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개방을 낳습니다. 꽁꽁 문을 닫아 놓고 살았던 사람이 사랑하는 부모님의 방문에 닫힌 문을 열어젖히듯, 평생 마음 문을 닫고 살았던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영적 갈증에 반응해준 예수께 몸을 돌립니다. 몸을 돌리는 것은 빛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빛이 되신 예수님께 자신을 기꺼이 노출시키기로 결심한다는 말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제 빛 앞에 삶의 부끄러움, 상처, 좌절이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하거나 죄를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이 영혼을 교류하는 인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만남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예수님과 이런 깊은 교제와 사귐의 시간을 가져보셨습니까? 아니면 그분 앞에 나가 자신의 사정만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어 놓고, 그 분 입에서 이제 말이 떨어질 무렵이면 짐을 싸고 내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셨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을 이렇게 대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마 `그는 나를 자기 수단으로 삼을 뿐이다. 그저 자기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채 은혜의 언저리만 맴돕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빛이 되신 예수님께로 돌렸던 등을 돌이켜 만나 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 진리의 빛에 의해서 자기 내면이 만짐 받아 치유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를 얽어매며 포박합니다. 인생에서 가진 상처는 내 속에 큰 힘이 되어 나를 그 속에 중력의 힘처럼 끌어 잡아 당깁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굴곡 많은 세월이 준 상처에 붙들여 있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주는 상처에 묶여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 만나기 전의 이 여인처럼 자신들이 이것에 묶여 신음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찾아오는 심연을 알 수 없는 허전함, 허무함, 불안과 염려가 자신을 묶고 있는 증거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니고데모처럼 그것을 감지하고 예수를 만났지만, 그저 겉껍데기만 만났기에 아무 변화도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정직하십시오. 자신의 아픔을 주님 앞에 개방하십시오. 그 분이 만져 주십니다. 여기서 묶여 있던 것이 풀려납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신을 풀어 자유롭게 해 주시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망을 뿜어냅니다. “어디서 예배해야 합니까?” 예배에 대한 열망이요, 하나님을 향하는 목마름입니다. 영혼의 고향이 되신 하나님 앞에 가서 이 죄 많은 인생을 용서받고 싶고, 또한 이제는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을 피해서 살아왔던 어두운 주님을 만나 풀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이 영을 압니다. 영은 영으로 만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으로 예배를 받으십니다. 주님이 만져 주시기 전에 이 여인의 영은 상처와 죄로 짓눌려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만지시고 난 후에 그의 영은 살아나 기지개를 펴게 되었습니다. 모든 분들의 심령에 주의 은혜가 임하여, 주님을 새롭게 만나 상한 영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