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말보다 행동으로

▲ 이호봉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언젠가 교리 신학원에 가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앞에 두고 강의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수녀님들 앞에서 강의를 하려니까 쉽게 말문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2시간 강의를 힘들게 겨우 1시간에 마쳤습니다. 나중에 강의 마치고 방에 들어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수도자들 앞에 선 나의 삶이 부끄러워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완전한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들에게 얕은 신학지식을 가지고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가르치는 대로 정말 잘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신부는 죽으면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는 죽으면 귀만 천당 가고, 평신도는 죽으면 발만 천당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사제인 나는 참 말을 많이 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말 많은 이 세상에, 말은 잘 못해도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많은 말로 잘난 체 하며, 듣는 사람의 귀와 정신을 어지럽히고 현혹시키는 사람보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으로 겸손하게 살며, 보는 사람의 눈과 정신을 맑게 하는 그런 사람이 그립습니다. 적어도 나도 그런 사람들 축에 속하고 싶은데, 여전히 말 많은 나를 보면 아직은 욕심인 듯합니다.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번지르르 말만 잘 하고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말은 잘 못해도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셨듯이 목숨 바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실천이 어려운 법입니다. 사랑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말수는 줄이고 행동으로 사랑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래서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2016-09-29

꿈을 심는 `꿈 못자리`

▲ 임석환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과거의 청소년들에게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 일로 느껴졌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될 만큼 무서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의 청소년들도 그럴까요? 이곳의 아이들을 보면 학교 밖 청소년들이 학업을 중단하는 이유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집안 사정이나 사고, 비행 등으로 학교를 원치 않게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학교를 그만 두고 싶으면 망설임 없이 그만둡니다. 대부분은 단순히 학교가 싫어서 그만두는 경우입니다. “학교가 싫으니 당장 그만둔다!” 과거에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요.`니트(NEET)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Not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라는 말의 약자로 아무런 교육이나 취직, 훈련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일명 `캥거루족`이라고도 합니다. 그냥 집에서 부모님이 해주는 밥만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 일쑤인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말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질 상황입니다. 학교 밖 아이들 가운데 거의 70~80%가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그냥 놀고 싶어서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학교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말이지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경민(가명)이라는 아이도 그렇습니다. 삶의 목표라던가 계획 같은 것은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학교를 나온 이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합니다. 학업중단에 대한 후회도 없이, 지금의 삶에 대해 별 어려움 없이 만족하며 지내는 아이입니다. “왜요?”, “몰라요.”,“싫어요!”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집 밖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이런 아이는 상담사들에게는 내담자로서 적당한 유형이겠지요. 하지만 이 아이에겐 `상담 모드`라는 것이 있어서 상담을 받게 되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맙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진행형입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끊임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에게 꿈을 심어 줍니다.학교 밖 청소년 · 학교 부적응 학생 관련 문의: 가톨릭청소년대안교육센터, (053)643-7624

2016-09-22

하느님을 닮은 인간

▲ 박철 신부·성안드레아본당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 예수님을 파견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자가 되어 그분 사랑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갑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닮은 피조물! 곧 그가 바로 우리 사람입니다.사람에게는 크게 세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동물성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본능, 생존 욕구, 이기적 욕망, 폭력 등으로 나타나고,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 고마움을 모른다거나 주지 않고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도 나타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적인 방법을 쓰기도 하고, 만족하거나 포기할 줄 모르는 욕심을 드러내고 자주 남의 탓을 하거나 원망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인간성입니다. 이는 정, 용서, 인내, 나눔 등으로 나타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바랍니다. 셋째는 신성입니다. 나를 때린 사람도 용서하고 기도해 주는 일, 나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나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일, 하느님을 닮고자 애쓰고, 실패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오히려 기뻐하며 그 실패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 나보다 남이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신성입니다.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인데, 동물성 쪽으로 기울어지면 개인과 사회는 비참해지고 신성으로 기울어지면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성의 영역에 참여하여 참 평화,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유언을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구원되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시작되며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피조물인 인간성으로 남아 인간적인 사랑을 하라고 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2016-09-01

