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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고마웠던 선물

등록일 2014-10-10 02:01 게재일 2014-10-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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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순수필가·전 EBS작가
더위에 길게만 느껴지던 여름도 어느새 가고 아침 저녁으로 바람결이 한결 선선해졌다. 방학이라 집에 와 있던 아들이 얼마전 미국으로 갔다. 떠나기 전 신형기기에 익숙치 않은 엄마를 위해 태블릿pc에 필요한 어플과 좋아하는 음악 등을 챙겨주고 가서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비교돼 늘 못미덥고 걱정이 많았는데 엄마를 생각하는 곰살맞은 마음이 찡하게 다가와 방학내 잔소리만 해댔던 게 벌써 후회된다.

작년에도 갈 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CD로 만들어줘 아들이 보고싶을 때 들으면 적잖은 위로가 됐었다. 그래서 “녀석이 좋은 선물을 하고 갔구나 ”여러번 감동했었다.

조금전 친구가 SNS에 딸이 첫월급을 받아 사보낸 선물을 찍어 올려 대화창이 환성으로 시끌시끌했다. 부모를 생각하고 정성껏 준비한 흔적이 묻어나 보는 사람도 덩달아 흐믓하고 대견하다.

나도 큰 아들이 첫 월급을 받아서 주었던 수표를 차마 통장에 넣기도 아까워 한동안 간직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 친구는 얼마전 추석에 시댁에 가서 음식준비에 몸이 지칠 때 쯤 시아버지께서 슬며시 건네주신 아이스크림 봉지에 피로가 다 풀리더라고 한다. 애쓴 며느리를 위한 속깊은 촌로의 정이 느껴져 나까지 찡해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큰동네까지 나가서 사다주신 거라니 얼마나 감사했을까?

때때로 서로 나누는 것들이 이처럼 마음이 담기고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면 즐거움과 감동이 된다는 생각을 새삼 가져본다. 포장만 화려하고 실속없는 값비싼 물건을 형식으로 건넨다면 오히려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면서 받은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이 떠오른다. 몇 년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회장을 맡은 친구가 내게 총무를 맡겼을 때의 일이다.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안 한다고 펄쩍 뛰었지만 일년에 몇 번 연락 정도만 해주면 된다며 거듭 부탁했다. 지리산 주변 시골이라 우리 학년이 두 학급이었는데 연락되는 친구도 그리 많지 않고 언젠가 한번씩은 감당해야 할 일이라 끝까지 뿌리치지 못했다. 그 후 어쩌다 고향에 가면 반갑게 전화라도 해볼 친구가 있다는게 든든하고 감사했다. 그 친구는 줄곧 묵묵히 고향을 지키고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동안 동창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던 친구였다.

어느날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감자를 수확했는데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으니 명단을 알려달라고 한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그 친구의 넉넉한 마음이 어찌나 고마운지 가슴이 벅찼다. 이른 봄부터 밭에 나가 애써 지은 농사인데 쉽지 않은 일인걸 잘 안다. 그렇다고 수 십명에게 보내라고 하기도 염치없는 일이고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굴까, 혹 섭섭한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등등 고심 끝에 부모님이나 일가친척이 고향에 있는 사람들을 제하고 몇 명인가의 이름을 골라 주었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도 감사해 나는 감자가 있노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며칠 후 내게도 택배가 왔다. 비닐테이프로 간신히 틀어막은 감자 박스를 보니 하나라도 더 넣은 정성이 그대로 전해졌다. 실한 것은 팔고 작고 못난 것들을 보내도 됐을 텐데 모두가 튼실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태껏 받아본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져 감히 이웃들한테 몇알씩 나누는 것도 참았다.

결혼하고도 쭉 시골부모님한테 온갖 것들을 다 얻어먹으면서도 솔직히 그렇게 뭉클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항상 해주시니 당연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자를 받은 한 친구도 행여 껍질을 두껍게 깎을까 조심하고 동창자랑을 많이도 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서 살다 새삼 고향의 정, 친구의 정성을 느껴 정말 고마왔다고 입을 모았다.

살면서 무슨 기념일이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을 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나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 기억에 남을 감동을 주는 선물들이 오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떠나면서 아들이 남기고 간 편지나 꺼내봐야겠다. 또 눈물이 핑 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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