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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느끼는 부활

등록일 2016-04-14 01:34 게재일 2016-04-1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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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우<br /><br />신부·욱수본당 주임
▲ 김준우 신부·욱수본당 주임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19-31)

토마스 사도는 요한 복음 20, 19- 31에서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하지만 증거를 확인한 다음에는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다. 토마스 사도처럼 “내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말하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눈에 보이는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보지 않고도 믿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은 드러내 줄 수 있다. 세상에 무슨 변고가 일어나도 이 행복을 건드릴 수는 없다.

그냥 만두, 칼국수보다는 `손`이라는 단어가 추가됨으로써 느껴지는 아련한 감정, 그것은 아마도 손끝으로만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랑과 정성의 맛이 배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토마스 사도는 오요한 복음 20,19- 31에서 그 손끝으로 직접 주님의 부활을 맛보고자 한다. 마치 자기 손으로 지켜드리지 못했던 주님께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아서, 약속과 믿음과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다. 토마스 사도의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절규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되는 부활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는 부활체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다. 손으로 만져서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부활 체험을 토마스 사도는 원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뵈었소”라는 사도들의 말에 토마스는 우리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뵙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아니라 내가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서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유하신다. 원래 신앙의 체험이라는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며, 그러하기에 강렬한 것이다. 그래서 그 체험을 한 사람은 영원히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다 바치게 된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은 `내`가 아니라 `우리`이며,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마태 27, 25)라는 군중들의 말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는 비겁한 핑계의 말이다.

우리는 흔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올바른 구분이 아니다. 믿음의 결단이라는 것이 두부 자르듯이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라가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일생에 단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릴 때마다 믿음의 결정을 늘 새롭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거듭거듭 제자 직분의 사명을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나의 신앙이 되지 못하면 작은 위기에서 쉽게 쓰러지고 만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해본 사람만이“하느님은 자비이십니다”라고 나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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