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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끝으로 느끼는 부활

▲ 김준우 신부·욱수본당 주임“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19-31)토마스 사도는 요한 복음 20, 19- 31에서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하지만 증거를 확인한 다음에는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다. 토마스 사도처럼 “내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말하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눈에 보이는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보지 않고도 믿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은 드러내 줄 수 있다. 세상에 무슨 변고가 일어나도 이 행복을 건드릴 수는 없다.그냥 만두, 칼국수보다는 `손`이라는 단어가 추가됨으로써 느껴지는 아련한 감정, 그것은 아마도 손끝으로만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랑과 정성의 맛이 배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토마스 사도는 오요한 복음 20,19- 31에서 그 손끝으로 직접 주님의 부활을 맛보고자 한다. 마치 자기 손으로 지켜드리지 못했던 주님께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아서, 약속과 믿음과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다. 토마스 사도의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절규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되는 부활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는 부활체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다. 손으로 만져서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부활 체험을 토마스 사도는 원하고 있다.“우리는 그분을 뵈었소”라는 사도들의 말에 토마스는 우리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뵙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아니라 내가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서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유하신다. 원래 신앙의 체험이라는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며, 그러하기에 강렬한 것이다. 그래서 그 체험을 한 사람은 영원히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다 바치게 된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은 `내`가 아니라 `우리`이며,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마태 27, 25)라는 군중들의 말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는 비겁한 핑계의 말이다.우리는 흔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올바른 구분이 아니다. 믿음의 결단이라는 것이 두부 자르듯이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라가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일생에 단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릴 때마다 믿음의 결정을 늘 새롭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거듭거듭 제자 직분의 사명을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나의 신앙이 되지 못하면 작은 위기에서 쉽게 쓰러지고 만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해본 사람만이“하느님은 자비이십니다”라고 나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2016-04-14

헌금생활에 담긴 신앙의 비밀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 담임예물을 드리는 성도는 “이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에 대해 먼저 관심 갖지 말고 받으실 그 분에 대한 경배와 사랑이 봉헌의 모든 마음을 휘감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아진 예물이 어디에 사용되어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첫째, 레위인을 비롯해 성전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십일조, 토지의 맏물, 화제물 등은 하나님 외에 기업이 없는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했다.(신명기 18장1절)오늘날로 치면 교회를 풀타임 혹은 파트타임으로 섬기는 사역자들의 생활을 위해 재정을 사용하라는 말씀이다.둘째,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사회적 약자의 구제와 복지를 위해 사용토록 했다. 신약에서 구제와 복지의 성격의 헌금은 연보의 형태로 이뤄졌다. 고린도후서 8장2절에서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가 가난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힘대로 할 뿐 아니라 넘치도록 하였다고 칭찬한다. 초대교회는 이미 사도행전에서부터 시작해서, 물질의 부족과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 성도와 세상을 위해 공동체적 책임을 느끼며 자신들의 것을 떼어 나누었다.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십일조의 용례이다. 첫 번째 십일조는 하나님의 성소를 위해 일하는 레위인을 위해 사용하고 두 번째 십일조는 매년 성소를 방문하여 자신, 가족들,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성소에서 즐기게 하며, 세 번째 십일조는 매 삼년 마지막에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됐다. 모든 십일조를 합치면 십일조가 소득의 23.3%가 되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백성공동체의 구제와 복지에 대한 일종의 사회안전망을 형성한 것이다.성경적으로는 교회의 재정은 교회를 섬기는 풀타임, 파트타임 사역자들의 생활을 위한 것을 제외한다면, 유대공동체에서 교육은 각 가정의 몫인 것을 고려하면, 구제 봉사, 복지 그리고 교육에 전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자가 살핌과 돌봄을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적 존중을 받는다. 각종 예물의 사용처를 명료하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 나라의 방향을 사회 안전망으로 형성코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담긴 것이다.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재정 지출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 부분이 너무나 많다. 비본질적인 곳에 재정이 남발되며, 교회의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재정을 쏟아 붓는다. 이것은 지상의 교회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주신 물질을 이웃의 연약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더욱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성경적 재정생활이 확대되는 교회 그리고 성도되기를 바란다.

