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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팝나무 하얀 꽃잔치

윤영대수필가이제 계절의 여왕, 오월이 왔다. 우리는 아직도 ‘코로나 거리두기’라는 사슬에 묶여있는데 계절은 자연의 왕성한 힘을 부추기면서 찬란하게 피었던 벚꽃이랑 봄꽃들을 떨구어내고 봄비에 씻겨 아름답게 단장한 새 얼굴들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고 있다.길을 지나다 보면 하얀 꽃나무가 아름다운 가로수가 되어 줄지어 있는 곳이 눈에 많이 띈다. 이팝나무다. 언제부터인가 가로수로 심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대로변이나 마을 길에도 5월이면 하얀 꽃들의 잔치를 즐길 수가 있다. 푸른 연록색 잎 가지에 하얀 꽃송이가 소복소복 쌓여있어서 늦봄에 흰눈이 내린 듯 신기하다. 배고팠던 옛 시절 밥사발에 소복이 담긴 흰쌀밥처럼 보여서 ‘이밥’ 나무라 했고 또 입하(立夏)에 꽃을 피운다고 해서 입하목, 입하나무로 불렀다가 다시 변하여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영어로도 하얀 눈꽃(snow flower)이다.입하는 ‘여름에 든다’는 절기이며 보리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의미로 맥량(麥6DBC), 초여름이라는 맹하(孟夏)라고도 하는데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고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계절이며, 고추 오이 가지 등 열매채소를 심는 때이기도 하다. 이때가 되면 생각나는 흰 쌀밥 꽃, 그 하얗게 눈이 내린 듯한 경관을 보고 싶어 흥해향교 숲을 찾는다. 하마비가 서 있는 언덕바지에 주차하고 오르면 태화루의 시원스러운 팔벌림 옆에는 백 년은 넘었을 이팝나무 거목들이 호위하듯 지키고 서 있다. 아니, 오월의 여왕이 하얀 비단옷을 입고 환하게 맞이하는 듯하다. 닫혀있는 문을 살포시 밀고 들어서면 명륜당도 고요하고 돌계단을 올라 대성전 뜰에 서니 막 송홧가루 날리기 시작하는 소나무가 묵상하듯 단정하다. 검은 기와지붕 위로 드리운 하얀 이팝나무꽃의 흑과 백, 파란 하늘 아래 울창한 푸른 숲의 청과 녹-이 자연의 어울림은 봄의 여왕이 주는 선물이다.옆에 있는 임허사 절의 독경 소리에 이끌려 좁은 길을 지나 올라서니 상수리나무와 어울려 많은 이팝나무의 흰 꽃들이 한껏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이 옥성리 이팝나무군락지는 큰나무 26그루가 있어 작년 12월 천연기념물 제561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제일의 군락지다. 그런데 표지판은 경상북도기념물 제21호, 아직 바뀌지 않았네…. 운동시설과 쉼터 등 깨끗하게 꾸며진 언덕을 이리저리 천천히 걷다가 큰 이팝나무 둥치를 가슴에 안고 귀를 데어보니 조용한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어젯밤 사이에 내린 빗방울로 하얀 꽃들은 더욱 얼굴이 곱고, 그래도 다 채우지 못한 이팝나무 모습의 미련에 시내 ‘철길숲’공원으로 달려갔다. 철도의 흔적을 따라 길게 조성된 Forail 산책길은 코로나에 지친 시민의 힐링 공간이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쌀밥 꽃들의 하늘거림 아래로 마스크를 쓴 채 가족 나들이하는 모습은 희망이다.5월은 또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에는 몸매 고운 오월의 여왕이 하얀 모시옷 입고 너울너울 살풀이춤을 추는 이팝나무 숲길을 걸으며 바이러스의 횡포를 날려버리고 서로의 사랑을 듬뿍 느껴보자. 이팝나무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 자기 향상’이다. 오월을 밝은 마음으로 맞이하자.

2021-05-02

걱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사공정규동국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옛날 중국 기(杞)나라에 걱정이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만약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면 몸을 지탱할 곳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할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그 걱정남을 위로하는 친구 위로남이 있었다. 이 위로남이 걱정남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하늘에는 공기가 쌓여 있을 뿐이네. 공기가 무너질 리도 없고, 설사 무너진다 해도 다칠 이유가 없네. 우리는 이미 공기 가운데서 움직이며 숨 쉬고 있지 않은가. 왜 괜한 걱정을 하나?”“땅은 흙이 쌓여 이루어진 것일세. 사방에 꽉 차있는 흙이 어디로 꺼지겠는가? 저 수많은 사람과 무거운 집, 태산까지도 받쳐주는 대지가 아닌가? 괜한 걱정일랑 말게”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기우(杞憂)라는 말이다. ‘기 나라 사람의 걱정’ 다시 말해 쓸데없는 걱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필자가 임상연구원으로 있었던 하버드 의과대학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조지 월튼(George Walton)의 연구에 의하면,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는 사소한 일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 4%,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이 4%”라고 한다.유난히 걱정이 많은 분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위의 기 나라 사람처럼 현실적 고통보다 부정적 상상 속의 고통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그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 확률이 적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걱정을 많이 한다. 자동차하면 사고, 아이가 학교에서 약간 늦게 오면 유괴, 밤거리하면 강도, 내가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실패, ‘내가 하면 되는 일이 없어’라는 식으로 자동적으로 부정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차분하게 해결점을 찾기보다는 바로 부정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경향이 높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제 우리는 완전히 망했다.” “이거 큰 일 났구나.”라고 생각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부정적 상상에 의한 공포로 호랑이가 잡아먹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스스로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호랑이 굴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그러나 걱정이 많은 사람은 이런 부정적인 사고를 줄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걱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첫째,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림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는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걱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커지기 때문이다.1987년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웨그너 (Daniel Wegner) 교수의 실험에서 우리가 “걱정하지 않을 거야, 걱정은 쓸데없는 거야.”라고 생각할수록 걱정들이 더 많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히려 “나는 지금 이런 걱정을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림하고 수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둘째, 하루에 시간을 정해 놓고 10분만 걱정하자.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평소 걱정 때문에 시간이 많이 빼앗긴다고 걱정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걱정을 멈추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그저 걱정만 하자. 단, 걱정을 할 때는 지침이 있다.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걱정들을 하나씩 글로 적어보자. 걱정들이 글로 정리되어 옮겨지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보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글을 쓴 후 차분히 읽어보자. 가능한 타인의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자신의 걱정을 살펴보자. 지금 걱정에서 더 나은 해결책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일인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일들이 실제로 내게 닥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소한 일을 내가 걱정으로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차분히 걱정들을 적고 읽다보면, 내가 그토록 괴로워하던 걱정이 실제로는 그토록 괴로워해야 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셋째, 걱정 시간이 아닌데도 걱정이 된다면, 걱정의 초점을 다른 것으로 돌리면 된다. 특정한 대안을 떠올려서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 것을 ‘초점 전환(focused distraction)’이라고 한다. 특히 걱정이라는 생각의 영역에서 생각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 전환하면 더욱 도움이 된다. 걱정이라는 생각의 영역을 감각이라는 영역으로 전환해보자. 음악 소리에 집중해도 좋고, 아로마 향에 집중해도 좋고, 아름다운 풍경에 집중해도 좋고, 호흡에 집중해도 좋다. 신체 감각으로 있는 그대로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면 된다. 걱정이라는 생각의 영역을 신체 활동이라는 영역으로 전환해도 좋다. ‘단순 반복 행동’에 몰입하는 것이 좋다. 설거지를 해도 좋고 청소를 해도 좋고, 밖에 나가 산책을 해도 좋다.

