 폭력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어릴 적 나는 아버지의 매를 맞으며 자랐다. 거짓말은 하면 절대 안 되었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했다. 어겼을 경우에는 굵은 회초리를 해오라는 불호령이 내려졌다. 아버지의 명령은 나에게 법이나 다름없었다. 쌓아둔 나무더미에서 아버지의 팔 힘을 가늠하며 회초리를 찾고 있으면 어머니께서 내 새끼손가락보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손에 쥐어주며 방으로 들어가게 하셨다.고개를 푹 숙이고 아버지 앞에 회초리를 내밀면 `이것도 회초리라고 해 왔느냐`는 소리가 천둥 같이 지나가고, 공기를 가르는 날렵한 싸리 나뭇가지는 뼛속까지 아리게 했다.아버지는 마치 대문 옆에 서 있는 커다란 엄나무 같으셨다. 온몸에 가시를 돋우고, 악귀를 쫓는다는 엄나무. 마치 우리들에게 못되고 나쁜 버릇이 스며들지 못하게 지키는 수호신 같았다.어머니는 달랐다. 큰소리로 나무라지도 않았다. 아버지께 혼이 난 다음날은 반듯하게 접은 양면괘지를 책가방 속에 넣어 두셨다. 퍼렇게 멍든 종아리가 많이 아프지, 매 맞고 울지도 않아서 엄마마음은 더 아프다, 씩씩하게 학교 잘 다녀오라는 따뜻한 편지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빈 편지지 일 때도 있었다. 푸르스름한 새벽, 연탄불에 밥 짓는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의 회초리보다 더 철들게 한 어머니의 따스한 회초리였다.내가 두 아이의 어미가 되었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아이의 투쟁과 맞선 적이 있다. 아이는 침묵과 단식으로 대항했고, 가정의 분위기는 살얼음 위를 걷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 때 어머니가 생각났다. 호통을 치거나 매를 들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철이 들게 하셨던 어머니의 편지 회초리였다.꽃그림이 있는 분홍빛 편지지를 사 왔다. 첫 줄에 아이의 이름을 쓰고, 사랑한다는 말을 적었다. 이어 쓸 말이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쓰고 보니 내 넋두리가 되고 말았다. 아이가 읽으면 어미의 잔소리 밖에 되지 않을 내용이었지만 곱게 접어 내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잠든 아이의 책가방 속에 살며시 넣어 두었다.하교시간에 맞추어 아이가 좋아하는 갈비찜을 만들어 두고 귀가하는 아이를 맞이했다. 뾰로통한 얼굴에 살짝 어리는 고운 빛을 보았다. 갈비찜을 가득 담은 접시를 상 위에 올리며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같이 먹자고 했더니 슬그머니 젓가락을 들었다.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이야기만 나누며 아이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아이는 고기 한 점을 집어 내 숟가락에 얹어 주었다. 매듭이 풀릴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켰다. 아이가 리모컨으로 채널을 고정시켰다. 나는 가장 멋진 연예인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아이는 왕방울 눈으로 쳐다봤다. 엉켰던 실이 풀리기 시작했다.모 대학교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려면 할 일은 한 가지 뿐이다. 학교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 `끼`와 `생각`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책상 정리를 하는 손놀림이 가벼웠다.다음 날 아침, 등교한 아이의 책상 위에 봉투가 놓여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쓴 답장편지였다. 봄 햇살보다 더 따사로웠다. 채찍보다 당근이 더 강한 회초리였다.

2016-03-25

그녀의 얼굴이 해쓱하다. 이생의 삶이 사라져 간 공간에 그녀와 나는 또 다시 마주 보고 섰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 했던 순간들이 아스라이 느껴진다. 생사를 넘나들던 그녀의 삶이 시간을 거슬러 환원된다. 현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와 피할 수 없이 맞닿아 있다. 고향친구의 모친상으로 모교 동기생들과 장례식장을 찾았다. 조문객들 틈에 멀찍이 앉아 있던 그녀가 불편한 몸을 가누며 내손을 잡아당겼다. 흰 머리카락이 드러난 긴 생머리를 동여매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주름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세상은 그녀를 현실 밖으로 밀어낸 듯한 착각이 들었다.오래 전, 그녀는 교통사고로 한동안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전신의 반 이상을 붕대를 감은 채 부기가 부석한 얼굴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의식이 돌아온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고통의 수위를 넘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보였다. 드러내지 못하는 속내가 회한으로 엉겨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으리라.그녀의 삶이 마치 폐허처럼 허물어져 낯설게 다가왔다.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몸에는 링거 줄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었다. 병실 밖 풍경에 눈길이 머문 순간, 코끝의 매운 느낌이 단지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가는 생명줄을 이어가고 있는, 세상과 단절된 중환자실의 어둡고 무거운 풍경 때문이기도 했다.그녀와 나는 고향에서 학교를 같이 다녔다. 흉허물 없이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친구였다. 도시의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소식이 뜸해졌고, 종내는 연락이 두절 된 채 시간이 흘렀다. 결혼을 하고 친구들이 하나 둘 연락이 되면서 소식이 닿았다.가슴이 답답할 때면 해안가를 한 바퀴 돌고 온다며 뜬금없는 기별이 올 때도 있었다.막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녀의 남편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느 가정의 일상과는 다른 무거운 기운이 앉은 자리를 불편하게 했다. 남편과의 잦은 충돌로 그녀의 삶은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로웠다.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그에게로 향했던 마음을 거두었다.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육신의 장애다.몇 차례의 수술 끝에 겨우 목발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됐다. 성대를 다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뱉어 내는 말에는 삶의 강한 애착이 묻어난다. 수없이 나락으로 곤두박질 쳤을 시간들이 그녀를 짓눌렀다.세상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애초부터 잘못된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믿었던 남편의 배신은 그녀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까지 이어졌으니 말이다. 헛된 욕망이 빚어낸 현실 앞에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인지 그 한계를 묻고 싶었다.세상바람에 휘청거리던 그녀가 답답했다. 집착의 끈을 놓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이 또한 세상의 잣대로 저울질한 입바른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고선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 버렸고, 먼 길을 지나와 버렸다.팽팽한 삶의 끈을 움켜쥐고 안달복달한 지난날들이 스친다. 과거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현실을 흔들기도 한다. 현실과 맞닿은 미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삶의 과제들을 떠안긴다. 더디 흐르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어느새 반백의 문턱에 서고 보니 잃을 것도, 움켜쥐고 누릴 욕심도 없다. 세상 밖으로만 촉을 세우던 일도 내 안으로 귀를 연다. 예민하고 발끈했던 성정이 한결 둥글어졌다. 꺾이지 않는 유연함을 세상바람에 흔들리며 체득한다. 그녀도 그랬으면 좋겠다.