2016-04-07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송창현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복음 20, 19-31의 주제는 신앙과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결코 믿지 못하겠다던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마침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주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오늘날의 불신앙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는 것입니다.첫째, 무관심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앙은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명백히 부정적인 의사표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싸늘한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무관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실천이 아무런 매력을 가지지 못하고 그 어떤 관심도 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 없이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둘째, 세속주의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앙은 세속주의의 모습을 가집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복음적 가치가 그 중심이 되어야할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의 정신과 가치, 그리고 행동방식이 중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말로는 신앙과 교회를 내세우면서도 철저히 세속적인 행태들을 우리는 봅니다. 이것은 물질주의, 성과주의, 교회 안의 출세주의, 지역주의, 연고주의, 집단 이기주의, 종교적 정치꾼들의 권력 다툼, 정치적 집단행동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셋째, 근본주의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앙은 근본주의의 모습을 가집니다. 근본주의자들은 겉보기에는 아주 철두철미한 신앙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표현 방식과 예절에 갇혀있는 탓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지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제한하려 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관습적인 신조와 실천을 절대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지는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하고, 신앙을 위한 지성의 역할을 무시하는 반지성주의의 형태를 띱니다. 오늘날의 신앙인은 현대 사회의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불안에서 회피하려고 쉽게 과거에로 회귀하려는 근본주의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를 흐려놓고 맙니다.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은 여전히 신앙과 불신앙의 주제와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의 불신앙이 여러 다양한 모습을 가지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의미를 다시금 묻게 됩니다. 이 질문에서 우리 자신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는 과연 그리스도 신앙인인가? 나는 어떤 신앙인인가? 신앙은 나의 삶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를 진지하게 물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불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모시는 기쁘고 행복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2016-03-31

복음을 아시나요?

▲ 손상수 포항산호교회 목사복음(福音)이란 복 복(福)자 소리 음(音)자, 복된 소리 즉 기쁜소식입니다.인간은 죄로 인해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이며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상놈 아들 상놈, 상놈 손자 상놈입니다.상놈 족보에서는 양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검둥이 아들 검둥이, 검둥이 손자 검둥이입니다.검둥이 족보에서 흰둥이가 나올 수 없습니다.인류의 가장 첫 번째 조상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죄인 아들 죄인, 죄인 손자 죄인….아담의 족보에서는 자손만대로 죄인만 태어납니다.의인이 나올 수 없습니다.아니, 그러면 이렇게 착하게 살아온 나도 죄인이란 말인가?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죄를 지어서 죄인이기 이전에, 모든 인간은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서 알게 모르게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완벽한 죄인입니다.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인간관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복음은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음미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차려놓은 만찬이지, 그 만찬이 사람들의 입에까지 그냥 들어오지는 않습니다.멍청하게 있어도 그냥 입에까지 하나님이 넣어 주는 것은 기계적이지 복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로 거기 가서 내 손으로 집어 먹어야 비로소 생명의 복음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알기는 알고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냥 막연하게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그것은 그림의 떡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이제, 철저히 멸망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선물은 받는 자에게만 선물이 되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도 참여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며 완성품입니다. 여기에 더해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됩니다. 그냥 선물로 받으면(예수만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당신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복음의 만찬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까?

2016-03-24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김종기 신부·안심종합사회복지관장 금호성당 주임으로 있을 때다. 학생들 중에 토요일 교리시간보다 일찍 오는 학생들이 사무실에 와서 물을 찾습니다. 어떤 물을 찾느냐고 했더니, “생수”라고, 가게에서 파는 병에 담긴 먹는 물을 찾습니다. 그래서“수도가 바로 옆에 있는데”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신부님 수돗물을 어떻게 먹어요?” 합니다. 속으로 `어떻게 먹긴, 입으로 먹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인체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중요하다 보니 수돗물은 불안해서 못 먹고 가게에서 파는 생수만 사다 먹는 모양입니다. 통계적으로 사람은 하루 1리터 정도의 물을 먹는다고 합니다. 1년 365리터, 10년이면 3천650리터, 평균 70세를 산다고 하면 25만5천500리터가 됩니다. 평생 10t 트럭으로 2천550대 정도의 물을 마시는 셈입니다. 엄청 마십니다. 그래도 또 목이 마릅니다. 물 뿐만이 아닙니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또한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대로 채워지지 못할 때 심한 욕구불만이 생기고, 그 때문에 갈등과 불행을 느낍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사람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욕구합니다. 해도 해도 만족을 못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갈증을 느낍니다. 여러분이 얻은 것들, 여러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에 여러분은 만족하십니까?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도 우리는 현재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잠시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에 자신의 온 정열을 바치는 것,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갈증을 느낍니다. 죽을 때까지 인간은 이러한 갈증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무엇에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 우리들의 갈증을 채워줍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우리들의 갈증을 해갈해 줄 수 있을까요? 복음(요한 4, 5-42·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주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한 갈증을 느낀다면, 이 복음을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미리 알고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이미 주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진정 무엇을 얻어야 하는 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갈증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요?형제자매 여러분, 성체 성사를 통해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 삶의 갈증을 풀어 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예수님을 만나 삶의 진정한 목마름을 깨닫고 해갈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목마름을 알게 해주시고, 그 갈증을 풀어줄 구원의 영원한 샘물을 마실 수 있는 은총을 주십사 함께 기도드립시다. 아멘.

