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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억의 보관함

▲ 김미향수필가·병원 근무 할아버지의 아내는 치매 환자였다. 자식들은 간간이 얼굴을 내밀 뿐 할머니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이태 전에는 혼이 빠지도록 놀랐다며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할아버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할머니가 사라졌다. 헤매다 지쳐 있을 즈음, 파출소에서 할머니를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달음에 달려가니 아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스스로를 자책했다. “얼른 죽어야 할 텐데.” 딱한 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그런 할머니라도 곁에 있어 주어서 든든하다고 하셨다. 얘기가 끝나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더디게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는 문득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3년 전 가족여행을 갔다. 나는 수다를 떠느라 시동을 켜둔 채 내린 적이 있었다. 내 정신머리에 깜짝 놀라며 그 후 한동안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다. 외출을 하다가도 다시 돌아가 잠긴 문을 확인하는가 하면 자동차 문을 잠그고도 또다시 당겨보곤 했다. 중년에 들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건망증이라고 하기엔 횟수가 잦았다. 피부에 주름이 생기 듯 나의 뇌세포에도 이미 구김살이 점령해 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앞선다.알츠하이머병, 노화로 인한 대표적인 퇴행성치매이다. 결국,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자신감도 꺾인다. 기억이 지워진 만큼 누군가에게 의존해야하는 치매는 결코 가벼운 병이 아니다. 고령화와 함께 현재 치매 환자는 52만 명에 육박한다. 무거웠던 삶들을 내려놓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나이에 무서운 병을 떠안은 노인을 보니 쓸쓸함마저 든다.해맑은 할머니의 미소 속에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치매를 부탁한다고 당부를 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 남아있는 정상적인 세포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껏 버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반듯한 대답도 하지만, 대부분은 지워지고 엉클어진 머릿속에 들어찬 망상으로 엉뚱한 소리를 한다. 더 진행이 되면 그 망상마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아내에겐 달라진 세상을 같이하는 남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마도 치매는 가족이 더 사랑하라는 메시지인 것 같다.구태여 치매가 아니더라도 디지털 세대에 살고 있는 나는 그런 증상을 느낄 때가 많다. 심지어 노래방 기기 없이는 한 곡도 부를 수 없을 만큼 기계들이 다 알아서 해준다. 컴퓨터가 그렇고 PDA가 그러하며 휴대 전화도 그렇다. 거기에 내비게이션까지 한 몫을 한다. 이렇듯 우리의 뇌는 제 기능을 디지털 기기에게 내어주고 기억의 영역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발전된 문명의 혜택을 즐기는 나도 손에 든 것을 찾기도 하고 외우고 있던 전화번호마저도 깜빡깜빡한다. 이런 게 신(新)현대판 치매가 아닐까.문득 할아버지의 웃음이 떠오른다. 같은 웃음이어도 감정은 제각각이었으리라. 할머니가 지었던 멋쩍은 웃음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다는 암시의 의미일 것이고, 할아버지의 웃음은 절망에서 찾은 희망의 미소였을 것이다. 동문서답의 대화 속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노부부에게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여든이 넘어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그저 천진하게 아내와 놀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치매가 준 선물은 아닐는지.치매, 지워지는 기억.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남의 일 같아도 나의 일이 될 수 있고,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알츠하이머, 피할 수 없다면 어머니가 나를 보듬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부모님의 흐린 기억을 가슴으로 안아야 할 것이다.훗날 내 머릿속의 잠재가 표면화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타인에게 보여 질 것인가. 지금부터라도 곱고 행복한 추억을 뇌리에 새겨야겠다.

