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부친 날부터는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린다. 나의 두 번째 연인은 집배원 아저씨다. 가슴 조이며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기다림이 얼마나 사람을 애태우는지.
당시 나는 유치환의 시에 푹 빠져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공책에 베껴 쓰며 열심히 외웠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나 절절한지. 시인은 곧 나의 대변인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내 안의 감각들. 일제히 비늘을 세우며 일어섰다.
들길을 산책하며 네 잎 클로버를 찾았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편지와 함께 동봉하고 싶었다. 마음은 이미 네 잎 클로버를 받고 기뻐할 사람을 떠올린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다. 목 언저리까지 달아오른 기쁨이 손가락에 불을 밝혀 꼭꼭 숨은 네 잎 클로버도 놓치지 않는다.
집배원 아저씨가 우리 집을 그냥 지나친 날은 갑자기 할 일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해졌다. 대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봤다. 멀어져 가는 집배원 아저씨의 모습이 야속했다. 아주 귀한 것을 나만 받지 못한 듯 서운하고 허탈했다. 처마 밑에서 한가롭게 지지배배 거리는 제비를 향해 팔을 휘휘 내저었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바람이 제집인 양 드나든다.
간절하게 기다린 건 펜팔친구의 편지다. 2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서적인 면에서 잘 맞았다. 그 애에게서 근 한 달 가까이 소식이 없다. 평상시 같으면 편지가 와도 두서너 통은 왔을 텐데, 불안하고 애가 탔다. 내게 온 편지가 있는데 집배원 아저씨가 깜박 잊은 건 아닌지, 쫓아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답장이 왔다. 읽어 내려가던 내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가 심장 수술을 하셨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면서 애를 태웠다. 다행히 경과가 좋단다. 마음이 놓였다.
이후에도 우린 참 많은 이야기를 글로 주고받았다. 친구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내게 잘할 수 있을 거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 시절만큼 편지를 많이 쓴 적이 있었던가. 낭만이 줄줄 흘렀던 만큼 감성이 비 온 뒤 새순처럼 나고 자랐다. 구름이 몰려오면 몰려온다고, 비가 내리면 비가 내려서, 맑은 날은 그 맑음에 반해서 편지를 썼다.
정성이 깃든 편지 한 통의 여운은 길다. 깊은 맛이다. 밤새 고아낸 사골 곰탕이 이런 맛일까. 시원하고 깔끔하다. 읽은 걸 읽고 또 읽어도 재밌다. 마음이 보신한 듯 기운이 난다.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고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이 답답하다. 더디게 회신이 오는 걸 참지 못한다. 보낸 즉시 회답이 와야 속이 시원하다. 그래서 요즘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다. 내 조급성에 어울리는 통신임이 틀림없다. 사랑한다는 문자를 몇 초면 보낼 수 있고 답신이 오는 것도 1분을 넘지 않는다.
편지는 잊었다. 그나마 신혼 시절에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일도 귀찮아지면서 내 안의 감성은 치매에 걸렸다. 우편함은 각종 고지서와 광고물로 가득하다. 일방적 통보역할에 그친 인쇄물은 내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 속에 반가운 사람의 편지 한 통이라도 들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끔 뼛속까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편지 한 통에 대한 갈증인지도 모른다. 깊은 울림이 없는 관계의 지속에서 오는 허전함일까. 가벼운 말장난 같은 문자의 남발에서 오는 진실의 부재일까. 바닥을 치고도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는 마음.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듯 볼품없이 버석거리던 들과 숲도 새순을 틔우는데 잃어버린 내 감성 내년 봄에는 되찾을 수 있을까. 문자나 이메일이 아닌 친필의 편지 한 통을 우편함에서 꺼내 드는 두근거림을 맛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