2016-03-17

“말씀이 능력이 되게 하라”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 담임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먼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통과한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회개한다.말씀을 피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자신의 가슴을 찌를 때 돌로 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죄가 무엇인가?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거나 순종에 부족한 것이 죄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빗나간 줄 몰랐다.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주인에게 “약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는 책망을 듣고 어두운데 쫓겨 갔다.또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성경 밖으로 돌지 말라. 생각보다 성경 밖에서 도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생명 밖으로 돌면 생명이 없다.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셨다. 포도나무는 말씀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 안에 있어야 하고 말씀은 내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마지막으로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사람이다.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버린 자들이다. 예수님도 그들을 버렸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을 섞으면 안 된다.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에 섞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을 섞어 불순종하지는 않았는지? 섞었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죄인들에게는 죄를 씻기 위해 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필요하다. 우리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필요하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 되게 하라. 교만은 죄의 분량을 모르는 것이다. 교만은 말씀의 능력이 내안과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라.명령으로 받을 때 순종 할 수 있고, 복종할 수 있다.

2016-03-10

진정으로 주님 믿고 따르는 길

▲ 이지훈신부·군종 사제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말뿐인 신앙이 되는 경우도 있고 실천이 없는 믿음이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잘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루카 17,5-10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에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직접적으로 알려주십니다.그것은 첫째,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고 살아갔던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우리의 말뿐인 신앙, 실천 없는 그러한 믿음을 향해 주시는 주님의 따끔한 한마디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올바른 믿음, 참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둘째,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흔히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하느님은 내 옆에서 나의 영광을 위해 힘써주시는 조력자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이루시고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역할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쓰여진 도구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더없이 겸손해 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특별히 한국천주교회는 매년 10월 첫째 주 일요일을 군인주일로 정해두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통해 나라를 위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 많은 군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인주일이 아니더라도 이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기에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며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 그것은 바로 믿음과 겸손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정 주님을 믿고 따르는 여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6-03-03

율법에서의 한자 한획

▲ 장영일신부·천주교 군위묘원 담당 10년도 더 전에 어느 지방의 본당 신부를 할 때의 일입니다. 겨울의 어느 주일날 새벽 미사 시간이었습니다. 강론을 끝냈는데 처음 보는 교우 몇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미사를 드리며 늦게 들어오신 그분들을 보았습니다. 영성체 시간이 되어 그분들이 제 앞에 오셨습니다. 성체를 모시려는 그분에게 “늦게 오셔서 성체를 드릴 수 없습니다.” 라고 부드럽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미사를 마쳤습니다. 늘 하던 대로 문 뒤에 서서 인사를 드리는데 그분들이 제게 다가와서 왜 성체를 못 모시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늦게 오셔서 그렇다고 말씀드리자 그분들이 그렇게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객지에 와서 겨우 성당을 물어서 찾아 왔는데 이제 어디에 가서 또 미사를 드리느냐고 하면서 아주 서운해 하시며 돌아서셨습니다. 이분들의 서운해 하는 모습이 제 안에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제 안에서 바리사이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저의 군대 시절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철원의 전방 부대에서 후반기 신병 교육을 받으며 지내던 때의 일입니다. 추운 겨울, 눈에 덮인 부대에서 성탄절이 와도 성당에도 가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파서 읍내를 지나 상급 부대의 의무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나던 길에 성당을 보았고 귀대하는 늦은 저녁 시간에 동네의 성당 근처의 식당에서 인솔병과 함께 저녁을 시켜 놓고 기다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인솔병에게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옆의 성당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 문을 두드리자 벽안의 노인 신부님이 나오셨고 몸에 맞지도 않고 때에 절은 군복의 저를 보시고 성당으로 데리고 가서는 묻지도 않고 성체를 영해 주시고 제 머리에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늦게 온 저를 찾아 다녔던 인솔병에게 말로 할 수 없는 욕을 들었습니다. 그날의 기억 때문입니다. 눈물 젖은 그날의 영성체는 제 안에 가장 감격적인 시간으로 간직해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형편과 사정을 헤아리기 보다는 원칙을 들이대는 저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그토록 나무람을 듣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았습니다.마태 복음 5장 18절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점 한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엄하게 지켜져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코린 2장 7절은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점 한획도 없어져서는 안 되는 성경 안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지혜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서 일점 일획의 잘못도 없이 살도록 해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지혜이겠습니까?하느님의 지혜는 십자가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사람을 향한 끝없는 용서, 무한한 자비와 사랑, 이것이 성경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지혜이며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성경 말씀 전체를 담아내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처벌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자비와 사랑만이 사람을 살립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결국사람을 살리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2016-02-18

