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노부부가 아픔을 딛고 교회에 출석해서 하나님께 거액의 감사험금을 드렸습니다. 헌금봉투에는 이런 감사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좋은 아들을 20년간 우리 곁에 두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자기 생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가라고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사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좋은 아들을 20년간 우리 곁에 두셨음을 감사합니다.” 생때 같은 자식을 갑작스레 떠나보낸 사실에 초점을 두는 대신에 20년간 가졌던 아름다운 만남에 집중합니다. “아들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죽어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에 초점을 두는 대신에 그 아들이 지금 하나님의 품에 있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이 노부부는 맹목적이지도 않고, 무비판적 낙관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비극을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쳐 관점의 전환을 시도하는 어설픈 심리요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생을 보통사람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조망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중심에 세웠던 것입니다.
“자식이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감사할 수 있을까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아내가 암으로 인해 시한부의 삶을 남겨두고 있을 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기도해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병상에 누워있는 가족을 앞에 두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온 나라가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요동하는 이때에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노부부의 인생관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종류의 감사가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 기대 감사, 무조건 감사입니다. 조건부 감사가 내게 좋은 것을 주셨기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기대 감사는 내가 감사할 때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감사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무조건 감사는 지금 주신 이 삶 자체를 선물로 여겨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를 보십시오. 그는 인생을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 1장 2절). 그는 사사건건 주님께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종국에 자신의 모든 불평이 하나님의 깊고 높으신 생각을 전혀 읽지 못한 소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성하고 아름답다` 확신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합 3장 18절)
내가 풍족히 받으면 감사할 것 같은가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주님께 병 고침 받은 나병환자 10명 중에 단 한 사람만이 주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면 더욱 넉넉히 주실 것이기에 그가 감사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며 소중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인생을 더욱 온전한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만지시고 있습니다. 비록 내 삶속에 아픔과 좌절이 있을지라도 나를 만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한 분으로 우리는 만족하며 충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