2016-03-18

지팡이

▲ 이영숙 수필가 아침 청소를 하고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경주 남산의 진달래가 우리 보고 싶어 울다가 눈이 벌겋게 되었으니 진달래보러 등산 가잔다. 구름 한 점 없는 용장골 하늘은 갓 세수한 말간 얼굴이다. 올봄은 흐리거나 비가 온 날이 많아 칙칙했는데 봄의 끝자락에 와서야 맑고 고운 얼굴로 벙긋이 웃는다. 용장골로 올라가는 남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새로운 맛이다. 계절은 제 이름에 어울리게 산을 꾸며 놓고 우리를 부른다.봄꽃의 화사함, 여름의 녹음, 가을의 풍성함, 어느 화가가 있어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계절을 채색할 수 있으랴. 순백의 겨울은 가슴까지 비우게 하며 나를 품어 안는다.자연의 위대하고 웅장함에 감사할 뿐이다. 눈이 짓무르도록 우리를 기다린다던 진달래꽃은 흔적도 없고 연초록 잎사귀들이 햇살에 반짝인다.고이산 중턱쯤에 이르렀다. 갑자기 더워진 탓인지, 방에만 뒹구느라 약해진 체력 때문인지 숨이 코끝에서 펄렁인다. 둔해진 몸을 감당하느라 힘이든 발이 미끄러지기를 수도 없이 한다. 용을 쓰면서 이 나무 저나무 잡아당기느라 손바닥에는 이미 진달래가 다시 피었다. 이젠 몸 하나 감당하기도 벅차다. 무엇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산에 오를 자신이 없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막대기 중 듬직한 것을 골라 지팡이로 삼았다. 지팡이를 짚으니 산에 오르기가 훨씬 편하다.사실 지팡이는 본인이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지팡이는 어르신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선물로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조상들은 나이에 따른 지팡이를 선물로 받았다. 50세가 되면 가장이라고 하여 자식들이 만들어 주었고, 60세가 되면 향장이라 하여 동네에서 만들어 주었다. 70세가 되면 나라의 경사이기에 국장이라 하여 나리에서 만들어 주었고, 80이 되면 아주 큰 경사여서 임금이 지팡이를 하사하고 조장이라 하였다. 내 나이 60이 넘었으니 향장을 받음직 하지만 만들어 줄 이 없으니 스스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었다.산을 오르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이제 여기 저기 연초록 잎이 눈에 들어왔다. 뾰족하게 얼굴을 내민 앉은뱅이 꽃이 금방이라도 필 듯 뱅긋이 웃는다. 미끄러워 밉기만 하던 소나무 마른 잎에서 솔 향이 올라왔다. 헉헉대던 숨결이 잦아들었다. 긴 휘파람을 날렸다. 그 소리에 놀란 듯 솔방울이 뚝 떨어졌다.굴러가는 솔방울을 보다가 아침에 남편과 다툰 일이 미안해졌다. 양치를 하려고 치약을 짜는데 치약이 없다. 남편에게 앞 베란다 벽장에 있는 치약을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남편이 치약을 두루룩 굴렸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에 짜증을 내었다. 주거니 받거니 말이 길어지다 보니 언성이 높아지고 눈물 한 자락을 짜 내고 말았다.`남편이 지팡이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량보다 많은 약을 먹어 축 처진 나를 업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던 남편이었고, 예순 아홉에 저 세상으로 떠난 엄마를 못 잊어하는 아픈 가슴을 다독여 주는 이도 남편이었다. 딸아이를 낳고 둘째를 잃어버렸을 때 내 눈물을 닦아 주는 이도 남편이었다. 인생 굽이굽이 어렵고 힘든 일 같이 헤쳐나간 지팡이. 고위산에 오르는 지팡이를 내가 만들듯 인생 지팡이도 내가 다듬고 아껴야 하는데 작은 일에 토라지고 화내고 상처 주었다.지팡이 덕분에 쉽게 산꼭대기에 올랐다.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바람이 싱그럽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지팡이를 챙겼다. 보물을 간수하듯 옆에 둔 지팡이를 보았다. 내 육중한 체구를 감당하느라 날렵하던 끝이 무디어졌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고맙기도 했다. 까탈스런 내 성깔을 고이 참아주느라 내 남편의 신경도 저렇게 무디어졌겠지. 오늘 저녁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불고기에 맥주 한 컵과 웃음 한 쟁반 차려야겠다.

2016-03-11

내게서 멀어지는 것은

▲ 김철순 수필가 독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 뚜껑을 여니 검은 봉지 틈으로 새순들이 핼쑥하게 목을 빼고 있다. 당근, 감자를 사서 잠시 넣어둔다는 게 한 달이 지났다. 저들이 싹까지 틔우며 얼마나 구시렁거렸을까. 싱크대 바닥에 쏟으니 곪은 상처에 상한 물이 배었다. 그 와중에 감자 세 알은 탄탄히 버티고 있다. 이들은 내 기억 밖에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을 무심하게 독에 가두어 저들의 꿈을 저버렸다. 싹 한 잎 틔우는 농부의 정성보다 화폐의 가치만 느끼던 무지가 부끄럽다. 상한 뿌리가 살아서 내 물컹한 건망을 깨운다.한 친구를 참 좋아했다. 그녀는 음악을 즐기고 사색적이라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여행도 같이 다니고 좋은 생각이 나면 편지도 자주 보냈다. 그녀는 이루지 못할 지독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아내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우연히 만난 인연에 그녀는 흠뻑 빠졌다. 상기된 사랑 이야기 끝은 늘 어두웠다.그들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는 신비로운 늪이었다. 아쉬운 만남은 그녀를 더 황홀하게 하고 물안개 같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 남자는 한 사람을 선택했다.그녀는 비 맞은 꽃잎처럼 젖었다. 내팽개쳐진 연정이 어두운 골목을 굴러다녔다. 언젠가 건너야 할 세찬 강물이었다.그리움도 강물처럼 흘려보내고 미련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깊은 사랑의 빈자리에 어둠은 질척이며 몸을 삭힌다.한참 후 친구는 고향에 있는 사과밭에 머무르며 넉넉한 시골 냄새로 마음을 식히고 있었다. 가끔 살이 오른 풋사과를 자기 마음인 양 청색 잉크로 그려 내게 보냈다. 그것은 겉모습이었다.매미가 자지러지던 여름날, 친구는 수면제를 마시고 잠자듯 떠나버렸다. 풋사과 같은 생을 열병으로 녹였다.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영원한 평온으로 감당했다. 설익은 생이 우물 안에서만 하늘을 보았다. 막내딸을 보내는 노모의 한이 절절했다. 세상에는 재주 많은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울타리도 맥없이 허물어졌다.내 삶도 한동안 사는 게 무력했다. 슬픔의 응어리는 내게 통증이었다. 꿈속에 불쑥불쑥 나타나 바스러지도록 웃기도 하고 해진 옷차림으로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녀의 잔상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일에 몰두했지만, 문득문득 다가오는 목소리에 괴로웠다.벗어날 수 없는 시간에 통째로 흔들렸다. 나를 움켜잡던 생각들도 차츰 작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혹독한 시련이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행인처럼 지나갔다.그녀의 흔적을 태우는 연기 속에 누가 내 신발까지 태워버렸다. 그녀의 슬리퍼를 끌고 강으로 갔다. 헐거운 슬리퍼가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스물네 해를 부수어 한 줌 가루로 강물에 몸을 뉘었다. 내 저린 속울음도 흰 물살 위에 띄워 보냈다.끝없이 흘러가다 갈대를 만나면 노래를 부르고 물살이 세어지면 가슴이 확 뚫리도록 달릴 것이다.오래 잊는다는 것은 마음에서 멀어진 것이다. 생각이 깜박거릴 때는 번개처럼 살아나지만, 건망의 수위가 높아지면 불씨까지 꺼진다. 꼭 해야 할 일도 기억 저편에 물러앉아 나를 시험하듯 기다린다.마음속에 지우고 싶은 생각은 돌덩이가 되어 더 심술을 부린다. 지독한 몸살을 앓은 후에야 슬며시 자리를 비킨다. 힘든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면 그 또한 고통이다. 잊힌다는 양면성에 아쉬워하기도 하고 평온해지기도 한다. `망각은 신이 준 귀중한 선물`이라는 명언에 수없이 밑줄을 긋는다.