한 알의 밀알이 됩시다

▲ 이성진신부·칠곡성당 주임 여러 본당을 다니다보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서 본당의 분위기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지난 일들을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발하고, 비방하고 험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본당의 모든 행사에도 소극적이며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에 가능하면 상대방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본당 일에도 적극적이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동참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부류에 속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일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며 본당의 모든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도 본당에서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는 많은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의 본당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한 알의 밀알로서 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능력을 봉헌했고, 어떤 분은 자신의 재물을 봉헌했고, 어떤분은 자신의 기도를 봉헌했고, 어떤 분은 자신의 시간을 봉헌했습니다. 나름대로 큰 희생을 바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의 본당이 있게 하였고 앞으로도 이런 분들에 의해서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참 교회 공동체로 발전할 것입니다.소금은 자신이 물에 녹아 없어짐으로써 그 맛을 내고, 초는 자신의 몸을 녹이고 심지를 태움으로써 빛을 발산합니다. 또 조개와 굴은 아주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하여 모래알을 변화시켜 고귀한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자신을 희생하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들은 부모보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준 사람만이 현세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로 인해 교회는 점점 더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교우 여러분!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한 알의 밀알이셨고, 우리가 따라야 할 밀알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새 2016년 새해의 첫 달이 지나가고 두번째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가 시작하면서 계획했던 일들을 차근차근 되돌아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6-02-04

내게 있는 것으로 주는 삶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베드로와 요한은 제9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다.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가 구걸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은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고 하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일어나 걸었다.이들에게는 없었던 것과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은과 금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은과 금이 없었다. 즉 돈이 없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물질로 의식주는 해결하나 얻지 못하는 것이 많다.제자들에게는 기도가 있었다.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기도했다. 오후 3시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 이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도구이다.이들에게는 사랑이 있었다.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면서 몇 푼의 돈을 던져 주었을지라도 그의 손을 잡아 준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은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예수의 이름은 능력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한복음 14장 13절) 예수는 구원자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한다.이들에게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우리는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보고, 주고 싶어 해야 하며, 주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주는 자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결론적으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찬송했다.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늘 찬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며 찬송해야 한다.

2016-01-28

이웃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 정황래 신부·천주교대구대교구“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2011년, 우리는 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 시대의 복음화`를 실천할 것을 다짐하며, 주님의 이 말씀을 함께 기억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주님의 모습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한 이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라는 주님의 간절한 부르심이었고, 우리 모든 교구민들은 그 부르심에 기꺼이 실천하는 삶으로 응답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이웃`의 사전적 의미는 `가까이 있는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킵니다.`이웃`의 복음적 의미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렇듯, `이웃`은 `가까이 가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가까이 가는 사람`입니다.“그를 보고서는, 그에게 다가가, 돌보아 주었다.” 강도 만난 이를 지나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돌보아`준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 아니었지만, 그는`가까이 다가감`으로서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 되었고, `자비`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은 가까이 다가감에서 시작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야지만 서로 `이웃`이 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교정(矯正), `뒤틀린 것을 바로잡다.`오늘날, 마음과 삶을 나눌 기회가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사회는 양심이 뒤틀리고, 마음이 뒤틀리고, 가정생활이 뒤틀리고, 사회생활이 뒤틀리고, 관계가 뒤틀린 이들로 인해 점점 각박하고 차가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그렇기에 교정사목은 이렇게 `뒤틀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이웃`에 대한 `이웃`의 관심을 촉구합니다.회개하는 `이웃`의 죄까지도 은총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그 `이웃`의 죄로 인해 깊은 아픔 속에 살아가는 또 다른 `이웃`의 상처를 하느님께서 치유해 주시리라 믿기에,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하느님의 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사마리아인처럼, 누구라도 먼저 `다가가야` 서로 `이웃`이 될 수 있고, 누구라도 먼저 `다가가면` 서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한 이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교정사목과 함께 `이웃`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

