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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다

등록일 2016-12-29 02:01 게재일 2016-12-29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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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학<br /><br />목사·포항제일교회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께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 하에서 핍절을 거듭 경험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절절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다. 마침내 이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됐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타산적인 생각일수도 있지만, 일견 식민지의 참혹함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무리들을 떠나 혼자 산으로 들어가셨다.

요한복음 6장 15절에 `아시고`로 번역된 헬라어 `그누스`는 관찰과 경험에 의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부지간에 서로를 알 때 쓰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지, 얼마나 의식주에 찌들어 사는지, 자신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정확히 아셨다. 그래서 이들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낄 정도로 불쌍히 여기셨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던 걸음까지도 마다하시고 이 무리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백성의 고통에 참여하고 함께 연대하시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백성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 이제는 이들을 떠나 홀로 산으로 가셨다. 이런 행보, 즉 삶의 자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중의 인기나 칭찬을 좇아가는 사람에게는 도대체 납득되지 않는 태도다. 자기를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고는 정작 그들의 마음을 가져온 후에는 오히려 그들을 떠나가다니. 이런 예수님의 행보는 오직 단 하나, 영적 자유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영적으로 자유하기에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추구해 나가는 자유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자기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찾아온다. 예수님은 참으로 자유하신 분이셨다. 진정 자유 하셨기에 `돌덩어리가 떡덩어리가 되게 하라`는 유혹을 뿌리치셨고, 주변사람들의 지탄을 무릅쓰고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가 되셨으며, 자신에게 환호성을 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떠나실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흔히 자유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며,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사실 자유가 아니라 `환상`이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 안에 있는 죄와 그 죄가 만든 욕망이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쉬고 싶다고? 누가 쉬고 싶다 하는가? 내 안에 `영`인가? `육`인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다고? 악의를 갖고 선택한 것도 존중해야하는가? 그 선택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기독교 신앙은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한다. 하나님을 향한 분절된 마음 없이 불같은 심정으로 그 분의 나라와 의를 좇아가는 자유를 추구한다. 이것이 그 사람 안에서 너무나 절박하고 간절하기에 돈, 명예, 권력, 이념 등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대중을 뒤로 하여 홀로 가는 예수님의 걸음을 고독한 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이 자유함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린도후서 3장 17절) 이 영적 자유를 날마다 행사하며, 일생을 통해 추구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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