2016-03-04

성형시대

▲ 김옥순수필가 햇장을 떴더니 짜다. 소금이 많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매사를 건성으로 듣고 해치우는 삶의 방식이 문제였다. 이 무슨 낭패인가. 된장은 일 년 동안 밥상에 올라갈 긴요한 음식이다. 장 담는 일은 연중 가장 큰 행사인데 무신경, 무성의로 짜다 못해 소태가 된 저 된장을 어떻게 할까. 친정어머니가 보시더니 생콩을 흐물흐물하도록 삶아 된장에 잘 섞어두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된장에 성형을 한 셈이다. 두어 달 뒤 장독 뚜껑을 열었더니 샛노란 된장이 빛깔도 고와 군침이 돈다. 잔뜩 기대하고 한 뚝배기 끓였는데 장맛이 영 아니다. 콩 특유의 비린내에다 시큼한 냄새까지 나는 것이 장맛도 아니고 콩 맛도 아니다. 이번에는 콩을 많이 넣어서 싱거워진 모양이다. 게다가 일찍 뚜껑을 연 나의 성급함까지 보태어졌으니! 성형용으로 들어간 콩이 분수 모르고 설쳐대면서 된장과 화합도 못 하고 저 스스로 숙성도 못한 결과였다. 다시 어머니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소금을 골고루 뿌리고 꼭꼭 눌러서 없는 듯이 한쪽에 밀쳐두라 하셨다. 성급하게 뚜껑을 열었다가는 된장을 아예 망치게 된다고도 엄포를 놓으셨다. 시간을 충분히 두라는 뜻이리라. 지시대로 그렇게 했다. 빨간 고무대야를 덮어서 눈에 안 띄는 장독대 구석에 멀찌감치 두었다. 이태가 흘렀을까. 조심스레 된장독을 열었다. 된장독 뚜껑을 여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도 잘못되면 큰일이 아닌가. 만약에 저번처럼 된장을 못 먹게 된다면 저 많은 된장을 어찌해야할까. 요즘은 버리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다. 위층에 꺼멓게 딱지가 두껍게 앉아있었다. 마치 어릴 때 넘어져서 상처가 아문 무릎에 생긴 딱지 같았다.조심조심 딱지를 걷어내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뜻밖이었다. 된장은 완벽했다. 성형용으로 들어간 생콩이 짠 된장과 더불어 오랜 세월 동안 발효되고 숙성되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무법자처럼 침입한 콩을 수용하자면 짠 된장 역시 고충도 많았을 터였다. 한쪽은 밀어내고 또 한쪽은 파고들다가 뒤엉켜서 충돌한 시기도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자리와 틈을 내주지 않으려는 짠 된장과 비집고 들어오려는 콩의 생존경쟁이 아니었겠는가. 그 둘은 오랫동안 부딪치면서 어떻게 살아남느냐를 깨달았을 것이다. 묵은 장과 성형의 하모니였다. 화합의 결과물인 된장을 보니 문득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결혼으로 소식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친구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었다. 안부를 나누는 동안 내 눈길은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어릴 적 그녀는 사각 턱이었고 볼우물이 패여 있었는데 성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턱을 깎고 지방이식을 한 친구의 얼굴은 울퉁불퉁하고 이상한 모습이었다. 부동산으로 졸부가 되면서 저질러진 일이었다. 경제적 풍요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과 우월감에 젖어 살았었다.친구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칩거생활을 했다. 얼굴 윤곽이 제자리를 잡고 자기 피부로 젖어들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동안은 후회와 괴로움의 시간이었다. 또한, 자기성찰의 시간이었다. 친구는 그 시간이 자기 안의 허영심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과도한 욕심으로 망가진 얼굴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친구는 복지시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진정한 생의 의미를 찾은 친구를 보니 아팠던 만큼 얻은 것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도도함과 사치로 휘날리던 그녀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외형의 모습과 내면의 것들이 부딪히면서 빚어낸 얼굴은 삶의 모습까지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모처럼 그 친구를 초대했다. 조촐한 나물 반찬에다 묵은 장으로 된장을 끓였다. 오랜 시간 묵히고, 삭이며, 어르고, 달래며 저 스스로 숙성된 된장을 보니 참으로 귀하다. 이참에 나도 성형이나 한번 해 볼까. 거울을 보니 뜯어고칠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서라, 다 그만두고 가슴이나 뜯어고쳐야겠다. 사랑과 양보의 미덕으로 후덕하게 살아가는 넉넉한 가슴 말이다. 벨이 울린다. 친구가 온 모양이다.

2016-02-26

두 손 마주 잡고

▲ 김정호수필가 음력 7월. 하얀 보름달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밤이다. 어제는 한여름 소나기가 한줄기 시원하게 퍼붓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물안개가 아주 옅게 깔린 오늘 저녁 공기가 상쾌하다.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걷기 운동을 위해 길에 나선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면 가끔 혼자서 걷는다. 집에서 출발하여 가산산성 입구 진남루를 거쳐 남원리를 돌아오는 코스는 한 시간 정도 걷기 운동에 적당하다. 짙은 솔향기를 마음껏 마시며 열심히 걷는다. 시골에 계시는 연로하신 부모님 걱정, 또 서울에 홀로 떨어져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 생각, 도토리 키 재듯 고만고만하게 잘 자라고 있는 손자 녀석들의 화사한 얼굴을 그린다.팔공산 자락에 민가가 많지 않아서인지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는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다. 게다가 밤이라고는 하지만 한여름의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산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수월찮다. 참으로 다행이다.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저만치 한 쌍의 남녀가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천천히 걷고 있다. 같은 색 같은 모양의 운동복으로 보아 아마도 신혼부부인 것 같다. 부러울 만큼 다정스러워 보인다.누구나 신혼 시절에는 풋풋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리며 살다 보면 때로는 사랑을 잊고 살 때가 잦다. 그냥 무덤덤하게 친구처럼 동반자로서 사랑의 감정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다.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기혼자들에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라는 질문이 있었다. 대다수 여성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대답했고, 남자들은 지금의 아내와 다시 결혼하고 싶다고 답했단다. 결과는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우리나라 고유의 유교적 관념으로는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하여 여자는 남자를 따르는 것이 미덕으로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을 선택하리라 믿었다.우리 부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을 할까? 특히 아내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당신이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와 결혼하겠느냐고 장난삼아 물어볼 수도 없다.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떨까. 여성 대다수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하니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시작된다. 나 역시 모든 남자의 대답과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또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은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당장 내 곁에서 살 비비며 살아가는 곱고 순수한 내 반쪽을 남에게 내어준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명쾌한 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앞서서 걸어가는 젊은 부부를 뒤로하고 열심히 걷는다. 갑자기 아니지, 그건 아니지 싶다. 하늘의 축복이 있어 만약에 당신과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단호하게 당신을 놓아주고 싶다. 22살 어린 나이에 나를 만나 그 많은 사연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해낼 수 있을까. 가난한 살림의 집안 8대 종부로 들어와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시난고난하게 살아왔다.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은 있어 고생하는 아내 등 한 번 다독여주는 일에도 인색했지만, 아내의 고생만큼은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절대자의 능력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기회를 준다면 좋은 사람 만나 고생 좀 덜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보라고 축복해주고 싶다.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떤 운명에 의해 부부의 인연을 맺어 이제까지 잘 살아왔으니 남은 삶이라도 아름답게 보내고 싶다.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것은 분명할지니, 조금은 서럽고 억울하더라도 붉은 입술 꼭 깨물며 두 손 마주 잡고 따뜻한 사랑의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2016-02-19

