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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소나무

▲ 김정현수필가 친구가 귀향을 했다. 삼십 년 세월을 객지에서 월급장이 노릇을 하다가 귀거래를 한 것이다. 귀향한 지 반 년이 지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기에 무슨 재미가 그리 쏠쏠할까 싶어 달려갔다. 막걸리잔을 나누면서 시골살림살이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친구의 소꿉놀이 같은 삶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마당귀에는 어린 소나무 몇 그루가 심겨 있는 것이 아닌가. 환갑이 다 된 사람이 소나무를 심어 언제 그 아름다움을 취할 수 있으랴싶어 나무를 심으려면 유실수를 심던가 아니면 벚나무 같은 것을 심으라고 권했다. 이 나이에 소나무를 심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에 친구는 그저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다. 교장선생님이 갑작스레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조경된 향나무를 캐내고 소나무를 심자는 것이었다. 수령 30년이 넘는 향나무를 캐내고 뚱딴지같이 소나무를 심자니…. 내심 반감이 솟았다. 목장지에서 나무를 사 들이고 나무 이식 전문가와 크레인을 동원하여 심고 나니 나무 한 그루에 300여 만원이 넘게 들었다. 그런데 이듬해가 되자 나무는 3분의 1 가량이 말라 죽고 말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공자가 세한연후에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고 했던가. 한 해 두해를 지나면서 학교 정원의 소나무는 기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내리는 날 창가에 서 있으면 내가 깊은 산에 들어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식을 하면서 잘라낸 가지의 흔적이 사라질 무렵이 되자 소나무가 고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무를 심고 몇 해가 지나서야 노교장의 혜안에 감탄을 하게 된 것이다.우리 나라의 산이란 산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소나무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가장 친근하게 살아 왔다. 땔감에서부터 집은 짓는 재료,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심지어 구황식품에 이르기 까지 소나무는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변변한 땔감이 없는 여름 장마철에 소깝 연기가 자우룩하게 피어오르면 그네들은 팍팍한 삶 때문인지, 연기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면서 어서 빨리 가을이 오기를 염원했고 늦가을이 되면 갈비를 끍??모아 아궁이를 지핀다. 갈비가 솔솔 타들어가는 모습은 정겹다.소나무의 용도가 어디 땔감에만 국한되랴. 이른 봄, 해토가 되면 농부는 진흙을 이겨 담장을 새로 수선하고 소깝을 덮어 치장했다. 마을 뒷산에서 잘 생긴 섯가래 감을 구해 집을 고치고, 외양간도 새로 손질을 했다. 밋밋하게 잘 자란 소나무는 기둥감이나 들보감으로 쓰였고, 특별히 잘 생긴 소나무는 대궐이나 북촌 대갓집 대들보로 뽑혀 서울 구경을 가기도 했다. 밑둥치가 두 자쯤 되는 나무는 관재로 쓰려고 특별히 아껴 둔다. 또 당산의 아름들이 소나무에는 신이 들어 있어서 마을을 수호한다고 믿었다.소나무는 자라면서 격을 갖추어 간다. 초부의 낫을 피한 소나무는 자라면서 나무로서의 격을 갖추어 나간다. 기둥감 정도만 되어도 사람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고, 100 여년 세월을 넘기면 족히 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톡톡해 해낸다. 동네 당산 아름드리 소나무 쯤 되면 이미 경외의 대상이다. 고향 마을 입구를 늘어선 늙은 소나무는 갑옷을 입은 장수처럼 변함없이 마을을 수호하는 것이다.소나무에는 우리 민족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질곡의 세월을 겪으면서 자라났고 늙을수록 더욱 정정하고 기품이 서리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가 아닌가. 우리 민족은 역사의 수많은 굽이굽이를 슬기롭게 헤쳐왔다. 그러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소나무는 어울려 살아야 멋이 난다. 정이품송이니 석송령이니 하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의 기품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만이야 하겠는가. 자식이 없는 친구는 어린 소나무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심었을지 모른다. 우리집 뜰에도 소나무 여섯 그루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80에 가까운 노송, 50이 넘은 소나무, 그리고 스물이 갓 넘은 소나무가 더불어 숲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나 아닐까. 친구의 그 미소가 솔향기처럼 싱그럽게 떠오른다.

2014-10-24

편지

▲ 임수진수필가 학창시절 내 취미는 편지쓰기였다. 국군 아저씨는 물론이고 먼 친척에게까지.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하얀 봉투에 넣고는 긴 치마를 팔랑대며 우체국에 갔다. 우체통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서 있다. 나는 우체통의 빨간 이마를 사랑스럽게 톡톡 쳐준다. 편지를 부친 날부터는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린다. 나의 두 번째 연인은 집배원 아저씨다. 가슴 조이며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기다림이 얼마나 사람을 애태우는지.당시 나는 유치환의 시에 푹 빠져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공책에 베껴 쓰며 열심히 외웠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나 절절한지. 시인은 곧 나의 대변인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내 안의 감각들. 일제히 비늘을 세우며 일어섰다.들길을 산책하며 네 잎 클로버를 찾았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편지와 함께 동봉하고 싶었다. 마음은 이미 네 잎 클로버를 받고 기뻐할 사람을 떠올린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다. 목 언저리까지 달아오른 기쁨이 손가락에 불을 밝혀 꼭꼭 숨은 네 잎 클로버도 놓치지 않는다.집배원 아저씨가 우리 집을 그냥 지나친 날은 갑자기 할 일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해졌다. 대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봤다. 멀어져 가는 집배원 아저씨의 모습이 야속했다. 아주 귀한 것을 나만 받지 못한 듯 서운하고 허탈했다. 처마 밑에서 한가롭게 지지배배 거리는 제비를 향해 팔을 휘휘 내저었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바람이 제집인 양 드나든다.간절하게 기다린 건 펜팔친구의 편지다. 2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서적인 면에서 잘 맞았다. 그 애에게서 근 한 달 가까이 소식이 없다. 평상시 같으면 편지가 와도 두서너 통은 왔을 텐데, 불안하고 애가 탔다. 내게 온 편지가 있는데 집배원 아저씨가 깜박 잊은 건 아닌지, 쫓아가 확인하고 싶었다.그로부터 일주일 뒤 답장이 왔다. 읽어 내려가던 내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가 심장 수술을 하셨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면서 애를 태웠다. 다행히 경과가 좋단다. 마음이 놓였다.이후에도 우린 참 많은 이야기를 글로 주고받았다. 친구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내게 잘할 수 있을 거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 시절만큼 편지를 많이 쓴 적이 있었던가. 낭만이 줄줄 흘렀던 만큼 감성이 비 온 뒤 새순처럼 나고 자랐다. 구름이 몰려오면 몰려온다고, 비가 내리면 비가 내려서, 맑은 날은 그 맑음에 반해서 편지를 썼다.정성이 깃든 편지 한 통의 여운은 길다. 깊은 맛이다. 밤새 고아낸 사골 곰탕이 이런 맛일까. 시원하고 깔끔하다. 읽은 걸 읽고 또 읽어도 재밌다. 마음이 보신한 듯 기운이 난다.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고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이 답답하다. 더디게 회신이 오는 걸 참지 못한다. 보낸 즉시 회답이 와야 속이 시원하다. 그래서 요즘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다. 내 조급성에 어울리는 통신임이 틀림없다. 사랑한다는 문자를 몇 초면 보낼 수 있고 답신이 오는 것도 1분을 넘지 않는다.편지는 잊었다. 그나마 신혼 시절에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일도 귀찮아지면서 내 안의 감성은 치매에 걸렸다. 우편함은 각종 고지서와 광고물로 가득하다. 일방적 통보역할에 그친 인쇄물은 내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 속에 반가운 사람의 편지 한 통이라도 들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끔 뼛속까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편지 한 통에 대한 갈증인지도 모른다. 깊은 울림이 없는 관계의 지속에서 오는 허전함일까. 가벼운 말장난 같은 문자의 남발에서 오는 진실의 부재일까. 바닥을 치고도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는 마음.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듯 볼품없이 버석거리던 들과 숲도 새순을 틔우는데 잃어버린 내 감성 내년 봄에는 되찾을 수 있을까. 문자나 이메일이 아닌 친필의 편지 한 통을 우편함에서 꺼내 드는 두근거림을 맛보고 싶다.