당신은 나의 피난처

▲ 김태한 신부·감삼본당 주임사람은 의지(depending)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의지함`의 연속이다. 그래서 의지할 곳 있고, 그 의지할 곳이 든든하면 든든할수록 그 사람은 살아가는데 참 행복한 사람이다. 반대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될 때, 그 때는 정말 사는 일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든든하게 의지할 곳이나 의지할 것을 찾는다.그런데 `의지할 곳`이란 것이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하다. 세상이 가장 흔히 선택하고 또 권하는 바는,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그것도 못미더우면 자신의 능력에만 기대어 살거나, 이도 저도 다 못 미더우면 재물이나 권력 등에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지함`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대부분 세상이 얘기하는 `의지할 곳들`에 우리가 의지하고 살다 보면 결국 번뇌와 고난, 절망, 영적 메마름, 슬픔 등의 고통에 빠져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세상이 의지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또 그것을 믿고 살다가 스스로 힘들어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것을 쉽게 놓고 살지 못한다. 신앙을 하는 우리 자신 또한 세상에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온전히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며 산다고 자부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다시 말해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흔히 의지하고 있는 헛된 것들에 의지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권유가 아닌 `명령`을 하신 주님의 속내를 헤아려보면 제자들에 대한 큰 사랑이 느껴진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에 의지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것이 불편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이다. 신앙 또한 `의지하는 것`이다. 오늘 이 명령은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게 의지하라는 것이다. 더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곳(집)에 “머물라”고 명하셨다. 그분의 진리와 사랑의 친교가 있는 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어떤 특정 장소를 얘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고 그것이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머물러야 할 `집`(공동체, 교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에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또 무엇에 의지하기를 바라고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대로, 우리를파멸로 이끄는 허망한 세상의 것들로부터 마음을 거두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살아가는 삶을 다시 시작하자.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2016-08-25

구원은 어디 있을까?

▲ 채창석 신부·교포사목2000년 9월, 세상은 온통 밀레니엄 시대라며 들썩이던 때에 군입대를 했습니다. 훈련소 생활은 상상하던 그 이상이었고, 고된 훈련과 규칙적이고 제한된 생활 속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여유있게 밥 먹고, 친구들과 맘껏 통화하고, 방바닥에 누워있고, 초코파이 두 개 먹는 것과 같은 당연하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군대뿐만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사람은 무언가 결핍되거나 잃었을 때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잃거나 떠나보내면 그 사람의 빈자리가 보이고, 건강이 악화되면 잘 먹고 잘 걷고 하던 그때를 떠올립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고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미리 소중함을 누리지 못하고 지나서 후회하게 됩니다. 마치 시지프(Sisyphe) 신화에서 한 사람이 정상을 향해 돌을 굴려 올라가지만 올라가지 못하고 굴러 떨어지고 또 올라가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해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게 중요합니다. 굴러 떨어질 돌덩이에 집착하기 보다는 이미 내게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들을 누리며 사는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고 삶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복음 루카 17, 11-19 에는 열 명의 환자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받아 낫게 됩니다. 그러나 단 한 명만 예수님의 구원보증을 받는데 그 사람만 다시 찾아와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왜 오지 않았을까요? 치유의 기쁨이 너무 커서 예수님을 잊어버렸을 수 있고, 그동안 아파서 못한 일들을 처리해내느라 분주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님의 개입이 있었음에도 결국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 안에 예수님은 작은 부분이었습니다.반대로 다시 찾아와 엎드려 감사하던 한 명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 안에는 예수님이 자리 잡았고, 앞으로 어떤 고통이나 환난이 와도 거뜬히 이겨나가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나쁜 것은 짧게 가져가고, 좋은 것은 길게 가져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고`, `나쁨`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현세를 살면서 `나쁜 것`들에 매이지 말고, `좋은 것`들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맘껏 감사하고 즐기면서 오늘을 삽시다. 지금 고마워할 줄아는 그런 마음에 예수님의 구원은 가까이 있습니다.“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2016-08-18

