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설렘이다. 설렘은 늘 어디론가 나를 떠나게 한다. 바쁜 가운데서도 멀리 떠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여행지가 경주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다녀온 여행이 초등학교 수학여행이었고 그곳이 경주였다. 어릴 적 가을밤에 느꼈던 첫 설렘, 어른이 된 지금도 경주는 새로운 설렘으로 이어진다. 유적과 유물을 통해 오래전 살았던 이들의 삶을 느끼고 교감할 수 있다. 선조들의 역사와 얼을 함께 호흡하는 일은 특별한 설렘이다. 천 년을 넘나드는데 어찌 아니 설렌단 말인가.
신라 천 년의 고도답게 경주는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 중에서 신라왕조의 궁궐터였던 월성지구를 좋아한다. 계림, 첨성대, 반월성, 안압지를 걷는다. 천년의 숨결을 걸으면서 느끼기 좋은 곳이다.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십여 분을 걸으면 안압지가 나온다.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 바라보는 기능으로 만들어진 궁원이었다. 통일신라 시기 영토 확장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한 강력한 왕권이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궁전을 짓는 데 중점을 두고 지은 궁전이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며 연회를 베풀었고 한다.
안압지는 걷는 여행의 백미이다. 바람결 따라 푸른 하늘에 그려지는 구름을 바라보며 마음도 구름 따라 일렁인다. 기와지붕 너머로 황금빛 노을이 그려진다. 붉게 물드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년의 숨결을 눈으로 보는 것 같다. 안압지 주변을 산책하면 내가 신라의 왕족이 된 듯하다. 어둠이 처마 끝에 내려앉으면 안압지는 화려한 야경으로 또 한 폭의 새로운 그림을 펼친다. 어둠속에서 빛과 어우러지는 안압지의 야경은 그 옛날 신라왕족도 누려보지 못한 풍경이 아닌가?
안압지를 돌아 반월성을 걸으면 그 길에서 만나는 사계는 늘 새롭다. 봄이면 들판 가득 노란 유채 밭에 마음을 잃고, 초여름에는 홍련과 백련의 고즈넉함에 빠져든다. 황화코스모스의 황홀함과 가로수 길의 알록달록한 단풍에 물들어 볼 수도 있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은 코끝이 시리도록 그 길에서 신라천년의 숨결에 그저 취하면 된다. 매번 다른 얼굴로 맞이해줘서 정답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느리게 경주에 물들고 싶다. 울창한 굴참나무 숲에 정적을 깨뜨리는 딱따구리의 맑은 소리와 그 짧은 파장에 놀라 떨어져 내리는 단풍잎 하나.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이 그려진다. 형형색색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 잎 하나 가슴에 얹고 불국사 경내를 돌아 석굴암에 올라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은 또 어떨까?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다시 경주를 찾고 싶다. 또 한 편의 수채화 같은 망중한을 그려 보고 싶다. 가을밤이 깊어지는 소리에 잠 못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