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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나님 아버지 마음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 교회마다 전도하는 것은 불신자전도를 최고의 가치로 믿고 실천하기 위함이다.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아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그곳에 우리도 있게 되며 전도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이다.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가?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 중에서 자기 유산을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낭비하고 거지가 되어 죽어 간다. 여기서 인생의 큰 비밀을 깨닫게 된다.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결국 `실패와 기근`과 `죽음` 뿐이다.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는 재산보다, 돈보다 자기를 떠난 아들을 더 기다린다.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기억한다. 그리고 타국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 아버지는 마을 입구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집을 나간 아들에게 있었다.그러나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밭에 나가서 종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는 것을 효도하는 것으로 알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잘못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 자신의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진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 첫째 아들은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큰 잔치를 준비한 것을 보고 원망했다. 원망은 큰 죄고, 불평은 불신앙이다. 전도할 때 원망하면 죄짓는 것이다. 원망의 마음을 물리치자.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 200%의 믿음을 가지자. 즉 말씀을 100% 믿고 순종하자.전도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해피데이 전도(전도축제)는 한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다.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거룩한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섬긴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다. 이 전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앎으로 이루어지는 영적은혜이다. 잃어버린 영혼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시고자 애태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뜨여져야 한다.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실천하자.해피데이 전도는 불신자를 예비신자로 품고, 예비신자를 먼저 작정해야 한다. 작정한 예비신자를 섬기고 기도해야한다. 계속 만나야 한다. 이 섬김과 기도작전에는 모든 성도가 다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사모하며 열매를 기다려야 한다.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왜 몰랐을까?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17-03-09

참 생명의 길

▲ 손상수 목사·포항산호교회오징어를 잡으려면 울릉도로 가야 합니다.울릉도 근해에는 싱싱하고 펄떡펄떡 뛰는 오징어가 줄줄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산삼을 캐려면 심신산골로 가야 합니다.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깊은 숲 속 그곳에 오직 외롭게 가만히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몸의 때를 씻으려면 목욕탕으로 가야 합니다.뜨거운 물 속에 오랫동안 몸을 담가야만 깨끗한 피부로 씻음 받기 때문입니다.인생의 구원을 받으려면 주 예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가 아니고서는 천하 인간에 죄 용서함을 받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팔을 활짝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그분의 품에 안기는 자는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습니다.당신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사기 44장 22절)영원한 생명(영생)을 얻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장 24절)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계시록 22장 1~2절)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 받습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장 7절)수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만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당신이 예수를 믿으면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놀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요한복음 10장 10절)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지체하지 마시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참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길밖에 없습니다.사람은 팔자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오직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기회는 지금뿐인지도 모릅니다.이 기회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17-02-23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 최해진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 구약의 제사는 제물에 사람의 믿음과 감사와 정성을 담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받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받는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였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먼저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구약의 제물은 짐승 또는 곡식을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몸`은 인격적인 존재인 나를 가리키며, 우리의 삶 전체를 말한다. 우리의 온 인격과 삶을 드려야 한다.제물은 거룩해야 한다.거룩이란 흠이 없다, 구별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거룩한 제물을 받는다. 거룩한 것은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기에 거룩하다. 거룩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거룩해야 한다. 예배는 거룩한 몸과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우리의 산 제물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이 사실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유일한 이유이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살아 계서서 예배를 기쁨으로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너희는 계속 이 세상과 같은 우리가 복음의 씨를 뿌려서 변화를 추구해야 할 일터이지 동화되어야 할 곳은 아니다.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성경은 “그러나 너의 마음 혹은 생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받으라”고 한다. 외적인 모양, 형상이 변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본질적인 요소를 변화시키라는 말이다. 영,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이다.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성경은 `시험하여 알아낸다`고 한다. 철저한 검증으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변화를 받아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다. 그러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결론적으로 산 제물이 되어 영적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계시록 5장 8절은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다.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빌립보서 4장 18절은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라고 했다. 헌금생활을 해야 한다.누가복음 15장 32절은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다. 전도생활을 해야 한다.히브리스 13장 16절은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했다. 선을 행함과 구제생활을 해야 한다.예수님이 친히 제물이 되셨다. 그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내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자.나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삶 속에 드려지는 영적 예배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17-02-16

