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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벼락 맞은 날

등록일 2014-10-03 02:01 게재일 2014-10-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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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렬수필가사립도서관 돼지등 관장
비 오는 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우산살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 그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질주하는 차들의 소음과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빗소리에 잠겨 고요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서서히 내 품으로 다가와 곁눈 한 번 주고 안긴다. 이런 날, 빗속 풍경을 보며 사물의 언어를 길트기로 요리조리 끼워 맞추는 맛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빗속 감상은 곧 현실에 부딪혀 깨어진다. 우루루~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간다.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여기는 2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다. 몇 걸음 폴짝 뛰면 1~2초 만에 건너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신호를 지키자니 멍하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무단횡단을 하자니 마음 한 쪽 구석에 숨어있던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가 졸금졸금 고개를 들어 기분 찜찜하게 만들 것 같다.

이곳이 그런 생각의 회색지대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신호와 상관없이 용감하게 도로를 횡단한다. 학생이나, 어른이나, 할머니나, 아이를 등에 업은 젊은 엄마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주저함 없이 무단으로 도로를 건넌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내 속에는 두개의 법이 싸운다. 뭐든 과감하게 내지르지 못하면서 착하지도 못한 쪼다본성, 그리고 화인(火印)맞은 양심으로 용감하게 정도(正道)를 거스르는 본성이다. 휴…. 살다보면 그리 중요하지도 않는 이런 일에 툭하면 내적 소모전이 벌어진다.

오늘도 착한 아이의 본성이 우세했다.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질주하는 차들 너머로 보이는 빨간 불을 얼빠진 사람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건너려고 한 발을 내디디는 찰나였다. 승용차 한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내 앞으로 횡~지나갔다. 순간, 도로에 고인 물이 나를 덮쳤다. 차는 굉음을 내며 멀리 사라졌다. 피할 사이도 없이 내 옷은 흠뻑 젖었다. 법을 지킨 결과다.

먼저 건넌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내 참담한 몰골을 보며 히죽 히죽 웃었다.

꼬질꼬질한 세줄 슬리퍼를 끌며 걷던 여학생 두 명은 까르르 대면서 수군거린다. “어이구 이 등신아, 도덕군자처럼 행동하더니 꼴좋다.” 라고 말하는 같았다.

난 늘 이게 문제였다. 어렸을 적 아이스깨끼 먹고 난 나무꼬치를 버릴 곳 찾지 못해 하루 종일 주머니에 넣고 다녔었다. 눈싸움 하다 내가 던진 눈덩이에 맞은 순이 얼굴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어 지지 않았다. 이제는 어줍은 눈치의 결과, 이른바 그 놈의 철딱서니라는 `세상물`이 좀 들법한 나이인데도, 아직까지 물벼락 맞아 생쥐 꼴을 면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용감한 횡단자들의 눈빛 말마따나 `어이구 이 등신` 이 맞다.

법을 지키는 사람이 날벼락을 맞는 세상, 잽싸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면 사회의 낙오자로 치부되는 세상, `약삭빠름` 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반듯함`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이 흐름을 거슬러 산다는 것이 오늘따라 참 버겁게만 느껴진다.

툴툴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대편에서 딸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보니, 맞은 편 횡단보도에서 나처럼 신호를 대기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옆을 지나면서 엄마는 아이에게 뭐라고 소근 소근 말하고 있다. 다 건너갈 즈음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끝까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 등신 아니예요?”

적어도 저 아이 만큼은 나처럼 물벼락 맞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잽싸게 피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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