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오솔길로 그를 따라 나는 말없이 뒤따른다. 족히 삼십여 분은 걸었을 게다. 길섶에 묻은 빗물에 치맛단이 흥건하게 젖었다.`이쯤에 너와집 한 채 만들어 놓을 테니 당신 가끔 놀러 와요.`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건만 난 대답하지 않는다. 습한 것을 싫어하거니와 한껏 멋을 내고 온 나의 모양새가 가늘게 내리는 비에 좀 전에 보았던 허수아비 꼴이니 기분 좋을 리 없다.
금맥이 쏟아질 지형도 아니고 열정이 들끓는 청춘도 훨씬 지난 나이고 보면 프러포즈를 할 일도 만무하잖은가. 금강산 비경을 넘어서 강산풍월을 가질 만큼의 절경도 아닌듯하니 궁금증은 더없이 간절하다. 앞서 가던 그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뒤돌아서 서 한마디 던졌다.
“사실은 나도 몇 달 전 이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 발견한 곳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아찔했다. 아무리 미지수라는 확장언어를 끌고 왔다지만 답변치고는 대가가 엄청나다. 경계를 가르는 무엇하나 없지만 정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꽂아야만 밟을 수 있을 만치 신비감마저 들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진 깊은 골짜기가 무릉도원이다. 건너편은 자작나무숲을 배경으로 허브꽃이 목차처럼 정렬되어 있고 보리수며 살구가 농염하게 익었다.
수양버들나무 아래 녹슨 철제의자에 앉았다. 오스트리아나 함부르크 어디쯤에서 가져 온 듯 한 둥근 원목 시계는 아홉 시를 살짝 넘긴 채 멈춰 있다. 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찍었다는 느낌보다 박았다는 느낌이 들자 마음조차 추슬러지는 묘한 기분은 뭘까. 목 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곳은 울음을 뱉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딱히 응어리질 것도 없지만 슬프거나 서러울 일도 없지만 고맙고 감사함에도 눈물을 부를 수가 있구나 싶었다. 그가 여느 날처럼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모른 채 무덤 속으로 갔을 수도 있었겠지.
잔디밭 끝 자락쯤 갔을 때 비로소 인기척이 들렸다. 산중에 보금자리 튼 새 둥지처럼 초록지붕을 한 일자형의 자그마한 집이 보인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그대로 살린 도랑가에 수국이 환하다. 예순에 가까워 보이는 중년 부부가 흔들리는 수국 꽃숭어리 앞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뭐 볼 꺼 있습디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한 표현을 빌려
“먼 후일, 또 기억하게 되겠지요.”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귀나무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잔디밭으로 퍼진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 정착했느냐고 묻는다면 이것 또한 실례가 되려나. 어쩌자고 산중에 수천 평의 정원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기껏해야 낮이면 산비둘기나 산줄기를 지나가는 바람이 보고 밤이면 부엉이나 지천으로 둘러쳐진 달맞이꽃이 관객의 전부인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내를 위해 마련해준 선물이 아니라면 아내가 남편을 위해 마련해 준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흠씬 물기 머금어 거뭇거뭇한 곡선의 나무계단을 다시 오른다. 비밀의 정원에서 우리들만의 비밀 하나를 만들어 놓고 청동아치형 꽃밭을 지나고 오솔길을 지난다. 뭐니뭐니 해도 이 순간 최고봉은 이곳으로 데려다 준 그의 말에 답해주는 게 아닐까.
“너와집 지으면 놀러올게요.”
그가 비밀스럽게 웃었다. 내려올 때 무겁던 치맛단이 새털보다 가볍다. 그곳에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천국을 느끼고 왔다면 당신은 믿어줄까.
여전히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다만 사진 몇 장이 휴대폰 속 앨범에 남아 있는 걸로 보아 필시 꿈속을 헤맨 건 아니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