“내게 주신 자는 잃어버리지 않아”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선포되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건만 정작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는 그 자신의 마음에는 아무 감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를 믿지 않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불신앙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초대교회 부자이자 2천년 기독교 신앙의 저수지로 일컬어지는 어거스틴은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못한 자의 차이라 말했습니다.요한복음 6장 36절에는 예수님을“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야기가 나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따라온 이 무리들은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한복음 6장 34절)라고 소리쳤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스스로를 나타내신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물을 내게 주소서”라고 갈구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이미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먹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혔고, 지금은 예수님에 대해 “요셉의 아들 예수”라 수근거리며 그도 결국은 한 인간의 아들이지 않느냐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불신앙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아버지께 주께로 보내신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한복음 6장 44절)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방황하며 배운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인생의 주권자는 결코 인간 자신이 아니며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시설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의 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라는 인생과 역사 전체에 대한 깨우침의 시간이었습니다.여러분! 만일 자신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예수 앞에 온 무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예수님께로 `보내신 자들` 입니다. 인간의 사랑 놀음으로 태어난 자들이 아니며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만으로 여자의 태에서 잉태된 자들이 아닙니다. 났다가 죽은 수많은 생명 중의 또 하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그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게 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로마서 8장 29~30절).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주님께 오는 성도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 너희를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장 37절), 둘째, 너희를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39절), 셋째,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리라.(44절)여러분은 결코 내던져진 자들이 아니며 내어 쫓겨진 자들이 아닙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맡겨진 자들도 아닙니다. 절대로 잃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보고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오늘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를 내 생명의 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때 예수님의 생명이 당신 안에 차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잃어버려진 사람처럼 동요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난 가인처럼 불안해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께 찾아진 자요, 발견된 자이며, 하나님 사랑의 눈길이 인생 끝까지 머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2017-02-09

그대 영혼에 대해 생각해 봤는가?

▲ 손상수목사·포항산호교회 그대는 한 번 멈춰 서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인생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나는 여기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생명은 언제 끝날지. 아마도 그대는 목표 지점에 이르려고 고군분투 하느라 바빴으리라.그대에게 가만히 물어봐도 되겠는가? 그대의 영혼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를.그대는 가장 높은 문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또한 그대의 꿈은 모두 실현될지도 모른다. 부와 명성이 그대의 몫이 되고 성공이 그대 위에서 빛날지도 모른다.그대의 모든 벗들은 그대를 칭송하고 노래하고, 어떤 걱정도 그대를 사로잡지 못하게 될는지도 모른다.그렇게 참으로 위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그대의 날이 계수되고 있음을 잊지 말라. 그대는 비록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 모두의 가엾은 운명처럼 그대도 언젠가는 잠깐 빛나다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그리하여 그대의 성공과 명성과 영광은 울리는 종만도 못한 것이 되리라.그대에게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는가? 그대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지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오늘 조금만 여유를 내 보는 게 어떻겠는가?그대의 인생행로에서 죄를 용서받는 기쁨보다 그대가 완전하게 지음 받았음을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에 구세주 그리스도를 대신해 묻겠다.그대는 그대의 영혼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유리창은 깨뜨릴 수는 있지만 붙일 수는 없다.컵의 물은 엎지를 수는 있지만 다시 담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다.인간은 타락하고 미끄러질 수는 있으나 스스로 회복하거나 제자리로 돌아올 수는 없다.착하게 사는 것, 도덕, 윤리, 철학, 수양, 과학으로 인간은 회복해 보려고 발버둥치지만 다 헛된 것들이다.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즉시 영원한 멸망에서 건지시고자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오랜 역사 동안 차분히 진행했다.동해 바다의 아름다운 일출을 보다가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설경에 등산을 하다가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감동적인 문학 작품을 읽다가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 맛있는 요리를 먹다가 인간은 구원 받지 못한다.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고 구원하시고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을 구속할 대속물로 이 땅에 보내 주셨다. 당신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017-02-02

