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이토록 탁월한 기동력을 감안하면, 한 자리에 눌러만 있어서는 결코 그분을 따라갈 수 없다. 엉덩이 붙이고 퍼져 있을 수가 없다. 발 벗고 달려가도 따라가지 못할 지경인데! 그래서 예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떠돌이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세상을 떠다니는 순례객, 천상 그렇게 살 팔자임을 받아들였다. 오죽하면 한자리에 모여 머물면서도 그곳을 `빠로키아`라고 불렀다. 오늘날`본당`을 뜻하는 라틴어 빠로키아는 희랍말 파로이키아에서 왔다. 파로이키아는 원래 눌러 사는 곳이 아니다. 멀리 돌아다니다가 잠시 들러서 기력을 회복하는 곳이다. 사막속의 오아시스요 고된 노동현장의 함바집이다. 이를테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쉬어가는 휴게소 같은곳이다. 기름을 채우고 기력을 찾았으면 다시 갈 길을 가야한다. 빠로키아, 본당은 그런 곳이다. 주일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로 힘을 되찾아서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힘차게 나가야 한다.
지난 몇 해 동안, 스승을 따라 곳곳으로 파고 들어간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모습을 생각한다. 가난한 이의 눈물과 한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밀어붙이고` `몰아붙이는` 토건 개발의 현장에서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일깨우려 묵묵히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던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생각한다. 병원에서, 장례식장에서, 가난과 싸우고 장애와 싸우는 곳에서 묵주를 방패삼아 버티어 내던 교우들을 생각한다.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스승 그리스도의 모습이 두려움 속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희망과 신뢰의 참뜻을 가르쳐 주었다면, 오늘도 그런 희망과 신뢰를 갈구하는 눈동자가 있고 목소리가 있다. 스승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라 나서서 그 시선과 목소리에 답해주라고 말씀하신다. 본당, 빠로키아는 그런 응답이 시작되는 자리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