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먹이 아이들은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가족은 물론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이건 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울고 떼를 쓴다. 그야말로 인격적으로 가장 유치(幼稚)한 단계인 것이다.
한 살씩 나이가 들면서 세상 모든 것이 자기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고, 자기 말고도 자기와 비슷한 남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때쯤 유치원에도 다니게 되면서 자기가 아닌 남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말하자면 처음으로 사회성(社會性)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성숙한 인격체를 길러내자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다. 그래서 초, 중등 교육과정은 기술이나 기능의 습득보다는 전인적인 인성함양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교육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교육현실은 이미 그런 목표를 많이 벗어나 있다. 입시위주, 학과성적과 경쟁위주의 교육에서는 결코 인성의 함양을 기대할 수가 없는 일이다. 교육이 그러한 것은, 인격이나 품성보다는 학벌이나 기능을 중시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서다.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 무질서와 부조화, 권모술수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 정의니 인격이니 품성이니 하는 말조차가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무기력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人間)이란, 말 그대로 혼자서는 될 수가 없다. 사람(人)과 사람의 사이(間),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人間)`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이란 그 사람이 갖춘 사회성의 정도에 따라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남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느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정신연령과 인격의 정도를 재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학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곧 훌륭한 인물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장관이나 총리의 인준을 위한 청문회 같은 데서도 거듭 확인을 했듯이, 우리 사회의 최상위 지도층 인사들 중에서도 제대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찾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소위 출세와 성공으로 일컬어지는 상당한 부와 권세와 명예를 성취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 인격과 정신연령에 있어서는 유치원 아이들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본다. 나이를 먹는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치졸해지는 퇴행현상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은 것이다.
정신적 성숙의 과정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관계중심적 사고로,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이기적인 것에서 이타적인 것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오늘 내 인격의 키는 과연 얼마이고 정신의 연령은 몇 살이나 되는지, 또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