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성서에서는 흔히 “듣는다.”는 말로써 하느님께 대한 간접 경험을 가르치고, “본다”는 말로써 그분께 대한 직접 체험을 지칭한다.
오직 현세적 유익과 육신 삶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한 것만을 추구하는 제자들은 더 이상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다. 무릇 신앙이란 상대방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인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면 마음을 열수가 없다.
이제 그 분의 말씀은 더 이상 생명의 말씀이 아니다. 딱딱하고, 거칠고, 굳어있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되어버렸다. 제자들도 이제 유대인들과 똑같이 투덜대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할 수 없다. 다음 기회에 한번….”
“생각을 좀 해보고 난 다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여기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그게 아니랍니다.”
“세상이 양보해서 당신께 맞출 수는 없지 않습니까?”
머리로 바쁘게 계산하며 핑계와 궤변을 늘어 놓으려 한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은 언제나 듣기에 무척 거북하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
이제 제자들은 신앙과 불신앙사이에 선택해야 한다. 말씀 안에 머물던지, 아니면 따라 갈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하거나, 배반하던지.
총명(聰明)한 신자여러분!
옛말에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는 것은 덕과 행실을 갈고 닦는 숫돌과 같다고 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되어 잘 들을 수(聰) 있어야하고 새로운 믿음의 눈으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거룩하신 분`을 잘 볼 수(明)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분과 함께 있다.`와 `그 분이 나와 함께 있다.`
`너는 나와 함께 간다.`와 `나는 너와 함께 간다.`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과 `고객이 만족하는 것`
두 문장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 베드로 사도와 함께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을 다시 한번 신앙 고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