2014-10-17

참으로 고마웠던 선물

▲ 임정순수필가·전 EBS작가 더위에 길게만 느껴지던 여름도 어느새 가고 아침 저녁으로 바람결이 한결 선선해졌다. 방학이라 집에 와 있던 아들이 얼마전 미국으로 갔다. 떠나기 전 신형기기에 익숙치 않은 엄마를 위해 태블릿pc에 필요한 어플과 좋아하는 음악 등을 챙겨주고 가서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비교돼 늘 못미덥고 걱정이 많았는데 엄마를 생각하는 곰살맞은 마음이 찡하게 다가와 방학내 잔소리만 해댔던 게 벌써 후회된다. 작년에도 갈 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CD로 만들어줘 아들이 보고싶을 때 들으면 적잖은 위로가 됐었다. 그래서 “녀석이 좋은 선물을 하고 갔구나 ”여러번 감동했었다.조금전 친구가 SNS에 딸이 첫월급을 받아 사보낸 선물을 찍어 올려 대화창이 환성으로 시끌시끌했다. 부모를 생각하고 정성껏 준비한 흔적이 묻어나 보는 사람도 덩달아 흐믓하고 대견하다.나도 큰 아들이 첫 월급을 받아서 주었던 수표를 차마 통장에 넣기도 아까워 한동안 간직했던 기억이 새롭다.한 친구는 얼마전 추석에 시댁에 가서 음식준비에 몸이 지칠 때 쯤 시아버지께서 슬며시 건네주신 아이스크림 봉지에 피로가 다 풀리더라고 한다. 애쓴 며느리를 위한 속깊은 촌로의 정이 느껴져 나까지 찡해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큰동네까지 나가서 사다주신 거라니 얼마나 감사했을까?때때로 서로 나누는 것들이 이처럼 마음이 담기고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면 즐거움과 감동이 된다는 생각을 새삼 가져본다. 포장만 화려하고 실속없는 값비싼 물건을 형식으로 건넨다면 오히려 부담이 될 것이다.그러고 보니 내가 살면서 받은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이 떠오른다. 몇 년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회장을 맡은 친구가 내게 총무를 맡겼을 때의 일이다.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안 한다고 펄쩍 뛰었지만 일년에 몇 번 연락 정도만 해주면 된다며 거듭 부탁했다. 지리산 주변 시골이라 우리 학년이 두 학급이었는데 연락되는 친구도 그리 많지 않고 언젠가 한번씩은 감당해야 할 일이라 끝까지 뿌리치지 못했다. 그 후 어쩌다 고향에 가면 반갑게 전화라도 해볼 친구가 있다는게 든든하고 감사했다. 그 친구는 줄곧 묵묵히 고향을 지키고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동안 동창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던 친구였다.어느날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감자를 수확했는데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으니 명단을 알려달라고 한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그 친구의 넉넉한 마음이 어찌나 고마운지 가슴이 벅찼다. 이른 봄부터 밭에 나가 애써 지은 농사인데 쉽지 않은 일인걸 잘 안다. 그렇다고 수 십명에게 보내라고 하기도 염치없는 일이고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굴까, 혹 섭섭한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등등 고심 끝에 부모님이나 일가친척이 고향에 있는 사람들을 제하고 몇 명인가의 이름을 골라 주었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도 감사해 나는 감자가 있노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며칠 후 내게도 택배가 왔다. 비닐테이프로 간신히 틀어막은 감자 박스를 보니 하나라도 더 넣은 정성이 그대로 전해졌다. 실한 것은 팔고 작고 못난 것들을 보내도 됐을 텐데 모두가 튼실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태껏 받아본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져 감히 이웃들한테 몇알씩 나누는 것도 참았다.결혼하고도 쭉 시골부모님한테 온갖 것들을 다 얻어먹으면서도 솔직히 그렇게 뭉클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항상 해주시니 당연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자를 받은 한 친구도 행여 껍질을 두껍게 깎을까 조심하고 동창자랑을 많이도 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서 살다 새삼 고향의 정, 친구의 정성을 느껴 정말 고마왔다고 입을 모았다.살면서 무슨 기념일이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을 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나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 기억에 남을 감동을 주는 선물들이 오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떠나면서 아들이 남기고 간 편지나 꺼내봐야겠다. 또 눈물이 핑 돌겠지만….