“내니 두려워 말라”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자신을 왕 삼으려는 무리들을 피해 산으로 가시는 동안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마태복음 14장은 이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 그 배에 올라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파도가 일어났다. 갈릴리 바다에서 형성된 대기와 동쪽 시리아 사막에서 형성된 대기가 부딪칠 때 갈릴리 바다에 이상 돌풍이 형성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노를 저어 가다가 혼비백산해 심히 고통에 빠지게 되었다. 보라! 이들은 지금 스스로 나선 걸음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인데 그 배에 풍랑이 찾아왔다.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대로 삶의 행로를 선택해 가면 당연히 어려움이 사라져야 하고, 순풍에 돛을 단 행복한 여행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명령에 순종해서 가는 걸음에도 반드시 `인생 풍랑`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 영적으로는 더욱 풍랑이 심할 수도 있다고 각오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결정적인 걸음이기에 오히려 원수의 방해도 더 커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은혜와 축복이 아닌 굶주림과 추위였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미래의 왕으로 세움 받은 다윗 역시 사울로 인해 당분간 거친 인생행로를 걸어야 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서 외친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신 것인가? 왜 나를 이렇게 내던져 놓으시는가?” 예수님으로부터 떠나 노를 젓는 제자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밤의 어두움보다 더 큰 어둠이 있었다. 버려진 거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이처럼 불투명함과 불확실함으로 당혹스러워 하는 제자들 시야에 물 위를 걸어오는 물체가 들어왔다. “뭐야, 이건? 귀신인가?” 두려움으로 몸서리치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니 두려워 말라!” 요한복음은 여기서 강조해서 말한다. “에고 에이미”(ego eimi). 예수님의 절대 신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내용이다.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만물 위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능으로 너희들에게 찾아오는 이가 바로 나 예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 이상이다. 바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이 왕을 인생의 배에 영접하는 배는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된다.공관복음은 이 일이 밤 사경쯤에 일어났다고 한다. 새벽 3~6시다.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예수님은 모든 것이 잠든 그 시간에도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전능자의 손길 안에 있는 우리는 안전하다. 생의 풍랑이 닥쳐올지라도 요동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하나님을 신뢰해 지금의 영적 항해를 계속하기를 바란다.

2017-01-19

음란

▲ 손상수 목사·포항산호교회 노아 시대 때나, 소돔과 고모라 시대 때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음란이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그들의 음란이 극치에 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멸망시키셨습니다.오늘날 우리 시대에 너나 할 것이 없이 공통적인 특징도 바로 음란입니다. 세상이 모두 이것으로 들러 싸여 있고, TV나 컴퓨터, 신문과 잡지가 모두 이것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우리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우리 자녀들이 그 속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사람이 여기 사로잡히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여기에는 나이가 없고 신사숙녀가 없고, 도덕과 윤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독약입니다.성이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가정의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이 기본 틀이 깨어지면 곧바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국가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이제, 이 세상은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음란의 죄악을 결코 용서치 않으실 것입니다.정신을 차리십시오.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쳐다보십시오.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존귀한 존재입니다.그리고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연필로 잘못 쓴 글씨는 지우개로 지워야 하고, 기름기 미끌미끌한 그릇은 `퐁퐁`으로 지워야 하고, 때 묻은 양복은 휘발유로 지워야 합니다.인간의 죄는 먹지와 같습니다. 손과 발이 죄를 짓지만 그것은 마음에 기록이 되어 그 흔적이 남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것도 분명히 실존하는 것이기에 뭔가로 지워야 합니다.인간의 죄를 지울 수 있는 세제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피뿐입니다. 그 피로써만 인간의 죄는 씻음 받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먼저 천국 간 성도들은 시대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지만, 오직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써 죄를 씻음 받고 모인 자들입니다.이 땅의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도덕, 윤리, 과학, 돈, 명예, 착하게 사는 것….다 사람을 속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보배로운 피, 보혈이라 합니다.보혈은 능력이 있어서 아무리 평생에 죄가 많고 검디검어도 예수님의 피 한 방울이면 흰 눈같이 죄가 전부 씻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받지 못할 죄는 이 땅에서 아무것도 없습니다.예수님의 피로써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는 오늘이라도 갑자기 그 생명이 끝나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그들은 영원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는 소망 없는 불쌍한 자들입니다.당신의 소중한 소망은 무엇입니까?당신의 영원한 운명은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예수님 믿고, 예수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천국가야 합니다.

