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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교회

▲ 최해진 포항하늘소망교회 담임목사 어떤 것에 미쳐서 사는 자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좋은 일에 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일에 집중해야 하고, 우리 심장이 복음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구령의 열정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복음의 증거자가 되라.우리는 이제 하나님 손에 붙잡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거룩한 열정이 들어가면 구원의 도구가 되고, 사악한 사단의 열정이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가면 사람을 죽이고, 망하게 한다.회심하기 전 사울은 잘못된 열심히 충만한 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구령의 열정으로 땅 끝까지 복음전파 하여 열매를 가져왔다. 우리의 열정을 확인해 보기를 원한다.복음에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가 있다.예레미야는 이렇게 선포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과 성전이 멸망할 것이라고 하는데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총감독을 맡은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분노하며 예레미야를 잡아들여 다시는 그런 예언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때리고 결박해 두었다가 풀어주었다.복음에는 구원의 기쁜소식과 함께 멸망의 슬픈 소식이 공존한다.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지만 거부하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지옥으로 가는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천국으로 가자는 것이다.사명으로 핍박을 극복하라.안타까운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전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조롱을 듣는 예레미야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셔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선포하게 하면 즐겁게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멸망의 소식을 선포하므로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된다.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에는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 예레미야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다. 사명으로 핍박을 극복하라.많은 교회들이 사순절 뒤 해피데이 `전도잔치`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불신자들을 구원하는 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복음열정으로 미친 심령들이 많아질 때에 해피데이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복음열정으로 예레미야처럼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예비신자들이 감동하도록 그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영적고지를 점령하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드리자.오늘 이 시간 나에게 구령의 열정이 있는가? 복음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가? 핍박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2017-08-17

상처와 치유

▲ 이금희 언약의교회 담임목사내가 목회를 하기 전 500명 정도의 중형교회를 출석하고 있었다.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내 나름대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극심한 피부병이 발병했다. 내가 봐도 너무 끔찍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눈코입만 빼고 마치 문둥병 환자처럼 보였다. 피부병이 심해서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고, 피부가 찢어질 듯 쓰리고, 가렵고, 아프고, 피가 알알이 맺혀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피와 고름이 줄줄 쏟아졌다. 냄새가 죽은 송장 썩는 것과 같았다.정말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배 시간이 되고 주일이 지나도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계속 교회를 빠지자 교회 할머니가 심방을 와서 내 모습을 보더니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며 핀잔을 줬다. 속이 상했다. 나는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왜 나만 모진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지` 내 자신이 한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난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오고 저주받은 자처럼 처량한 신세가 됐다.약을 먹으면 먹을수록 약을 바르면 바를수록 그 아픔과 고통이 지옥 같은 마음뿐이었다. 괴로운 나날 속에 지쳐가는 내 몸과 맘, 텅 비어버린 생각, 감각 없는 모습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 마치 죽음의 질주를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착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모든 병원과 약국을 돌아다녀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대구에 가면 문둥병 환자 치료하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귀띔 해줘 약을 한 달분 받아왔다.그 약을 먹는데 조금 후 녹지 않는 약을 그대로 토해냈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 약이 안 받는가보다`란 생각을 하며 다음 날부터 다시 부지런히 챙겨 먹었지만 이상하게 그때마다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제 약조차 삼킬 수 없구나. 나는 어쩌지`하면서 성경을 펼쳤다. 에스겔 37장 1~13절을 읽었다. 내용은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에스겔의 환상이었다.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세상 만물은 복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따라야 함을 깨닫고 잠이 들었다.새벽 2시 무렵 내 귀에서 “딸아, 일어나 세숫대야에 물을 붓고 네 손과 발을 담가라”라는 우레 같은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방안에 가득 찼다. 너무 놀라서 그 명령대로 벌떡 일어나 세숫대야에 물을 붓고 내 손과 발을 담그며 “하나님, 저가 마른 뼈처럼 생기가 없고 불쌍한 처지인데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내 눈물은 땀과 뒤범벅이 된 채 세숫대야에 떨어졌다. 그 순간 “앗 뜨거” 하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내 손과 발을 봤다. 손과 발은 말할 것도 없이 내 몸의 모든 피부병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깨끗해진 내 모습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부리나케 약국을 운영하는 집사를 찾아 내 모습을 보여주니 “아니 무슨 약을 먹었고 무슨 병원에 다녀온 건지”를 되물었다. 그래서 자초지정을 들려주고 병을 고쳐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하나님의 명령으로 고침 받은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솟구치는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세상 약으로 고칠 수 없는 나의 피부병을 고친 것은 기도와 말씀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017-08-03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