▲ 권영호수필가 사람들은 새해 이른 새벽 산으로 오른다. 일출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불그스름한 여명을 앞세우고 떠오르는 해덩이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다. 그들은 해님을 향해 한결같이 저마다 더 윤택하고 탄탄한 인생길로 바꾸어 달라며 소망한다. 나도 사람들 따라 새해 이른 새벽 산으로 오른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산 위로 오르는 초입 길은 지난여름, 소나기에 흙이 씻겨 내린 탓에 알몸으로 드러난 뾰족한 송곳 돌, 날카로운 칼 돌로 즐비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 돌들을 요리조리 피하지 않고도 뚜벅뚜벅 걸어 갈 수 있다. 밑창이 단단한 등산화를 신었기 때문이었다.한참을 올라갔다. 산밭 울타리로 심어놓은 탱자나무 옆, 토끼 길을 지나야했다. 앙증스런 탱자나무는 가시 달린 가지를 겁 없이 길 쪽으로 쭈욱 뻗어 가뜩이나 좁은 길을 반쯤이나 가로막았다.위세 당당한 훼방꾼처럼 턱 버티고 서있는 탱자나무 가지의 높이와 길이에 맞추어 온몸을 낮추었다가는 펴며 간신히 그 길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산 중턱, 어머니 산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메고 온 배낭에서 꺼낸 막걸리 잔을 정성껏 올렸다. 간밤에 내린 진눈개비로 덮인 잔디 위에 엎드렸다. 산소 옆 잣나무 가지에서 노닥거리던 겨울바람들이 기어 내려와 목덜미로 파고든다.예순 여섯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난한 아버지를 만나 남의 집 대문 옆 단칸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던 어머니의 인생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조금 전, 산으로 오르는 초입 길을 뒤덮었던 모난 돌들보다 훨씬 더 뾰족했던 가난의 편린들을 어머니는 맨발로 밟고 지나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남들이 신고 있는 고무신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이게 바로 당신의 운명이려니 했다.앙칼스런 탱자나무 가시로 뒤덮인 좁은 길로 접어들었을 때, 배움이 없었던 내 어머니는 혼자서 얻은 지혜와 용기만을 믿었다. 어머니는 우리 오남매를 바싹 가슴 속에 묻었다. 얇은 옷조차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등을 탱자나무 가시에게 성큼 내어주시고는 게걸음으로 조심조심 그 길을 빠져나오셨다. 그러자니 어머니는 얼마나 겁이 났을까. 얼마나 그 길이 멀게만 느껴졌을까.세월이 흘렀다. 언제나 당신에게 무거운 등짐이었던 우리 오남매가 모두 결혼을 했다. 이제 오남매는 멍든 어머니의 몸을 추슬러 드릴 때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머니의 발바닥에 생겼던 굳은살이 척 벌어졌고 가시에 찔린 등 언저리가 깊게 곪아 있었다. 몸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늦게서야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나는 괜찮다고만 했다.우리 오남매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예쁜 꽃들이 피어날 행복의 길을 만들어 드렸다.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오남매가 어머니를 부축하여 겨우 올려놓은 행복의 길에서 한 발자국을 떼는가 싶더니 그만 풀썩 주저앉아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일으켜도 어머니는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끝내 어머니는 홀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길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 우리 곁을 떠나가신 내 어머니는 아직도 돌아올 길을 마련하지 못하신 모양이다.산소 앞에 꿇어 앉아있으면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에 가슴이 조여든다.고개를 들었다. 산꼭대기로 오르는 오솔길 위로 떨어진 다복솔잎들이 폭신한 융단처럼 깔려있었다. 그 오솔길은 솜처럼 가벼운 구름들이 떠있는 쪽빛 하늘로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이다. 아니다. 당신 대신 외아들인 내가 걸어보라고 내어주신 그 길이었다.`어머니. 이 아름답고 편안한 길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당신이 좋아하셨던 손자랑 손녀와 함께 말입니다.`

2016-02-12

세월의 훈장

▲ 신형호수필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동해로 여행을 갔다. 늦은 오후 철썩이는 파도가 창을 밀고 들어올 듯한 민박집 2층에 짐을 풀었다. 멀리 대왕암이 손에 잡히는 대본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민박집 2층은 다섯 개의 방이 붙어있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가 수평선 위를 걸어오고, 밤에는 달빛이 물결 타고 춤추는 선경이 펼쳐진다. 저녁 8시가 좀 지났을까. 왼쪽 방으로 남자 손님들이 들어가는 기척이 난다. 조립식 건물로 방음시설이 약해 조용히 누워 있으면 옆방의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따로따로 방에 있지만 한 방에 있는 느낌이다.자려고 누웠지만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체기가 있던 막내아이는 오전의 내연산 산행이 피곤했는지 벌써 깊은 잠에 빠져 다행이다. 벽 저편에서 주고받는 소리가 높아진다. 옆방에서 술자리가 벌어진 모양이다. 들리는 목소리로 짐작해보니 70대 후반의 노인인 듯싶다. 걸걸하고 쉰 목소리의 한 분이 길게 얘기를 하고, 나직한 목소리의 두 분이 맞장구를 치는 듯하다. 한세월 살아온 분들이 삶의 필름을 돌리고 있다.술이 혈관 속을 한 바퀴 돌았을까? 갑자기 노래가 들려온다. 쉰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엔카를 부른다. 느린 듯 감돌아 이어지는 트로트 곡조 비슷한 노래이다. 일행들도 서너 소절을 따라 부르더니 곧 잠잠해진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지난날의 얘기를 이어간다. 한 잔의 녹차가 식을 무렵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런 여행지의 옆방에서 늦은 밤 일본노래를 듣는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무슨 연유로 이런 노래를 부를까? 일본 노래를 부를 연배면 아마 여든을 넘긴 분들이 아닐까?여든이라! 고희(古稀)를 넘기고, 다시 강산이 한번 요동친 나이다. 가장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기를 일제 강점기 말기라는 암흑기에 보낸 분들 일 것이다. 해방을 맞자마자 한국전쟁을 겪고, 격랑의 산업 전성기와 민주화시기를 거쳐 오늘까지 살아온 분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무슨 얘기를 하였을까? 흘러간 청춘의 봄날이 그리워 그 시절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사람은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생길 때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노래는 젊은 시절 배운 유행가일 것이다. 적당한 분위기와 곡차 한 잔이 들어가면 금상첨화이다. 세월은 가는 게 아니라 쌓인다고 했다. 켜켜이 쌓아온 세월 속에 술잔을 앞에 놓고 삶을 되돌아보는 것일까? 열이틀 휘영청 달빛에 젖은 감포 앞바다를 창 밖에 두고, 죽마고우와 살아온 세월의 훈장을 꺼내 보는 것이리라. 가슴 벅차게 행복한 날도 있었을 테고, 설움에 겹도록 마음 저린 날도 있었을 것이다. 애절한 가락에 나도 코끝이 찡해진다.가만히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순이 지난 나이이다. 내 청춘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지난날은 돌이켜 볼 수 있지만, 앞날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갖은 상념이 동영상처럼 지나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떠오르기도 한다. 먼 훗날 삶을 돌아보면 내 세월의 훈장은 어떤 것일까?문득, 몇 달 전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옆방의 노인들과 비교해본다. 전문 관리직으로 퇴직한 팔순 노인의 사건이다. 대기업 임원의 자식을 둘이나 두고 노년에도 짜인 건강관리로 활기차게 살아왔다. 누가 봐도 복 받은 분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분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원인이었다.다음날 아침, 1층 식당에서 옆방 손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80대로 추측되는 깔끔한 노인 세 분이셨다. 백발이 멋있는 한 분과, 골이 파인 팔자 주름과 저승꽃이 듬성듬성 핀 두 분의 얼굴에서 세월의 훈장을 읽을 수 있었다. 막역지우들과 겨울여행을 나온 것이리라. 멋지게 사는 분들이다. 아름다운 우정을 상상해본다.“해장해야지.”하면서 반주로 맥주 한 병을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창밖의 수평선으로 눈을 돌렸다.

