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겪는 단절과 고립으로 인해서 그는 항상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고 지옥의 아픔을 느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기적은 귀먹은 반벙어리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단절을 회복시켜주는 구원의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말할 수 있습니다. 들음은 상대를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나를 상대편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를 받아들여줄 수 있어야 나를 건네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통교를 위해서는 우선 들어야 합니다. 듣기 위해서는 우선 열려있어야 합니다. 육신적인 귀가 열리는 것보다 영적으로 열려야 합니다. 육신의 귀가 열려 있으면서도 마음이 닫혀 있을 때 우리는 소리를 듣지만 마음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마음이 닫히는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들의 닫힌 마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남에게이해시키려 많은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닫아둔 채 내 말을 남에게 전달하려고만 합니다. 서로가 쉴 새 없이 자기 말만을 하려하고 도무지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성체 앞에 앉아서도 하느님을 알아들으려 하기보다는 내 말부터 합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사이에서도 우리는 말하는 것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말하려 하고 듣기 위해 마음을 열기에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러나 들음 없이 우리는 더 깊은 외로움에 빠져들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현대는 표현의 시대라고 해서 보다 세련된 표현에 익숙해져 갑니다. 하지만 많이 말한다고 해서 많이 열려 있겠습니까? 열려 있다면 왜 서로의 갈등은 깊어져 가고, 열린 무엇을 찾는 일들이 범람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
우리는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을 기억 하면 좋겠습니다. “열려라!” 열린다는 것은 귀 기울여 상대방을 듣고 이해하려 하는 태도입니다. 애써서 들으려 할 때 우리는 서로의 귀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래야 공감하여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닫혀 외롭지 않고 서로 들어줄 줄 아는 곳은 바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 애쓰고, 서로 들으려 노력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천국일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의 한마디 말씀을 기억합시다. “열려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