행복한 삶을 향한 틀 바꾸기

▲ 박상용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지난해 어느 대학 교수님의 행복에 대한 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적당한 유머가 함께 섞인 상당히 세련된 말솜씨로 사람들을 휘어잡는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어떤 데서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누가 들어도 좋을 그런 강의였습니다. 강의 전체 가운데 비교적 시작 부분에서 `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행복하거나 또는 행복하지 않은 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틀을 가지고 보고 듣고 그리고 나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거나 반면에 행복하지 않은 마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에 따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는데 그 `틀`을 바꾼다면 당연히 모든 것이 다르게 다가오고 또 그렇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틀`을 가지고 있다면 새 것으로 바꾸면 될 것입니다. `틀`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이지만. 11월 중 한 주간은 `성서 주간`으로 정해 져 있다. 늘 말씀과 함께 하는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고 다시금 말씀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주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 분들은 성경이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 앞에서 꼬리를 슬쩍 내립니다. 그리고 성경은 어려워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들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많은 분들의 수고 덕분에 성경 모임들이 많이 생겨나고 성경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온도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틀` 바꾸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 바꾸어 야 합니까? 하느님 그분만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바꾸어야 합니까?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세상에서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나라로, 이해하기보다 쉽게 판단하는 마음에서 부족함까지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마음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시선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틀`을 바꾸라고 성경은 우리를 끊임없이 초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우리가 가진 틀을 포기하고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틀을 내 것으로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행복한 삶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궁금하다면 성경을 펼치십시오! 그리고 읽으십시오!

2016-08-11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 담임신뢰는 개방을 낳습니다. 꽁꽁 문을 닫아 놓고 살았던 사람이 사랑하는 부모님의 방문에 닫힌 문을 열어젖히듯, 평생 마음 문을 닫고 살았던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영적 갈증에 반응해준 예수께 몸을 돌립니다. 몸을 돌리는 것은 빛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빛이 되신 예수님께 자신을 기꺼이 노출시키기로 결심한다는 말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제 빛 앞에 삶의 부끄러움, 상처, 좌절이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하거나 죄를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이 영혼을 교류하는 인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은 이런 만남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예수님과 이런 깊은 교제와 사귐의 시간을 가져보셨습니까? 아니면 그분 앞에 나가 자신의 사정만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어 놓고, 그 분 입에서 이제 말이 떨어질 무렵이면 짐을 싸고 내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셨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을 이렇게 대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마 `그는 나를 자기 수단으로 삼을 뿐이다. 그저 자기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채 은혜의 언저리만 맴돕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빛이 되신 예수님께로 돌렸던 등을 돌이켜 만나 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 진리의 빛에 의해서 자기 내면이 만짐 받아 치유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죄는 우리를 얽어매며 포박합니다. 인생에서 가진 상처는 내 속에 큰 힘이 되어 나를 그 속에 중력의 힘처럼 끌어 잡아 당깁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굴곡 많은 세월이 준 상처에 붙들여 있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주는 상처에 묶여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 만나기 전의 이 여인처럼 자신들이 이것에 묶여 신음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찾아오는 심연을 알 수 없는 허전함, 허무함, 불안과 염려가 자신을 묶고 있는 증거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니고데모처럼 그것을 감지하고 예수를 만났지만, 그저 겉껍데기만 만났기에 아무 변화도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사마리아 여인처럼 정직하십시오. 자신의 아픔을 주님 앞에 개방하십시오. 그 분이 만져 주십니다. 여기서 묶여 있던 것이 풀려납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신을 풀어 자유롭게 해 주시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망을 뿜어냅니다. “어디서 예배해야 합니까?” 예배에 대한 열망이요, 하나님을 향하는 목마름입니다. 영혼의 고향이 되신 하나님 앞에 가서 이 죄 많은 인생을 용서받고 싶고, 또한 이제는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을 피해서 살아왔던 어두운 주님을 만나 풀린 것입니다.우리 주님은 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이 영을 압니다. 영은 영으로 만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으로 예배를 받으십니다. 주님이 만져 주시기 전에 이 여인의 영은 상처와 죄로 짓눌려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만지시고 난 후에 그의 영은 살아나 기지개를 펴게 되었습니다. 모든 분들의 심령에 주의 은혜가 임하여, 주님을 새롭게 만나 상한 영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2016-08-04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

▲ 이성억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관리국장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가장 큰 잘못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체험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은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때 신앙의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신자들 중에는 하느님을 무서운 분, 벌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이 자비와 은총의 신이며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며,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이며,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계속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느님을 떠나 주변에 있는 다른 민족이 섬기는 우상을 따라 섬기는 죄를 거듭 지어 불행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당신께 돌아올 때는 언제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불행에서 건져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도 죄인인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용서를 청할 때마다, 조건 없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전부를 다 아시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고자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미 알고 계셨고, 이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심으로써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써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교형자매 여러분, 부모님과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인간이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면 기뻐하시며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사랑으로 응답합시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아멘.