2016-02-05

서안의 온천궁

▲ 안연미 수필가 이곳은 중국의 찬란한 역사가 숨 쉬는 곳 서안(西安)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의 온천궁과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다. 흥했던 국운이 황제와 애첩의 사랑 놀음에 패망의 길을 걸었던 안타까운 역사의 고장 서안의 화청궁(華淸宮)을 어찌 지나칠 수 있으랴. 입구에 들어서자 화려한 전각 앞에 너른 연못이 먼저 반긴다. 여산(驪山)이 감싸 안은 이름 높은 그 화청지다. 현종과 양귀비가 밀어를 속삭이며 수없이 거닐었을 연못이 아니던가. 달콤했던 그들의 애틋한 사랑이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함이 안타깝기만 하다. 황제들의 삶이 묻어있을 겨울 온천탕이 슬쩍 궁금해진다.발길을 옮긴 곳은 황제들의 어탕(御湯) 유적박물관이 있는 앞마당이다. 정원 중심부에는 키가 크고 풍만한 육체를 자랑하는 양귀비 석상이 우뚝 서 있다. 절세미인 양귀비라 해서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다. 양귀비의 발은 중국여인에게 행해졌던 전족관습에 의해 발길이가 10센티미터도 안 된다 하였거늘 석상의 양귀비 발은 작지도 않고 아주 고운 발이다. 전족으로 구부러진 흉한 발을 차마 조각하지 못한 것인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황제들의 온천탕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당태종의 온천 성진탕(星辰湯)이다. 이곳 온천수는 온도와 좋은 수질 덕분에 천하제일의 어천(御泉)이요, 동방의 신천(神泉)이라고까지 칭송받은 곳이다. 현종과 양귀비의 욕탕보다 100년이나 앞서 지었다는 당태종의 성진탕은 원래는 노천탕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목욕을 한 곳이다.천장도 없는 황제의 온천탕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이다. 솟구치는 뜨거운 온천수는 여산주변을 수증기로 가득 채워가며 이곳 황제의 욕탕에 도달한다. 차가운 청옥석의 냉기가 서서히 온천수의 황금비율을 맞출 즈음, 국사(國事)에 지친 태종 황제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탕 안으로 들어간다. 황제가 온천수에 몸을 녹이는 동안 엄동설한(嚴冬雪寒) 밖에서 황제의 안위(安危)를 지키던 신하들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른다. 매서운 바람은 눈과 한데 섞이어 머리 조아리고 있는 신하들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다행히도 황제는 신하의 독설도 능히 받아주던 성군(聖君)이 아니던가. 추위에 떨고 있던 그들을 누각 안으로 들어오도록 배려해 주는 황제를 위해 신하들이 무릎을 꿇어 머리를 조아린다.성군이 머물렀던 곳의 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건만 세월의 흔적 속에 후세 사람들은 황제의 욕탕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발 빠르게 앞서 가던 여행 안내원이 가리키는 곳은 관원들의 욕탕이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리던 요리사와 관원들이 쓰던 욕탕에는 황제가 목욕했던 물을 다시 이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당태종이 백성들한테 성군으로 불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던가. 당태종은 신하 위징의 수많은 간언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서 자신의 잘못과 욕심이 지나치지 않도록 스스로 채찍질 했던 지혜로운 황제였다. 그는 역대 황제들의 잘못된 행실과 뛰어난 업적을 자신의 거울로 삼았다. 성군과 패군의 갈림길은 과욕을 어찌 다스리는가에 달렸나 보다.부귀영화를 누리며 시절 모른 현종과 양귀비 옆에는 국운을 걱정하고 충언하는 신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어찌하여 모두가 과욕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현종은 온천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수없이 보았을 터인데 역대 황제의 거울 교훈을 잊었단 말인가. 역사거울을 통해 당나라 현종이 교훈으로 삼고 실천했더라면 모든 일에 정도(程度)를 지킨 성군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뿐이랴. 안녹산의 군대를 피해 고달픈 피난길을 걷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태평성대가 무너진 것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성난 군사들 앞에 양귀비의 목숨을 내어주는 비통함은 겪지 않았을 것을….

2016-01-29

껍데기 인생

▲ 이근진 수필가 결혼기념일을 맞아 바다 여행을 마련했다. 겨울 파도의 사나운 모습과 제철 만난 게살 맛이 생각난 때문이기도 했고,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전화로만 `친구로 지내자`고 한 스님의 절이 그 쪽에 있으니 내친 김에 한번 만나보리라 작정한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왜 찾아 가냐며 의아해 하는 아내에게 군대 동기 만남의 희귀함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군대 동기이니 우리는 `당연히 친구`라며 일방적으로 반말을 해왔다. 그와 군대 생활을 같이 한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제대 후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한 부대에 있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전화 통화를 자주 하게 되었다. 얼굴 한번 본 일 없었지만, 그가 동기를 강조하는 통에 `됐나? 됐다!`를 외친 이후, 소위 말하는 니네돌이로 말까지 트는 사이가 된 것이다.그가 주지로 있는 절은 대게로 유명한 강구항 인근에 있었다. 작지만 아담한 대웅전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넓은 주차장 위쪽에 정결하게 보이는 요사채가 있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깊숙하고 길다란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받아 평안한 분위기가 풍기는 아담한 절이었다.합장 인사를 받았다. 친구하자는 예의 그 주지 스님이다. 통통한 양 귓볼이 도드라져 보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인상이다. 내겐 합장이 익숙지 않았지만 처음 대하는 자리인지라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두 손을 모아 인사에 답했다.전화기로 주고받은 임마, 얌마도 있었지만 군발이 젊은 시절을 같은 부대에서 부대꼈다는 사실 하나가 우리를 스스럼없이 가깝게 했었나 보다. 대면은 처음인데도 호칭부터 서로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한동네 살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허물없는 대화들이 한동안 오갔고, 그는 우리를 자기 거처로 안내했다.대웅전 입구의 사랑채에 구유 크기의 넓은 차 탁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으니 진입도로 입구부터 건물 전체가 조망되었다. 군대 생활 내내 위병소 근무만 했다던 주지 스님 다운 건물들의 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놓은 차의 맛이 특이해서 재료를 물었더니 감 껍데기 차라면서 그는 스님의 본성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생명체에는 알맹이도 중요하지만 그 알맹이를 보호해 주는 껍데기도 중요하다`고.거처하는 방은 마치 학생의 하숙방 같이 단촐 했다. 온돌방에 이부자리와 갈색 책상 하나, 그리고 모니터 두 개를 연결한 PC가 전부였다. 벽에는 운동복이 한 벌, 무늬 없는 장롱 두 짝이 윗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옹색하고 초라한 세간이 속인(俗人)인 나의 눈에는 약간 서글프게 느껴졌다.군 생활 때라며 사진 몇 장을 보여 주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의 배경에 나타난 내무반 풍경이, 우리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업보를 물어볼까. 아니지. 스님이 된 사유나 들어 보자고 해도, 스님 된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해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오랜만의 만남, 아니 얼굴 튼 초면이니 어찌 그냥 있을 것이냐며 스님 손을 이끌었다. `스님은 곡차를 마시시오, 나는 곡주를 드마.`고 했더니 보름 제(祭)마다 제 절을 찾는다는 보살님 식당으로 가잔다. 한상 그득 주안상이 차려졌다. 스님 전용 곡차 병이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찻잔과 술잔이 뒤엉겼다. 몇 순배가 돌자 그가 설파했다. `곡차나 곡주는 원래 같은 것이다. 기쁨을 함께하는 환호의 박수요, 슬픔을 나누는 위로의 손잡이이다. 우정을 묶어주는 튼튼한 밧줄이며 오해를 뚫어주는 송곳이요, 가식과 허례를 벗겨주는 솔직함`이라고….껍데기 인생을 이야기했다. 자식들을 언제까지 보듬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네는 껍데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취기가 오를수록 나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스님친구는 오히려 나의 껍데기 인생이 부럽다고 했다. 아내가 결론을 내려줬다. `서로를 부러워하라`고.