2014-10-10

물벼락 맞은 날

▲ 이상렬수필가사립도서관 돼지등 관장 비 오는 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우산살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 그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질주하는 차들의 소음과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빗소리에 잠겨 고요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서서히 내 품으로 다가와 곁눈 한 번 주고 안긴다. 이런 날, 빗속 풍경을 보며 사물의 언어를 길트기로 요리조리 끼워 맞추는 맛이 그만이다.하지만 이 빗속 감상은 곧 현실에 부딪혀 깨어진다. 우루루~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간다.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여기는 2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다. 몇 걸음 폴짝 뛰면 1~2초 만에 건너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신호를 지키자니 멍하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무단횡단을 하자니 마음 한 쪽 구석에 숨어있던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가 졸금졸금 고개를 들어 기분 찜찜하게 만들 것 같다.이곳이 그런 생각의 회색지대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신호와 상관없이 용감하게 도로를 횡단한다. 학생이나, 어른이나, 할머니나, 아이를 등에 업은 젊은 엄마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주저함 없이 무단으로 도로를 건넌다.이럴 때면 어김없이 내 속에는 두개의 법이 싸운다. 뭐든 과감하게 내지르지 못하면서 착하지도 못한 쪼다본성, 그리고 화인(火印)맞은 양심으로 용감하게 정도(正道)를 거스르는 본성이다. 휴…. 살다보면 그리 중요하지도 않는 이런 일에 툭하면 내적 소모전이 벌어진다.오늘도 착한 아이의 본성이 우세했다.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질주하는 차들 너머로 보이는 빨간 불을 얼빠진 사람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건너려고 한 발을 내디디는 찰나였다. 승용차 한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내 앞으로 횡~지나갔다. 순간, 도로에 고인 물이 나를 덮쳤다. 차는 굉음을 내며 멀리 사라졌다. 피할 사이도 없이 내 옷은 흠뻑 젖었다. 법을 지킨 결과다.먼저 건넌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내 참담한 몰골을 보며 히죽 히죽 웃었다.꼬질꼬질한 세줄 슬리퍼를 끌며 걷던 여학생 두 명은 까르르 대면서 수군거린다. “어이구 이 등신아, 도덕군자처럼 행동하더니 꼴좋다.” 라고 말하는 같았다.난 늘 이게 문제였다. 어렸을 적 아이스깨끼 먹고 난 나무꼬치를 버릴 곳 찾지 못해 하루 종일 주머니에 넣고 다녔었다. 눈싸움 하다 내가 던진 눈덩이에 맞은 순이 얼굴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어 지지 않았다. 이제는 어줍은 눈치의 결과, 이른바 그 놈의 철딱서니라는 `세상물`이 좀 들법한 나이인데도, 아직까지 물벼락 맞아 생쥐 꼴을 면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용감한 횡단자들의 눈빛 말마따나 `어이구 이 등신` 이 맞다.법을 지키는 사람이 날벼락을 맞는 세상, 잽싸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면 사회의 낙오자로 치부되는 세상, `약삭빠름` 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반듯함`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이 흐름을 거슬러 산다는 것이 오늘따라 참 버겁게만 느껴진다.툴툴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대편에서 딸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보니, 맞은 편 횡단보도에서 나처럼 신호를 대기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옆을 지나면서 엄마는 아이에게 뭐라고 소근 소근 말하고 있다. 다 건너갈 즈음 뒤를 돌아보았다.아이의 시선은 끝까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아저씨 등신 아니예요?”적어도 저 아이 만큼은 나처럼 물벼락 맞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잽싸게 피하든지.

2014-10-03

▲ 백두현수필가박달재엘피씨 관리이사 나의 주말농장 부근 산자락에서 덫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고라니 한 마리를 보았다. 여러 명의 이웃들과 같이 보았는데 각자 설왕설래했다. 지난 계절의 만행을 생각하면 죽어 마땅하다는 사람들과 불쌍하니 놓아주자는 사람들의 의견이 저마다 분분했다. 옥수수나 콩 농사를 망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대로 죽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껌벅거리는 고라니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측은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고라니가 많아졌을까? 요즘 차를 타고 운전하다 보면 길거리에`로드킬`을 당한 고라니 숫자가 엄청나다. 게다가 이렇게 덫에 걸리거나 사냥꾼의 총에 쓰러지는 숫자도 부지기수다. 산을 떠나 위험을 무릅쓰고 고라니가 이렇게 마을까지 내려오는 이유는 먹이 때문이다. 농작물이라도 먹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운 것이다. 그들의 터전에 먹이가 부족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개체수가 너무 많아진 까닭이다. 아마도 개체수를 조절하던 호랑이나 삵 같은 최상위 포식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산속의 환경은 그대로인데 고라니 숫자만 많아지니 그도 살기위해 몸부림치다 그만 덫에 걸린 것이다.그렇더라도 고라니는 살기위해 인간의 작물을 탐한 것이다. 살기위해 자신의 몫이 아닌 인간의 농작물을 먹어야만 했다. 사람들도 고라니를 먹어야만 했다면 서로 먹고 먹히며 그나마 개체 수 조절이 될 텐데 사람들은 고라니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갈수록 먹을 것이 남아도는 세상인데 질기고 노린내 나는 고라니고기를 먹을 이유가 없다.숲에서는 최상위 포식자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고라니 고기에 관심이 없으니 점점 고라니 수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덫을 놓아 인위적인 개체 수 조절에 나선 것이다.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두는 자신이 살기위해 살생을 한다. 나를 지탱하고자 세상에서 취하는 것 중 생명 아닌 것은 거의 없다.사실 생(生)의 의미 자체가 다른 생을 취해야 하는 것이 우주만물의 이치이긴 하다. 문제는 고라니 같은 동물의 살생이 오히려 인간보다 인간적이라는 사실이다. 동물들은 배고플 때만 다른 생명을 취한다. 대개가 나의 배고픔에 큰 지장만 없다면 크고 작은 동물들 간 다툼이 별로 없다. 유독 사람만이 나의 생명유지와 상관없이도 다른 생명을 취한다. 지금 당장 배고프지 않더라도 살생을 하고 일종의 쾌감이나 욕심 때문에도 생명을 취한다. 어이없게도 군대에서 맞아죽기도 하고 돈 때문에 청부살인도 당하는 세상이다. 이에 비하면 단지 살기 위한 고라니의 노략질이야말로 얼마나 인간들보다 인간적이란 말인가.그뿐인가. 동물은 생존본능을 위해 발정기에만 암컷을 품지만 사람들은 수시로 이성을 품는다. 동물들은 번식을 위해 스스로 정한 짝과 교미를 하지만 사람들은 돈으로도 사랑을 산다. 경기도 포천의 한 빌라에서 발견된 사체처럼 치정에 얽혀 남편이 아내에게 살인까지 당하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덫도 마찬가지다. 동물의 덫은 종족보존을 위해 다른 동물들에게만 놓지만 인간의 덫은 욕망 때문에 인간들 스스로에게도 설치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놓은 비정한 탐욕의 덫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인간답지 못한 슬픈 덫이다.몽고지방의 사람들에겐`천장`이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시체를 화장하거나 매장하지 않고 나뭇가지에 걸쳐놓아 지나가던 배고픈 동물이나 독수리 같은 새들이 먹도록 한다는 것이다. 시체의 살이 모두 먹이로 제공되고 나면 남은 뼈도 땅에 묻어 식물의 거름에 소용되도록 한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나 그래도 그 의미는 숭고하다. 살면서 취했던 그 많은 생명들을 위로하고자 나도 누군가의 생을 위해 제 몸을 바치는 것이다. 죄 많은 인간들도 죽어 산에라도 묻히면 부디 그 시체라도 거름이 되어 좀 더 숲이 무성해지길 바란다. 그래야 온갖 덫이 많아져 상처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고라니 덫 하나라도 줄어들테니까.