▲ 정래곤 신부·침산본당 주임찬미 예수님. 루카 복음16,19-31.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에 관한 비유를 들려줍니다.이 비유에서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전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는 비싸고 좋은 옷도 주저하지 않는, 호화로운 식탁을 차리며 자신만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자신 이외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그래서 자기 집 문간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운 채 굶고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돌볼 생각은 전혀 없는 부자입니다.반면에 복음에 나오는 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의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아서 하느님만이 그를 기억하고 걱정하는 그런 사람입니다.비유에 나오는 부자와는 다르게 이 사람은 이름이 전해집니다. `엘레아자로`라는 이름의 축약형인 `라자로`는 그 뜻도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신다.” 입니다.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잊혀진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 아무 가치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귀하디귀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고된 삶을 마친 뒤에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영원한 행복 안에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말씀하셨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말씀대로 말입니다.반면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라는 말씀대로 말입니다.그때에는 후회해도 소용없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모습에 따라 결정된다.`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하느님께서 보여주셨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느냐 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지난해 9월 4일 시성되신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나 9월 27일에 축일을 지내는 성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처럼 굶주린 이들과 헐벗은 이들과 머물 곳이 없이 떠도는 이들, 불구와 눈먼 이들과 나환자들,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이들, 사회에서 소외되고 짐이라 여겨지는 모든 이들을 주님처럼 섬기고 봉사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애덕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아멘.

2017-07-20

하늘 길을 택한 사람들

▲ 주민기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 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은 모진 박해와 고통,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면서까지도 소풍가듯 기쁘게 노래하며 하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님의 부친이 십니다. 그분은 안양 수리산 자락에 삶의 기반을 잡으시고 교우촌을 건설하셨습니다.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곧 마을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평소 순교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그분은 언제든지 순교의 때가 다가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교우들에게도 자상하게 `순교 교육`을 시키며,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길 바라셨습니다.마침내 올 것이 왔습니다. 한밤중에 포졸들이 닥친 것입니다. 결박을 당하면서도, 심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그분께서는 태연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잘들 오셨습니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들이 많으셨습니까? 저희는 오래전부터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조금 쉬십시오. 곧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요기하시는 동안 저희는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그분께서는 교우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한 다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다 함께 기쁜 얼굴로 순교의 길을 떠납시다.” 해 뜰 무렵, 그분은 포졸들을 깨워 정성껏 아침식사를 대접하시고, 남루한 옷을 입은 포졸들에게는 잘 다려진 새 옷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님과40여 명이나 되는 교우들은 마치 잔칫집에 가듯이, 단체 소풍이라도 가듯이 그렇게 순교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관헌으로 끌려가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 교도들`, `천주학쟁이`라고 욕하며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동물이라도 바라보듯이 그들을 쳐다봤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함께 기도하며 성가를 부르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그렇게 갈바리아산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그들이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그리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천국을 일찌감치 맛보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 끝이 아니라 하늘로 가는 영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이 힘들고 험할지라도 주님 함께 계시면 이 또한 기쁘고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신앙의 선조들처럼 손에 손잡고 서로 격려하며 다함께 하늘 길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2017-07-13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 안병권신부·칠곡 중리본당 주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이들의 문제를 들추거나 다른 이들의 잘못과 실수를 부각시킬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에게 문제가 많을수록 다른 이들의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너무 쉽게 이야기하거나 평가를 하고 더 나아가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이들을 보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바로 그 사람을 유심히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무심하게 혹은 날카롭게 하는 말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을 주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처음에는 처세술로 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을때, 사람들은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루카복음 13,22-30 안에서 우리는 닫혀 버린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들은 간절히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러한 이들의 말에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인을 향해 그들은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주인과 자신들의 관계를 들먹입니다.사실 이는 우리들이 흔히 선호하는 삶의 성향,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라고 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정말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나 행동, 나아가 그 삶의 모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금 문만 열리기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이 주님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해 침을 뱉고 모욕을 퍼부었다는 것도 완전히 감추고 있습니다. 나아가 “죽여라!”라고 고함을 질렀다는 것까지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삶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주님께로 가는 문은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열릴 문은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그냥 죄를 짓고 잘못을 하였다고 하여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참된 회개를 통해 인간적으로는 초심으로 나아가고 신앙으로는 주님께 돌아갈 수 있을 때, 우리에게 그 문은 분명 열릴 것입니다.