2014-09-12

▲ 홍성순수필가씨유 체인점 대표 추석을 앞두고 재래시장이 한껏 달아올랐다. 제수용품 가게 앞에는 길게 늘어선 줄이 명절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진양조장단과 자진모리장단으로 채소를 사라며 발목을 잡는다. 생선가게 아주머니도 그 소리에 질세라 목소리를 높인다. “무 썰어 넣고 찌개 끓이면 두 사람 먹다 한사람 죽어도 모린대이” 그 옆을 지나다 아주머니의 구수한 말에 고등어를 샀다. 손님이 많아서 신이 났는지 활짝 웃으며 새끼 고등어 한 마리를 슬쩍 끼워 준다. 어머니는 봄이 되면 채소 씨앗을 뿌렸다. 씨앗이 파랗게 고개를 들고 올라오면 이른 새벽부터 자식 돌보듯 정성을 다했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채소를 솎아서 시장으로 나갔다.장날이 되면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려고 일찍 일어났다. 어머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다. 이 십리 길을 가려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큰 걸음을 쫓아가느라 어린 나는 힘이 들었지만 시장입구에 들어서면 기운이 났다. 면 소재지 옆 넓은 공터에서 오일장이 열렸다.어디서 왔는지 시장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사람들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간 어머니는 채소 보따리를 풀었다. 정갈하게 다듬은 채소를 소쿠리 위에 올려놓고 어머니는 숨을 돌렸다.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오십 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상추와 쑥갓을 샀다. 어머니는 미리 담아놓은 소쿠리에 상추를 한 줌 더 얹어 주며 덕담을 건넸다. 아주머니는 기분이 좋은지 눈깔사탕 하나를 내게 건넸다. 한 줌 더 올려주는 어머니가 이상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니가 보기엔 덤으로 주니까 엄마가 손해 본 거 같나. 사는 사람이 기분 좋게 가면 그 복이 파는 사람에게로 돌아오는기라. 그래서 장사도 더 잘 되지.”덤 때문일까. 어머니의 채소는 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일찍 동났다. 채소를 다 팔고 집으로 돌아갈 땐 가게에 들러 동생들에게 줄 과자며 사과를 샀다. 과일가게 주인도 사과 몇 개를 덤으로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 시절 덤은 인심이었다. 요즘 대형마트에서는 채소를 달아서 판다. 야박해 보여서 시장 보는 재미를 잃는다. 재래시장의 정이 그리울 때가 있다.어릴 적, 어머니는 용돈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학교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덤은 기분을 좋게 하는 묘약이다. 물건의 덤처럼 인생에도 덤이 있다.삼촌이 암에 걸렸었다.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삼촌에게 의사는 더 이상 치료해 줄 것이 없다고 했다. 실의에 빠진 삼촌은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아무리 원망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삼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황토 찜질이 좋다는 말에 솔깃하여 황토방을 드나들며 정성을 다했다. 또 생식이 좋다 하면 아픈 몸을 이끌고 신들린 사람처럼 온 산천을 헤매다녔다. 가락꼬지처럼 비쩍 말라 회복될 기미가 없던 삼촌은 차츰 시간이 흐르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삼촌은 암도 이기고 도회지 생활을 청산했다. 한적한 시골에서 채마밭을 가꾸며 산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하루를 맞는다는 삼촌은 자신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말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어서 고맙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우리는 어쩌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욕심 때문에 힘들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작은 것에도 소중한 마음을 담을 때 멋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불평을 늘어놓고 살던 나는 삼촌을 보며 내 삶을 되돌아봤다. 탈 없이 자라는 자식과 연세가 많으신 데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사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행복하다. 평소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던 작은 일도 이젠 고맙고 감사하다.물건을 살 때 얻는 덤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덤은 더 소중한 것이리라. 하루가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라고 한다면 더 많은 애착과 열정을 쏟으며 살 것이다.

