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제 먹다 남은 개 밥그릇 언저리에 머리를 디밀고 밥알을 쪼아 먹는 참새들은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는다. 먹이를 주면 늘 한 숟가락가량의 밥을 남기는 개 때문에 마당에 참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어린 시절, 여덟 남매가 다투어 자라던 우리 집에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가 종종 식객으로 머물렀다. 아저씨는 밖의 일을 보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버지와 상을 마주하였다. 넉넉잖은 살림에 때때마다 오시던 아저씨가 얄밉기도 했지만, 밥상머리에서 입담 좋게 풀어놓는 그분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손님 밥을 항상 고봉으로 수북하게 담았지만, 아버지는 그 위에 한 숟가락의 밥을 더 떠서 얹어 주시곤 했다.
그 시절 고등교육을 받은 아저씨는 아는 것도 많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넘나들며 같은 이야기라도 귀가 쏠리게 하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분의 과거사를 어린 우리는 알 수가 없었지만, 부모님은 때를 잘 못 만난 탓이라고 하셨다. 식솔이 많아 끼니 해결조차 절박하던 형편에 아버지는 소복이 떠 얹어주는 한 숟가락의 밥으로 형편이 어려워서 찾아오는 일가붙이에 도와줄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 했으리라. 대소가에서 아버지가 제일 먼저 도시로 이주하셨으니 집 안에는 친가, 외가의 객식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식구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객군에게 한 끼 밥 대접하는 일을 어머니는 버거워하셨다.
아버지는 밥을 아주 천천히 드셨는데 늘 마지막 한 숟가락 정도의 밥을 남기셨다. 어머니가 조금 적게 밥을 담는 날에도 어김없이 밥은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밥 한 그릇 배불리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남긴 밥을 서로 차지하려고 우리는 눈독을 들였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남긴 하얀 쌀밥이 먹고 싶었지만, 그 밥은 남자 형제들이나 입이 짧은 언니의 몫이었다. 어쩌다 내가 밥그릇을 차지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눈을 곱게 흘기셨다. 어린 마음에 겨우 차지한 밥그릇을 빼앗길까 봐 허겁지겁 밥을 먹느라 목이 막혀 딸꾹질하곤 했다.
백수라도 할 것 같이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보낸 후 손수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 떠먹여 드리는 한 숟가락의 밥에 집안 대소사며 멀리 사는 자식들의 안부를 몇 번씩 확인하고서야 그 밥을 삼키셨다. 용하게도 한 숟가락 정도의 밥이 남을 즈음이면 어김없이 손을 내 저으셨다.
늙으면 먹는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께서 한 톨의 밥알을 남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데 자식은 천천히, 겨우 밥을 삼키는 아버지께 어서 드시라고 짜증을 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세끼 밥을 먹여 드리는 것으로 위세를 떨었던 내가 참 부끄럽다.
햇살이 마당 가득하던 봄날, 애틋한 눈빛을 남기고 당신은 떠나셨다.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고 나면 오빠는 한 숟가락의 밥을 수북이 떠서 접시에 담아 대문 앞에 내놓았다. 윗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제례법이 아니었는데 오빠의 새로운 제례의식에 우리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살아생전 남기시던 밥으로 여덟 남매의 주린 배를 채워 주고 싶었던 당신만의 자식 사랑법이란 것을 철이든 이후 우리들은 알았다.
오랜만에 오빠 내외가 집에 왔다. 혼자 살아가는 누이집이라 자주 들리지는 않았지만 끼니때에 맞추어 다니러 온 오빠 내외와 밥을 먹었다. 식사하고 난 오빠의 밥그릇을 보았다. 한 숟가락의 밥이 남아 있었다.
“오빠, 요즘 남긴 밥은 부부간이라도 안 먹어.” “아니 그냥 배가 불러서….”
멋쩍게 웃는 주름진 오빠의 얼굴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떠 얹어주는 밥 한 숟가락, 남기는 밥 한 숟가락, 밥 한 숟가락은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였다.
봄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뜨락에 제 밥그릇 한 귀퉁이에 밥알을 남겨둔 채 콧등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개가 졸고 있다. 후루룩 참새가족이 한마당 날아드는 화창한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