2017-07-06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 담임당신은 자유하게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쉽게 “예,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이미 매여 있고, 속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매여 있고, 어떤 이는 권력에 매여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칭찬과 명예에 매여 있다. 현대인 중에는 외모와 건강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외모가 별로 매력이 없다는 생각에 빚을 내어서라도 성형수술을 하여 자기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매임은 단순히 결핍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손에 틀어쥐고 있으면서도 매여 있다. 쥐고 있는 것을 더욱 크게 쥐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평생 생각도 못해본 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더욱 틀어쥐지 못해서 매여 있는 사람들도 있다. 자유하지 못한 것이다.우리는 흔히 자유라는 것을 가정, 학교, 은행계좌가 주는 마음의 넉넉함과 평안함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자유도 아니고 기독교의 자유도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31~32절).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한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한복음 8장 33절).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은 자신들이 구속되거나, 속박을 당해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정치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이 말을 받아서 말씀하신다.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한복음 8장 34절). 몸이 속박 받고, 정치적으로 속박을 받는 것이 종이 아니라, 죄에 묶여서 사는 자체가 종의 모습이라는 의미다.즉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죄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이 자유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자유는 자의적인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는 자유다. 사실 선택의 자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무엇인가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무엇에 매여서 결정한다. 밤을 새워 인터넷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지만 단지 내가 지금 이것을 선택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생각 자체가 환상이요, 착각인 것이다. 그는 지금 인터넷의 종이다. 그는 선택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마력에 붙들려 숙명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길은 절대 자기 안에 없다. 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어내고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한다.여러분! 종이 되지 마라. “그러므로 너희가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했다. 자유하라! 사랑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라. 그 때 참된 자유의 세계로 점점 더 들어가게 될 것이다.

2017-06-29

어리석은 자야!

▲ 정영훈 신부·포항 덕수본당 주임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및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 않을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지난해 6월 27일 사망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한 말입니다. 교육 행정가들과 부모들에게 한 말이죠. 학생들에게 한 말은 아닙니다. 오늘 무언가 열심히 하긴 했는데, 그것이 내일 필요가 없는 무엇을 붙들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했지만 `참 어리석다`라고 하는 듯합니다.“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복음 12, 13~21에 등장하는 `어떤 부유한 사람`은 오늘만을 생각하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 옆 사람도, 하느님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느님께서 “어리석은 자야!”라고 부릅니다.“에구, 어리석기는! 성당에 다니면 돈이 생기나, 떡이 생기나?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이고!” 성모상 주변에 잡초를 뽑고 조용히 화장실 청소를 하시는 분들, 나도 어렵고 아픈데 더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하는 분들, 주말에 성당에 살며 하루 종일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리교사들 등등. 이런 분들을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야!”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슬기로운 자야!”라고 부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고,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과 하느님도 염두에 두면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어 보이는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예쁘고 슬기로운 삶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면서 한 주간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아멘.