2014-09-05

내 노래방

▲윤묘희 전 MBC드라마`전원일기` 작가나는 매일 우리 아파트 경내(境內)를 산책한다. 지은 지가 오래되어서 건물은 낡았지만 조경수는 울창하고 아주 멋진 조그마한 단지의 아파트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다섯 개 동 전체를 열 바퀴 돌고 별로인 날은 여덟 바퀴쯤 돈다. 소요 시간은 40~50분 정도, 그렇게 걷고 나면 등이 촉촉하게 젖는다. 간단한 정리 운동 몇 동작을 하고는 바로 내 노래방으로 향한다.웬 노래방? 마이크 시설이 갖춰진 그런 노래방이 아니다. 아파트 정원의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 벽돌 여섯 장을 삼 층으로 쌓아 놓은 지극히 단출한 노래방이다. 밀폐된 지하 노래방같이 답답하지 않아 좋고 담배 냄새가 배어 있지 않아서 더 좋다.반주는 딱따구리, 뻐꾸기, 종다리, 얘네들이 알아서 해준다. 가을에는 풀벌레들도 한 몫 거든다.청중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면 족하다. 이 녀석들은 내 노래 톤이 조금 올라가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서 돌아본다. 그런데 재수 좋은 날은 청중이 한 명 더 늘어난다. 맞은 편 가죽나무 꼭대기 둥지에서 방금 아가 젖 물리고 있던 까치 한 마리가 그만 내 노래에 반해 냉큼 내려온다. 내려와선 까딱, 인사부터 하고 그리고 얌전히 앉아서 경청한다. 풀어헤쳐 진 그녀의 앙가슴에서는 젖내음이 폴폴 나는 것 같다. 그런 때는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한껏 목청을 돋우어 근사하게 한 곡 더 뽑아준다. 더더 재수 좋은 날은 순찰 중인 경비원에게 내 노래가 들키는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는 그를 못 본 척, 한층 더 목소리를 가다듬을 때 나는 최고로 기분이 좋아진다.바로 옆 잔디밭에서는 보랏빛 제비꽃과 보송보송 노랗게 올라온 민들레가 내 노래를 가지고 저희끼리 쑥덕거린다. `남쪽 나라 내 고향` 할 때는 목을 살짝 꺾어야 하는데 저게 뭐냐는 둥, `초가삼간` 할 때 올라가야 하는 데 엉뚱하게 `그립습니다`가 더 올라가니 할머니가 혹시 노망든 게 아니냐는 둥, 작년보다 많이 늙어 보인다느니 어쩌느니 촌평(寸評)이 구구(區區)하다.이때 살며시 고개 내민 쑥이 한소리 한다. “할머니가 기운 없어서 그렇지 노래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니뭐니해도 기운 나게 해주는 보약은 나거든, 그러니 올해에도 할머니 건강은 내가 책임질 거야” 곁에서 돌나물도 나선다. “맞아, 저희들이 뭘 안다고, 나는 새콤달콤 초무침으로 할머니 입맛 찾아드릴 거야” 조잘대는 얼굴들이 참 귀엽다.“모두 모두 고맙고 또 고맙다. 얘들아!”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힐 때는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이 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기분이 우울할 때는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를 중얼거리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비 내리는 고모령`을 목청껏 불러본다. 언제나 이 노래 끝 소절쯤에서는 목소리가 그만 젖어버린다.어떤 때는 내 노래방이 애완견의 변이나 담배꽁초 같은 것으로 아주 지저분해져 있다. 운동 후의 달콤한 휴식시간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날은 내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진다. 따라서 행복지수도 다운된다.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 주민들을 보호해주고 반겨주는 저 꽃과 나무들 앞에서 그 인심(人心)은 부끄럽지도 않은지.며칠 전에는 새로 부임한 관리소장이 봄맞이 대청소를 하던 중 내 노래방 벽돌 의자를 몽땅 치워버렸다. 그런데 한 경비원이 소장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고 다시 정성껏 쌓아주었다. `눈이 떠 있는지 감겨 있는지조차 분간 안 되는 실눈의 경비아저씨 고맙습니다! 그 얼굴에 패인 굵고 깊은 훈장은 괜히 받은 것이 아니랍니다.`몸이 부실한 형편이다 보니 그 벽돌 의자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 정원에 앉아서 노래도 부르고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고 멋진 글도 구상할 수 있도록 내 건강이 더욱 좋아졌으면 하고 빈다.

