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 어린 손녀를 앞에 앉혀 머리를 빗기고 있다. 빗질을 하면서도 까다로운 손녀가 신경이 쓰인다. 마무리 머리통을 쓰다듬어도 더 예쁘게 되질 않는다. 벌써 머리통을 흔들어대는 손녀의 모습에서 불만이 느껴진다. 손녀가 머리칼 묶은 고무줄을 당겨 풀어버린다. 곱게 묶여 있던 머리칼이 순식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가는 머리칼을 얼마나 힘들게 싸잡고 고무줄을 댕겼는데. 괘씸하기보다 성질 부리는 손녀를 어찌해야할지 막막함이 앞선다.
손녀 : 머리는 이모가 빗겨주는 걸 좋아한다. 할매는 머리도 맘에 들게 묶지 못한다. 아무리 말을 해도 대답만 할뿐 머리를 빗어주는 모양은 같다. 이모가 빗겨주고 출근하면 좋겠는데, 할매는 이모의 출근이 늦다고 그냥 가라며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맘에도 안 들게 묶으면서 이모를 그냥 보낸 할매가 밉다.
# 시장가기
할매 : 집에서 놀고 있으면 얼른 다녀오겠구먼, 어린 걸음에 맞춰 시장을 보려면 힘이 든다. 복잡한 시장 통에서 아이를 잃어버릴까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아이는 모른다. 몇 년 전 할배가 시장에서 아이를 잃고 얼마나 놀랐는지 일주일을 생 몸살을 앓았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은 뒤 시장을 데려가기가 꺼려진다. 오늘따라 집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는데도 꾸역꾸역 따라온다. 눈을 부라려도 한 팔을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해도 그때뿐이다. 돌아서면 또 따라온다.
손녀 : 시장에 꼭 따라가고 싶었다. 할매가 없는 빈집에서 해질 때까지 놀아야 하는 게 얼마나 지루한지 모른다. 할배는 목침을 베고 코를 골며 자거나 산삐알 밭에 물을 들고 오라고 했다. 양동이에 물을 담고 걸어가다 보면 물은 흘러 치마를 적시고 얼마 남지 않는다. 무겁고 하기 싫었다. 할매를 따라 시장에 가면 시장 입구에 있는 큰 가게에서 마론 인형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운이 좋으면 만져 볼 수도 있다. 오늘은 때를 써도 통하지 않았다. 할매는 나를 안 사랑하나보다.
# 껌 훔치기
할매 : 어릴 때 한번은 겪는 일이다. 어떻게 넘겨야할 지 걱정이 된다. 가겟집 아줌마가 손녀가 동네 큰 아이들이 시켜서 껌을 한 통 훔쳐갔다고 했을 때 부끄러움과 걱정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손녀를 불러 안방에 꿇어앉히고 방문의 잠금 쇠를 걸었다. 아이의 큰 눈은 손에 쥐고 있는 빗자루만 쫓아다닌다.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세게 때려도 울음소리를 삼키며 눈물만 흘린다. 아이가 경기라도 안 하려는지 걱정이다. 고운 아이 매 한 대 더 때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손녀 : 무서운 언니가 불렀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언니는 가게를 가리키며 저기 가서 껌을 한통 들고 나오란다. 돈이 없다니까 그냥 가져오면 나중에 언니가 돈을 준단다. 심부름하는 거라며 그래야 착한 아이란다. 언니 말을 안 들으면 우리 집 고양이가 저주를 받아 죽는단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고양이가 유일한 친구인데 고양이가 죽으면 심심할 때 같이 놀아줄 친구를 잃게 된다. 안방을 나오는 할매의 손에 빗자루가 들려져 있다. 들어오란다. 껌 때문임이 틀림없다. 할매는 도둑질이 젤 나쁜 짓이라고 말했었다.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는 아팠지만 고양이를 생각하며 참았다. 껌을 훔쳐 고양이를 살렸다. 지금 나는 맞아도 고양이는 산다. 고양이는 고마워 할 거야.
할매와 손녀는 43년을 함께 살았다. 이별이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지난 날 할매가 죽고 싶다고 한탄 섞인 말을 뱉으면 허락 없이 죽으면 그 구덩이에 같이 묻힐 것이라고 악다구니 치던 손녀였다. 손녀는 43년 뒤 숙연한 맘으로 할매를 고이 보내드렸다. 몸은 갔어도 기억으로 추억 속에서 함께한다. 할매와 늘 함께하고 있음을 손녀는 느낀다. 심장이 뜨겁게 뛴다. 만지면 평온을 찾던 할매 찌찌의 몰캉함이 생생하다.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