2014-09-26

달 뜨는 소리, 별 헤는 밤

▲ 송은경수필가아동복지 교사 결혼하고 나니 친정 식구들끼리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전국도 모자라 외국까지 나가 있으니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입시 전쟁과 취업 준비로 바쁜 아이의 뒷바라지가 부모를 찾아뵙는 일보다 더 우선시되는 사회 풍습도 한 몫을 한다. 올해는 딸 넷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몇 년 전에 결혼한 남동생 가족도 왔다. 타국에서 근무하는 큰 형부와 캐나다에 유학 중인 조카까지 모두 모이니 시골집이 왁자하다. 스물아홉의 큰조카부터 이제 세 살이 된 동생의 아이까지 대가족이다. 식사 시간이 되면 거실에 상이 몇 개가 차려진다. 주방에는 온종일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기분 좋은 노동이다.확히 말하면 아버지 자리만 비었다. 여름에 쓰러지신 아버지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어찌 보면 편찮으신 아버지가 자식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이다. 그날 밤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말에 총출동된 가족이 눈물로 지새운 날이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고비를 넘기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셨다. “낼모레쯤 퇴원해도 되겠다” 하시며 부축하려는 손을 마다하고 혼자 걷는 연습을 하신다.올여름엔 누구 하나 휴가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다섯 자식 모두 중환자실에서 교대로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휴가를 다 써 버렸다. 누구 하나 망설임 없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세상이 변해도 핏줄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결혼하고 자주 보지 못했던 언니들과 모처럼 오랜 얘기도 나누었다.병실을 지키면서 딸 막내라는 이유로 나는 중환자실에서 자주 쫓겨났다. 쉰을 넘긴 큰 언니도, 나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작은 언니도 항상 동생 걱정을 먼저 했다. 교대로 잠깐씩 눈을 붙이려고 휴게실에 가져다 놓은 이불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아버지 곁에서 새로 쌓은 자매의 정은 더 끈끈해졌다. 이 후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생활하다 가을의 어느 날, 홀로 계신 어머니 곁으로 다시 모인 것이다. 아버지가 편찮으신 와중에도 어머니는 논밭에서 부지런히 수확한 곡식을 다섯 보따리씩 만들어 놓았다. 저녁 무렵,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는 옥상에 말려놓은 토란 줄기와 도라지를 또 가져오신다. 집으로 향할 트렁크에 짐이 그득하다. 당신의 몸이 불편한 중에도 병원을 찾은 손자의 용돈을 챙기는 아버지의 마음과 참기름부터 고춧가루까지 자식에게 줄 양념을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방앗간을 오고 갔을 어머니의 사랑이 시골집에 넘친다.해가 진 하늘에 달 뜨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기울긴 했지만, 여전히 그 빛은 환하다. 마당에 서서 가을바람 사이로 별을 센다. 별자리도 찾아본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 무리를 보니 어릴 때 서로 자기별이라고 부르던 생각이 난다. 나이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지만, 휘영청 말 없는 달 옆에 내 별은 이제 기생충 자리로 이름 지어야 할 것 같다. 몸은 독립해서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직 부모님 없이는 먹는 것 하나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주는 대로 주섬주섬 차에 싣는 내 모습이 너무 익숙하다. 편찮으신 중에도 자식들 걱정이 먼저인 그 삶에 흡착하여 나머지 등골마저 빼먹고 있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살아온 모습이 그대로 자식들에게 대물림되고 생각을 이어 받아 산다는 뜻이다. 아이에게 늘 당당하던 모습이 부모님 앞에 서니 한없이 작아진다.초록의 몸을 세운 잔디가 저녁 이슬에 촉촉하다. 후텁지근한 낮의 공기와 달리 저녁이 되니 바람이 차다. 그럼에도 떠나야 할 가족들이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차마 발길을 못 떼고 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서로의 얼굴과 몸짓에서 이미 익숙한 도시의 피로가 엿보인다. 잠시라도 머무를 이유를 찾은 사람처럼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별자리를 찾는다고 야단법석이다.

2014-09-19

기억의 보관함

▲ 김미향수필가·병원 근무 할아버지의 아내는 치매 환자였다. 자식들은 간간이 얼굴을 내밀 뿐 할머니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이태 전에는 혼이 빠지도록 놀랐다며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할아버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할머니가 사라졌다. 헤매다 지쳐 있을 즈음, 파출소에서 할머니를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달음에 달려가니 아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스스로를 자책했다. “얼른 죽어야 할 텐데.” 딱한 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그런 할머니라도 곁에 있어 주어서 든든하다고 하셨다. 얘기가 끝나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더디게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는 문득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3년 전 가족여행을 갔다. 나는 수다를 떠느라 시동을 켜둔 채 내린 적이 있었다. 내 정신머리에 깜짝 놀라며 그 후 한동안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다. 외출을 하다가도 다시 돌아가 잠긴 문을 확인하는가 하면 자동차 문을 잠그고도 또다시 당겨보곤 했다. 중년에 들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건망증이라고 하기엔 횟수가 잦았다. 피부에 주름이 생기 듯 나의 뇌세포에도 이미 구김살이 점령해 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앞선다.알츠하이머병, 노화로 인한 대표적인 퇴행성치매이다. 결국,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자신감도 꺾인다. 기억이 지워진 만큼 누군가에게 의존해야하는 치매는 결코 가벼운 병이 아니다. 고령화와 함께 현재 치매 환자는 52만 명에 육박한다. 무거웠던 삶들을 내려놓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나이에 무서운 병을 떠안은 노인을 보니 쓸쓸함마저 든다.해맑은 할머니의 미소 속에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치매를 부탁한다고 당부를 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 남아있는 정상적인 세포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껏 버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반듯한 대답도 하지만, 대부분은 지워지고 엉클어진 머릿속에 들어찬 망상으로 엉뚱한 소리를 한다. 더 진행이 되면 그 망상마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아내에겐 달라진 세상을 같이하는 남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마도 치매는 가족이 더 사랑하라는 메시지인 것 같다.구태여 치매가 아니더라도 디지털 세대에 살고 있는 나는 그런 증상을 느낄 때가 많다. 심지어 노래방 기기 없이는 한 곡도 부를 수 없을 만큼 기계들이 다 알아서 해준다. 컴퓨터가 그렇고 PDA가 그러하며 휴대 전화도 그렇다. 거기에 내비게이션까지 한 몫을 한다. 이렇듯 우리의 뇌는 제 기능을 디지털 기기에게 내어주고 기억의 영역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발전된 문명의 혜택을 즐기는 나도 손에 든 것을 찾기도 하고 외우고 있던 전화번호마저도 깜빡깜빡한다. 이런 게 신(新)현대판 치매가 아닐까.문득 할아버지의 웃음이 떠오른다. 같은 웃음이어도 감정은 제각각이었으리라. 할머니가 지었던 멋쩍은 웃음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다는 암시의 의미일 것이고, 할아버지의 웃음은 절망에서 찾은 희망의 미소였을 것이다. 동문서답의 대화 속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노부부에게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여든이 넘어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그저 천진하게 아내와 놀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치매가 준 선물은 아닐는지.치매, 지워지는 기억.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남의 일 같아도 나의 일이 될 수 있고,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알츠하이머, 피할 수 없다면 어머니가 나를 보듬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부모님의 흐린 기억을 가슴으로 안아야 할 것이다.훗날 내 머릿속의 잠재가 표면화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타인에게 보여 질 것인가. 지금부터라도 곱고 행복한 추억을 뇌리에 새겨야겠다.