2021-05-02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지질공원, 울릉도·독도

김윤배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동해연구소​​​​​​​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대장애국가의 가사대로 동해물이 마른다면 울릉도와 그 부속섬 독도는 어떤 모습일까? 독도는 자그마한 돌섬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보는 독도는 해저로부터 높이 약 2천300m에 달하는 거대한 화산체의 정상부일 뿐이다. 약 460만년전 해저 화산분출로 생성된 독도보다 훨씬 뒤늦게 약 250만년전 생성을 시작한 울릉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울릉도 최고봉인 성인봉 높이는 987m이지만, 그 실제 높이는 무려 약 3천100m에 다다른다.지난 2012년 12월, 환경부에서는 울릉도와 독도가 품은 지질학적 가치에 주목해 울릉도·독도와 주변 해역을 제주도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하였다. 2021년 현재, 경북도 2개소(울릉도·독도, 경북동해안)를 포함하여 전국에 13개소의 국가지질공원이 지정되어 있다.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에는 이중분화구, 주상절리, 시스택, 해식동굴, 해식절벽 등 다양한 지질학적 특성과 함께 성인봉 원시림, 알봉, 용출소, 죽도, 관음도, 삼선암, 코끼리바위(공암), 태하해안산책로 및 대풍감, 황토굴, 도동해안산책로, 저동해안산책로, 죽암 몽돌해안, 학포해안, 거북바위 및 향나무자생지, 봉래폭포, 국수바위, 버섯바위, 노인봉, 송곳봉 등 울릉도의 지질명소와 함께 독도에는 숫돌바위, 독립문바위, 삼형제굴바위, 천장굴 등 지질명소가 있다. 그야말로 섬 전체가 지질명소이다.독도는 해저산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지질유산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섬 전체가 화산암과 화산쇄설성 퇴적암류로 구성된 독도는 폭발성 화산분출과 동해의 거센 파도에 깎이면서 다양한 화산암층, 주상절리, 해식동굴, 해식절벽 등이 존재한다.250만 년 전부터 생성을 시작해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약 5천년 전에 마지막 분출이 일어난 울릉도는 성인봉, 나리분지(칼데라), 알봉으로 구성된 이중화산의 형태를 띠고 있어 지질학적으로 매우 큰 가치가 있다.성인봉 원시림은 성인봉을 중심으로 나리분지 일대에 넓게 분포한다. 해발 약 360m에 위치한 나리분지는 동서방향으로 약 1.5㎞, 남북방향으로 약 2㎞에 이르는 울릉도의 가장 넓은 평지이다. 울릉도는 전체 면적의 약 67.7%가 해발 200m 이상일 정도로 지형이 매우 가파르다.성인봉 원시림에는 생성이후 육지와 격리된 탓에 섬말나리, 섬바디, 우산고로쇠, 섬백리향, 섬쑥부쟁이, 울릉산마늘(명이) 등 30여종의 울릉도 고유 식물들이 자생한다. 세계 섬 중에서 가장 많은 향상진화 특산식물 보유지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식물 진화 자연실험실이다.울릉도는 단단한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토양이 만들어지기가 어려워 식물이 살기에 힘든 땅이었다. 하지만 나리분지 알봉이 생성될 무렵인 약 5천년 전에 마지막 화산폭발로 부석들이 울릉도 전 지역을 덮었고 많은 양의 화산쇄설물들이 퇴적되었다. 부석질의 화산쇄설물은 쉽게 풍화되어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층을 만들어 오늘날의 원시림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과거 비옥한 산림과 함께 현재는 더덕밭으로 유명한 죽도 또한 마찬가지이다.나리분지의 특징적인 지질구조와 풍부한 적설량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겨울 강수량이 가장 많은 울릉도의 기상 특성은 물이 풍부한 섬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하수로 발전하는 곳이 울릉도이기도 하다. 도동항과 저동항을 잇는 해안산책로는 울릉도 화산활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묵직한 지질교과서이다. 울릉도 북서쪽에 자리잡은 꼬끼리바위(공암)는 원래 울릉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파도에 깍이면서 외딴 바위를 만들었으며, 또한 아치형 해식 동굴을 만들었다. 울릉도 북동쪽에 위치한 해안절경인 삼선암 또한 원래 울릉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가 파도에 의해 침식되면서 현재의 시스택 구조가 되었다.대구경북연구원이 지난 2019년 울릉도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울릉도의 관광만족도는 다소 낮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울릉도의 생태자원 가치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주고 있었다.울릉도의 관광 만족도 개선을 위해서는 생태자원을 기반으로 한 울릉도 고유의 생태관광 프로그램의 적극적 개발이 필요하다. 특히 설문조사에서 관광객들은 해설사가 동행하여 울릉도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관광형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울릉군에서는 20여명의 국가지질공원 해설사를 두고 있으며, 사전 예약제를 통하여 울릉도(독도)의 지질학적 가치와 그 땅에 기대어 사는 주민의 삶을 알리고 있다. 울릉도와 그 부속섬 독도는 섬 전체가 야외자연사박물관이요, Eco-Lab (자연생태실험실)이라 할 수 있다.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을 기대해본다. 그것이 또한 울릉군의 부속섬 독도를 지키는 길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을 향한 긴 여정도 시작되고 있다.

