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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인연

등록일 2014-08-22 02:01 게재일 2014-08-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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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전후담 정미소 대표
흔치 않은 일이다. 어머니의 산소 벌초를 하기 위해 예초기를 차에 실었다. 혼자 가도 된다며 만류해 보았지만 막무가내다. 벌이라도 달려들까 완전 무장하고 살충제와 갈퀴를 챙겨 들고 따라 나선다. 벌써 4년째다.

“사돈요. 잘 계싰니?? 올해도 사우 따라 또 왔니더.”

사돈의 방문에 맨발로라도 달려 나올 텐데 어머니는 대답이 없다. 산소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만 무성하다. 예초기의 엔진 소리가 높아지자 빠르게 돌아가는 칼날에 잡초가 잘려나갔다. 내 뒤를 따라 장모님은 깔끔하게 갈퀴 질을 했다. 어머니는 천상에서도 사돈의 수고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조상님 산소 벌초는 해마다 형님 대신 내가 하고 있다. 가난한 집의 맏이로 태어난 형님은 그동안 동생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것이 죄송하여 벌초만이라도 형님의 짐을 덜어 주고 싶어 자청한 일이다. 벌초만이 아니라 주위의 나무를 베어내고 산소를 손보는 일도 혼자서 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아무 불만이 없다.

장모님은 혼자 애쓰는 사위가 보기 딱해서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에 짠하게 남은 사돈의 산소만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여러 해째 동행해서 벌초를 돕고 있다.

고등학교 때 웅변대회에 나갔다가 여고 대표로 나온 한해 선배인 지금의 처형을 만났다. 가끔 선배 집에 들러서 잡다한 일이며 벼 베기를 도와줬다. 지금의 장모님은 며칠 뒤 수고했다며 찹쌀떡 두 되를 보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집 사위가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작은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어머니에게 먼 길도 마다치 않고 달려와서 위로해 주었다.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낸 세월이 짧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서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학교 다닐 때, 장이 서는 날엔 짬뽕을 사 줄 테니 수업 마치고 중국집 앞으로 나오라는 기별을 가끔 받았다. 그런 날은 수업시간 내내 들떠 있었다. 어머니는 장에 가더라도 할머니처럼 고무신에 한복을 입고 갔지만, 한참이나 젊은 장모님은 언제나 구두를 신은 양장 차림이었다. 친구들이 젊은 어머니와 핫도그를 같이 사서 먹는 것을 제일 부러워했는데, 같이 다니는 날 보고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항상 아들이라고 하는 장모님의 대답이 난 좋았다.

장모님은 사돈이 여럿 있지만 유독 어머니를 측은하게 여겼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없고, 육신마저 병으로 온전하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짐만 된다며 장모님에게 넋두리했나 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장모님은 사돈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고 했다.

고생이라곤 모르고 산 딸이 월세방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느라 힘들다고 투덜댔다. 장모님은 시부모도 내 부모나 마찬가지니 잘 섬기라고 신신당부하며 나중에 복 받을 일이니 참고 견디라며 달랬다. 장모님은 맞벌이하는 딸이 안쓰러웠던지 큰딸을 돌봐 주셨다. 작은딸은 어머니가 돌보고 있었는데 어머니 몸이 아파서 장모님이 맡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돈에게 미안하다며 아파도 눕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사돈, 어쩌든지 아들 걱정은 마시고 편하게 쉬시소.”

벌초를 마치고 장모님은 준비한 제주 한 잔을 산소에 올렸다. 장모님의 음성이 촉촉히 젖었다. 음복 잔을 나누고 짐을 챙기며 산소를 살폈다. 풀들로 무성하던 봉분을 다듬고 나니 명절 빔을 갈아입혀 드린 듯했다.

벌초할 때 장모님을 모시고 오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인연이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가장 어려운 사이가 사돈 간이지만 격의 없이 정을 내는 장모님이 참 존경스럽다.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장모님이 건강해서 사돈 간의 만남이 오랫동안 이어지길 바란다. 두 분 참 특별한 인연이다.

“사돈요, 지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삭신이 쑤시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더. 언제 또 사돈 뵈러 올지 모르겠니더. 아무튼 편안히 잘 계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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