2017-01-12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윌리엄 버클레이라는 신약학자가 사람이 평생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는 지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먹는 데 9년, 잠자는 데 24년의 시간을 쓴다고 한다.80년을 산다고 할 때 1/3이 넘는 33년을 순전히 먹고 자는데 쓰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공부하는 데는 1.5년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첫째, 일을 중단 상태로 남겨두지 말라. 영원히 끝마치지 못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둘째, 해야 할 일을 신중히 선택할 것.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으므로 정말로 중요한 일만을 선택해서 하라. 셋째, 다른 이와 다퉜거나, 사이가 틀어진 채로 하루를 마치지 말 것.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기 때문이다.에베소서 말씀은 성도의 지혜로운 신앙생활의 소중함에 대해 일깨워 주고 있다. 열심 있는 믿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지혜로운 믿음이다. 그 지혜의 요체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5절에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말씀하신다. 무턱대고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이 알아서 은혜로 이끌어 주시겠지” 하고 그저 하나님께 내가 결정할 부분까지 맡기는 것은 결코 온전한 순종이 아니다. 진정한 순종은 삶을 철저하게 주님께 드리기 위해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순간순간 지혜롭게 사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 요체는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원어로는 “시간을 구원하라`로 되어 있다. 일분 일초의 시간도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강조한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 5:17)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공통적인 시간의식을 갖고 있었다. 인생은 소중하고 세월은 짧다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스승이요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33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사시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2~3배의 인생을 산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을 사셨다. 당신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를 향한 삶인 것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일관되게 그 방향으로 자기를 지향해 가셨다.우리가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급한 일을 좇아가느라 중요한 일을 놓치고 산다. 급한 일의 횡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늘 거기에 매여 있으며, 정작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일은 옆으로 밀어 놓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 급한 일 빨리 해치우고 나면 본격적으로 중요한 일을 해야지!” 그러나, 그 날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급한 일을 빨리 해치우고 나면 또 다른 급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을 쓰고 나면, 어느 순간엔가 여러분은 늙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어야 하는데….” 주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일상의 폭력에 자신을 내어 맡긴 벌이다. 우리 주님은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부딪힐 때는 주저 하지 않고 중요한 일을 쫓아가셨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다른 곳에서 머무르셨다. 긴급했던 일은 나사로의 죽음을 막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는 일이었다. 주님은 중요한 일을 택하셨다. 새해 여러 분의 삶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내 인생에 이루기 위해 중요한 일을 선택하고 있는가? 먹고 살기 위해 달려가야 하는 긴급한 일을 선택하고 있는가?

2017-01-05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다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께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 하에서 핍절을 거듭 경험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절절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다. 마침내 이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됐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타산적인 생각일수도 있지만, 일견 식민지의 참혹함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무리들을 떠나 혼자 산으로 들어가셨다.요한복음 6장 15절에 `아시고`로 번역된 헬라어 `그누스`는 관찰과 경험에 의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부지간에 서로를 알 때 쓰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지, 얼마나 의식주에 찌들어 사는지, 자신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정확히 아셨다. 그래서 이들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낄 정도로 불쌍히 여기셨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던 걸음까지도 마다하시고 이 무리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백성의 고통에 참여하고 함께 연대하시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백성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 이제는 이들을 떠나 홀로 산으로 가셨다. 이런 행보, 즉 삶의 자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대중의 인기나 칭찬을 좇아가는 사람에게는 도대체 납득되지 않는 태도다. 자기를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고는 정작 그들의 마음을 가져온 후에는 오히려 그들을 떠나가다니. 이런 예수님의 행보는 오직 단 하나, 영적 자유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영적으로 자유하기에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추구해 나가는 자유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자기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찾아온다. 예수님은 참으로 자유하신 분이셨다. 진정 자유 하셨기에 `돌덩어리가 떡덩어리가 되게 하라`는 유혹을 뿌리치셨고, 주변사람들의 지탄을 무릅쓰고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가 되셨으며, 자신에게 환호성을 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떠나실 수 있었다.현대인들은 흔히 자유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며,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사실 자유가 아니라 `환상`이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 안에 있는 죄와 그 죄가 만든 욕망이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쉬고 싶다고? 누가 쉬고 싶다 하는가? 내 안에 `영`인가? `육`인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다고? 악의를 갖고 선택한 것도 존중해야하는가? 그 선택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기독교 신앙은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한다. 하나님을 향한 분절된 마음 없이 불같은 심정으로 그 분의 나라와 의를 좇아가는 자유를 추구한다. 이것이 그 사람 안에서 너무나 절박하고 간절하기에 돈, 명예, 권력, 이념 등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대중을 뒤로 하여 홀로 가는 예수님의 걸음을 고독한 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이 자유함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린도후서 3장 17절) 이 영적 자유를 날마다 행사하며, 일생을 통해 추구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16-12-29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라”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 성탄시즌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영광 버리고 왜 이 땅에 오셨나? 종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여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빌립보서 2장 5절). 왜 예수의 마음을 가져야 하나?먼저 우리의 환경에서 살펴보자.실족시키지 말아야 한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족시키는 자에게 화가 있다.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들어가라고 했다.죄를 범하거든 책망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했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결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난후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니”. 이 말은 제자들이 믿음을 양적인 개념으로 보고 자신들의 믿음 위에 믿음을 추가해 달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없는데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들의 믿음위에 더하여 달라고 했다.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했다. 겨자씨 믿음은 생명력과 잠재력이 있다. 힘이 있다. 자란다. 희망이 있다. 예수님은 믿음의 양을 요구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질을 말씀하셨다. 작은 씨앗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에 능력이다. 그 믿을 통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 실족시키지 않고, 책망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면 용서 할 수 있는 이런 믿음의 질이 있는가?믿음은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다. 삶으로 보여 줘야 한다. 겨자씨 믿음은 종으로 사는 것이다. 종은 주권과 소유권이 없다. 절대적 복종이다. 사례가 없다. 무익한 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종으로 오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는 종이 되기 위해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생명이 있는 믿음은 종의 자세를 가지고 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의 질을 높여라.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말씀 순종하는 일에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제자들은 왜 믿음을 더해달라고 했는가?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16-12-22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나?