2021-05-02

경제계 상소문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상소문 형식으로 꼬집은 시무 7조의 청원이 화제를 뿌렸다. 20만명 이상 청원이 올라온 이 글은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옛날식 상소문 형식에다 명쾌한 문장 전개로 세인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상소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그 내용은 건의, 청원, 진정 등에서부터 개인적인 감사의 표시까지 매우 다양하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관료와 학자, 유생이 올린 상소는 수만 건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상소는 관직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일반 유생까지 말할 수 있는 제도여서 당시 왕과 소통하는 창구로서 역할도 했다.조선시대 1만여 유생들이 올린 만인소(萬人疏)를 보면 당시 비록 왕권사회라지만 언로가 열려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 최초의 만인소(1792년)에는 영남유생 1만57인이 참여했다. 그들은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내용으로 상소했다. 상소문 중에는 지부상소(持斧上疏)라는 것이 있는데, 목을 내놓고 상소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선조 때 왜국의 사신 목을 베고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조헌의 상소가 그것이다.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훗날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수모를 겪었다.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을 건의하는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의 탄원이 청와대에 전달됐다. 경제단체의 이 같은 움직임은 이 부회장 공백에 대한 광범위한 경제계 우려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보다 앞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70%가 그의 사면에 찬성을 표했다. 백신과 반도체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대해 그의 역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인다. 대개 상소란 민심을 바탕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국민적 관심이 높다. 상소를 접한 청와대의 생각이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4-29

시험대 오른 윤석열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정치권의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여론조사서 대선후보 적합도 1위로 나오는 윤 전 총장이 매우 유력한 대권주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윤 전 총장의 대권가도는 아직 멀고도 멀다. 윤 전 총장이 맞닥뜨릴 가장 큰 난관은 아직 한번도 정치권의 검증대에 오른 경험이 없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우리 정치권의 인물검증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장관직을 맡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국회 인사청문회지만 그 험난함 때문에 고사하는 이들이 많아 장관 후보를 뽑기가 어려울 정도다.실제로 학계에서 명망이 높은 분이나 고위공직자로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온 이들 가운데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허망하게 낙마한 경우가 적지않다. 대표적인 게 자녀병역 특혜나 학위논문 표절, 친·인척의 부동산 투기행위, 아이들 학군배정과 관련한 위장전입, 기타 업무와 관련한 특혜시비 등이다. 예전에는 논문을 쓸 때 표절여부를 그리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았기에 학계 출신의 상당수는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고위공직자 자녀들 상당수가 병역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가 논란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아파트나 땅 투자로 재테크한 경우 역시 부동산 투기란 비판을 받았고,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명문학군에 위장전입했던 사실이 발각돼 낙마한 경우도 많았다. 정작 장관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업무적 능력이 문제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국회 인사청문회는 약과다.대권고지를 향한 인물 검증은 강도 자체가 다르다. 정치권 전체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물고뜯는다. 당연히 훨씬 가혹한 기준이 적용된다. 지난 대선 때 대선출마의 뜻을 밝히며 귀국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대선 불출마선언을 했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당시 반 전 총장은 국외에서 주로 활동을 했기에 정치적인 공격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었고, 외교장관에 임명될 때도 청문회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래서 대권 출마선언 직후부터 시작된 반(反) 반기문 세력의 파상공세가 더욱 힘겹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물론 윤 전 총장은 반기문 전 총장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제1야당인 국민의힘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있으며, 윤 전 총장에 필적할 만큼 지지율 높은 후보가 아직 없다는 것은 큰 메리트다. 다만 윤 전 총장이 국민의 힘으로 입당해 당내 대선후보 경선을 거쳐야 하는 게 부담이다. 당내에서 이끌어 줄 친윤파 의원이나 조직도 없어 후보로 확정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윤석열 신당을 만드는 것도 정치신인으로서 쉽지않은 일이다. 이 와중에 서울지방경찰청장 시절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은폐·축소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된 전력이 있는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이 29일 자신을 기소한 윤 전 총장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정치권 검증의 신호탄일 뿐이다.윤석열에 대한 검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2021-04-29