2017-06-22

착한 사마리안 되기

▲ 김성일신부·용계본당 주임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걸인들이 많았고, 때가 되면 동냥하러 오는 그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쯤 가끔씩 식사 때가 되면 동냥을 하러 오는 걸인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그 사람에게 식사를 차려 주시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남의 집 한 곁에서 셋방살이 하는 우리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비단 우리 어머니만이 아니라 그 무렵 어렵게 살던 모든 서민들이 또한 그렇게 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고 있는 그들에게 밥 한 끼 챙겨주는 것이 거창한 나눔이니, 사랑의 실천이니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인정상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던 대부분의 서민들이 루카복음 10, 25~37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진 오늘날 오히려 어머니 세대 때 같은 사마리아인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보다 정이 없어서라든지 사랑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모두가 이런저런 것들을 염두에 두며 망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시간이 없어서`, 혹은 `돕는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볼지` 등의 망설임이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루카복음 10, 25~3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보고 느낀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망설이지 말고 그렇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사랑의 실천은 입으로만 해서도 안 되고, 가슴의 느낌으로 끝나서도 안되며, 실천하는데 망설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반드시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용기를 주님께 청하며, 우리 모두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7-06-15

참으로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입니다

▲ 이태우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병원사목부장 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의 만남을 통해 원목사제로서 배우고 얻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환자분들과 보호자분들께서 말씀하시는 고통의 여정이 때로는 가슴 아프게, 때로는 안타깝게 다가오면서 지금의 내 삶에 대한 성찰과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투병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프고, 힘겨운 나날들이지만 그분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고통을 겪고 계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체험 가운데에서 저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었던 하나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직장생활을 하던 A씨는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결혼을 준비를 하던 중, 몸에 이상이 생겨서 검사를 했는데 자궁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A씨는 물론, 함께 할 배우자 D씨 또한 너무나 큰 충격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엄청난 시련에 힘이 들었지만 현실은 그들의 시간과 마음을 더욱더 조급하게 만들었습니다. 00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눈물로써 서로를 위로하던 가운데, 결혼식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마음을 원목사제인 제게 전화로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남편 될 사람의 이야기인즉슨, 처음에는 아내인 환자분이 결혼식 하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지만, 남편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혼식을 하기로 했으니 주례를 부탁한다고…. 안타까운 마음과 애절함이 목소리에 담겨있어서, 다음날 호스피스 병실에서 혼배를 갖기로 하였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성당에서 숱하게 혼배 주례를 해왔지만 병원에서, 그것도 호스피스 병실에서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양가 부모님들, 지인들, 증인들, 원목 수녀님, 호스피스 팀장이 작은 병실을 가득 메운 채 혼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병실 안은 엄숙함과 더불어 비통함으로 그야말로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저 또한 신랑 신부가 반지를 교환하고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합니다”라는 사제의 기도를 목이 메여와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반복을 하였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새 신부인 환자는 “행복해요…. 그런데 신부님, 우리 오빠가 너무 불쌍해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주위를 숙연하게 했습니다. 두 분의 결혼식을 주례하면서 문득 어느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행복이란 저 멀리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나와 네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자매는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귀한 배우자와 가족들을 위하여 하느님 품에서 기도하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아름다운 두 분의 사랑이 지금도 제가 환자분들과 보호자분들을 만날 때마다 아름다운 기도가 되어 제 마음 안에서 울리고 있습니다.`정말 중요한 것은 한가지입니다. 지금 행복하세요. 더 있다가는 늦어요. 지금 고백하세요.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2017-06-08

