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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의 추억

등록일 2015-07-10 02:01 게재일 2015-07-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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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도 수필가·이상도 신경과의원장
5월 중순인데도 낮 기온이 체온보다 더 오르는 성급한 여름이다. 아까시나무의 가지들은 부풀어 올라 뜨겁게 꽃을 피워 숨 멎을듯한 향기를 천지에 뿜어낸다. 짙은 쑥 향기를 풍기며 쑥대는 실팍하게 자라 들녘을 풋풋하게 채운다. 그 황홀한 향기들을 맡으며 풀벌레들도, 산새들도 생명의 환희를 노래한다. 달려온 여름이 취하도록 좋아 채소밭의 들깻잎과 마늘 대는 한층 풍성해지며 온실 속 풋고추들도 쑥쑥 자라 불뚝불뚝 힘깨나 쓰고 있다.

여름의 문턱에 서면 이십여 년 전 5월 어느 날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의 황홀감을 잊을 수 없다. 비행기 탑승구를 내린 순간 온몸을 휘감아 전율시킨 아열대의 열기와 습기, 그로 말미암은 젊은 생명력의 숨 가쁜 팽창! 그때 `아! 나의 조상은 아프리카인이었을 거야`라 탄성하였다.

계절은 도심의 거리에서 비로소 체감된다. 젊은 아이들의 치마와 반바지가 한껏 올라간 여름의 동성로 산책길은 매력이 넘친다. 자랑스레 한껏 드러낸 노출된 몸에는 곧 터질듯 한 젊음이 가득하다. 그래 벗어버리자, 거추장스런 문명을 모두 벗어던지고 원시의 순진무구한 알몸으로 다시 돌아가자. 오래전 아프리카에서처럼, 태초의 낙원에서처럼. 아담과 이브가 되어 서로의 알몸을 감고 감기며 뜨거운 여름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보자.

벗어버리면 얼마나 자유한 지를 처음 느낀 곳은 학회차 방문한 캐나다 밴쿠버에서였다. 명문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근처에 나체 해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애써 가보았다. 대학 뒤편에 캠퍼스와의 경계를 이루는 지방도로가 있고 그 차도를 건너 몇 분간 숲 언덕길을 내려가니 해변이 있었다. 해변은 넓디넓었고 조그만 인공물도 보이지 않아 자연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바닷가에는 알몸들만이 있었다. 더러는 바닷속에 있었으나 대부분은 혼자 또는 여럿이서 모래 위에 눕거나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알몸으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 수영을 즐겼다. 그 경쾌한 평안함은 한 올이라도 걸치지 않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경지였다. 수영복 걸친 상태로 물속을 잠영하며 형형색색의 열대어와 함께 즐겼던 필리핀 세부 섬 리조트의 맑은 비췻빛 앞바다는 이곳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으나 여기서 느낀 낙원의 자유함을 선사하지는 못했었다.

남김없이 벗어야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함. 에덴의 낙원은 자연처럼 모든 것을 벗어버릴 때 다가온다. 한 올이라도 걸치면 실락(失)의 삶이 시작된다. 진리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나며 똑똑하여 스스로를 가리는 자에게는 가려진다. 사실 감추어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알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부활하였다. 갓 태어난 세존(世尊)은 알몸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설파하였다. 경허(鏡虛) 대선사는 속세의 어머니를 위한 특별법회를 열고 참석한 어머니와 대중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여주는 무언(無言)의 법문을 하였다.

여름은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자연이 되고픈 계절이다. 산과 계곡, 강과 바다에 머무르면서도 자연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곳에서도 벗지 못하고 꼭꼭 감추어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원죄 같은 치부가 있다. 그것이 드러날 경우 자존감이 손상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견딜 수 없는 불안과 불안정에 휩싸여 인간은 은밀히 그리고 필사적으로 이들을 감춘다. 옷과 함께 마지막 남은 꼬장꼬장한 체면마저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서면 하늘과 땅이 그를 자유인으로 새롭게 낳을 것이다.

몇 년 전 그리스 로도스 섬에서의 추억이 아련하다. 북쪽은 에게 해, 남쪽은 지중해 양 바다가 만나는 폭 일 미터 정도의 섬 서쪽 좁은 땅에서 알몸으로 두 바다를 헤엄쳤다. 바다를 나오니 경계 없이 부는 바람이 온몸을 남김없이 포옹해주었고 분별심 없는 햇볕이 젖은 몸을 말려주었다. 아름다운 이국(異國)의 바다가 한없이 평온한 자유와 기쁨을 준 것은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자연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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