윤여정 신드롬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아시다시피,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제 이름은 윤여정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제 이름을 ‘어영’ 혹은 ‘유정’이라고 부르는데요. 제 이름은 ‘여정’입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용서하겠습니다.”배우 윤여정으로 온 나라가 흥분에 휩싸였다. 전세계가 놀라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상을 받았다. 영화 ‘미나리’를 통해 오스카 조연상을 받은 것이다. 연기상으로는 한국인 최초이고 아시아인으로는 두 번째라고 한다.지난해 2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적과 같이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을 당시도 연기상에서 한국인이 수상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고 더구나 2년 연속 한국영화 또는 영화인이 아카데미 시상대에 오르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올해 나이 일흔 넷의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믿기 힘든 순간을 한국영화 102년 역사에 남긴 것이다.‘미나리’를 연출한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이 절대적인 기회를 준 사람이긴 하지만 윤여정 개인의 노력이 돋보인다. 전세계에의 각종 영화상에서 무려 42개의 트로피를 받으면서 정점의 오스카상으로 마무리 한 것이다.본격적인 소감에 앞선 윤여정 특유의 농담에 시상식 장내에 웃음이 번졌다. 이미 앞서 열린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당시 “‘고상한 척(snobbish)’ 하는 걸로 유명한 영국인들”이란 뼈 있는 농담으로 화제가 됐던 윤여정이었고 이날도 브래드 핏 제작자에게 “드디어 만났네요. 영화 찍을 때 있었나요?”라고 하면서 재치있고 유창한 영어 솜씨로 때때로 던지는 유머도 전세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지금 열광하고 있는 윤여정 신드롬은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첫째, 자기 분야에 혼신을 다하는 사람은 결국 인정받는다는 전문성이다.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윤여정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정말 열심이었다. 중간에 10여년의 미국생활의 공백기를 딛고 귀국해 다시 차근차근 연기의 전문성을 쌓아 나갔다.둘째, 국제성이다. 한국어로 인터뷰하라는 요청도 있지만 국제어가 된 영어로 BBC, CNN 등 전 세계 매스컴에 자신을 알리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어로 농담까지 겯들이는 모습은 그녀의 국제성이 앞으로 그녀의 국제성으로 높여 줄 것이다.셋째, 남을 배려하는 겸손한 이미지이다. 자신은 “최고”가 아니라 “최중”이 되자고 외치며 같이 경쟁한 후보들을 일일이 칭찬하고 자신에게는 조금 행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윤여정 신드롬은 우리 사회가 노력을 통한 전문성, 그리고 국제적 감각으로 무슨 일이든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절대적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윤여정의 초기 데뷔 시절 어딘가 부족한 듯한 연기를 보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걸어온 길에 경의를 표한다. 그건 우리 모두가 배워야할 길이다.윤여정 신드롬을 마냥 즐기고 싶다.

2021-04-29

미국과 중국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직전인 조선말기는 지리멸렬한 정국이었다. 오랜 당파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데다 국제정세에 무지몽매한 조정은 불어 닥친 외세의 바람에 갈팡질팡하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19세기 말에 네 차례나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비숍 여사는 조선인들의 가난과 불결, 게으름에 놀랐다고 한다. 조선의 백성들이 가난한 것은 노동의 의욕이 낮고 따라서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인데 이는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일을 해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절망과 체념이 백성들을 무기력하고 게으르게 만든 거라는 결론이었다. 거기다 상류층은 사치와 방탕에 절어 있었다고 한다. 맹자에 나오는 ‘國必自伐然後人伐之(나라는 스스로 망할 짓을 한 후에 다른 사람이 멸망시킨다)’는 말처럼 조선은 이미 곳곳에 패망의 징조를 보이는 나라였다.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것은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때문이었다. 타력에 의해 불시에 해방은 되었지만, 막상 나라를 다시 일으킬 준비는 되어 있질 않았다. 당연히 좌왕우왕하고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었다. 식자층의 과반수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국민의 70%가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실정에 남쪽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의지와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미국과 동맹을 맺고 비호와 원조를 받은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혜택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김일성이 도발한 6·25전쟁에 미국을 위시한 유엔의 도움이었다. 미국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 때 대한민국은 없어지고 우리는 지금 김정은을 절대 존엄으로 떠받들어 모시고 사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 비록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도운 것이라 한들 그것이 우리나라를 살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일이다. 반면에 중공군의 개입이 없었으면 남북은 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압록강까지 진격을 해서 한반도의 통일은 눈앞에 둔 순간 중공군의 침입으로 무산이 된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이었다. 전쟁의 발발에서 병력투입까지 중공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적국이었다.지금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을 장악한 주사파들 중에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것이 못마땅할 뿐만 아니라, 6·25전쟁에 미군이 참전해서 적화통일을 막은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미군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사회주의국가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노선이 반미친중 정책이다.반대쪽 국민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겉으로는 아닌 척 위장을 하더니 차츰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분명한데도 경각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한사코 엇길로만 가는 정권에 불안하기 짝이 없다.

2021-04-29

달동네 같은 교회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한국 건축의 아버지 김수근씨는 “우리 선조들은 집을 건축할 때에 집 없는 이들이 묵어갈 사랑방을 두었다”면서 건축에는 반드시 이웃과 함께할 공간이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 승효상은 “무엇이 진정한 건축인가?”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시기에 우연히 달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달동네는 가난한 이들이 사는 곳이라 서로 필요한 자원을 나누며 살았다. 단칸방이라 집에서 모일 수 없어 지형을 따라 생성된 좁고 굽은 길에서 모였는데 그 길은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놀이터요, 치유가 이루어지는 병원이요, 물자를 나누는 시장이요, 삶을 공유하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이 길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활의지를 다지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었다. 승효상은 달동네의 길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건축의 길을 찾았다.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교회란 무엇인가?”하고 묻자 교황은 “교회는 야전병원과 같은 곳”이라 했다. 야전병원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해서 다시 전쟁터로 돌려보내는 재활의 장소이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상처입은 사람이 치료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도록 도와주는 곳이 교회라는 뜻이다. 도시건축학자들은 야전병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달동네라고 했다. 달동네는 인생의 낙오자들이 잠시 머물러 살면서 재활의 의지를 다지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미관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달동네를 없애려 하지만 달동네가 사회에 기능하는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기에 선진국가에서는 하나 이상의 달동네를 존속 시키고 있다. 미국의 할렘, 영국의 이스트런던, 프랑스의 아롱디스망이 그것이다.나사렛은 로마에 의해 파괴된 세포리스라는 도시에서 시오리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은 멸시받고 천대받은 인생의 낙오자들이 사는 달동네와 같은 곳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속담이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철저히 버림받은 달동네였다. 그곳이 바로 예수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예수는 버려지고 상처입은 자들의 재활 치유자였고, 삶을 공유하는 희망의 예언자였고, 생명의 길을 제공하는 자였다. 당시 성공한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축제를 즐겼지만 실패한 낙오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성전출입이 금지 되었다. 예수는 이들을 위한 축제를 갈릴리 빈들에서 열었다.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불러온 달동네의 축제이다. 이 축제 정신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초대교회로 이어졌고 오늘의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야전병원은 오늘의 달동네이며 오늘의 교회는 달동네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2021-04-28

