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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6-12-09 02:01 게재일 2016-12-0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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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영수필가
푸르스름한 새벽이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마당에 세워 둔 자동차에 눈길이 멎었다. 운전석의 문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앞치마를 두른 채 마당으로 나가 자동차를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의 손을 탄 흔적이 뚜렷하다. 차안에 두었던 물건들을 죄다 뒤져 놓았다. 서랍에 있던 장갑, 서너 알 담겨있는 껌 통, 시장바구니와 메모지, 자동차등록증과 그 속에 접어서 넣어둔 영수증 몇 장 따위가 의자 위에 널려져 있었다. 자동차 털이범이 설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직접 피해를 입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있으려니 몇 해 전 집을 다녀간 손이 생각난다.

집이 비어있는 시간은 불과 이십 분정도 될까 말까한 순간이었다. 내가 도서관으로 간 후 잠시 집에 들른 남편은 현관문의 열쇠가 가볍게 돌아가서 이상하게 느꼈지만 거실과 주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에 내가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간 줄 알았다고 한다. 집안에서 서성이다가 안방 문을 열자 보석함이 서랍장 위에 올려진 것을 보고서야 현관문을 열 때의 미심쩍었던 느낌이 번쩍 떠올랐단다. 얼른 뚜껑을 열어 보았지만 이미 손이 지나간 뒤였다. 혼수품으로 장만한 보석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가 불편하기도 하고 거추장스러워서 함에 넣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날렵한 검은 손이 대낮에 아파트의 문을 따고 방안에 있던 귀금속을 몽땅 털어가 버리고 말았다. 며칠 동안 검은 손이 또 올까봐 무서움이 고개를 삐죽삐죽 내밀었다.

뿐만 아니다. 어느 여름날, 화분에 심어 베란다에 둔 백합이 꽃을 피우지 못하기에 햇볕과 바람이 잘 통하는 꽃밭에다 심어두고 오며가며 들여다보았다. 비가 아주 부드럽게 내린 다음날 백합을 만나러 꽃밭으로 갔다가 뻥 뚫린 작은 웅덩이를 발견했다. 그 새하얀 연꽃모양의 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혼수품으로 받은 목걸이와 팔찌, 반지들이 몽땅 손을 탔을 때와는 또 다르게 가슴이 아렸다. 책과 꽃을 몰래 가져가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하지만 아찔한 현기증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텔레비전에서 손가락 두 개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발가락으로 시계를 수리하는 사람의 `발손`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손은 내 가슴을 뜨겁게 흔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전환시킨 그들의 손은 뼈를 깎는 듯 고통을 이겨낸 결과였다. 그들의 도전정신과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 낸 피아노연주와 시계수리 기술은 감동 그 자체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보았다. 열 손가락 멀쩡한 내 손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쓰였던가.

세상에는 온전하지 못한 손으로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도 하고, 온전한 손으로 타인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한다. 굼뜬 손과 재빠른 손, 따뜻한 손과 차가운 손, 어떤 손을 가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일까.

간밤 몰래 자동차에 다녀간 손의 손놀림 또한 매우 날렵하고 민첩할 것이다. 사람들이 곤히 잠을 잘 때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재빠르게 작업을 했을 터이다. 그 소행이야 배울 바가 아니지만 근본은 선한 사람 일게다. 자동차 안을 뒤지기만 하고 자동차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하여 출근길에 발을 동동 구르게 할 수도 있었으련만 바람처럼 왔다갔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밤새 낯선 손길에 정신이 혼미했을 물건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있던 자리에 앉혀두고 자동차문을 닫는다. 신문배달부가 던진 신문이 마당에 툭, 떨어진다. 아침밥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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