2016-01-21

본당, 빠로키아

▲ 박용욱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떠돌이셨다. 방랑벽이 있어서도 아니요, 거릿귀신이 들어서도 아니다. 애초부터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고 찾아가셨다. 말 그대로 종횡무진, 신출귀몰, 머리 누일 곳도 없이 곳곳을 다니시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 혼인 잔치에 가셔서 흥을 돋워주시고, 아들을 잃은 과부와 오빠를 여읜 누이의 눈물 젖은 상갓집에 나타나셔서 재회의 기쁨을 안겨 주기도 하셨다. 어두운 밤 풍랑을 헤치고 제자들을 찾아오시는가 하면 아침부터 제자들과 생선을 잡수시기도 했다. 그분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아픈 이를 고치며 마귀 들린 이에게 제정신을 찾아주시러 사방팔방을 다니셨다. 공생활 내내 돌아다니시던 분이셨으니, 죽었다가 깨어나셔서도 생전의 그 버릇 버릴 리가 만무하다. 성전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넙죽넙죽 예물을 받아 드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면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 제자들이 모인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셨다. 그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는 결코 외롭지 않다`고 말씀을 건네신다. 음식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신다. 지친 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시고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 두려움에 숨어 있는 이들과 더불어 뱃속을 채우시면서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신다. 루카 24,35-48 말씀처럼.예수 그리스도의 이토록 탁월한 기동력을 감안하면, 한 자리에 눌러만 있어서는 결코 그분을 따라갈 수 없다. 엉덩이 붙이고 퍼져 있을 수가 없다. 발 벗고 달려가도 따라가지 못할 지경인데! 그래서 예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떠돌이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세상을 떠다니는 순례객, 천상 그렇게 살 팔자임을 받아들였다. 오죽하면 한자리에 모여 머물면서도 그곳을 `빠로키아`라고 불렀다. 오늘날`본당`을 뜻하는 라틴어 빠로키아는 희랍말 파로이키아에서 왔다. 파로이키아는 원래 눌러 사는 곳이 아니다. 멀리 돌아다니다가 잠시 들러서 기력을 회복하는 곳이다. 사막속의 오아시스요 고된 노동현장의 함바집이다. 이를테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쉬어가는 휴게소 같은곳이다. 기름을 채우고 기력을 찾았으면 다시 갈 길을 가야한다. 빠로키아, 본당은 그런 곳이다. 주일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로 힘을 되찾아서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힘차게 나가야 한다.지난 몇 해 동안, 스승을 따라 곳곳으로 파고 들어간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모습을 생각한다. 가난한 이의 눈물과 한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밀어붙이고` `몰아붙이는` 토건 개발의 현장에서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일깨우려 묵묵히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던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생각한다. 병원에서, 장례식장에서, 가난과 싸우고 장애와 싸우는 곳에서 묵주를 방패삼아 버티어 내던 교우들을 생각한다.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스승 그리스도의 모습이 두려움 속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희망과 신뢰의 참뜻을 가르쳐 주었다면, 오늘도 그런 희망과 신뢰를 갈구하는 눈동자가 있고 목소리가 있다. 스승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라 나서서 그 시선과 목소리에 답해주라고 말씀하신다. 본당, 빠로키아는 그런 응답이 시작되는 자리여야 한다.

2016-01-14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말씀

▲ 이상학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요한복음은 네 개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단순하다. 그러나 가장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담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다른 세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실제 삶과 메시지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삶에 담긴 영적 비밀을 캐내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커튼 뒤에 가려진 비밀한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 영적 비밀은 이 땅에 오신 인간 나사렛 예수가 사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대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마치 바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다만 피부로 느낄 수만 있는 그분을 묘사하기에 어렵다.반면에 요한복음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 분과 사귀고 교제하며 그 분의 나라에 완전히 노출될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축복이 있다. 내 영이 깨어나 하나님을 향해 인생의 꽃이 활짝 피어나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변화이다. 모든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다. 그 분을 만나야 내 삶의 문제가 풀리며, 묵은 영혼이 기지개를 펴고 살아나며, 완악한 자아의 틀을 깨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된다.요한복음은 이 변화의 축복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먼저, 요한복음 1장 1~3절은 우주의 기원, 세상의 뿌리, 만물의 근본을 말씀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여기서 말씀은 흔히 `로고스`라 한다. 이 땅에 오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계셨다고 증언한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근원이요 뿌리라는 뜻이다. 연이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여기서 엄청난 비밀의 커튼이 열린다. 우리 눈에 보이는 만물 중에 어느 것도 저절로 생긴 것이 없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자연도, 산도, 들도 저절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서 자기 자신 또한 우연히 지금 이 자리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말하기를 “지은 것 중에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엄청난 도전이 들어 있다. 세상의 중심이 과연 누구이냐? 세상이 과연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는 질문이다.세상의 중심은 물질이 아니다. 세상의 속에는 원자와 더 미세하게는 분자와 전자의 회돌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세상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여기에는 내 이기심을 깨뜨리고 완악한 심령을 찢어 나를 거듭나게 하기를 원하시는 뜻이 담겨 있다.내가 중심이고 하나님이 주변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요 나는 그 분 덕택에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다. “그가 세상의 중심이요, 내 인생의 중심이다.”