인연을 짓다

정미영수필가벚나무 꽃자리마다 초록빛이 시(詩)처럼 흩날리는 봄날이다. 나는 도서관을 향해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강의실로 들어가기 전에 책과 먼저 눈인사를 나눈다. 정갈하게 정리된 서가 사이를 오가며 서너 권의 책을 꺼내 들면, 작가의 소중한 글을 제각각의 공법으로 알차게 꾸민 출판사의 노력이 표지부터 물씬 전해진다.책을 펼치면 주옥같은 언어의 황홀경이 펼쳐진다. 인생의 세밀한 구석들을 명증하게 들추어내는 책을 들여다볼 때면, 수필을 쓰는 나로서는 자극을 받을 때가 많다. 나도 우리네 인생사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깊은 울림을 주는 문체를 사용해 진솔한 작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내 수필 속 청신한 문장들이 독자들의 마음속으로 날아가 선명하게 돋을새김 되어 빛나면 좋으련만.독서는 삶을 변화시키는 임계점이다.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자분자분 문장을 음미하다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책에 몰입하게 된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순간은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창조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책을 통해 치유받기도 하고 살아가는 힘을 얻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책에서 얻은 순도 높은 깨달음을 공유하는 데에는 독서 모임이 제격이다. 나는 포항시립도서관에서 인문학 독서회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덕분에 회원 분들과 어우렁더우렁 ‘책수다’를 떨고 있다. 같은 책을 읽고 다양한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행복해질 거야.’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문장을 빌려 독서회를 기다리는 내 설레는 마음을 표현해 본다. 우리는 책이라는 연결고리로 만나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문장과 생각들을 펼쳐 보인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며 등장인물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하고,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자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책 향기를 맡으며 우리들 내면이 성숙해지기를 바랄 때도 있다.책은 타인과 소통하는 문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내 생활을 잠시 멈추고, 문을 활짝 열어 내 주위를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뜻에서 독서회에 참여하는 분들은 이미 타인과 소통하고 있다. 회원들은 서로의 고민과 아픔을 말하며 고단한 등을 토닥여 주고는 함께 눈물 흘릴 때가 있다. 삶의 깔딱고개를 넘어오느라 숨이 찬 것을 잠시 내려놓기도 하고, 자녀와의 부대낌 속에서 겪는 속상함을 이야기하면서 치유 받기도 한다. 시나브로 우리는 책을 통해 기꺼이 동반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나는 독서회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 얼마 전, 회원 한 분이 내게 책을 선물해 주셨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받은 속상함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심리 책을 섭렵하고 있는 중이라며, 자신의 마음을 옭아매고 있는 상처를 보듬기 위해 이 책을 골랐다고 했다. 책을 읽는 동안 위로를 받았다며 내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단다.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내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독서회는 꿈 씨앗이 영글어 가는 곳이다. 좋은 책은 꿈을 잃고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꿈을 되돌려 주거나, 혹은 꿈을 잃어버린 채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힘으로써 세상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책의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 자신만의 꿈 씨앗을 싹 틔우고 튼실하게 자랄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다.회원 분들은 품이 넉넉한 탓에 누구라도 환영한다. 책을 읽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 찾아왔든, 사람이 그리워 찾아왔든, 항상 밝게 ‘손 내밈’을 한다. 독서회는 왜 질리지도 않고, 계속 참여하고 싶고, 옆에 영원토록 붙잡고 싶은 것일까. 우리 회원 분들이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희망의 언어를 책 속에서 찾아내어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기를 곡진하게 기원해본다.나는 지금, 독서회 분들과 소중한 인연을 짓고 있다.