2016-01-22

바지랑대

▲ 김옥매 수필가 햇살이 내린다. 배롱나무 꽃잎에 앉아 발갛게 타들어 간다. 흙 담장에 기댄 접시꽃은 장마에 지친 얼굴을 매만진다. 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태세로 덤벼드는 더위에 맞서있다. 잠시 서 있었는데도 내 몸은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온종일 불볕더위와 싸워야 하는 남편의 그은 얼굴이 생각난다. 짐을 가득 싣고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야 하는 낙타처럼 고단한 그의 모습이 이불 위에 어린다.첫 만남에 설렘은 없었다. 싫지 않은 정도였다. 가난한 복학생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저녁을 사 준다기에 분식집으로 이끌었다. 밥을 먹고 왔다며 그가 남긴 김밥, 그것이 부부의 인연으로 자랐다. 이상형이 아니었단다. 오늘 하루도 공쳤구나! 생각했을 테지. 자기가 남긴 김밥을 날름날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예뻐 보였단다.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는 서서히 젖어들었다.사슴처럼 기대어 단꿈을 꾸던 날이 아련하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부러움 없는 일상이었다. 고요한 숲에 돌개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남편의 일터를 휘저어 버린 거센 바람의 위력에 절망했다. 그의 어깨가 점점 내려앉았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처자식의 눈망울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절망의 끝에서 작은 끈 하나를 잡고 떠나던 뒷모습이 어제 같다. 그렇게 그는 떠돌이 인생을 시작했다.휴일이면 오가는 차비가 아까워 숙소를 지켰다. 살림이 하나 둘 일어갈수록 몸은 더욱 지쳐 갔으리라. 어깨에 얹힌 짐의 무게를 참고 또 참았으리라. 당신은 여자로 태어나서 참 좋겠다던 그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얼마나 힘들면 그런 말을 할까. 배웅하고 돌아온 어느 저문 날, 마시다 만 커피 잔에 형광등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까맣게 태운 마음 한 자락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무엇이 남편을 커피 한잔 마실 여유도 없이 내몰았는가. 문밖에 등 굽은 가을이 어찌 내 맘을 알았는지 찌르르 찌르르 울어 주었다.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며 주말 부부인 나를 부러워하는 눈길, 나도 모르게 서서히 남편의 부재에 익숙해져 갔다. 조심스럽게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치열한 적지에 그를 내몰아 놓고 이래도 되는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가. 또 얼마나 이기적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울증이 올 수도 있음을, 그것보다 낫지 않을까 애써 합리화시키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려 했다. 취미생활의 종류가 차츰차츰 늘어났다. 그즈음 노력의 결과로 남편의 나무에도 열매가 익어 갔다. 여유가 생긴 남편은 주말이면 어김없이 집을 찾았다. 꼼짝없이 남편에게 맞춰야 하는 현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숙소를 지킨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일 터. 짚신장수와 우산장수 아들을 둔 부모처럼 마음이 복잡해졌다.늘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 아내의 다양한 취미 생활에 진심으로 관심을 두었다. 풍물은 쇠가 최고인데 이왕이면 쇠를 배우지 그랬냐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휴일에 홀로 집에 남겨져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내며 심술을 부린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아이처럼 함께 놀아 달란다. 홀로 지내야 했던 외로움의 시간이 그동안 상처로 곪아 있었나 보다. 고름을 철철 흘리며 아픔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이 내 책임으로 다가왔다.버티고 버텼을 것이다.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마땅한 핑계를 잡은 듯 자신을 놓아버린 것이 아닐까. 이제야 알았다. 남편은 내 인생의 줄을 받쳐주는 바지랑 장대였음을. 늘 씩씩하게 그 자리에 있었기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그의 고통을 짚어보지 않았다. 무심한 아내였음이 부끄럽다. 그가 더 지치기 전, 그의 곁에서 젖은 빨래를 말리는 바람이 되고 싶다. 장대 끝에 잠자리로 내려앉아 지친 마음 어루만지는 약손이 되고 싶다.

