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그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고 몇 번이고 망설인다. 갑자기 어둡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로 좋아했는데, 설마 언짢아하지는 않겠지. 억지로 마음이 편안한 쪽으로 자문자답해 본다.
다시 편지 봉투를 살펴본다. 흔한 이름이지만 내 가슴에 새겨진 소중한 그 이름 석자! 그 세 마디 이름 때문에 얼마나 기다리고, 슬퍼하고, 원망도 많이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미워했던 것 같다. 무슨 악연이었던가. 불가에서는 전생에 가장 악연이었던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시 만난다고 했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나도 전생의 죄 갚음으로 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제 받은 전화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올해의 첫눈으로는 참 많은 눈이 쏟아지고 있는데 휴대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내가 응답을 하자마자 느닷없이
“거기도 눈이 많이 오지요?”
나는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예에…. 어디십니까….”
하고 황급하게 물어보는데 전화가 찰깍 끊겼다. 나는 육감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귀에 익은 그의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신호음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쉴 새 없이 내리고, 혹시나 하는 기다림만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 옛날, 새마을 노래가 한창 열풍을 일으키던 때, 나는 그 소녀와 헤어지고 먼 곳으로 떠났다. 그래도 미련은 있었던지 철없는 소리로 “우리 첫눈 올 때 만나요”하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그리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짙어지고, 어느 하늘 아래 살아 있는지 궁금증만 더해갔다. 풍문에는 저 남쪽 어느 도시에서 아주 부자가 되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가끔 소녀는 꿈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는 한마디의 말도 보내 주지 않았다. 필시 큰 원한을 품고 있으려니 하고 나 자신을 나무라며 죄책감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 동안 첫눈이 오늘처럼 분명하게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겨울에 내리는 남부지방의 눈이란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어정쩡한 눈비로서 첫눈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몇 년이 지나자 꿈같은 언약은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서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잊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와 헤어진 후 이렇게 많은 눈이 첫눈으로 펑펑 쏟아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날 밤 나는 긴긴 편지를 썼다.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설움들을 다 들어내어 썼다. 어린아이의 반성문처럼 내 잘못만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매정한 전화처럼 내용을 다시 읽어보지도 않은 채 봉투에 확 집어넣고 봉했다.
나는 우체통 앞에서 나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바보 같은 빨간 통을 유심히 본다. 옛날에는 둥근 우체통이었는데 왜 네모로 만들었을까. 이 통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까. 남이 보지 못하게 꼭꼭 풀칠을 한 편지들,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하겠는가. 내가 쓴 사연보다 더 미련하고 쑥스런 사연들도 있겠지. 아무거나 수용하는 천치 같은 우체통.
나는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나보다 더 못난 사람의 글이 이 통속에 있으리라는 상대적 위안으로 용기가 솟아 오른 것이다.
편지를 밀어 넣었다.
“철썩”
통속에 편지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돌부처처럼 서 있는 우체통이 오늘처럼 위엄 있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갓 입학한 초등학생처럼 얌전히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