2021-04-28

유년의 봄

하늘이 참 맑은 날, 바람 한 자락에 꽃 소식이 묻어왔다. 먼저 나서는 마음 따라 자두나무 과수원으로 향했다. 밭둑에는 쑥, 냉이, 민들레꽃이 나붓이 엎드려 있고 나무들은 하늘 아래 햇볕 바라기 중이다. 어우렁더우렁 자두나무 사이를 걷는데, 아찔한 향기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춘다. 꽃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가지를 뒤덮은 나비 떼가 파르르 날갯짓한다.나무가 열매보다 먼저 꽃을 피운 길이다. 향기 없는 꽃이 있을까마는 여느 꽃보다 자두 꽃의 진한 향기가 온몸에 밴다. 목련처럼 인심 넉넉한 꽃송이를 피워 사람을 불러들이지도 않고, 앙증맞은 꽃을 나무에 달아 놓고 화르르 떨어져 버린 벚꽃도 아닌. 자두는 순백의 꽃잎에 꽃 수술을 촘촘히 새겨 놓았다. 봄볕 아래 참 해사하다.하늘 아래 거저 피는 꽃이 있으랴. 비와 바람과 눈보라 그리고 살갗을 에는 한파를 견뎌낸다. 강산이 서너 번 변한 때에 나무는 나무껍질에 숨구멍을 내면서 제 몸을 키운다. 불규칙하게 세로로 갈라진 몸피를 보니 삼십 년쯤 되었을까. 나무의 몸통이 검고 골이 깊을수록 나무가 견디었던 시간이다. 그러면서 나무는 봄이면 가지를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꽃을 피워 나비를 부른다.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다. 고향 집 앞마당 우물가에 자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키가 크지 않아 가지에 열매를 늘어지게 달고 있는 자두나무를 만만하게 보았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어 나무에 올라갔다.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자두 하나씩 나눠 주며 으스대고 싶었다. 마지막 한 개를 따려다 가지가 부서져 나무에서 떨어졌다. 순간, 기절했다. 내 머릿속의 기억 한 부분을 완전히 지워 버린 사건이었다. 부모님은 다음 날, 자두나무를 사정없이 베어 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자두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향에서는 자두를 ‘왜추’라고 불렀다. 왜추의 맛은 고향처럼 내 몸에 각인 된 그런 맛이었다. 첫 아이를 배고 입덧이 왔을 때 왜추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무더위에 지치고 입맛 헛헛한 날, 과일가게에 있는 진한 보랏빛의 자두를 보자 침샘이 자극했다. 잊혔던 고향의 입맛을 불러왔다. 잘 익은 자두를 한입 베어 물었다. 과즙이 터지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고였다. 고향 집 왜추나무의 추억을 불러들여 입덧의 고비를 넘겼다.자두나무는 초봄에 하얀 꽃을 피우고, 늦은 봄에 잔가지 하나에 초록빛 작은 열매를 열 개 정도 맺는다. 오월이 오면 농부의 일손이 바빠진다. 일일이 나무를 돌아보며 적과해서 튼실한 것 하나만 남긴다. 남은 작은 열매는 여름의 뙤약볕을 견디면서 붉은색으로 익어간다.자두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을까? 자두나무는 16세기부터 1920년 사이에 자주색을 띠는 서양 개량종이 들어와 이름이 자도(紫桃), 자리(紫李) 등으로 불렸다. 지방별로 제각각 불리던 재래종 오얏과 섞여 쓰이며 점차 ‘자두’로 통일된 듯하다.오얏꽃의 꽃말은 순박, 순백, 열매의 모양을 본떠 순수, 다산, 생명력의 뜻이 있다. 맑고 순결하고 고귀한 오얏꽃은 조선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1892년 처음 등장했다. 대한제국이 건립된 후에는 황실에서 쓰는 물건에 오얏꽃 문양이 그려져 사용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오얏꽃 무늬의 은잔이 전시되어 있다. 덕수궁의 석조전, 운현궁 양관, 포항의 호미곶 등대의 천장에도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오얏꽃 문양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한때는 인정전의 오얏꽃 문양이 일본인이 설치한 벚꽃 모양과 비슷해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일본이 대한제국의 품위와 권위를 떨어뜨리려 오얏꽃 문양을 만들어 수치와 굴욕을 주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국가가 아닌 한 가문에 의해 지배되는 왕조라는 뜻으로 낮추기도 했다.이순혜수필가또한, 자두나무와 관련된 고사성어도 있다. ‘오이밭에서는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오얏나무는 그리 크지 않으면서 열매를 많이 맺으니 그 나무 아래서 쓸데없이 의심을 살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일 거다. 우리 생활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 이야기다. 이 화사한 봄날, 자두나무에 걸어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오늘따라 향기롭다.“내가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복숭아꽃 오얏꽃 아기진달래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내 유년의 풍경에는 오얏꽃이 빠지지 않는다. ‘고향의 봄’을 읊조리며 들길을 걷는다.

2021-04-28

코인 환치기

환치기는 통화가 다른 두 나라에 각각 계좌를 만든 후에 한 국가의 계좌에 입금한 후 다른 국가에서 해당 국가의 환율에 따라 입금한 금액을 현지화폐로 인출하는 불법 외환거래 수법을 일컫는다.이러한 환치기는 세금탈루나 외국에서 사용할 유흥자금 또는 해외도박·마약밀수 등의 불법자금을 조달하는 데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국인 K씨가 모 은행에 계좌(환치기 계좌)를 개설한 뒤 중국 현지의 가족들에게 송금을 원하는 조선족들에게 일정 수수료를 떼는 조건으로 송금액을 받고, K씨와 연결이 되어 있는 현지 환전상이 가족에게 해당액수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외환의 지급, 영수시 상대국 통화로의 환전절차 없이 ‘환(換)을 바꿔친다’고 해서 ‘환치기’ 라고 불린다. 특히 최근에는 자금 출처 조사가 어려운 비트코인이 새로운 결제수단으로 부상하면서 비트코인을 이용한 ‘코인 환치기’가 성행하고 있다. 수법은 기존 환치기와 비슷하다. 환치기 조직이 외국 거래소에서 가상화폐를 구입한 뒤, 국내 가상화폐 전자지갑으로 보내고, 국내조직이 가상화폐를 팔아 원화로 출금하는 방식이다. 은행을 통해 돈을 송금하면 환전 기록이 파악되지만, 가상화폐로 주고 받으면 파악이 불가능한 점을 악용한 것이다.관세청에 따르면 최근 3년 사이 이런 환치기 자금으로 외국인이 사들인 국내 아파트가 14채, 163억 원어치에 이른다. 더구나 4월 들어 2주 사이 시중 은행을 통해 중국으로 송금된 돈만 해도 지난해 월 평균의 10배에 이르는 1천억원을 훌쩍 넘었다니 걱정이다. 비트코인이 새로운 국제금융수단으로 막 떠오르는 마당에 환치기수법에 악용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런 일이다. 비트코인이 불법 환치기에 악용되지 않도록 제도정비가 필요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4-28