내 어릴 적 꿈

▲ 여영환 신부·한티순교성지 담당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만 어린 시절의 마을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그때 가족들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어르신들과 친구들 얼굴도 하나 둘씩 떠오릅니다. 그때 키웠던 많은 꿈들도 떠오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 마을을 떠나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던가?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꿈을 이룬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린 시절 그 마을이 더 생각나고 그곳으로 한 번쯤 돌아가고 싶은 것은 왜 일까요?골배마실을 간 적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열다섯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될 당시 가족들이 함께 살던 경기도 용인의 산골입니다. 사제가 되어 이 마을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고난의 세월 동안 신부님은 이 마을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요? 꿈속에서 수없이 나타났던 마을이 아니겠습니까? 그사이 체포되어 순교하신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포졸을 피해 이곳저곳 떠도신 어머니 고우르술라, 여동생과 막내 난식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또 어떠셨을까요? 유학생활 중에도 신부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많이 아팠으니 오죽 가족 생각이 나셨을까요? 그토록 그리워하던 동네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을 만났을 때의 심정은 또 어떠셨을까요? 신부님의 귀향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금의환향도 아니었습니다. 불과 겨우 반년 남짓. 1846년 4월. 그곳 은이공소에서 교우들과 함께 드린 부활절 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신부님께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께 순종하며 유학길을 떠나 갖은 고생을 다하셨습니다. 신학생과 신부가 되어서는 주교님께 순종하여 선교사들이 다닐 길을 준비하고자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셨지요. 그는 가라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갔고, 돌아오라 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오는 순종의 종이였음을. 그 많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붙잡힌 후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꿈쩍하지 않고 천주님 품에 안기신 충직한 종이었음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 것을 탐하지 않고 하늘의 것 하나만을 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매번 우리를 감동시키십니다.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것을 탐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의 현존을 강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고 듣고 만나게 될 때 누구나 주님께 대한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 어릴 적 꿈을 추슬러야겠습니다.

2017-06-01

밥그릇 때문에

▲ 이경기신부·구미 도량본당 주임 어느 본당에서 보좌신부 시절, 신자들 사이에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같은 업종의 교우들 사이에 반목이 생긴 것입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본당신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 두 신자들을 좀 중재해 주시지요.”하지만 본당신부님께서는 “본당신자들이긴 하지만 밥그릇 싸움에는 참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애송이 보좌신부가 보기에 본당신부님께서 조금은 무책임한 듯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뭔가 경험이 있으시거나 깊은 뜻이 있으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 반목은 차차 옅어졌고 저는 그 본당을 떠났습니다.본당 사목을 하면서 그와 비슷한 일을 가끔 보게 됩니다. 신자들 사이의 밥그릇 싸움입니다.이런 일을 볼 때마다 그 본당신부님의 충고를 생각하게 됩니다. “경거망동 하지 말고 조심해라. 어쭙잖게 끼어들면 양쪽이 다 원망한다.” 그 충고말씀이 참 고마웠습니다. 밥그릇 앞에서는 교회도, 하느님도, 신부도, 수녀도 없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밥그릇 싸움에 안 끼어들면서 어떻게 그 충고를 이해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이렇습니다. 밥그릇이라고 해서 한 가지 밥그릇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밥그릇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릅니다. 모양도 다르고 냄새도 다르지요. 밥그릇이 결국 먹고 살기 위한 것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지위와 명예의 밥그릇을, 다른 이는 인정과 칭찬의 밥그릇을 찾습니다. 어떤 이는 간장종지만한 밥그릇에도 만족하지만, 다른 이는 대용량 밥그릇도 빼앗기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리고 그 밥그릇에 손을 대는 자는 누구든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부든 교회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부니까, 교회니까 내 밥그릇을 지켜달라고 요구합니다.수많은 밥그릇 싸움은 분열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그나마 파멸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밥그릇을 양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까요? 분열의 원인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역시 그 놈의 밥그릇이 큰 문제입니다.강대국들의 이념(이데올로기)이라는 밥그릇 싸움 때문에 동족끼리 전쟁을 치르고 아직 남북분열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밥그릇일지도 모릅니다. 그 밥그릇 안에서 또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다면 어떡하지요?예수님 : “용서해라, 네 밥그릇에 손대는 자를….”

2017-05-25

사람 냄새 나는 신부님, 어디 없어예?