▲ 이종현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 “그들이 우리보다 덜 가졌기 때문에요.”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들도 언젠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상의 답변들은, 본인이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 지난 10월 신입생 면접고사 때 신부들이 낸 면접 문제 중의 하나였던 “우리가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나요?”란 물음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들이다. 본인이 채점관이 아니었기에 이같은 답에 대해 면접을 담당한 신부들이 어떤 점수를 주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 문제를 대한 학생들 나름대로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그런 대답들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만일 신앙인인 우리들이 이와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면 우리들 각자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대림 3주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 교회는 이른바 “기쁨”의 주일을 지내고 있다. 특히 1독서와 2독서, 그리고 알렐루야에서 이 “기쁨”이라는 주제가 강조된다. 그런데, 이 기쁨이 진정 참된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참으로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한 가지 사실 때문이다.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시고 아무런 힘도 없는 갓난 아기로 우리 인류를 위해, 무엇보다 나를 위해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셨다는 그 진리 하나! 대림절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들 각자는 이 성탄의 기쁨을 어떻게 맞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마땅할까?또한, 우리 교회는 대림 3주일인 오늘을 자선 주일로 지내고 있다. 자선,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이란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런데,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예수님 앞에는 우리 모두가 다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다. 오히려, 우리들이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기에,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성탄의 기쁨은 결코 혼자서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몸소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신앙인인 우리들이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며, 또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성찰하고, 그런 자선의 실천을 행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드리자!

2016-12-15

백리병과 흑싸리 쭉정이

▲ 손상수목사·포항산호교회 닭에게는 백리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닭이 이 병에 걸리면 건강하게 잘 놀다가 갑자기 설사를 하면서 픽 쓰러져 죽습니다.이 병에 걸린 닭이 낳은 계란이 병아리가 되어도 이 병에 이미 걸려 있습니다.겉으로 보기엔 건강한 병아리 같지만 어느날 갑자기 설사를 하면서 쓰러져 죽습니다. 계란이지만 이미 어미 닭 속에서 백리병에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인간도 이와 같습니다.인류의 조상 아담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죄에 오염되어 백리병(죽음)에 걸렸습니다.그것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 역시 이미 아담 안에서 같이 오염되었습니다.어렸을 때는 그 증세가 안 보이지만 이제 철이 들고 나이가 들면서 여러 가지 죄악, 거짓말, 미움, 시기, 도둑질, 간음, 살인 등으로 증세가 하나씩 나타나게 됩니다.우리 모두는 이 공식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언젠가 화투를 치는데 8광이 한 장이 없고 대신 흑싸리 쭉정이가 한 장 있었습니다.궁여지책으로 흑싸리 쭉정이 한 장에다 희미하게 색연필로 보름달을 그려 넣고 8광으로 인정하고 통용시켰습니다.그것은 분명히 흑싸리 쭉정이인데 그날 온종일 8광 행세를 하며 8광으로 돌아다녔습니다.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이신칭의는 법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선포하고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미꾸라지를 보고 잉어로 선포하고 잉어로 통용시킵니다. 그러면 미꾸라지가 잉어 행세를 하며 온종일 잉어로 돌아다닙니다.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예수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인으로 법적으로 선포해 버립니다.그러면 분명히 꼬락서니는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인정받아 영원토록 의인 행세하며 의인으로 통용되어 버립니다.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누구든지 그의 피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용서받고 자유함을 얻습니다.당신은 죄에서 용서받고 자유하고 싶지 않으십니까?당신은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고 싶지 않으십니까?길은 오직 예수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장 12절)흑싸리 쭉정이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끝까지 흑싸리 쭉정이가 있고, 8광 행세를 하는 흑싸리 쭉정이가 있습니다.죄인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끝까지 죄인이 있고, 예수 믿고 의인 행세를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당신은 어느 흑싸리 쭉정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2016-12-08