교육이 녹아내린다

장규열한동대 교수국격이 높아졌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올랐다 하고 문화강국으로 위상도 한결 날아오른다. K-Pop은 지구촌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글로벌 영화계에는 우리 감독과 배우들로 넘실거린다. 지구 위 어디를 가도 한국인들이 없는 곳이 없으며 가는 곳 어디에서도 이제는 소외되지 않는다.필자가 미국대학에서 가르쳤던 1990년대에만 해도 나라의 위상이 오늘같지 않아 안타까웠던 기억이 언제였나 싶다. 이제는 어깨 펴고 다닐 만하다. 코로나19의 광풍이 걷히고 나면 그런 변화를 확인하러 나가봐야겠다. 그랬던 시절에도 우리 마음에 비수처럼 번득였던 자랑거리가 하나 있었다. 교육.잘살아보려는 다짐 덕이었는지,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이 배경이 되고 아이들도 잘 따라줬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 회원국들의 교육상태를 비교하는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 PISA에서 한국 학생들이 수학과 과학 실력은 늘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랬던 실력이 이제는 조금씩 꾸준히 내려간다고 한다. 학력과 인성이 균형있게 자라야 하는데, 학력의 평균적인 하향추세는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그 와중에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교육을 비롯한 교육환경의 출렁거림 가운데 학력격차의 심화와 학력수준의 하향세는 더욱 시름을 깊게 만든다. 방역이 중요한 만큼 경제도 살려야 하지만, 미래를 담보할 교육의 기틀은 지켜야 한다.최근 한 시민단체의 조사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 상황을 전후로 중학교에서는 학력중위권이 상하위권으로 분산되는 ‘학력 양극화’현상이 나타났으며 고등학교에서는 중위권과 상위권이 줄고 하위권이 증가하는 ‘학력저하’ 현상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미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일반적인 학력저하 현상에 코로나19의 영향이 더해진 결과로 보인다. 온라인과 비대면수업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가운데,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사교육이 세차게 작동하여 학력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은 아닌가도 싶다. 교육당국은 ‘내려가는 비탈’에 선 학력저하 현상을 면밀히 분석해 장기적인 회복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건강을 위한 방역에 성공하더라도 교육의 뿌리가 흔들린다면 그보다 큰 실패도 없지 않을까.초중등학교 교육의 성패는 대학에서도 감지된다. 교수들이 평가하는 대학신입생들의 기초학력도 해가 갈수록 내려간다고 한다. 학문적 성과는 하루아침에 초인이 가져오지 않는다. 산적한 과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연구결과를 내기 위해서도 함께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갈 후학들이 계속 튼실하게 자라나야 한다. 성장과 발전의 바탕에는 든든한 공교육이 있어야 한다. 건강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도 학력저하는 위험하다. 밝은 내일을 열어내기 위해서도 실력있는 집단지성이 살아있어야 한다. 교육이 백년대계인 까닭은 의외로 간단하다. 배워서 익히고 다듬어 숙성한 사람들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서로서로 아는 게 많아야 한다. 실력은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갈고 닦아야 쌓이는 게 실력이 아닌가. 실력있는 국민이 나라를 세운다.

2021-04-28

‘문빠’와 ‘태극기’는 언제쯤 퇴장할까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해방 이후 한국사회는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분단과 6·25 전쟁, 군부 독재와 민주화, 민중 항쟁과 촛불혁명은 오늘의 분열된 정치 지형을 낳았다. 흔히 우리는 아시아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공한 국가로 평가를 받는다. 샤츠 슈나이더가 말하는 정당간의 정권 교체로 아시아 최고의 정치의 발전을 이룬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아직도 상호 부정과 거부라는 독특한 갈등 구조를 갖고 있다. ‘문빠’와 ‘태극기’라는 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간의 왜곡된 이념 갈등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태극기 부대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박근혜 탄핵을 극력 반대하면서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절대 신뢰하고 현재도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이 나라의 두 번의 군부 쿠데타까지 정당시하고, 선독(善獨)의 당위성을 주창한다. 지역적으로 영남을 주축으로 연령적으로는 60대 이후 세대가 많다. 이들은 반공에 철저하고 진보 정권을 좌파 용공 정권으로 간주하면서 문재인 정권의 퇴진을 거듭 주장한다.한편 문재인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 옹호하는 세력을 ‘문빠’라고 부른다. 보수 진영은 그 중 ‘대깨문’을 친문 보위 세력의 핵심으로 본다. 이들은 이 나라를 망친 장본인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이라 보고 이들을 극히 혐오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을 적극 지지한다. ‘문빠’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선의지를 무조건 존중하고 추종한다. 대통령을 향해 ‘인이 마음대로 해’라는 맹목적 정서가 깔려 있다. 이들은 보수가 재집권하면 나라가 거덜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촛불정권의 주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그러나 위의 ‘태극기’ 부대도 ‘문빠’ 집단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양쪽 모두 참 보수도 참 진보도 아닌 사이비 이념의 맹신자들이다. 이들 중엔 보수나 진보의 참뜻도 모르면서 상대를 감정적으로 비난 거부한다. 보수주의 원조 에드먼트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과격성을 반성하면서 자유라는 전통적 가치를 보존하자고 주장하였다. 진보는 정치 개혁이나 혁명을 통해 인권을 보장하자는 주장이다.‘태극기’나 ‘문빠’는 본질에서 너무 이탈해 진영 프레임에 빠져 있다. 모두 이성적이지 못하여 상대에 대한 적대감만 노출하고 있어 이 나라 정치 발전에는 백해무익한 세력들이다.이러한 적대적 세력 간에는 화해할 수 없는 장벽이 있다. 서로 자신은 애국자이고 상대는 매국노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상대를 적대시 하는 감정 프레임의 노예가 되어 있다. 정치인들은 목전의 이익 때문에 이들을 교묘히 정치에 이용한다. 이들은 대체로 정치의식 수준은 낮으나 정치에 과잉 동조하는 세력이다. 우리 정치를 부정적으로 활성화 시킬 뿐이다. 이제 친박과 친문에 기생했던 ‘태극기’와 ‘문빠’는 퇴장할 시간이다. 그 시점은 내년 대선이 끝나는 지점이며 빠를수록 더욱 좋을 것이다.