2016-01-07

희망이 있는 싸움

▲ 박영일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사목국장 신앙인이 비신앙인보다 5~6년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또 병원에 있는 환자도 신앙인이 비신앙인보다 훨씬 빨리 낫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신앙인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낫는다는 희망,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고통이 없는 기쁨이 가득한 것에 대한 희망,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어렵고 힘들어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잘 견뎌 내는 것입니다.따라서 희망이 있다면 지금 힘들어도 이겨낼 힘이 나고 행복한 것입니다.시인 도종환씨도 자신의 시 `암병동`에서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 일 때도 우리는 온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하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 부정, 부패 등과 맞서 싸우는 것도 희망이 있는 싸움이며, 그리스도인이 겪는 십자가도 희망이 있는 것이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장차 받을 행복에 비한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희망이 있는 고통이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현재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가셔서 당신의 감추어진 신적인 면모를 보여 주십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수난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정신력이 그렇게 강하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당신의 신적인 면모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신앙인이라고 하면서 기쁨이 없고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참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다보면 고통 받고 짜증스러울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약속한 예수님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루카 9:28~36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은 결국 우리가 희망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필리 3 :17~41에서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새기며 우리도 언젠가는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집시다.“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 : 21)

2015-12-31

총명한 신자

▲ 김준우신부·대구 욱수성당 주임 우리 말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총명(聰明)하다고 한다. 이것은 귀로 듣고(聰) 눈으로 보는 일(明)이 제대로 되는 것, 다시 말해서 귀가 밝고 눈이 잘 보이는 상태를 뜻한다. 그만큼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 중에서도 듣는 일과 보는 일이 가장 대표적인 기능임을 말해 준다.그런데 성서에서는 흔히 “듣는다.”는 말로써 하느님께 대한 간접 경험을 가르치고, “본다”는 말로써 그분께 대한 직접 체험을 지칭한다.오직 현세적 유익과 육신 삶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한 것만을 추구하는 제자들은 더 이상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다. 무릇 신앙이란 상대방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인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면 마음을 열수가 없다.이제 그 분의 말씀은 더 이상 생명의 말씀이 아니다. 딱딱하고, 거칠고, 굳어있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되어버렸다. 제자들도 이제 유대인들과 똑같이 투덜대기 시작한다.“이번에는 할 수 없다. 다음 기회에 한번….”“생각을 좀 해보고 난 다음.”“이 정도는 괜찮겠지.”“여기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그게 아니랍니다.”“세상이 양보해서 당신께 맞출 수는 없지 않습니까?”머리로 바쁘게 계산하며 핑계와 궤변을 늘어 놓으려 한다.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은 언제나 듣기에 무척 거북하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이제 제자들은 신앙과 불신앙사이에 선택해야 한다. 말씀 안에 머물던지, 아니면 따라 갈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하거나, 배반하던지.총명(聰明)한 신자여러분!옛말에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는 것은 덕과 행실을 갈고 닦는 숫돌과 같다고 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되어 잘 들을 수(聰) 있어야하고 새로운 믿음의 눈으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거룩하신 분`을 잘 볼 수(明) 있어야 하겠습니다.`그 분과 함께 있다.`와 `그 분이 나와 함께 있다.``너는 나와 함께 간다.`와 `나는 너와 함께 간다.``고객을 만족시키는 것`과 `고객이 만족하는 것`두 문장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오늘 우리 모두 베드로 사도와 함께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을 다시 한번 신앙 고백합시다.