절대적 감사생활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감사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비밀이 있다.감사하는 자에게 문제가 해결되는 능력, 치료되는 능력, 구원의 능력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 비밀을 알 수 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를 매년 지키라고 했다.매년 지켜야 할 3대 절기로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 있다. 왜 매년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다.만약 절기를 제정해 주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릴 것이다. 또 매년 추수를 하면서고 하나님이 거두게 하셨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힘과 지혜로 거둔 것이다. 왜 성경에 없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인가? 구약성경의 첫 열매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 수장절, 추수하여 곡식을 저장하고 감사하는 절기이다.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절기의 중심사상인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일 년 동안 우리를 지켜주시고, 복주시고, 복 주실 것을 내다보면서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감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대적인 감사와 절대적인 감사이다. 상대적인 감사는 어떤 것과 비교 했을 때 오는 감사이다. 환경과 조건의 영향을 받아 기분 좋으면 감사하고 기분 나쁘면 불평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어떤 감사일까? 상대적 감사를 뛰어 넘어 절대적 감사하기를 원하신다.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감사하자.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않아도 감사하겠다고 한다.포도나무의 열매가 없어도 감사하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감사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한다.우리는 죄와 파멸과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 은혜는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자.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며” 감사하자. 이 감사를 절대적 감사라고 한다. 절대적 감사는 환경과 상관없이 내가 놓은 형편과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감사한다.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사의 습관, 감사의 체질, 감사의 성품, 감사의 인격, 감사의 신앙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감사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비밀이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절대적인 감사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16-12-01

“무조건 감사”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노부부가 아픔을 딛고 교회에 출석해서 하나님께 거액의 감사험금을 드렸습니다. 헌금봉투에는 이런 감사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좋은 아들을 20년간 우리 곁에 두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자기 생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가라고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사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좋은 아들을 20년간 우리 곁에 두셨음을 감사합니다.” 생때 같은 자식을 갑작스레 떠나보낸 사실에 초점을 두는 대신에 20년간 가졌던 아름다운 만남에 집중합니다. “아들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죽어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에 초점을 두는 대신에 그 아들이 지금 하나님의 품에 있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이 노부부는 맹목적이지도 않고, 무비판적 낙관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비극을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쳐 관점의 전환을 시도하는 어설픈 심리요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생을 보통사람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조망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중심에 세웠던 것입니다.“자식이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감사할 수 있을까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아내가 암으로 인해 시한부의 삶을 남겨두고 있을 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기도해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병상에 누워있는 가족을 앞에 두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온 나라가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요동하는 이때에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노부부의 인생관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감사에는 세 가지 종류의 감사가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 기대 감사, 무조건 감사입니다. 조건부 감사가 내게 좋은 것을 주셨기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기대 감사는 내가 감사할 때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감사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무조건 감사는 지금 주신 이 삶 자체를 선물로 여겨 감사하는 것입니다.하박국 선지자의 감사를 보십시오. 그는 인생을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 1장 2절). 그는 사사건건 주님께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종국에 자신의 모든 불평이 하나님의 깊고 높으신 생각을 전혀 읽지 못한 소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성하고 아름답다` 확신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합 3장 18절)내가 풍족히 받으면 감사할 것 같은가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주님께 병 고침 받은 나병환자 10명 중에 단 한 사람만이 주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면 더욱 넉넉히 주실 것이기에 그가 감사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며 소중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인생을 더욱 온전한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만지시고 있습니다. 비록 내 삶속에 아픔과 좌절이 있을지라도 나를 만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한 분으로 우리는 만족하며 충분할 수 있습니다.