2014-09-12

▲ 홍성순수필가씨유 체인점 대표 추석을 앞두고 재래시장이 한껏 달아올랐다. 제수용품 가게 앞에는 길게 늘어선 줄이 명절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진양조장단과 자진모리장단으로 채소를 사라며 발목을 잡는다. 생선가게 아주머니도 그 소리에 질세라 목소리를 높인다. “무 썰어 넣고 찌개 끓이면 두 사람 먹다 한사람 죽어도 모린대이” 그 옆을 지나다 아주머니의 구수한 말에 고등어를 샀다. 손님이 많아서 신이 났는지 활짝 웃으며 새끼 고등어 한 마리를 슬쩍 끼워 준다. 어머니는 봄이 되면 채소 씨앗을 뿌렸다. 씨앗이 파랗게 고개를 들고 올라오면 이른 새벽부터 자식 돌보듯 정성을 다했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채소를 솎아서 시장으로 나갔다.장날이 되면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려고 일찍 일어났다. 어머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다. 이 십리 길을 가려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큰 걸음을 쫓아가느라 어린 나는 힘이 들었지만 시장입구에 들어서면 기운이 났다. 면 소재지 옆 넓은 공터에서 오일장이 열렸다.어디서 왔는지 시장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사람들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간 어머니는 채소 보따리를 풀었다. 정갈하게 다듬은 채소를 소쿠리 위에 올려놓고 어머니는 숨을 돌렸다.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오십 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상추와 쑥갓을 샀다. 어머니는 미리 담아놓은 소쿠리에 상추를 한 줌 더 얹어 주며 덕담을 건넸다. 아주머니는 기분이 좋은지 눈깔사탕 하나를 내게 건넸다. 한 줌 더 올려주는 어머니가 이상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니가 보기엔 덤으로 주니까 엄마가 손해 본 거 같나. 사는 사람이 기분 좋게 가면 그 복이 파는 사람에게로 돌아오는기라. 그래서 장사도 더 잘 되지.”덤 때문일까. 어머니의 채소는 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일찍 동났다. 채소를 다 팔고 집으로 돌아갈 땐 가게에 들러 동생들에게 줄 과자며 사과를 샀다. 과일가게 주인도 사과 몇 개를 덤으로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 시절 덤은 인심이었다. 요즘 대형마트에서는 채소를 달아서 판다. 야박해 보여서 시장 보는 재미를 잃는다. 재래시장의 정이 그리울 때가 있다.어릴 적, 어머니는 용돈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학교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덤은 기분을 좋게 하는 묘약이다. 물건의 덤처럼 인생에도 덤이 있다.삼촌이 암에 걸렸었다.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삼촌에게 의사는 더 이상 치료해 줄 것이 없다고 했다. 실의에 빠진 삼촌은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아무리 원망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삼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황토 찜질이 좋다는 말에 솔깃하여 황토방을 드나들며 정성을 다했다. 또 생식이 좋다 하면 아픈 몸을 이끌고 신들린 사람처럼 온 산천을 헤매다녔다. 가락꼬지처럼 비쩍 말라 회복될 기미가 없던 삼촌은 차츰 시간이 흐르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삼촌은 암도 이기고 도회지 생활을 청산했다. 한적한 시골에서 채마밭을 가꾸며 산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하루를 맞는다는 삼촌은 자신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말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어서 고맙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우리는 어쩌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욕심 때문에 힘들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작은 것에도 소중한 마음을 담을 때 멋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불평을 늘어놓고 살던 나는 삼촌을 보며 내 삶을 되돌아봤다. 탈 없이 자라는 자식과 연세가 많으신 데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사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행복하다. 평소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던 작은 일도 이젠 고맙고 감사하다.물건을 살 때 얻는 덤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덤은 더 소중한 것이리라. 하루가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라고 한다면 더 많은 애착과 열정을 쏟으며 살 것이다.