2016-01-15

밥의 항변

▲ 최종희수필가·여름문학 편집장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보다 각별한 사이도 드물지 싶다.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거나, 고맙다는 인사말을 대신하거나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할 적마다, 내 이름을 거론하며 속내를 표현할 때가 많다. 누구를 막론하고 집에서나 밖에서나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와의 만남을 즐긴다. 처음에 어색한 이들도 나와 함께 하는 횟수만큼 정이 쌓여간다고 할 정도니 이만하면 그 역할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아마 이러한 지위는 호위무사와 궁녀들을 대동하는 왕의 행차와도 맞먹을 것 같다. 나는 거의 혼자서 상 위에 오르는 법이 없다. 가는 곳마다 육, 해, 공군이 동행하기 마련이다. 채소와 생선과 육류들이 번갈아 따라다닌다. 그래도 그들 위에 군림하기는 싫다. 육즙이 좔좔 흐르는 고기의 자리를 탐한 적도 없고, 푸른 빛깔이 감도는 싱싱한 야채의 자리를 넘보지도 않는다. 예쁘고 화사한 쟁반에서 분에 넘치는 겉멋을 부리기보다, 소담스런 공기에 다소곳하게 담겨 있기를 원할 뿐이다.그러한 내가 있기까지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손길을 기억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울어댄 소쩍새의 수고로움보다, 한 톨의 쌀을 맺으려고 농부들이 흘린 피와 땀의 노고가 더 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언감생심 거드름을 피울 여유조차 없다. 사람들의 몸속에서 영양분을 만들어 활력을 불어넣는 본연의 의무를 다하기에 분주하다.가끔은 유구한 역사를 지켜온 나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지극정성으로 기울인 노력은 오간 데 없이, 시금치를 먹어 건강해졌다며 근육 자랑을 하는 뽀빠이를 보면 섭섭함이 밀려온다. 온갖 재료와 색상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 빵이 호시탐탐 아침 식탁을 넘볼 때는 심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 해도 예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가끔은 들려오는 세상사 소식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어떤 날은 괜히 으쓱해진다. 건강의 중심에서 나를 꼭꼭 챙기는 사람들이 많아 존재의 필요성을 실감할 때나, 배고픈 이들을 위해 선뜻 자신의 몫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인정스러움에는 가슴이 훈훈해진다. 때론 분노가 치밀 때도 있다. 뇌물죄로 줄줄이 엮어가는 소식을 접하면 기가 막힌다. 자신들의 죄는 뉘우칠 기미가 없고 애꿎은 내 이름을 들먹이며 변명만 늘어놓기 일쑤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짓이라는 핑계가 들릴 때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이 저질러 놓은 마음 탓이면서 오히려 내가 원인인 것처럼 돌려 덮어씌운다. 그러고서도 진작 거물들은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용케 도망쳐 버리고, 조종당한 힘없는 아바타들만 잡혀가는 현실에 한숨이 난다.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나를 취하기 위해 등이 휘어지도록 삶의 무게에 시달려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막강한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차려 놓은 밥상을 빼앗으려 드는 파렴치한 행동에는 분통이 터진다. 이것을 밥그릇 싸움이라 부르며, 마치 생존전략의 대명사인 양 당당하게 나를 끌어들인다. 결코, 내가 모든 원인을 제공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제 다시는 함부로 내 이름을 들먹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이 벌이는 끝도 없는 쟁탈전에 동네북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나에게도 소망이 있다. 요즘은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한 개의 상품을 다양한 목적으로 재창출하는 원 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 시대이다. 영화는 한 개의 상품이지만 극장 상영뿐만 아니라, 비디오, 만화, 게임, 캐릭터 등 다양한 관련 상품을 파생시켜 이익을 낳게 한다.디지털 시대에 몸담은 나도,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포만감을 느끼게 하고, 삶의 질을 풍성하게 만드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 분홍빛이 감도는 연인들에게 솜사탕처럼 달콤한 사랑을, 마음을 나누고 싶은 벗들에게는 끈끈한 우정을, 외로운 이들에게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정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6-01-08

그림속의 크리스마스

▲ 신미경 수필가 내 살아온 날의 흔적이 담긴 상자에 있던 빛바랜 크리스마스카드를 펼친다. 순간 흰 눈이 뒤덮인 고즈넉한 시골의 교회당이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다.마치 내가 살았던 시골의 예배당을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 옛 추억들을 하나둘 깨운다.불심이 강했던 할머니의 호통 때문에 우리 남매는 교회를 다니지 못했다.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삼 남매는 묘한 설렘과 흥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는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팥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아멘”을 외쳤다. 아마 넉넉지 못한 시대를 사는 할머니는 손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못해 어쩔 수 없이그때만큼은 교회에 드나드는 것을 눈감아 주었으리라.“거기서 나쁜 거 가르치지는 않더라.” 하며 종교에 관한 당신의 완곡한 신념도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 앞에서는 꺾이곤 했다.온갖 색깔의 꼬마전구로 불 밝힌 트리로 꾸며진 이국적인 교회 안 풍경은 시골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집에서는 맛보지 못한 여러 종류의 과자와 사탕들이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관심은 온통 트리 밑에 수북이 쌓인 선물 상자들과 단내를 풍기는 간식거리에 곁눈질하던 까까머리와 단발머리의 아이들이었다. 풍족한 물질문명 속의 요즘 세대들은 그때의 동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전깃불이 꺼지면 별빛만이 시골 마을을 비추고 차가운 고요가 감돌았다.새벽녘에 밖에서 들리는 언니 오빠들의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성가 소리는 잠결에 들어도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도시에서는 밤새도록 들리는 자동차 소음 때문인지 성가를 듣기 힘들었다.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고요한 시골 길 밤하늘에 퍼지는 그 성가만큼은 아직도 그립다.어느 해 크리스마스 아침. 불교인 우리 집에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루돌프 사슴들을 이끌고 썰매를 타고 온 흔적이 있었다. 그 해는 산야가 온통 흰 색으로 뒤덮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머리맡에 놓인 아버지의 늘어진 양말 안에는 뭔가 불룩한 것이 들어 있었다. 자식들의 환호성에 부모님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으며 우리는 세 개의 양말 안에 들어 있던 선물을 꺼냈다. 갈색 얼굴에 흰 눈물이 그려진 그 당시 유행하던 `못난이 삼 형제 인형`이 우리 삼 남매 선물이었다. 낙향해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였지만 한때는 배우를 꿈꾸며 도시의 변두리에서나마 문명을 접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랬기에 아마도 산타클로스의 의미를 시골서 키우는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리라.맏이인 난 부모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나이였지만, 두 동생의 환한 웃음을 보며 부모님이 보내는 무언의 눈빛에 장단을 맞춰야 했다. 절대 가난의 그 시절 아이들에 비해, 요즘은 선물의 무게도 무거워져야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다. 요즘 산타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아마도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못난이 인형의 뺨에 그려진 흰색 눈물이 닳고 닳아 그냥 눈물 모형만 남아 있을 정도로 간직하며, 작은 것 하나에도 오래도록 기뻐했던 그 시절이 이제 내게는 없는 것 같다. 세속적인 욕심이 비교적 적은 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고 다니지만, 그 욕심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반대급부의 이득에 흐뭇해하는 영악함에 씁쓸해질 때가 있다. 그 옛날 인형 세트를 다 받은 것도 아니고, 세 개 중 하나만 달랑 받았음에도 가슴속엔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그 마음들을 다시금 느낄 날이 올까. 어른들에게도 크리스마스의 축복이 주어진다면 그 시골에서의 단발머리 작은 여자애가 느꼈던 작은 행복과 동심 속으로 다시 한 번 발 디뎌 보고 싶다.