2016-11-17

세상 것 버려야 할 이유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은 세상 것들을 얻고, 가지고, 취하고 거기에 만족했던 사람이다.“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빌 3 : 4)라고 말했다. 바울은 언약의 이스라엘의 백성, 귀족가문인 베냐민 족속, 유대의 관습을 계속 지킨 히브리인,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가말리엘 문하생, 아버지가 로마의 시민권을 돈으로 살만큼 부자였고, 다소에서 헬라학문을 했고, 공회원(국회의원)이었다.부, 명예, 권력 지식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것이며, 사람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고 부러워하는 것들이다.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했다. 지금까지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세상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 이유를 살펴보자.먼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다.그리스도에게 무엇이 있기에 세상의 것들을 버릴 수가 있었나? 예수님에게는 세상에서는 가질 수 없는 죄 사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구원, 영원한 생명과 부활, 천국이 있다. 또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행복과 하늘소망이 있고, 이것들을 가졌기 때문이다.다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세상 것과는 비교 할 수 없는 더 귀한 것을 얻었다. 얻은 것을 잃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영원히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세상의 것들을 버린 이유는 뭘까?뒤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다. 즉,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만 어려워도 세상의 것이 생각나고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다시 돌아가기가 쉽다. 없으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자 그의 소를 모두 잡고 쟁기 등 소의 기구를 불살라 버렸다.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했다. 그리고 스승 엘리야를 좇았다.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다.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고난도 역경도 있다.그런데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 고난의 때에 말씀 순종하는데 걸림돌이 된다.재물과 주님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 중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 것들이 장애물이 되어서 넘어가지 못하고 중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다”고 했다.마지막 한 가지는 주님만 의지하기 위해서다.돈이 있으면 돈을, 권세가 있으면 권세를 의지하기 쉽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만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 것들이 있으면 그것을 주님 보다 더 의지하기 쉽다. 바울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지식, 권세, 명예 모든 것을 복음 전하는데 사용했으며 오직 주님만이 주인으로 알고 순교의 제물이 되는 그 날까지 주님만 따랐다.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총과 행복이 있지 않는가? 가지고, 누리며, 나누며, 영혼의 때를 위해 살아야 한다.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헤아려 보고,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배설물처럼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2016-11-10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바울에게는 일생의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 13~15절을 보면 바울의 이런 간절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로마에 가고 싶어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라고 말씀한 바처럼, 이런 저런 방해와 장벽으로 인해 아직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계속 시도하다가 이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니 이렇게 편지라도 써서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말합니다. “….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듣고, 깨달아, 누리고 있는 생명의 복음, 그 복음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삶을 전하고 싶어서 입니다.이미 로마제국은 이제 발흥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심장부인 로마는 더욱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 곳 로마에 바울은 가지 못해 안달이 난 것입니다. 도대체 왜입니까? 본문 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삶이 완전히 뒤집어져 새 삶을 시작한 후에 생각해 보았겠지요.“도대체 나 같은 사람을 왜 하나님이 찾아오셨을까?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려고까지 한 나를 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에게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을 수 있는 합리적 근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자신에게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깨달았겠지요. `아하! 나같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도 그것이 밤인 줄도 모른 체 방황하는 자들, 지혜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지혜에 갇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복음 전하라고 나를 먼저 부르신 것이구나! 나는 그들에게 빚진 자이다.`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시고, 평생을 살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임을 안다면 우리는 삶에서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라는 깨달음입니다. 둘째,“이 놀라운 은혜의 빚을 어떻게 갚을까?”라는 거룩한 채무의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갚으라 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에게 당부하셨듯이 “너처럼 신음하고 고통하는 내 백성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016-11-03

한 뼘 같은 인생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고통 중에 있다. 이 시기는 다윗이 임박한 임종을 앞두고 인생의 연약함과 무상함을 통감했을 때라 보인다. 아니면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절박한 가운데 있었던 아들 압살롬의 반역 음모를 포착한 시점으로 추정된다.그는 이러한 때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자.고통 중에 침묵하기로 했다.시인인 다윗은 영혼과 마음에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심각한 질병, 또는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겪는 늙음과 죽음의 문제가 시인의 한탄을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악인들의 조롱이어다.이런 고통 가운데 시인은 생각하기를 행위를 조심하여 혀로 범죄하지 않고, 입술에 재갈을 물린다고 한다. 선한 말도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히려 묵상하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했다.인생의 허망함을 깊이 인식했다.묵상 중에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아,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그 감정을 토해내면서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한다. 자신의 종말을 알게 해달라고 한다.나의 살아갈 날이 얼마인지 알게 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이 착각에 빠지면 정욕으로 살기 쉽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인지 알게 해 주시면 조롱하는 이들로부터 겸손하고 인내 할 수 있다고 한다.우리 인생의 길이는 한 뼘에 불과하다. 한 뼘은 이때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로 손가락을 가지런히 포갠 한 손바닥의 폭의 10cm에 해당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비교한다면 우리 인생은 없는 것과 같다.그러므로 사람마다 든든히 섰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허사이다.사람들은 허무한 실존, 즉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소란하지만 그 재물을 누가 취할지 모른다.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성공은 허사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인간이 한 없이 강한 것 같지만 한없이 약하기도 하다. 죽음 앞에는 약한 인간이다. 이 약함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래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편 39편 7절)이제 시인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의 주가 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인생이 행복해지며 소망 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다.소망은 하나님께만 있다.여러분의 소망이 이 땅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가?하나님께 있는 자는 기도하며 의지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간다. 오늘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2016-10-27