2015-12-24

재잘거림

▲ 이병훈신부·들꽃마을 원장 “트위터”(Twitter)는 “What are you doing?”(지금 뭐하노?)이라고 적혀있는 빈 공간에 140자 이내의 짧은 글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그 모양이 참새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것 같아 “트위터”(재잘거림)라고 한다. 스마트폰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사람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재잘거릴 수 있으며, 나의 재잘거림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마다 외롭지 않고 즐겁다. 마침내는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무리를 이루어 요구하고 힘을 과시한다. 이 트위터가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에 영향을 줬다고도 하고 한국의 정치에도 큰 변동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어떻든 사람들은 사람들과 재잘거리고 싶어 한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아담이 외로워 보여서 하와를 창조했다고 하지 않는가?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은 큰 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불편한 소리에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히,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루카 25,49). “너 어디 있느냐?”(창세 3, 9. Where are you?)라며 아담을 찾아 나서던 하느님의 재잘거림은 “돌 속에” 묻혀버렸다.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재잘거림들이 있다. 그리고 각자 원하는 대로 모여 힘을 이루어 마치 소리가 큰 것이 옳은 것처럼 요구하고 있다. 그 속에서 아무 소리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교회조차도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재잘거리는 것이 힘든데 그리스도 신자들은 오죽하랴? 신자들이 삶 속에서 아무런 말 없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힘듦을 지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있다. 마치 스승에 대한 죄책감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눈치 보며 “멀찍이 떨어져서 불을 쬐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재잘거리지도 반대로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재잘거리신다면 우리는 큰 소리들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할지도 모른다.“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멀찍이 떨어져서” 외치던 나병환자 열명과 죄 많은 세리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길을 보여준다. 아무 것도 아닌 나병환자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외치던 세리는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재잘거려 치유받고 용서받았다. 가슴 졸이던 미리암은 기회가 닿자 달려가 준비된 재잘거림으로서 공주를 설득하여 모세를 살렸다. 하느님께 재잘거려 치유 받고 용서받은 기쁨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 재잘거리고 싶도록 만든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 기회를 보고 준비하게 만든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재잘거림과 기회가 닿는 대로 사람들에게 재잘거리고 행동할 수 있는 준비이다.이 두 가지를 통해 주님께서는 침묵의 돌 속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우리의 일들을 의미 있게 해주실 것이다.

2015-12-17

사랑의 계명 율법의 열쇠

▲ 최환욱 신부·칠곡가톨릭병원장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구약시대에는 지켜야할 율법이 무려 613가지나 있었습니다. 오늘날 발전된 사회에서 각 나라가 만든 수많은 법보다는 턱없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백성들의 생활을 규제하기에는 충분히 많은 수의 법규들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준수만이 충실한 백성의 판단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러한 생각은 그들에게 오히려 엄청난 무게의 족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가식적인 행동들과 바른 정신이 결여된 맹목적인 율법주의로 변질되기도 한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조목들에 매여 있는 그들에게 율법 문구 안에 매여 있지 말고 그 율법의 근본정신 속에서 율법을 보고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들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이 말씀은 사랑의 계명이 모든 계명을 대표하는 계명이 아니라 모든 계명의 근본이며 그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사랑을 빼고서는 그 수많은 율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율법들은 하느님과 인간들의 관계를 정리해 주는 규정들이며,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입니다. 그 규정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사랑은 없어서는 안 될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일 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의 근본정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꼭 지켜야 할 명령`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좁은 생각입니다. 사랑은 결코 강제로 실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자유로운 의지로 이타적인 판단과 감정과 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다는 것은 단순히 명령을 실천하는 것을 넘어 `자유의지로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 속에 명령이라는 계명의 흔적이 녹아 없어져 버릴 때 사랑의 계명은 가장 잘 실천되고 있는 것입니다.