2015-12-18

언덕 위의 여자

▲ 이필영 수필가 그림속의 커다란 시곗바늘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전시주제는 `하느님의 시간`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돌리는 거대한 시간의 바퀴 속에 살고 있다고, 화가는 자신의 종교적 인생관을 겸손하게 말한다.창조주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인간의 삶이란 것이 진정 탄생도 죽음도 창조주의 시간 속에 예정되어 있는가.갑자기 시곗바늘이 빙빙 돌아가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며 한 여인의 얼굴이 나타나서 함께 회전한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본 인간의 시간을 살다가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 여인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문밖출입을 제한했던 그는 끝내 홀로 죽었고 임종의 시간은 아무도 몰랐다.부음을 접한 날, 신을 향한 사랑으로 세상의 유혹에는 두 눈 친친 동여매고 하얗게 늙어갔던 그의 일생을 떠올리며 신을 원망했다. 삶의 내용이 어떠했던 독신의 말로는 혼자 쓸쓸히 죽어 나가는 것뿐인가. 언제든 닥칠 우리의 죽음은 어떤 현실로 주변에 알려질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는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처럼 우리의 죽음도 한 통의 전보로 혈육인 누군가에게 전해질까. 독신의 지인들은 너울처럼 덮치는 불안에 전율했다.선대부터 부유했고 고위공직자의 딸이었던 그는 호사스럽게 성장했지만 일찍부터 수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뼛속까지 서린 자존심과 호의호식을 미련 없이 버렸다. 수도원에 입회한 날 그는 환하게 웃었지만 정신에 반해 몸이 견디지를 못했다. 수도생활 중 가장 혹독하다는 수련기에 걸핏하면 쓰러졌다. 수련기를 마치고 병자 같은 몰골로 그가 휴가를 나온 날, 수녀원에서 조그만 보따리가 배달되었다. `본원의 규칙을 수행하기 어려운 부적격자로 결정되었다`는 쪽지가 든 소지품이었다.수도생활이 좌절되자 그는 독립된 공간을 원했다. 딸이 애련했던 부친은 본가와 외길로 이어진 언덕진 곳에 유럽의 엽서에서나 봄직한, 70년대 초반의 소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그림 같은 집을 지어주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면서 그는 자신의 거처를 수도공간으로 삼고 부모 외에는 누구이든 예고 없는 방문은 차단했다.일찌감치 많은 재산을 물려받자 어느 날부턴가 그는 `언덕 위의 여자`로 불려졌다. 새로 부임한 지역의 은행지점장이 그의 집에 인사를 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문밖출입이 없자 언덕 위의 집은 더욱 높게만 보였고 그는 점점 베일에 싸여갔다.얼굴을 감춘 지 십년이 훌쩍 넘어갔다. 선망이 슬금슬금 악의적 소문을 토해냈다.정신병에 걸렸고 귀신같은 몰골로 변했다는 괴상한 소문이 너풀거릴 즈음 그의 집을 방문했다. 계단을 한참 올라 당도한 대문에는 덩굴장미가 화려했고 담장이 성벽처럼 둘러쳐졌다. 초인종을 누르자 까만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대문을 열었다. 소문과는 달리 활짝 웃으며 포옹을 해주었는데 어둔 구석이 없었다.대문이 닫히고 언덕 위의 집을 방문했던 나와 일행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너나없이 얄팍한 월급으로 청춘의 한때를 통과하고 있었기에 그의 삶에 무한한 동경을 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독실한 신앙도 없었고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도 따라잡지 못할 부도 탐만 났지 가질 길은 요원했다. 입을 꽉 다물고 걷던 누군가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불공평하다고 하늘에 주먹질을 해댔고 무거운 기분을 털어내느라 소리 높여 웃었다.며칠인지도 모른 채 발견된 주검, 장례미사에 참석한 지인들은 평생을 하느님만 바라본 그의 종말이 처연해 인간의 기준으로 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신부는 아무도 몰랐던 임종의 시간을 `고인은 세상 누구도 모르게, 오직 하느님만 아는시간에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고 장엄한 의미를 부여했다.

2015-12-11

책상2

▲ 김현정수필가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려 봅니다. 참으로 편안해집니다. 마음속의 자잘한 주름들이 곱게 펴지는 듯합니다. 책상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제게는 소중한 벗이며 지기(知己)입니다. 지기에게 다가갈 틈이 나지 않으면 더러는 조급증 같은 것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가끔은 그와 마주앉아 몇 날이고 책의 행간 사이로 거닐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비껴나기도 그리 쉽지 않아서 번번이 벼러 보기만 할 뿐입니다. 생각들을 모으고 걸러서 종이를 채워 가는 일도 여의치 않으면 작은 공간에서 골똘히 생각에 젖어 보기도 합니다. 투박하고 듬직한 지기는 본래 떡메를 받쳐 주던 떡판이었습니다. 몇 손을 거쳐 어찌어찌하여 키 낮은 책상이 되어 저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슴을 쓰다듬어 보면 감촉이 부드럽습니다. 넓은 가슴 펴고 있는 지기가 고향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의 날개를 펴 봅니다.이제 지기는 저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오도카니 기다림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그리움이 번지듯 그는 갈빛으로 짙어지고 있습니다. 저의 슬픔도 기쁨도 다 알고 있다는 듯 은은한 빛으로 말을 건네옵니다.그대여 저와 함께 밤마다 불을 밝히며 꿈꾸기를 그치지 마세요. 먼저 살다 간 이들이 속울음을 울면서 꿈을 이루지 않았습니까.요절한 허난설헌, 사랑하는 이를 부르다 정신병동에서 사라진 까미 끌레유, 오직 진리만을 갈구하며 삶을 소진한 시몬느 베이유. 이들의 아픈 흔적들은 살펴보셨나요. 슬픔을 형상화시킨 자취가 아픔으로 전이(轉移)될 것 같아 되새겨 보고 싶지 않다고요.`의유당 관북 유람 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를 보셨나요. 의유당 김씨는 순조 29년(1829년)에 남편 이희찬이 함흥 판관으로 부임할 때 따라가서 그 부근의 명승 고적을 두루 다니며 쓴 기행문입니다. 조선의 현실에서 남편의 외방 임지에 아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지요. 잠영세가에서 더구나 범절과 덕행이 남다른 부인으로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지요. 한양에서 함흥까지 남편을 수행하고 게다가 명승지까지 여행한 그들 부부의 금실이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시대를 뛰어넘어 풍류를 즐긴 멋진 부부였나 봅니다. 북산루(北山樓) 기행은 여유로움에 취해 있는 듯합니다.“풍류를 일시에 주하니 대모관 풍류라 소리 길고 화하야 가히 들음 즉하더라. 모든 기생은 쌍지어 대무하야 종일 놀고 날이 어두우니 돌아올 제 풍류를 교전에 길게 잡히고 청사초롱 수십 쌍을 고이 입은 기생이 쌍쌍히 돌고 섰으며 횃불은 관 하인이 수없이 들고나니 가마 속 밝기 낮 같으니 밖곁 광경이 호말을 헬지라 붉은 사에 푸른 사를 이어 초롱하였으니 그렇게 어룽지니 그런 장관이 없더라.”의유당은 규중의 소녀자임을 잊고, 스스로를 승전하고 돌아온 장정으로 생각했다가 머리를 만지고 치마를 보고서야 아녀자임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남성 못지않은 호기와 인품에서 동시대의 여인들과는 거리가 먼 여유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규방을 떨치고 나와 기생과 하인을 데리고 거기다 고을 원님의 호위까지 받으며 여행하였고, 뛰어난 문장을 남긴 의유당의 호방함이 부럽지 않은지요. 슬프도록 아름답게 살다 간 이들은 우리의 마음을 울려 주지만 대범하고 다복한 이들의 맥도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요.모처럼 마음이 풋풋해집니다. 이름을 남긴 이들의 발자취가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한 떨기 별이 되어 빛나지 않겠습니까.이름을 남기고 빼어난 문장을 남긴 이들의 자취도 빛나지만 지기가 살아온 모습에 더욱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오랜 세월 동안 많은 생명들을 거느리며 키워 온 당신의 생애는 더없이 순결합니다. 그대는 혼신을 다해 식솔들의 양식이 되었고 포근히 감싸 주었습니다. 이제는 더 맑은 눈빛을 간직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갈색 빛을 띄우며 이렇게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언제나 엷은 미소를 머금고 저의 주위를 말없이 살펴보렵니다. 그대의 얼굴에 언제나 윤기가 어리도록 애써 보렵니다.

2015-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