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도 좀 적막해져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아야 할 것 같다. 망년회니 해맞이니 부산을 떨고 몰려다니는 것은 겨울의 분위기에 어울리지가 않는다. 한 해가 기울고 새해가 시작된다는 것은 대자연의 섭리에 따른 일월성신의 운행에서 비롯된 시간개념이다. 초목과 금수(禽獸)가 그 법칙에 따라 생육과 소멸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삶의 모습과 태도를 바꾸어 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적절한 일이 될 것이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어둡고 어수선한 연말이다. 가뜩이나 불황의 늪에 빠진 경제사정으로 다들 아우성인데,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 사실이 드러나면서 백만 군중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몰려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우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대통령의 자질에 대해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가원수의 자리에는 적어도 건강하고 정상적인 식견과 품성을 가진 사람이 앉아야 하는 것인데 박근혜 대통령의 행동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피를 나눈 형제들과는 담을 쌓고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최태민과 그 가족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온 것도 그렇고, 막중한 국정의 운영에까지 상당 부분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여서 국민들의 크나큰 실망과 분노를 샀다.
다음으로는 아직도 우리나라는 대통령 측근이란 자들의 호가호위와 국정농단이 먹혀들어가는 사회라는 것이다. 정계와 재계는 물론 법조계, 학계, 문화계, 스포츠계 할 것 없이 권력의 위세에는 맥을 못 추고 한통속으로 놀아났다는 것이다. 소위 강남아줌마 하나가 국정전반을 농단할 수 있을 만큼 허술하고 부패한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민낯이고 실상이란 점도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촛불을 든 백만 군중의 평화적 준법 시위였다. 최루탄과 무력진압이 없어지고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사라진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것이고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롱과 비하를 일삼던 외국 언론들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정치적 혁명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과도기의 후진국에나 필요한 격변인 것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보다는 내실과 성숙이기 때문이다. 내실을 다지고 보다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정국의 혼란도 법과 제도가 부실해서가 아니라 엄정하고 정의롭게 시행하지 않은 데서 야기된 것이다.
아무튼 국내외적으로 산적해 있는 당면문제들은 우리를 기대와 희망으로 새해를 맞을 수 없게 한다.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북핵의 위협과 오리무중인 경제의 불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류독감까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정치꾼들은 하나같이 당리당략이나 개인의 잇속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열망도 좋고 혁신도 좋지만 그 바탕에는 가장도 냉철하고 신중한 분별력과 진정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국정을 농단한 자들과 동조를 한 자들은 이제 엄정한 법의 심판에 맞기고 이 세밑에는 저 겨울나무들처럼 저마다 쓸쓸하고 적막해져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