2014-08-29

특별한 인연

▲ 이대전후담 정미소 대표 흔치 않은 일이다. 어머니의 산소 벌초를 하기 위해 예초기를 차에 실었다. 혼자 가도 된다며 만류해 보았지만 막무가내다. 벌이라도 달려들까 완전 무장하고 살충제와 갈퀴를 챙겨 들고 따라 나선다. 벌써 4년째다.“사돈요. 잘 계싰니?? 올해도 사우 따라 또 왔니더.”사돈의 방문에 맨발로라도 달려 나올 텐데 어머니는 대답이 없다. 산소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만 무성하다. 예초기의 엔진 소리가 높아지자 빠르게 돌아가는 칼날에 잡초가 잘려나갔다. 내 뒤를 따라 장모님은 깔끔하게 갈퀴 질을 했다. 어머니는 천상에서도 사돈의 수고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조상님 산소 벌초는 해마다 형님 대신 내가 하고 있다. 가난한 집의 맏이로 태어난 형님은 그동안 동생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것이 죄송하여 벌초만이라도 형님의 짐을 덜어 주고 싶어 자청한 일이다. 벌초만이 아니라 주위의 나무를 베어내고 산소를 손보는 일도 혼자서 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아무 불만이 없다.장모님은 혼자 애쓰는 사위가 보기 딱해서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에 짠하게 남은 사돈의 산소만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여러 해째 동행해서 벌초를 돕고 있다.고등학교 때 웅변대회에 나갔다가 여고 대표로 나온 한해 선배인 지금의 처형을 만났다. 가끔 선배 집에 들러서 잡다한 일이며 벼 베기를 도와줬다. 지금의 장모님은 며칠 뒤 수고했다며 찹쌀떡 두 되를 보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집 사위가 되었다.고등학교 2학년 때, 작은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어머니에게 먼 길도 마다치 않고 달려와서 위로해 주었다.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낸 세월이 짧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서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학교 다닐 때, 장이 서는 날엔 짬뽕을 사 줄 테니 수업 마치고 중국집 앞으로 나오라는 기별을 가끔 받았다. 그런 날은 수업시간 내내 들떠 있었다. 어머니는 장에 가더라도 할머니처럼 고무신에 한복을 입고 갔지만, 한참이나 젊은 장모님은 언제나 구두를 신은 양장 차림이었다. 친구들이 젊은 어머니와 핫도그를 같이 사서 먹는 것을 제일 부러워했는데, 같이 다니는 날 보고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항상 아들이라고 하는 장모님의 대답이 난 좋았다.장모님은 사돈이 여럿 있지만 유독 어머니를 측은하게 여겼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없고, 육신마저 병으로 온전하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짐만 된다며 장모님에게 넋두리했나 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장모님은 사돈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고 했다.고생이라곤 모르고 산 딸이 월세방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느라 힘들다고 투덜댔다. 장모님은 시부모도 내 부모나 마찬가지니 잘 섬기라고 신신당부하며 나중에 복 받을 일이니 참고 견디라며 달랬다. 장모님은 맞벌이하는 딸이 안쓰러웠던지 큰딸을 돌봐 주셨다. 작은딸은 어머니가 돌보고 있었는데 어머니 몸이 아파서 장모님이 맡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돈에게 미안하다며 아파도 눕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사돈, 어쩌든지 아들 걱정은 마시고 편하게 쉬시소.”벌초를 마치고 장모님은 준비한 제주 한 잔을 산소에 올렸다. 장모님의 음성이 촉촉히 젖었다. 음복 잔을 나누고 짐을 챙기며 산소를 살폈다. 풀들로 무성하던 봉분을 다듬고 나니 명절 빔을 갈아입혀 드린 듯했다.벌초할 때 장모님을 모시고 오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인연이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가장 어려운 사이가 사돈 간이지만 격의 없이 정을 내는 장모님이 참 존경스럽다.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장모님이 건강해서 사돈 간의 만남이 오랫동안 이어지길 바란다. 두 분 참 특별한 인연이다.“사돈요, 지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삭신이 쑤시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더. 언제 또 사돈 뵈러 올지 모르겠니더. 아무튼 편안히 잘 계시소.”