2014-09-05

내 노래방

▲윤묘희 전 MBC드라마`전원일기` 작가나는 매일 우리 아파트 경내(境內)를 산책한다. 지은 지가 오래되어서 건물은 낡았지만 조경수는 울창하고 아주 멋진 조그마한 단지의 아파트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다섯 개 동 전체를 열 바퀴 돌고 별로인 날은 여덟 바퀴쯤 돈다. 소요 시간은 40~50분 정도, 그렇게 걷고 나면 등이 촉촉하게 젖는다. 간단한 정리 운동 몇 동작을 하고는 바로 내 노래방으로 향한다.웬 노래방? 마이크 시설이 갖춰진 그런 노래방이 아니다. 아파트 정원의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 벽돌 여섯 장을 삼 층으로 쌓아 놓은 지극히 단출한 노래방이다. 밀폐된 지하 노래방같이 답답하지 않아 좋고 담배 냄새가 배어 있지 않아서 더 좋다.반주는 딱따구리, 뻐꾸기, 종다리, 얘네들이 알아서 해준다. 가을에는 풀벌레들도 한 몫 거든다.청중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면 족하다. 이 녀석들은 내 노래 톤이 조금 올라가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서 돌아본다. 그런데 재수 좋은 날은 청중이 한 명 더 늘어난다. 맞은 편 가죽나무 꼭대기 둥지에서 방금 아가 젖 물리고 있던 까치 한 마리가 그만 내 노래에 반해 냉큼 내려온다. 내려와선 까딱, 인사부터 하고 그리고 얌전히 앉아서 경청한다. 풀어헤쳐 진 그녀의 앙가슴에서는 젖내음이 폴폴 나는 것 같다. 그런 때는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한껏 목청을 돋우어 근사하게 한 곡 더 뽑아준다. 더더 재수 좋은 날은 순찰 중인 경비원에게 내 노래가 들키는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는 그를 못 본 척, 한층 더 목소리를 가다듬을 때 나는 최고로 기분이 좋아진다.바로 옆 잔디밭에서는 보랏빛 제비꽃과 보송보송 노랗게 올라온 민들레가 내 노래를 가지고 저희끼리 쑥덕거린다. `남쪽 나라 내 고향` 할 때는 목을 살짝 꺾어야 하는데 저게 뭐냐는 둥, `초가삼간` 할 때 올라가야 하는 데 엉뚱하게 `그립습니다`가 더 올라가니 할머니가 혹시 노망든 게 아니냐는 둥, 작년보다 많이 늙어 보인다느니 어쩌느니 촌평(寸評)이 구구(區區)하다.이때 살며시 고개 내민 쑥이 한소리 한다. “할머니가 기운 없어서 그렇지 노래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니뭐니해도 기운 나게 해주는 보약은 나거든, 그러니 올해에도 할머니 건강은 내가 책임질 거야” 곁에서 돌나물도 나선다. “맞아, 저희들이 뭘 안다고, 나는 새콤달콤 초무침으로 할머니 입맛 찾아드릴 거야” 조잘대는 얼굴들이 참 귀엽다.“모두 모두 고맙고 또 고맙다. 얘들아!”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힐 때는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이 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기분이 우울할 때는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를 중얼거리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비 내리는 고모령`을 목청껏 불러본다. 언제나 이 노래 끝 소절쯤에서는 목소리가 그만 젖어버린다.어떤 때는 내 노래방이 애완견의 변이나 담배꽁초 같은 것으로 아주 지저분해져 있다. 운동 후의 달콤한 휴식시간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날은 내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진다. 따라서 행복지수도 다운된다.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 주민들을 보호해주고 반겨주는 저 꽃과 나무들 앞에서 그 인심(人心)은 부끄럽지도 않은지.며칠 전에는 새로 부임한 관리소장이 봄맞이 대청소를 하던 중 내 노래방 벽돌 의자를 몽땅 치워버렸다. 그런데 한 경비원이 소장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고 다시 정성껏 쌓아주었다. `눈이 떠 있는지 감겨 있는지조차 분간 안 되는 실눈의 경비아저씨 고맙습니다! 그 얼굴에 패인 굵고 깊은 훈장은 괜히 받은 것이 아니랍니다.`몸이 부실한 형편이다 보니 그 벽돌 의자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 정원에 앉아서 노래도 부르고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고 멋진 글도 구상할 수 있도록 내 건강이 더욱 좋아졌으면 하고 빈다.

2014-08-29

특별한 인연

▲ 이대전후담 정미소 대표 흔치 않은 일이다. 어머니의 산소 벌초를 하기 위해 예초기를 차에 실었다. 혼자 가도 된다며 만류해 보았지만 막무가내다. 벌이라도 달려들까 완전 무장하고 살충제와 갈퀴를 챙겨 들고 따라 나선다. 벌써 4년째다.“사돈요. 잘 계싰니?? 올해도 사우 따라 또 왔니더.”사돈의 방문에 맨발로라도 달려 나올 텐데 어머니는 대답이 없다. 산소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만 무성하다. 예초기의 엔진 소리가 높아지자 빠르게 돌아가는 칼날에 잡초가 잘려나갔다. 내 뒤를 따라 장모님은 깔끔하게 갈퀴 질을 했다. 어머니는 천상에서도 사돈의 수고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조상님 산소 벌초는 해마다 형님 대신 내가 하고 있다. 가난한 집의 맏이로 태어난 형님은 그동안 동생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것이 죄송하여 벌초만이라도 형님의 짐을 덜어 주고 싶어 자청한 일이다. 벌초만이 아니라 주위의 나무를 베어내고 산소를 손보는 일도 혼자서 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아무 불만이 없다.장모님은 혼자 애쓰는 사위가 보기 딱해서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에 짠하게 남은 사돈의 산소만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여러 해째 동행해서 벌초를 돕고 있다.고등학교 때 웅변대회에 나갔다가 여고 대표로 나온 한해 선배인 지금의 처형을 만났다. 가끔 선배 집에 들러서 잡다한 일이며 벼 베기를 도와줬다. 지금의 장모님은 며칠 뒤 수고했다며 찹쌀떡 두 되를 보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집 사위가 되었다.고등학교 2학년 때, 작은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어머니에게 먼 길도 마다치 않고 달려와서 위로해 주었다.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낸 세월이 짧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서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학교 다닐 때, 장이 서는 날엔 짬뽕을 사 줄 테니 수업 마치고 중국집 앞으로 나오라는 기별을 가끔 받았다. 그런 날은 수업시간 내내 들떠 있었다. 어머니는 장에 가더라도 할머니처럼 고무신에 한복을 입고 갔지만, 한참이나 젊은 장모님은 언제나 구두를 신은 양장 차림이었다. 친구들이 젊은 어머니와 핫도그를 같이 사서 먹는 것을 제일 부러워했는데, 같이 다니는 날 보고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항상 아들이라고 하는 장모님의 대답이 난 좋았다.장모님은 사돈이 여럿 있지만 유독 어머니를 측은하게 여겼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없고, 육신마저 병으로 온전하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짐만 된다며 장모님에게 넋두리했나 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장모님은 사돈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고 했다.고생이라곤 모르고 산 딸이 월세방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느라 힘들다고 투덜댔다. 장모님은 시부모도 내 부모나 마찬가지니 잘 섬기라고 신신당부하며 나중에 복 받을 일이니 참고 견디라며 달랬다. 장모님은 맞벌이하는 딸이 안쓰러웠던지 큰딸을 돌봐 주셨다. 작은딸은 어머니가 돌보고 있었는데 어머니 몸이 아파서 장모님이 맡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돈에게 미안하다며 아파도 눕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사돈, 어쩌든지 아들 걱정은 마시고 편하게 쉬시소.”벌초를 마치고 장모님은 준비한 제주 한 잔을 산소에 올렸다. 장모님의 음성이 촉촉히 젖었다. 음복 잔을 나누고 짐을 챙기며 산소를 살폈다. 풀들로 무성하던 봉분을 다듬고 나니 명절 빔을 갈아입혀 드린 듯했다.벌초할 때 장모님을 모시고 오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인연이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가장 어려운 사이가 사돈 간이지만 격의 없이 정을 내는 장모님이 참 존경스럽다.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장모님이 건강해서 사돈 간의 만남이 오랫동안 이어지길 바란다. 두 분 참 특별한 인연이다.“사돈요, 지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삭신이 쑤시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더. 언제 또 사돈 뵈러 올지 모르겠니더. 아무튼 편안히 잘 계시소.”

