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선포되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건만 정작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는 그 자신의 마음에는 아무 감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를 믿지 않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불신앙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초대교회 부자이자 2천년 기독교 신앙의 저수지로 일컬어지는 어거스틴은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못한 자의 차이라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6절에는 예수님을“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야기가 나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따라온 이 무리들은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한복음 6장 34절)라고 소리쳤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스스로를 나타내신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물을 내게 주소서”라고 갈구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이미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먹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혔고, 지금은 예수님에 대해 “요셉의 아들 예수”라 수근거리며 그도 결국은 한 인간의 아들이지 않느냐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불신앙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아버지께 주께로 보내신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한복음 6장 44절)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방황하며 배운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인생의 주권자는 결코 인간 자신이 아니며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시설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의 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라는 인생과 역사 전체에 대한 깨우침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자신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예수 앞에 온 무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예수님께로 `보내신 자들` 입니다. 인간의 사랑 놀음으로 태어난 자들이 아니며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만으로 여자의 태에서 잉태된 자들이 아닙니다. 났다가 죽은 수많은 생명 중의 또 하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그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게 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로마서 8장 29~30절).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주님께 오는 성도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 너희를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장 37절), 둘째, 너희를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39절), 셋째,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리라.(44절)
여러분은 결코 내던져진 자들이 아니며 내어 쫓겨진 자들이 아닙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맡겨진 자들도 아닙니다. 절대로 잃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보고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오늘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를 내 생명의 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때 예수님의 생명이 당신 안에 차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잃어버려진 사람처럼 동요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난 가인처럼 불안해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께 찾아진 자요, 발견된 자이며, 하나님 사랑의 눈길이 인생 끝까지 머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