2014-08-22

또 다른 시작을 위해

▲ 최보금보금 공인중개사 대표 자동차 급유 신호에 불이 들어왔다. 연료통 게이지가 E를 가리킨 건 어제부터였다. 일부러 주유소 가는 것이 귀찮아 출근길에 넣기로 했다. 차 문을 내리고 `가득`을 주문했다. 웅웅거리는 소음을 타고 기름이 들어온다. 서툰 독립생활에 빨간불은 수시로 들어왔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였다. 변변치 않은 자취 살림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생활비가 떨어진 날은 학교까지 걸어가느라 지각하기 일쑤였고 차가운 방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눈물만 흘렸었다. 따뜻한 방에서 김이 나는 국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면 나무에라도 매달려서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다달이 계획을 세우고 아무리 아껴 써도 생활비는 턱없이 모자랐다. 여름은 여름대로 살기가 힘들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월세방은 조그만 창문 하나가 전부였다. 선풍기도 없이 여름나기도 만만치 않았다. 차가운 콜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하루는 일기장에 `콜라`만 잔뜩 적은 적도 있었다.서른이 넘어서였다. 어린 두 딸아이와 함께 대구로 오게 되었다. 살림만 하던 내가 갑자기 직업 전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젊다는 것 외엔. 최선을 다했지만 경험이 없어서인지 노력도 허사였다. 가족들에게 짐이 될 수도 없었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아이들만이라도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주고 싶었지만 내 고등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자존심 따위는 버리기로 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더는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담담해졌다. 자식을 생각하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도 생겼다. 공인중개 사무소에서 말단 직원으로 있으면서 일을 배웠다. 월급이라야 고작 팔십만 원이 전부였지만 한 푼 벌이 없는 나에겐 감읍할 따름이었다. 생소하고 두렵던 부동산 문턱을 넘어선 것이 내 삶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이런 일을 하려면 차가 필요했다. 통장을 탈탈 털어 중형차를 샀다. 운전이라고는 면허증 딸 때 몰아본 경력이 전부였다. 마음을 다잡고 용감하게 거리로 나왔다. 손님을 차에 태우고 물건을 보기 위해 차에 올랐다. 손님보다 운전대를 잡은 내가 더 떨고 있었다.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고 신호를 어겨서 벌금 내는 날이 많았다. 삼 년에 걸쳐 갚아야 할 할부금도 많았다. 무모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부동산 중개 일은 무엇보다 내 형편에 딱 들어맞는 일이었다. 밑천이 없어도 몸만 건강하면 되고 상품처럼 재고가 없어서 좋다. 경기의 등락에도 크게 손해 볼 일이 없다. 거기다 투자 대비 수익구조도 나쁘지 않다. 운전이 손에 익듯이 일도 점점 많아졌고 내 개인 사무실을 가질 정도가 되었다.부동산 사무실에는 돈 많은 사람이 투자하기 위해 드나 들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래 일을 하다 보니 내 생각이 편견임을 알았다. 사람들은 빠듯한 살림도 아끼고 아껴서 더 좋은 전셋집을 구하고, 더 넓은 집을 사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홀몸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지만 그들을 보면서 열심히 살 희망이 생겼다. 내 부동산 사무실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할 것 없이 희망을 파고 산다. 나도 `하늘이 돕는 자`보다 `스스로 돕는 자`가 되리라 결심했다.오일표시기 바늘이 가득 쪽으로 움직인다. 아이들은 뒷자리에서 휴대전화기를 보며 깔깔거린다. 아이들이나 나나 오랜만에 가져 보는 여유다. 일상에서 바빴던 몸을 잠시 쉬고 재충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비워져 있어야 채워진다는 깨달음이 문득 스친다. 비어있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채우기 위한 과정이요, 또 다른 시작이다.겁도 없이 장만했던 차는 내 손발이 되어 십 년이 넘도록 함께 일했다. 천정부지로 기름값이 치솟을 때는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다녔지만 지나고 보니 그 일 조차 행복이었다. 이젠 다른 차와 손발을 맞춘다. 내 옆지기다.출발 버튼을 누른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2014-08-08