2015-10-22

마지막 숙제

▲ 손상수 포항산호교회 목사 어렸을 적 학교 숙제 때문에 가슴 앓이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 말씀대로 초저녁에 숙제부터 일찍 해놓고 놀면, 놀아도 아주 재미있게 놀 수 있지만, 저녁먹고 나중에 해야지 하고 숙제를 미루다 보면 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숙제를 안하고 내일 학교 가서 선생님에게 혼날 걸 생각하면 얼굴에 수심이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우리 인생에도 숙제가 있습니다. 결혼하는 숙제, 자식 잘 키워야 하는 숙제,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야 하는 숙제, 노후대책의 숙제 등등. 그러나 이런 숙제들은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부부간에 힘을 합하면 얼마든지 잘 해결 할 수 있는 숙제들입니다.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힘을 모아도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마지막 숙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숙제이겠습니까? 인간의 영원한 마지막 숙제, 그것은 바로 죽음의 숙제·요단강 숙제, 무덤의 숙제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수천 년이지만, 이 숙제를 풀어 보려고 큰소리치고 시도한 사람은 많지만, 정작 인류 앞에 이 숙제를 완전히 풀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 숙제를 풀어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숙제를 못해 쩔쩔매면 할 수 없이 엄마가 다 해 주듯이, 인간이 이 마지막 숙제를 하지 못 해 끙끙 대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 숙제를 풀어 주셨습니다.하나님은 먼저 대표선수를 뽑으셨습니다. 천하인간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에 하나님은 대표선수로 당신의 아들을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에게 인간의 몸을 덧입혀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유대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죽음의 숙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덧입으시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드디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숙제가 죽음의 숙제이기 때문에, 당신이 친히 숙제 속으로, 죽음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또 장례를 치르시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숙제가 무덤의 숙제이기 때문에 이숙제를 풀기 위해 친히 무덤 속까지 들어가신 것입니다.그럼, 이 숙제를 푼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3일만에 무덤문을 열고 부활하는 그 순간에,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죽음의 숙제, 무덤의 숙제가 풀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이제 죽음은 숙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2011년 전에 이미 이 숙제를 푸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시면서 이 숙제를 푸신것이 아니라, 당신도 친히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 하심으로 이 숙제를 푸셨기 때문에, 성도라도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도 예수님과 똑같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2015-10-15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박상일 교포사목 신부·美 한국순교자성당“관심이 가는 일에는 누구나 신경을 쓰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보람을 기대합니다. 그와 반대로 마지못해 하는 일에는 그저 모양이나 낼 뿐, 마음을 기울여 애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상급, 우리 삶의 이유이자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얼마나 고대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 마음이 가 있는 데가 어디입니까”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약속을 한다. 약속은 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도 사람들과 약속을 하셨다. 노아에게는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의 별들만큼 많은 후손과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시고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실 때 백성들은 하느님께 다짐하며 약속했다.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24,7) 하고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표현했다.지혜서 18.6~9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해서 약속을 충실히 지키신다는 것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법에 동의하며 충실해야 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다. 하느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계명을 어기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사람들과 맺은 약속을 완성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충실한 믿음을 간직하시고, 제자들에게도 충실하라고 이르신다.루카 12.32~48에서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면 항구한 인내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인내하며 깨어 있는 충실한 종처럼, 신앙인들도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항구하게 희망할 수 있다. 그리고 희망하기에 우리는 그분에게 충실하게 응답할 수 있다. 히브리서 11.1~2.8~19에서는 아브라함의 충실한 믿음을 상기시키며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도 충실한 믿음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충실한 응답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신다.

2015-10-08

된장 같은 인생을 삽시다

▲ 손병렬 포항 중앙교회 목사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 식단에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음식이 아마도 고추장과 된장일 것입니다. 고추장이 매콤하고 칼칼한 맛을 낸다면, 된장은 구수하면서도 토속적인 맛으로 우리 입을 달래 줍니다. 된장 예찬론자들은 된장을 `세계에서 가장 구수한 보약`이라고 자랑합니다.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줘서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고 해독 작용이 있어 술이나 담배, 중금속의 독성을 중화시켜 준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된장국을 먹는 사람은 위암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세계 최장수국인 일본의 경우 우리의 된장과 성분이 비슷한 `미소시루`나 `낫토`를 즐겨 먹어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있습니다.바라기는 우리의 인생도 된장과 같은 덕스러운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 맛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과 섞여서 살아가고, 섞여 있으면서도 자신의 고유함을 지켜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변하고 바꿔 버린다는 것입니다. 변화해야 살 수 있는 시대이지만 세월이 변해도 결코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순간을 살더라도 자신의 맛을 오래도록 지켜갈 수 있는 신념,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오래토록 변함없는 자신의 맛을 지켜가는 인생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또한 우리 안에 비리고 기름진 냄새로 가득한 부분들을 과감히 걸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더 정결하고 거룩함을 지켜가고, 유지해 가는 삶이 혼탁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절실히 요구되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강하고 굳어지고 아파하는 것들을 보면서 부드럽게 만들고 또 그렇게 다른 이들이 자신을 가꿀 수 있도록 돕는 선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끝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조화로움 속에 참된 평화가 깃듭니다.우리의 인생이 된장 같이 구수한 맛을 내는 언제 먹어도 물리지 않는 그런 덕스러운 인생이길 소원해 봅니다.가을을 맞으며 된장 같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오늘은 된장국을 먹어야겠습니다.(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2015-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