2016-07-28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구요?

▲ 손상수 목사·포항산호교회 담임어느 곳에 인쇄소가 폭발했습니다.그 폭발하는 와중에 종이에 활자가 마구 찍히더니 폭발 후 백과사전 한 권이 저절로 툭 만들어졌습니다.어느 광산이 폭발했습니다.그 와중에 나무와 시멘트와 강철이 서로 요란하게 부딪히더니 폭발 후 아파트 한 채가 만들어졌습니다.아파트 옥상 위에 올라가서 1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찢어서 한 장씩 날렸습니다. 그랬더니 도로 위에 질서 정연하게 한 페이지부터 차례대로 줄지어 내려앉았습니다.물론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확률은 0%입니다.그러나 차라리 이것을 믿는 것이 낫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 번도 뒤바뀜 없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매일 매일 해가 뜨고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대한 별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이런 것들이 저절로 되어 진다고 믿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구요?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친히 이 모든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오늘도 그것을 운행하고 계십니다.그 분의 손길 없이 어찌 이 우주 천체가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두 사람이 극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한 사람은 무스탕을 입고 모자를 쓰고 멋진 안경을 끼고 악어 백을 들고 벤츠를 타고 떠났습니다.극장 앞에 와서 극장 주인에게 자신의 값비싼 치장과 화려한 모습을 보이며 입장시켜 달라고 거드름을 피웠습니다.그러나 극장 주인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습니다.또 한 사람은 겉모습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얼른 가서 극장표를 사서 주인에게 그것만 보였습니다.극장 주인은 함지박 웃음을 지으며 잽싸게 그 사람을 입장시켰습니다.천국도 이와 같습니다.도덕, 윤리, 수양, 철학으로 치장한 사람은 천국 문 앞에서 그것들을 뽐내며 거드름을 피우겠지만, 천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그들의 출입을 막아 버립니다.천국행 표는 오직 믿음입니다.극장 주인이 표 하나만 보고 통과시키듯이, 하나님은 믿음 하나만 보시고 천국 문을 열어 주십니다.구원은 딱 하나 오직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은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인생들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뿐입니다.당신은 무엇을 들고 극장 가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까?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2016-07-21

잊지 말아야 할 것

▲ 권대진 신부·압량성당 주임 평신도로 살아간다는 것, 성직자로 살아간다는 것, 수도자로 살아간다는 것,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는 지금, `나는 올 한 해,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살아왔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고(故) 최인호씨가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천사와 같은 머리 깎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았을때,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했다. 그렇다면 주님,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에 아픈 것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내 귓가에 속삭이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탓도 아니다. 다만 저 아이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녀인 나를 통해 당신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보십시오. 고통 중에 있을 때, 아픔 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지?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왜 저에게 이 같은 비난의 말이, 왜 저에게 이 같은 오해가, 왜 저에게 이 같은 시련이?` “이런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삶의 여정 가운데 고통이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기만을 바라며 발버둥 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아들 예수님을 보십시오. 아들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일을 드러내시는 성부의 뜻을 보라는 것입니다.지금 나에게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내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을 때, 내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평신도로서 우리들이 증거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6-07-14