미투리 한 켤레, 사랑 두 짝

▲ 박시윤수필가 현관에 벗어놓은 남편의 해진 신발이 유독 눈에 띈다. 발이 빠져나간 신발 속은 어둠만 남은 듯하다. 하루의 고단함이 쾨쾨한 냄새로 남아 무거운 체증처럼 뒹굴고 있다. 한쪽 발을 넣어보니 내가 남편에게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 새삼 넓게만 느껴진다. 나머지 한쪽 발도 넣었다. 땅을 짚고 굳건히 서 있는 내 몸은 늘 남편 앞에서만은 목소리 크고, 당당한 아내였다. 남편의 신발은 다른 식구들의 신발에 비해 유독 낡았다. 현관에 널브러진 신발들을 정리할 때면 남편의 신발을 늘 구석이거나 가장 낮은 위치로 옮겨 놓았다. 깨끗하고 앙증맞은 아이들의 신발과 굽이 있는 나의 구두보다 한 번도 맨 위이거나 중간이었던 적이 없었다.안동대박물관에 다녀온 후 며칠째 생각이 신발에 머무른다. 지극히 단순한 모양새의 미투리 한 켤레 때문이다.안동의 고성 이씨 분묘 이장(移葬) 작업에서 출토된 `원이 엄마의 마지막 편지`와 나란히 있었던 미투리라 한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요절한 남편에 대한 망부의 애끓는 사연과 병(病)중인 남편의 쾌유를 빌며 삼 줄기와 머리카락을 한데 엮어 만든 미투리였다. 원이 엄마의 사연은 `내셔널지오그래픽` 2007년 11월호에 `사랑의 미투리`라는 이름으로 특집 게재될 만큼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단순한 미투리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한국의 숭고한 사랑을 세계에 알렸던 것이다.망부는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엮었던 것일까.신발은 보드라운 발을 감싼다. 그리고 자신의 보드라운 얼굴을 바닥에 내어 준다. 흙을 덮어쓰고, 각진 모래에 상처도 난다. 온몸의 무게를 받고도 묵묵히 견딘다. 그러면서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오로지 발을 보호한다. 때로는 빗물에서, 때로는 눈밭에서 뒹군다. 뒹굴다 돌아온 툇돌은 싸늘히 그를 맞이한다. 밤새 싸늘한 잠을 자고도, 다음 날이면 또 원래의 모습으로 길을 나선다. 요절한 남편은 원이 엄마에게 미투리와도 같았을 것이다. 땅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낮게 엎드린 것이 미투리였다. 그러면서 발을 보호하는 미투리에게 망부는 몸의 가장 윗부분에 자리한 머리카락을 엮음으로써 존경과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사백여년 전의 이야기다. 편지를 감상하는 내내 미투리의 엮인 부분 부분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 떠나는 남편에게 미투리를 자신인 양 머리맡에 넣어 주었으리라.신발장을 열어젖힌다. 식구 다섯에 꽤 많은 신발이 있다. 돌돌 말린 신문들이 신발의 허한 속을 채우고 있다. 언제 적 것인지 아예 먼지가 보얗다.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 아쉬운 마음에 끝내 버리지 못한 신발들도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신발이 있다. 남편의 지극히 단순한 작업화다.현장 일에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작업화는 유난히 낡았다. 모양이나 형체를 고정할 가치도 없어 신문하나 말아 넣지 않은, 속이 텅 빈 신발이다. 비어있어도 한 번도 채워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남편이다. 가족들을 위해 세상에 몸을 바삐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그저 묵묵한 사람이었다. 가족을 감싸고 가족을 위해 기꺼이 신발이 되고 있는 남편이 원이 엄마의 미투리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 걸 기억한다.아이와 함께 신발가게에 간다. 사이즈를 묻는 주인 앞에서 얼굴이 붉어진다. 여태껏 남편의 발 사이즈도 모른다. 신어보고 엄지손가락 세 개 정도의 간격을 둔다. 마음은 벌써 남편의 귓전에 맴돌고 있지만 꾹꾹 눌러 입을 봉한다. 현관 중간에 남편의 새 신발을 정리해 둔다. 아이가 달려와 먼저 신고는 온 집을 돌아다닌다. 커다란 남편의 신발이 아이의 자그마한 몸과 보드라운 웃음을 감싸고 있다.오늘은 나도 원이 엄마가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엮듯 마음 깊숙이 남편의 미투리 한 켤레에 몸을 맡긴다. 싸늘한 신발 속이 내 체온으로 후끈 덥혀지는 중이다.