2014-08-22

또 다른 시작을 위해

▲ 최보금보금 공인중개사 대표 자동차 급유 신호에 불이 들어왔다. 연료통 게이지가 E를 가리킨 건 어제부터였다. 일부러 주유소 가는 것이 귀찮아 출근길에 넣기로 했다. 차 문을 내리고 `가득`을 주문했다. 웅웅거리는 소음을 타고 기름이 들어온다. 서툰 독립생활에 빨간불은 수시로 들어왔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였다. 변변치 않은 자취 살림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생활비가 떨어진 날은 학교까지 걸어가느라 지각하기 일쑤였고 차가운 방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눈물만 흘렸었다. 따뜻한 방에서 김이 나는 국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면 나무에라도 매달려서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다달이 계획을 세우고 아무리 아껴 써도 생활비는 턱없이 모자랐다. 여름은 여름대로 살기가 힘들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월세방은 조그만 창문 하나가 전부였다. 선풍기도 없이 여름나기도 만만치 않았다. 차가운 콜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하루는 일기장에 `콜라`만 잔뜩 적은 적도 있었다.서른이 넘어서였다. 어린 두 딸아이와 함께 대구로 오게 되었다. 살림만 하던 내가 갑자기 직업 전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젊다는 것 외엔. 최선을 다했지만 경험이 없어서인지 노력도 허사였다. 가족들에게 짐이 될 수도 없었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아이들만이라도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주고 싶었지만 내 고등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자존심 따위는 버리기로 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더는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담담해졌다. 자식을 생각하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도 생겼다. 공인중개 사무소에서 말단 직원으로 있으면서 일을 배웠다. 월급이라야 고작 팔십만 원이 전부였지만 한 푼 벌이 없는 나에겐 감읍할 따름이었다. 생소하고 두렵던 부동산 문턱을 넘어선 것이 내 삶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이런 일을 하려면 차가 필요했다. 통장을 탈탈 털어 중형차를 샀다. 운전이라고는 면허증 딸 때 몰아본 경력이 전부였다. 마음을 다잡고 용감하게 거리로 나왔다. 손님을 차에 태우고 물건을 보기 위해 차에 올랐다. 손님보다 운전대를 잡은 내가 더 떨고 있었다.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고 신호를 어겨서 벌금 내는 날이 많았다. 삼 년에 걸쳐 갚아야 할 할부금도 많았다. 무모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부동산 중개 일은 무엇보다 내 형편에 딱 들어맞는 일이었다. 밑천이 없어도 몸만 건강하면 되고 상품처럼 재고가 없어서 좋다. 경기의 등락에도 크게 손해 볼 일이 없다. 거기다 투자 대비 수익구조도 나쁘지 않다. 운전이 손에 익듯이 일도 점점 많아졌고 내 개인 사무실을 가질 정도가 되었다.부동산 사무실에는 돈 많은 사람이 투자하기 위해 드나 들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래 일을 하다 보니 내 생각이 편견임을 알았다. 사람들은 빠듯한 살림도 아끼고 아껴서 더 좋은 전셋집을 구하고, 더 넓은 집을 사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홀몸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지만 그들을 보면서 열심히 살 희망이 생겼다. 내 부동산 사무실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할 것 없이 희망을 파고 산다. 나도 `하늘이 돕는 자`보다 `스스로 돕는 자`가 되리라 결심했다.오일표시기 바늘이 가득 쪽으로 움직인다. 아이들은 뒷자리에서 휴대전화기를 보며 깔깔거린다. 아이들이나 나나 오랜만에 가져 보는 여유다. 일상에서 바빴던 몸을 잠시 쉬고 재충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비워져 있어야 채워진다는 깨달음이 문득 스친다. 비어있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채우기 위한 과정이요, 또 다른 시작이다.겁도 없이 장만했던 차는 내 손발이 되어 십 년이 넘도록 함께 일했다. 천정부지로 기름값이 치솟을 때는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다녔지만 지나고 보니 그 일 조차 행복이었다. 이젠 다른 차와 손발을 맞춘다. 내 옆지기다.출발 버튼을 누른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2014-08-08