▲ 김충남 신부·한국성모의 자애수녀회 담당새소리도 물소리도 맑고 깨끗한 산자락이라서 그런지 가끔씩 길 잃은 고라니가 얼굴을 내밀다가 제 생긴 모습이 자기와 다른지 바로 발길을 돌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곤 합니다. 좀 더 멈춰 있으면 맛있는 것도 줄 수 있는데 말입니다.여름 더위가 솔솔 몰아치려는 요즘 여러분의 일상은 어떠신지요?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고생을 하고 사시는지요? 그 고생을 말할 수 있고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셨는지요? 신자들은 그 누군가를, 바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사람 냄새 나는 신부님`을 오늘도 목말라하고 있습니다.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신부님의 모습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더욱이 신부님의 그림자를 밟아도 안 된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제가 처음으로 신부님과 꽤 오랜 대화를 나눈 것은 고등학생 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신학교에 뜻을 두고 있다보니 그런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교우들이 신부님을 가까이서 겪다 보면, 신부님께서 사목에 관심이 있으신지 아니면 돈과 자리, 업적 같은 것에 관심이 있으신지 잘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알아도 신부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는 교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대놓고 이야기하는 교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교우들은 자신들의 고생을 말할 수 있고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신부님,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신부님을 찾고 있습니다. 소위 `사람 냄새 나는 신부님`을 찾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분은 신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알아주고 위로해 주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라고 하시며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두가 “예”하고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사람 냄새 나는 신부님, 어디 없어예?”

2017-05-18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 박정근 신부·포항 효자본당 부모에게 자식은 전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듯 이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서 전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게다가 자식이 한 명이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배우자를 잃은 홀아비나 과부에게 자식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전부라는 것을 누구나 다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 7, 11~17은 남편 없이 혼자 살아가는 과부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인 자식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긴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얼마나 슬피 울었으면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우는 모습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고 계십니다. 살려주는 이유를 루카 복음 7, 11~1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실 때에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병자를 고쳐주셨고(마태 14, 14),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부채도 탕감해 주시고(마태 18, 27),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가시고(루카 10, 33),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탕자를 받아주시는 예수님(루카 15,20)이심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의 어려움과 곤경을 절대로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면서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픔과 상처를 주님께 봉헌할 수 있는 믿음도 함께 지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혼자 살아가는 신앙의 삶은 너무나 힘들고 외롭고 지쳐버리기 쉽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내 삶의 아픔을 치유해 주시고자 내 곁에, 내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내 삶을 위로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내 삶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실 것입니다.“가엾은 자의 부르짖음을 주님 들으시고 곤경에서 건져주셨다”(시편 34, 6) 아멘.

2017-05-11

시류를 거스르는 용기

▲ 주국진 신부·대구 성토마스성당 주임천주교 대구교구 청소년국에서는 매년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해외 봉사활동을 가고 있습니다. 봉사활동을다녀온 학생들은 베풀러 갔다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쓰레기 더미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일상의 작은 일에 행복해하는 현지 주민들을 보면서 행복한 삶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했다고 합니다.가톨릭 교회는 지난해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라는 주제로 자비의 특별 희년을 지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난해 4월 24일 청소년을 위한 희년을 맞아 청소년을 위한 희년 담화문을 통하여 청소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시류를 거스르는 용기를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을 위대한 이상들에 바치십시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자비”, “시류를 거스르는 용기”, “위대한 이상”과 같은 말은 공부와 대학 입시에 매몰된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허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공부에 방해되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부모들의 원망어린 말도 들리는 듯합니다.청소년들을 만나보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사랑과 우정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정의감을 숨기지 않고 있으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들에 대한 자비심 또한 넉넉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랑의 손을 내미신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 관하여 들려주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더 높은 가치와 원대한 이상을 향하여 도전할 용기를 내비치기도 합니다.자신의 성공만을 바라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시류를 거스르는 도전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청소년들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며 시류를 거스를 용기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 외로움도 크지만 더 큰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을 생각하고 있으며 도움을 청하는 친구들을 위하여 기꺼이 시간을 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착한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격려해 주시고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자비로우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

2017-05-04

누구든지 날 사랑하면 내 말 지킬 것

▲ 이재현 신부·김천 신룡본당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잘 듣고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뜻을 거스르는 행동만 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여러분은 부모님을 사랑하세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부모님 말씀은 잘 듣고 따르나요?”라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우물쭈물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왜 그럴까요?”라고 물으니 대답을 잘 못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져야하는 것이 당연한데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것은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부모님, 남편, 아내, 자녀들의 말에 귀기울이고 잘 들어주고 계신지요?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잘 듣고 잘 지켜야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습니다.첫째,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피해가 오거나 내가 힘들다고 느끼면 언제든지 끝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 내가 원하는 식의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만 고집하는 사랑입니다. 스토커나 의처증, 의부증 환자의 사랑을 올바른 모습의 사랑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삐뚤어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셋째, 가슴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머리로만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의지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실제로는 따르지 못합니다. 부족한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요한복음 14, 23-29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혹여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잘 지킬 때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경험합니다. 주님께서 남기신 평화가 늘 우리 안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합니다.