하느님을 만날 용기를 내세요

▲ 주국진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청소년국장 상황 1  “주일 미사에 빠지지 말고 잘 나오세요.”“고3인데요? 고3이 어떻게 성당에 가요?”“고3은 주일 미사에 나오면 안 되니?”“고3 때 공부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인생이 편해져요.”어느 날 우연히 만난 고3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고3은 편안한 인생을 위하여 공부만 해야지 다른 활동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나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일학교에 잘 나오던 학생들도 고3이 되면서 절반 정도만 주일미사에 나오고 있습니다. 고3은 공식적인 냉담기로 선포해야 할 판입니다. 상황 2 본당 중고등부 학생회 간부 연수 중에 있었던 대화입니다.“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돈입니다. 돈이 많으면 좋은 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으니까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고 유학도 갈 수 있어요. 그리고 돈이 많으면 부모님을 잘 모실 수도 있고 돈이 많으면 결혼도 잘 할 수 있고 자녀들이 원하는 것도 다 해 줄 수 있어요. 그리고 돈이 많으면 자신감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청소년들도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행복을 위하여 좋은 대학과 돈이라는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위하여 `거짓된 보화`에 마음이 끌리는 일은 없어야 하겠고 잘못된 시류에 맞서 싸울 용기를 가지라고 하십니다(2015 청소년 주일 담화문 참조). 시험 성적이나 대학, 직장, 재물 등은 참된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과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학교 공부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면 잠자리에 들때나 일어날 때, 등하교 할 때나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잠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일 미사 한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일주일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매일 한 줄씩이라도 읽는다면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아 마음을 잡고 공부하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만난다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을 알게 될 것이며 참된 행복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용기를 내십시오.

2016-07-07

전도하기 그치지 않는 자들

▲ 최해진 목사·포항하늘소망교회 담임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어떤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먼저 빚을 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다.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마서 13장 8절)고 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믿게 된 사실과 과정을 복음의 빚진 자라고 보았다.두 번째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마서 1장 16절)고 했다.그 복음은 유대인도 헬라인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하신다고 했다.병원이 하는 일은 병든 사람을 살리고 병든 육체를 고치는 것이다. 죄를 치료하여 죄인을 살리는 것은 복음밖에 없다.세 번째는 전도하는 방법 외에 예수님을 전하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장 21절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다.세상 사람들은 전도를 미련하게 보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전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오직 전도뿐이다.네 번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기 때문이다.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안하면 내가 받은 복을 기회를 놓치니 화를 당하는 것이다”고 했다.전도 안하면 내 영혼이 화를 당한다. 가정이 화를 입고 국가가 화를 면치 못한다. 이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기에 전도에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끌려가 채찍질을 당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지만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고 오히려 기뻐했다.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우리도 마찬가지다. 전도하라.특히 초등학생 저학년 이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보라.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듯 잘 받아들일 것이다. 네가 예수님을 믿으면 네가 복을 받고 너를 통해 가정과 학교와 이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들려주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지만, 죽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다스릴 것이라고 들려주라.전도는 때가 있다.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 문이 닫힐지 모른다. 지금 전도해야 한다.

2016-06-30

모진 아버지의 사랑

▲ 서준홍신부·신동본당 주임 일본 나가사키 성지 안내를 약 40번 정도 했습니다. 순례 동안 188위 복자 `바오로 우치보리`와 아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박해 시대에 바오로는 3명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바오로를 배교시키기 위해 관리들은 협박과 감금, 갈취와 고문을 했습니다.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배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오로의 아들을 잡아 와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아버지 바오로가 보는 앞에서 잘랐습니다. 그 중에는 5살 된 이냐시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바오로가 배교하지 않자 관리들은 아들을 차가운 바다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아버지 바오로는 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바오로는 배교하지 않았고, 큰 아들은 “이런 큰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했습니다. 후에 바오로도 운젠의 지옥 열탕 고문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순례 차량 안에서 이 설명을 들은 순례객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순교의 모습에 감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모진 아버지가 있느냐며 화를 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순교할 수 있어도, 자식을 가지고 협박과 회유를 한다면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창세 22, 1~2 등에는 아들 이사악의 생명을 하늘에 바치려는 모진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에는 후에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집니다. 아들의 생명을 하늘에 바치려는 아버지가 모질게 느껴지십니까? 아버지가 아 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로 요약되는 마르 9, 2~10에 나오는 아버지는 정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바오로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생명보다 하늘나라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가르쳐 주고 실천했습니다. 아들의 고통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참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음을 알고 아들을 바쳤습니다.아들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끝날지라도, 하느님이 아들의 생명을 이끌어 주심을 믿고 따랐습니다. 성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 예수님이 죽음으로 내려가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아시고 아드님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바오로도 아브라함도 성부께서도 모진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아들의 생명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자녀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지금 모질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에 맡기십시오.