미투리 한 켤레, 사랑 두 짝

▲ 박시윤수필가 현관에 벗어놓은 남편의 해진 신발이 유독 눈에 띈다. 발이 빠져나간 신발 속은 어둠만 남은 듯하다. 하루의 고단함이 쾨쾨한 냄새로 남아 무거운 체증처럼 뒹굴고 있다. 한쪽 발을 넣어보니 내가 남편에게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 새삼 넓게만 느껴진다. 나머지 한쪽 발도 넣었다. 땅을 짚고 굳건히 서 있는 내 몸은 늘 남편 앞에서만은 목소리 크고, 당당한 아내였다. 남편의 신발은 다른 식구들의 신발에 비해 유독 낡았다. 현관에 널브러진 신발들을 정리할 때면 남편의 신발을 늘 구석이거나 가장 낮은 위치로 옮겨 놓았다. 깨끗하고 앙증맞은 아이들의 신발과 굽이 있는 나의 구두보다 한 번도 맨 위이거나 중간이었던 적이 없었다.안동대박물관에 다녀온 후 며칠째 생각이 신발에 머무른다. 지극히 단순한 모양새의 미투리 한 켤레 때문이다.안동의 고성 이씨 분묘 이장(移葬) 작업에서 출토된 `원이 엄마의 마지막 편지`와 나란히 있었던 미투리라 한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요절한 남편에 대한 망부의 애끓는 사연과 병(病)중인 남편의 쾌유를 빌며 삼 줄기와 머리카락을 한데 엮어 만든 미투리였다. 원이 엄마의 사연은 `내셔널지오그래픽` 2007년 11월호에 `사랑의 미투리`라는 이름으로 특집 게재될 만큼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단순한 미투리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한국의 숭고한 사랑을 세계에 알렸던 것이다.망부는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엮었던 것일까.신발은 보드라운 발을 감싼다. 그리고 자신의 보드라운 얼굴을 바닥에 내어 준다. 흙을 덮어쓰고, 각진 모래에 상처도 난다. 온몸의 무게를 받고도 묵묵히 견딘다. 그러면서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오로지 발을 보호한다. 때로는 빗물에서, 때로는 눈밭에서 뒹군다. 뒹굴다 돌아온 툇돌은 싸늘히 그를 맞이한다. 밤새 싸늘한 잠을 자고도, 다음 날이면 또 원래의 모습으로 길을 나선다. 요절한 남편은 원이 엄마에게 미투리와도 같았을 것이다. 땅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낮게 엎드린 것이 미투리였다. 그러면서 발을 보호하는 미투리에게 망부는 몸의 가장 윗부분에 자리한 머리카락을 엮음으로써 존경과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사백여년 전의 이야기다. 편지를 감상하는 내내 미투리의 엮인 부분 부분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 떠나는 남편에게 미투리를 자신인 양 머리맡에 넣어 주었으리라.신발장을 열어젖힌다. 식구 다섯에 꽤 많은 신발이 있다. 돌돌 말린 신문들이 신발의 허한 속을 채우고 있다. 언제 적 것인지 아예 먼지가 보얗다.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 아쉬운 마음에 끝내 버리지 못한 신발들도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신발이 있다. 남편의 지극히 단순한 작업화다.현장 일에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작업화는 유난히 낡았다. 모양이나 형체를 고정할 가치도 없어 신문하나 말아 넣지 않은, 속이 텅 빈 신발이다. 비어있어도 한 번도 채워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남편이다. 가족들을 위해 세상에 몸을 바삐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그저 묵묵한 사람이었다. 가족을 감싸고 가족을 위해 기꺼이 신발이 되고 있는 남편이 원이 엄마의 미투리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 걸 기억한다.아이와 함께 신발가게에 간다. 사이즈를 묻는 주인 앞에서 얼굴이 붉어진다. 여태껏 남편의 발 사이즈도 모른다. 신어보고 엄지손가락 세 개 정도의 간격을 둔다. 마음은 벌써 남편의 귓전에 맴돌고 있지만 꾹꾹 눌러 입을 봉한다. 현관 중간에 남편의 새 신발을 정리해 둔다. 아이가 달려와 먼저 신고는 온 집을 돌아다닌다. 커다란 남편의 신발이 아이의 자그마한 몸과 보드라운 웃음을 감싸고 있다.오늘은 나도 원이 엄마가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엮듯 마음 깊숙이 남편의 미투리 한 켤레에 몸을 맡긴다. 싸늘한 신발 속이 내 체온으로 후끈 덥혀지는 중이다.

2014-08-01

본심

이상렬대구 반야월성덕교회 목사득구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이름만으로 주먹이 세 보이는 아이 득구, 고르게 자란 잔디 위에 잡초 하나가 쑥 올라 있듯 그의 키는 또래 아이들보다 한 뼘 더 솟아있었다.산그늘이 드리워진 학교 운동장에서 득구와 시비가 붙었다. 주변을 빙 둘러선 아이들은 편을 갈라 득구와 나의 실랑이를 부추기고 있었다. 평소 골비 단지로 늘 골골대던 나, 이길 승산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약골이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내가 먼저 냅다 주먹을 날렸다. 허무하게 빗나갔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순식간에 득구의 덩치 밑에 깔리고 말았다. 맹수의 공격에 목이 눌린 사슴처럼 무력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는 선혈의 떪은 맛이 느껴졌다. 누워서 바라본 득구의 얼굴 뒤로 펼쳐진 잿빛 하늘만큼 내 생애에 무서웠던 장면이 또 있었을까.순간 황급히, 누군가가 배를 깔고 앉아있던 득구를 걷어 냈다. 선비 선생님으로 불렸던 6학년 주임 선생님이셨다. 그리고는 나를 일으킨 다음 다짜고짜 나의 따귀를 때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그 사건은 모든 이들에게 묘한 궁금증을 남겼다. 왜 주임 선생님은 힘센 득구 밑에 깔려 있는 작은 아이의 따귀를 때렸을까. 섧다는 감정을 억누르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날 밤, 어린 자존심은 노적가리 속에 숨어 바른 볏단을 젖혔다.그해 가을, 학년 전체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불국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대열을 정리하고 있을 때, 주임 선생님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이상렬, 이리 나와 봐!”정적이 흘렀고 나는 주춤주춤 걸어나갔다. 선생님은 두 팔로 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전교생 앞에서 보란 듯이 단 한 명, 나와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선생님이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그러나 나는 안다. 지난 슬픈 봄날에 득구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내 따귀를 때린 이유를, 또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한 사람, 나를 지명하여 불러내어 사진을 찍은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선생님은 바로 나의 아버지다.그날, 아버지는 그랬다. 교무실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다 우연히 한 무리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중간에 으르렁대는 두 아이를 목격한 것이다. 제 몸뚱어리보다 큰 덩치에 깔린 채 힘없이 누워있던 아들, 거센 주먹질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두들겨 맞고 있는 자식을 본 아버지, 그 순간 아버지는 더는 선비 선생님이 아니었다. 자식을 구출하기 위해 맹렬히 타는 불 속이라도 기꺼이 뛰어들 수 있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달렸다. 한걸음에 뛰어와 득구를 밀친 후,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떳떳이 나를 아들이라 드러내기에 앞서 스스로 반듯하게 자라주기를 조용히 눈으로 지켜주며 묵묵히 계셨던 아버지, 순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행동뿐이었으리라. 아들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아니, 득구에게서 아들을 구한 것이다.아버지, 오늘같이 무시무시한 세상이라는 괴물 밑에 깔려 속절없이 뭉개지고 있을 때, 더 절실해지는 이름이다. 그 깊디깊은 아버지의 본심이 가슴에서 찡하게 울려온다.이제 내가 아버지가 되었다. 한번은, 아들 녀석이 친구에게 맞고 들어왔다. 격정을 삭이지 못하고 집에 와서야 제 혼자 분을 터트린다. 아이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함께 걸었다. 아니, 부글부글 타는 속상한 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걷다 보니 인근 학교운동장이다. 아들에게 물었다.“득구, 무서웠니?”“네? 득구가 누구예요?”능선으로 넘어가는 노을 한 자락이 아들의 울긋불긋한 얼굴을 어루만진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멋쩍어하는 아들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는다.“아들아~미안하다.”텅 빈 교정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두 개가 다정스럽다.

2014-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