2017-04-20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의 얼굴

▲ 신종호신부·구미 정평본당 사방이 온통 푸른빛입니다. 봄을 맞이하는 자연은 출발 준비를 마치고 100m 달리기를 시작하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들 앞다투어 잎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잎사귀 내지 말고 꽃 피우지 말라고 말려도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모든 생명에 사랑의 마음이 가득합니다.사랑이 가득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하고 예쁘게 꾸미고 뭔가를 만들어 냅니다. 창조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그 사랑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복음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남기시지요. 그런데 이 새로운 계명이 빵조각을 받은 유다가 떠난 직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의 범주 속에 심지어 당신을 배반한 유다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십자가 시작의 순간에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요? 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이라니요? 목숨까지도 다 내어 줌이 영광이라니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필리 2,8 참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에 그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의 영광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는 분명히 달라 보입니다. 무언가를 잔뜩 지니고 있는 영광이 아니라 다 내어줄 때의 영광입니다.유다의 배반이 시작되는 순간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 `서로 사랑`함. 주님께서 제자들을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 그 계명을 주십니다.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고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는 초대입니다. 배반자조차도 사랑함, 그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셨듯이.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동시에 지금 있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겠다는 다짐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은 이 지구를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거처”(묵시 21,3)는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2017-04-13

부활의 의미

▲ 류지현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시몬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배를 타고 손에 그물을 잡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사람 낚는 어부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버렸던 그물과 배를 다시 붙들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셨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제자들처럼 그물과 배를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어느새 다시 그것들을 잡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과 새 정신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옛 사람으로 돌아가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재차 삼차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가 새 사람으로 살도록, 주님께 불림 받은 빛의 자녀로 살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시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진정 세상의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도 제자들처럼 세상의 것을 추구하기보다 세상의 것을 주시는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시면서 다시금 그들이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형제 여러분!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버렸던 그물과 배를 다시 붙들고 있는 제자들처럼 혹시 나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렸던 그물과 배를 다시 손에 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괜찮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부활은 다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새롭게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낡은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롭게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7-04-06

사랑하지 않고는 안다고 말하지 말라

▲ 김상조 신부·현풍본당 “사랑하지 않고는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유고집 `거룩한 경청` 127쪽에 나오는 말씀을 한 줄로 요약해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허물까지도 덮어집니다. 그가 가진 허물을 개의치 않게 됩니다. 일흔일곱 번의 용서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가운데 왜 갈등, 분열, 다툼, 증오, 미움, 공격, 음해, 모함이 있을까요? 사랑이,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하기 전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그분의 이 말씀으로 이제 결백하고 고결한 사람, 죄 없는 사람, 격정과 육욕이 없고 거룩하고 완벽하고 선한 사람, 의롭고 신심 깊은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까지 모두 하느님 법정에 불려나온 느낌입니다.하지만 그렇게 거룩하고 고결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차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습니다. 그분이 계속해서 땅바닥에 글을 쓰고 계시는 동안 모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분은 돌을 든 사람들에게 그 돌을 던지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현명한 방법을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차츰 알아차렸습니다. `암, 나는 거룩하지! 그런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안되고말고!` 라며 발길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미 어느 정도 단죄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상쾌한 아침 햇살이 눈부신 가운데 이토록 밝은 날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한 쪽이 웅성거리더니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여인이 돌을 든 남자들 손에 무지막지하게 끌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부끄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수치심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평화가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가련한 여인을 보는 그분의 눈길에 연민이 가득합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께서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분이 그 가녀린 얼굴과 배, 혹은 가슴과 등을 겨냥해서 무자비하게 돌을 던지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차마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이 단 둘만 남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어떤 것에도 메이지 않고 기쁘고 자유롭게 갈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날 아침 너무나 밝은 햇살에 차마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한 여인의 그 “많은 죄를 용서받은”(루카 7,47) 기쁨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우리가 얼마나 죄에 잘 넘어가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더 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음을 요한 8,1-11. 복음의 여인을 통해 우리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2017-03-30