2016-06-16

살리시는 하나님

▲ 박재현신부·반야월본당 주임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을 내려주십니다. 탈출기 16, 2~4. 12~15를 보면,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합니다. “….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16, 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으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16,12)“그들 위에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게 하시고, 하늘의 곡식을 그들에게 주셨네.”(화답송, 시편 78, 24)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매일 매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먹을 것을 내려주심으로써 백성을 살리십니다. 하느님은 살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먹을 것을 내려주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신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빵을 내려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원히 살게해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살리시는 하느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미사 안에서 성부께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게 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기도 2양식) 살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이들을 이 땅에서 살게 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예수님의 몸과 피를 주심으로써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하느님은 이 땅의 양식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천상의 양식으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날의 일용할 양식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어 고백하는 사람이 참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내려 주시는 그 음식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천상양식임을 믿어 고백하는 사람이 참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는 살리시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2016-06-09

통일, 간절히 바라고 믿고 기도하나?

▲ 곽재진 신부·윤일본당 주임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정말 통일이 소원인가? 정말 간절히 바라는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 실 거라고 믿는가? 기도하는가? 기도한 바를 노력하는가? 고 김수환 추기경과 젊은이들과의 대화 일부분이다. “통일을 원하느냐?” “원한다” “그 통일을 위해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나?” “묵묵부답! ? !” “지금 여기서 옆 사람과 화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리고 산길은 자꾸 다니다보면 넓고 편한 길이 되어간다.”우리는 정치, 사회적으로만 아니라 대화를 통해 경제, 문화적 교류와 대북 지원 등의 노력을 해 오고 있다. 인식과 이해의 차이를 어렵게 극복하고, 남북 관계가 좀 진전이 되나 싶으면 으레 교류 중단이나 도발이 터진다. 그리하여 국민 정서도, 교회 내 정서도 찬반으로 갈릴 때가 있다. 막가자는 식의 북한 태도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현실 앞에서 화해와 일치를 통한 통일을 꿈 꿀 수 있을까?오늘 우리는 교회에 맡겨진 화해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이 사명에 얼마나 충실하였는지 반성해 보아야겠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힘은 `기도`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것이다”(마태 18, 19). 독일이 통일의 길로 나아갈 때, 독일 교회는 인도적 지원과 교류사업도 펼쳤지만, 주목할 것은 지속적인 기도 운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매주 월요일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회가 있었다. 1980년 20여명으로 시작된 기도회가 1989년 10월 9일(12만명)까지 이어졌고, 이 기도 운동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되어 한 달 뒤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 3)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통한 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믿고, 기도하자! “기도”와 “기대”는 다르다. 기도는 나를 움직이게 하지만 기대는 타인을 향한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켜 길을 찾게 하지만 기대는 다른 이가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기도는 갈등을 줄여주지만 기대는 자칫 불화와 집착을 키우기 쉽다. 기도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다. 미래를 향한 것이다. 모든 긍정적 가능성 앞에 자신을 활짝 열어두는 것, 신뢰로 가득한 마음이 기도이다.

2016-06-02

콩을 따라 가는 인생

▲ 손상수 포항산호교회 목사한 무리의 돼지 떼가 몰이꾼을 따라가는데 한 마리도 길을 벗어남이 없이 가더니 마침내 도살장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습니다. 몰이꾼의 기술이 너무 신기해서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간단하지요 뭐, 그 놈들은 콩을 좋아하거든요. 가면서 콩을 한 움큼씩 길바닥에 뿌려 주면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콩을 따라오는 거지요. 정신없이 콩만 주워 먹고 가다가 제 죽을 곳으로 가는 것도 모르지요.”인생이란 너무나 신비에 가득 차 있으며,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또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피부에 느껴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세상이 신비에 차 있다 함은 인간 이상의,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만약에 인생이 70년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면 이 땅에서 1천년을 사는 거북이와 학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보고 얼마나 비웃겠습니까?인간이 육으로 느껴지는 것에만 매달려 웃고 울고 한다면 무지한 짐승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착하게 살아야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를 많이 해야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야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천국은 죄 없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죄 안 지은 자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죄 짓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직 이 죄를 용서 받은 자가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 죄를 용서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착하게 못 살아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못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둑질, 강도짓을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였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처리하셨습니다. 이제 천상천하 단 하나의 죄는 주 예수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조건은 단 하나 예수 믿고 죄 용서함 받는 길이고, 지옥 가는 조건도 단 하나 예수 안 믿고 죄를 그냥 방치해 두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늘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직 예수 믿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파라다이스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혹 당신은 오늘도 눈에 보이는 콩만 쳐다보며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2016-05-26