2014-08-01

본심

이상렬대구 반야월성덕교회 목사득구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이름만으로 주먹이 세 보이는 아이 득구, 고르게 자란 잔디 위에 잡초 하나가 쑥 올라 있듯 그의 키는 또래 아이들보다 한 뼘 더 솟아있었다.산그늘이 드리워진 학교 운동장에서 득구와 시비가 붙었다. 주변을 빙 둘러선 아이들은 편을 갈라 득구와 나의 실랑이를 부추기고 있었다. 평소 골비 단지로 늘 골골대던 나, 이길 승산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약골이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내가 먼저 냅다 주먹을 날렸다. 허무하게 빗나갔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순식간에 득구의 덩치 밑에 깔리고 말았다. 맹수의 공격에 목이 눌린 사슴처럼 무력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는 선혈의 떪은 맛이 느껴졌다. 누워서 바라본 득구의 얼굴 뒤로 펼쳐진 잿빛 하늘만큼 내 생애에 무서웠던 장면이 또 있었을까.순간 황급히, 누군가가 배를 깔고 앉아있던 득구를 걷어 냈다. 선비 선생님으로 불렸던 6학년 주임 선생님이셨다. 그리고는 나를 일으킨 다음 다짜고짜 나의 따귀를 때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그 사건은 모든 이들에게 묘한 궁금증을 남겼다. 왜 주임 선생님은 힘센 득구 밑에 깔려 있는 작은 아이의 따귀를 때렸을까. 섧다는 감정을 억누르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날 밤, 어린 자존심은 노적가리 속에 숨어 바른 볏단을 젖혔다.그해 가을, 학년 전체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불국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대열을 정리하고 있을 때, 주임 선생님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이상렬, 이리 나와 봐!”정적이 흘렀고 나는 주춤주춤 걸어나갔다. 선생님은 두 팔로 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전교생 앞에서 보란 듯이 단 한 명, 나와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선생님이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그러나 나는 안다. 지난 슬픈 봄날에 득구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내 따귀를 때린 이유를, 또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한 사람, 나를 지명하여 불러내어 사진을 찍은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선생님은 바로 나의 아버지다.그날, 아버지는 그랬다. 교무실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다 우연히 한 무리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중간에 으르렁대는 두 아이를 목격한 것이다. 제 몸뚱어리보다 큰 덩치에 깔린 채 힘없이 누워있던 아들, 거센 주먹질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두들겨 맞고 있는 자식을 본 아버지, 그 순간 아버지는 더는 선비 선생님이 아니었다. 자식을 구출하기 위해 맹렬히 타는 불 속이라도 기꺼이 뛰어들 수 있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달렸다. 한걸음에 뛰어와 득구를 밀친 후,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떳떳이 나를 아들이라 드러내기에 앞서 스스로 반듯하게 자라주기를 조용히 눈으로 지켜주며 묵묵히 계셨던 아버지, 순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행동뿐이었으리라. 아들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아니, 득구에게서 아들을 구한 것이다.아버지, 오늘같이 무시무시한 세상이라는 괴물 밑에 깔려 속절없이 뭉개지고 있을 때, 더 절실해지는 이름이다. 그 깊디깊은 아버지의 본심이 가슴에서 찡하게 울려온다.이제 내가 아버지가 되었다. 한번은, 아들 녀석이 친구에게 맞고 들어왔다. 격정을 삭이지 못하고 집에 와서야 제 혼자 분을 터트린다. 아이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함께 걸었다. 아니, 부글부글 타는 속상한 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걷다 보니 인근 학교운동장이다. 아들에게 물었다.“득구, 무서웠니?”“네? 득구가 누구예요?”능선으로 넘어가는 노을 한 자락이 아들의 울긋불긋한 얼굴을 어루만진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멋쩍어하는 아들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는다.“아들아~미안하다.”텅 빈 교정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두 개가 다정스럽다.

2014-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