감추어져 있습니다

▲ 손상수 목사·포항산호교회 진주는 진주조개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주를 얻으려면 진주를 찾아야 합니다.알밤은 밤송이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밤을 얻으려면 밤송이를 찾아야 합니다.하나님은 인생들의 영원한 생명(영생)을 예수 안에 감추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생을 얻으려면 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이 땅에서의 인생은 70~80세가 기한으로, 그것은 마치 배터리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 생명으로는 결코 천국을 볼 수도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인생이 천국 가서 영원히 살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으로 접붙임을 당해야 합니다.하나님은 그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예수 안에 감추어 놓았기에, 그분과의 만남으로 인생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이 영생을 찾으려고 하면서 도덕, 수양, 선행, 존경, 고행 등의 길을 찾고 있으나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끝없는 방황이요, 종착역 없는 목마름일 뿐입니다.주 예수께로 돌아오십시오.영생은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분만이 참 생명이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당신은 아직도 엉뚱한 곳에서 영생의 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엄마 꽁치와 아기 꽁치가 태평양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갑자기 아기 꽁치가 슬픈 빛을 띠고 엄마에게 물었습니다.“엄마, 이 태평양 물이 다 마르면 어떡하지. 그럼 우린 죽잖아. 무서워 엄마….”그러자 엄마 꽁치가 여유 있는 웃음을 띠며 말합니다.“아가야, 이 태평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아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절대로 태평양 물이 마르는 법은 없단다.”“그래도 엄마, 혹시 다 마르면 어떡하지. 난 밤에 잠이 안 와. 너무 무서워….”어느 철없던 꽁치가 소년 꽁치가 되었습니다.“엄마, 태평양은 정말 넓고 신나는 곳이에요.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여요. 엄마, 도대체 이곳의 끝은 어디예요?” “글쎄, 나도 그 끝을 모른단다.”하나님의 은혜는 태평양과 같아서, 그것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넓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크신 은혜로 모든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하나님이 구원치 못할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흉악하고 과거가 많은 죄인 중 괴수라도,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은 태평양 같은 은혜로 인생들을 파멸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십니다.당신은 아직도 아기 꽁치와 같이,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채 불안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사랑의 음성을 외면하시겠습니까?

2017-03-23

주님은 정녕 사랑이십니다

방탕한 삶에서 돌아온 작은아들을 용서하며 성대한 잔치로 맞아주시는 아버지, 이 처사를 못마땅해하는 큰아들을 다독이며 용서에로 이끄시는 아버지….“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우리가 죄를 지어 어둠에 빠졌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무엇을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회개하며 용서를 청하는 작은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먼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기를 원하십니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 18) 회개의 최우선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순간 하늘을 놓쳐버린 것보다 더 어두운 것은 깊은 죄책감에 빠져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어둠이란 결국 사랑(빛)을 믿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형제와의 화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사랑이심을 믿는다면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부터 가져야 용서를 구할 수도, 서로의 소통을 이룰 수도 있는 것입니다.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믿는 것이 첫 번째이지만 자아의 진리를 개척하는 지혜를 익히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스로의 가치관을 살펴 더 높은 이상을 이룬다는 것인데, `더 높은 이상`은 하늘을 향한 흠숭에 맞닿는 숨결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빛의 결탁으로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입니다.` 라는 빛의 의지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가득하신 손길로 함께 파스카를 이루는 행운을 얻게 될 것이며, 또한 서로가 보편되기를 원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하나 되는 것이요 삼위일체적 실천이려니 용서와 사랑은 무거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은 정녕 설화(說話)가 아니라 실체적 운명, 실체적 사랑입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이 관념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바로 지금 여기 실체적 삶 안에서 하늘에 맞닿아 `주님은 정녕 사랑이십니다.`라는 진실한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서 파스카의 주인공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