에파타

▲ 김용민신부·대구가톨릭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고 내 사랑을 속삭여 줄 수도 없는 상황을 우리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고 합니다.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고 말하 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그래서 서로 멀어져만 가는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지옥일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하고 외로움을 달래줄 대상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연결해주는 것이 대화이고 이를 통한 통교입니다. 그런데 통교를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일 것입니다. 마르코북음 7, 31-37에 등장하는 귀먹은반벙어리는 바로 통교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그가 겪는 단절과 고립으로 인해서 그는 항상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고 지옥의 아픔을 느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기적은 귀먹은 반벙어리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단절을 회복시켜주는 구원의 기적이었습니다.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말할 수 있습니다. 들음은 상대를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나를 상대편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를 받아들여줄 수 있어야 나를 건네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통교를 위해서는 우선 들어야 합니다. 듣기 위해서는 우선 열려있어야 합니다. 육신적인 귀가 열리는 것보다 영적으로 열려야 합니다. 육신의 귀가 열려 있으면서도 마음이 닫혀 있을 때 우리는 소리를 듣지만 마음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마음이 닫히는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들의 닫힌 마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남에게이해시키려 많은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닫아둔 채 내 말을 남에게 전달하려고만 합니다. 서로가 쉴 새 없이 자기 말만을 하려하고 도무지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성체 앞에 앉아서도 하느님을 알아들으려 하기보다는 내 말부터 합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사이에서도 우리는 말하는 것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말하려 하고 듣기 위해 마음을 열기에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러나 들음 없이 우리는 더 깊은 외로움에 빠져들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현대는 표현의 시대라고 해서 보다 세련된 표현에 익숙해져 갑니다. 하지만 많이 말한다고 해서 많이 열려 있겠습니까? 열려 있다면 왜 서로의 갈등은 깊어져 가고, 열린 무엇을 찾는 일들이 범람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우리는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을 기억 하면 좋겠습니다. “열려라!” 열린다는 것은 귀 기울여 상대방을 듣고 이해하려 하는 태도입니다. 애써서 들으려 할 때 우리는 서로의 귀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래야 공감하여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닫혀 외롭지 않고 서로 들어줄 줄 아는 곳은 바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 애쓰고, 서로 들으려 노력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천국일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의 한마디 말씀을 기억합시다. “열려라!”아멘.

2016-05-19

당신은 이 세상의 내 모든 것

▲ 김태한 신부·감삼본당 주임사람은 의지(depending)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의지함`의 연속이다. 그래서 의지할 곳 있고, 그 의지할 곳이 든든하면 든든할수록 그 사람은 살아가는데 참 행복한 사람이다. 반대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될 때, 그 때는 정말 사는 일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든든하게 의지할 곳이나 의지할 것을 찾는다.그런데 `의지할 곳`이란 것이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하다. 세상이 가장 흔히 선택하고 또 권하는 바는,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그것도 못미더우면 자신의 능력에만 기대어 살거나, 이도 저도 다 못 미더우면 재물이나 권력 등에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지함`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대부분 세상이 얘기하는 `의지할 곳들`에 우리가 의지하고 살다 보면 결국 번뇌와 고난, 절망, 영적 메마름, 슬픔 등의 고통에 빠져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세상이 의지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또 그것을 믿고 살다가 스스로 힘들어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것을 쉽게 놓고 살지 못한다. 신앙을 하는 우리 자신 또한 세상에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온전히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며 산다고 자부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6, 7~13에서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다시 말해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흔히 의지하고 있는 헛된 것들에 의지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권유가 아닌 `명령`을 하신 주님의 속내를 헤아려보면 제자들에 대한 큰 사랑이 느껴진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에 의지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것이 불편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이다.신앙 또한 `의지하는 것`이다. 이 명령은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게 의지하라는 것이다. 더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곳(집)에 “머물라”고 명하셨다. 그분의 진리와 사랑의 친교가 있는 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어떤 특정 장소를 얘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고 그것이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머물러야 할 `집`(공동체, 교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에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또 무엇에 의지하기를 바라고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대로,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허망한 세상의 것들로부터 마음을 거두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살아가는 삶을 다시 시작하자.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2016-05-12