항상 즉시 기쁘게…

▲ 김정렬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교우 여러분, 1997년 9월 5일 하느님 품 안으로 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아실 겁니다. 수녀님의 말씀 중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모든 것은 다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지닐 수가 없으며,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정도 또한 극히 적습니다.”어쩌면 우리가 베푸는 것 같은 사랑도, 기도로써 주님께 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 5,10)저의 오래 전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것은 그물에 가득 들어 있는 물고기를 잡아 끌어 당기는 어부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입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사진이었습니다. 한동안 그 사진이 잊혀지지 않았지요. 지금도 마찬가지구요.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5,11)베드로 사도는 주님께로부터 선택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셨기에 베드로는 바뀌었고 그 분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신뢰하였기에 스승님의 말씀에 자신의 뜻을 꺾고 당신의 말씀에 따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고집을 계속 내세웠더라면 할 수 없었을 행동이었습니다.사람은 변합니다. 아니 변해야 합니다.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안에서 변화하고 성숙하고 성장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선택하셨기에 그리고 그 분의 선택에 순종하였기에 변화되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으뜸 제자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기에 변화되고 성장해 갑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모습처럼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고난과 저항이 있더라도 말입니다.누구나 인정하는 삶을 사셨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수녀님께서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께 청하는 기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바로 주님의 선택에 대한 무한한 응답과 감사의 기도라고 감히 생각해보았습니다.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매일 부르시는 주님께 늘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항상, 즉시, 기쁘게….

2016-10-20

참된 내가 되기 위해

▲ 마석진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 사제가 되어 대구에서 두 개 본당 보좌 생활을 하고, 볼리비아 산타크루즈 교구로 파견되면서 사실 여러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아마도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과연 사제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나 걱정이 아니라 말이나 문화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저를 지금의 제 자신으로 만든 사건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산 프란치스코라는 공소(지금은 본당이 되었습니다)에 복사단 여자 아이 하나가 제게 뭐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이제 겨우 공부를 마치고 본당에서 일한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때인지라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한데, 다시 한 번 말해 줄래?” 여러번 다시 묻고 그 아이도 다시 말을 했지만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한데, 한번만, 더” “padre, no entiende nada.” 번역하면 “신부님, 아무것도 이해 못하네.” 하필 이 말이 어찌나 귀에 잘 들리던지, 그 말을 듣자마자 사실 화가 치밀었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무시당한 자존감, 제 자신에 대한 자책감 등 너무나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날 밤은 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화를 낸 것일까?` 결국 이유는 그 아이의 말이 아니라, 제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무시하는 듯한 어린 아이의 말에 `내가 어른이고, 신부인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들었으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던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쓸데없는 교만을 마주하며 많은 반성들을 했었습니다. 신자 분들이 사제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존대해 주시고, 많은 사랑을 주시는데 마치 그것이 `내가 잘나서`, `내가 멋져서`, `내가 신부니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교만에 빠져 있었던 제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그 아이가 고마웠고, 하느님께 감사드렸으며 비로소 제가 참된 제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우리는 자주 우리가 무슨 큰 위치에 있는 마냥 남을 무시하기도 하고, 또 조금이라도 무시당한 것 같으면 감히 내가 누군데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각자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드러내셨고, 그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자 당신의 삶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인데, 어디 감히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겸손의 모습이었고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참된 내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겸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을 통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6-10-13

우리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 김명섭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마르코 복음 10, 17-30에 부자 청년이 등장합니다.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잘 배운 것으로 보여 지고, 또 배운대로, 정해놓은 율법 규정대로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 고 전하는 것을 보면, 부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의 어떤 잘못됨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청년 스스로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부자 청년은 스스로 더 해야 할 무엇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달려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예수님의 답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였습니다.하지만, 부자 청년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부자 청년의 마음은 재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이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따라오라니….`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재물의 포기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지금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는 재물과, 재물을 통해 누리는 사회로부터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떠나가게 됩니다. 재물은 분명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큰 도구가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하지만, 재물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남는다면, 하느님과 이웃을 다 잊어버릴 정도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데 큰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하는 문제를 얘기하고 싶으셨습니다.우리는 과연 어떨까요? 자신도 모르게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마음은 재물에 두고, 그저 계명을 지키는 삶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지하게, 큰 이상을 품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신앙의 길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재물이 삶의 목표인양,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의 마음이 재물에 매여 있지 않고, 진정한 나눔을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이길 청합니다.

2016-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