“무슨 말씀이든 그대로 하라”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 담임예수님과 제자들이 참석한 결혼 축제에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한창 흥겨운 잔치가 진행되는 중간에 포도주가 그만 떨어졌습니다. 이는 신랑신부 측에서 볼 때는, 단순히 사건 정도가 아니라 재앙을 만난 것입니다. 물론, 손님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왔다든지 하는 다른 핑계를 댈 수는 있으나 잔치를 잔치되게 하는 중요한 촉매제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이 이 축제에 계셨는데도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연히 들른 곳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손님으로 초대되어 간 곳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인생길이 축제의 걸음일지라도 이렇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감당치 못할 고난으로 인해 눈물의 밤을 보낼 수도 있고, 상한 인간관계로 인해 가슴에 멍이 들기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인해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해 미래가 막막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 걸음에 이런 일이 찾아온 것입니다.이 불상사를 누가 수습합니까? 예수님과 그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지둥대는 반면에,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신뢰한 사람 마리아에 의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한복음 2장 5절) 더 이상 이 잔치에서 예수를 그저 손님으로 대접하지 말고 주님으로 받아들여 그를 좇아가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변화되고 싶어 합니다. 삶의 상처에서 치유되고 회복되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내 시선이 치유와 회복에 고정되어 있는 한 그는 절대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관심으로 신앙을 대하며,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내 생의 주님으로 고백하여 “그가 시키는 대로 내 의지는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살면, 그는 이미 변화되어 있으며 그 결과 치유와 회복은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여러분 안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인생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인생에서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늘 주님이 아니고 손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어 계시면 그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그를 삼키지 못하며 오히려 그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뭘 먹을지 뭘 입을 지 염려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 잔치의 전반부처럼 예수님을 손님 대우할 때 여러분은 아주 분주합니다.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하고 걱정해야 하고, 자식 키울 일로 잠을 설칠 것입니다. 그 영혼에 평화가 없습니다. 빨리 예수님을 손님으로 대하는데서 주인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은 뒤로 갈수록 오히려 좋은 포도주를 내는 예수님의 잔치처럼, 주님으로 인해 인생의 뒤로 갈수록 더욱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2016-04-28

살아야 할 성체성사

▲ 김명현신부·비산성당 주임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모든 것을 인류구원을 위해 내어놓으셨고, 또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람을 성체성사의 삶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며, 교회 활동의 정점입니다. 그리고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로서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서 삶 안에서 성체성사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체성사의 삶이란 성체성사 안에 드러나는 감사의 삶, 나눔의 삶, 증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성체성사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당신 자신을 거저 내주셨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 아낌없이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당신을 내어주시는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우리는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셨듯이 우리 자신을 이웃을 위해, 교회를 위해 내어 놓는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또한 성체성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 즉 파스카의 신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체, 성혈을 받아모실 때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로 전해야 할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세상 안에서 죽고 부활하는 삶을 통하여 그분을 증거 하여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증거의 삶이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의미합니다.성체성사는 거행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행과 동시에 삶으로 드러내어야 할 성사입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양식으로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는 우리는 세상 안에서 감사의 삶, 나눔의 삶, 증거의 삶을 통해 성체성사를 드러내어야 합니다.그분의 몸과 피로 양육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그 자신이 세상의 성체성사가 되어야 합니다.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놓으셨듯이 오늘날 교회도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교회 때문에 영적 양식을 얻고 구원의 희망으로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2016-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