2021-04-28

학교 외딴섬, 시험도(試驗島)의 비극

이주형 산자연중학교 교감“선생님, 저 영어 90점 맞을 거예요! 이거 복사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서울에 사는 학생이 월요일 등교하자마자 영어 선생님을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그리고 종이 파일을 건네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부탁한다.“90점! 그래, 열심히 해봐. 그런데 이번 시험 쉽지 않을 거야. 괜찮겠어.”“그럼요, 걱정 없어요. 주말 동안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이게 그 증거에요.”영어 선생님께서는 학생이 건넨 종이들을 찬찬히 살펴보셨다.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선생님 얼굴에는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몇몇 부분을 수정해 주셨다. 학생은 선생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바로 질문했다. 선생님께서는 반갑게 답해 주셨다.“친구들과 시험 범위를 나눠서 요약하기로 했는데, 큰일 날뻔했어요. 감사합니다.”학생은 너무 즐거워했다.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저렇게 즐거울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 학생을 필두로 교무실 앞에는 정리한 자료의 복사를 부탁하는 학생들이 줄을 섰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밝은 모습에 주말 내내 무겁기만 하던 필자 마음이 조금 밝아졌다.주말, 필자는 시험공부에 몸살을 앓는 학생들을 보았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앞에는 독서실이 있는데, 밤이면 간혹 어린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아파트 놀이터로 나온다. 뭔가에 잔뜩 화가 난 그들의 모습은 필자를 늘 불안하게 만들었다.“시험 포기했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혼잣말만 하고 나가버리고, 인터넷 강의는 들어도 모르겠고, 엄마한테 그냥 학원 보내달라고 했어. 학교가 왜 있는지 모르겠어.”비록 필자와 거리는 있었지만, 학생들의 한숨과 원망 가득한 말은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학원에 가기 위해 일어서는 학생을 붙잡고 필자는 말해 주고 싶었다.“얘들아, 모르는 것은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여쭈어봐.”하지만 필자는 돌아올 답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이내 포기했다. 일요일 늦은 밤, 학교 시험을 위해 학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성난 그림자가 필자를 노려보았다. 그 학생이 떠나고 남아 있던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어디론가 향했다. 그들이 가는 곳이 집과 독서실이 아님을 필자는 직감으로 알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들을 필자는 잡아주지 못했다.죄책감으로 시작한 월요일, 어느 학생의 하소연을 듣는 순간 필자는 더 큰 죄인이 되었다.“오늘 시험 치는데, 선생님들이 틀린 문제 수정한다고 하도 다니셔서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다 못 풀었어요. 근데 선생님들은 시험 방해한 거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세요.”시험에 갇힌 4월 학교는 의사소통이 단절된 섬이다. 그 섬 안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세상은 코로나19를 핑계로 귀를 닫았다. 5월 함성보다 더 큰 학생들의 원성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거듭 부탁하지만, 그 파도가 학교를 휩쓸기 전에 시험에 대해 제발 다시 생각하자.

2021-04-28

이순신과 영화 ‘명량’

김규종 경북대 교수2021년 4월 28일은 충무공 탄생 476주년 되는 날이다. 조선왕조 518년 사직을 돌아보면 세종과 이순신이 선두에 있다.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약관 21세에 왕위에 올라 훈민정음을 비롯한 문물 정비로 조선의 기틀을 놓은 이도(李7979) 세종. 조선 초기 정비되지 않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 후세 왕들의 모범이 된 인물 이도. 그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늦깎이로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은 몇 차례 난관을 뚫고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거북선을 건조한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이후 전공을 세운 그는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 총사령관에 오른다. 그 후 이순신의 행적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백의종군하던 그는 전함 12척으로 적선 133척과 맞붙어 승리하는 ‘명량대첩’을 진두지휘한다.2014년 7월 30일 개봉된 ‘명량’은 1천762만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사를 다시 쓰게 한다. 왜 ‘명량’에 수많은 관객이 몰렸을까, 하는 의문은 같은 해 4월 16일 온 국민을 낙담과 절망으로 몰고 간 ‘세월호 대참사’가 대답한다. 안산 단원고교 250명 학생을 포함한 305명의 귀한 생명을 수장(水葬)시킨 씻을 수 없는 ‘국가범죄’가 21세기 첨단정보통신 국가에서 발발한 것이다.실시간 중계된 ‘세월호 대참사’는 우리에게 국가의 부재와 권력자의 실종이라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빤히 보이는 배에, 서서히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죽음을 맞아야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치를 떨어야 했다. 대체 국가란 무엇이고, 권력이란 또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도록 만들었던 해양 참사가 우리를 바닥 모를 추락으로 인도했다.‘명량’에서 이순신은 ‘충’에 관해 맏아들 ‘회’와 나누는 대화에서 결연히 말한다.“충(忠)은 의리(義理)다. 의리는 왕이 아니라 백성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은 왕이 아니라,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누란지위의 백성을 지켜낸 이순신의 ‘충’은 왕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것이었다. 417년 전 이순신의 생각과 실천이 임진왜란의 극복으로 나타났다면,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는 충이 없는 대통령의 권력 유희였다. 현대국가 존립의 첫 번째 근거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국가로 불리지 못한다.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 일당의 권력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까닭이 거기 있다.국가의 이름으로 국난극복의 선두에 섰으되, 파직과 고문을 겪어야 했던 이순신. 모친상도 치르지 못한 채 백의종군에 임해야 했던 이순신.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결과를 끌어낸 이순신. 그런 지도자를 염원했던 사람들이 ‘명량’에 환호했다.충무공의 탄신을 맞이하여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는 난관의 중심에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 자리해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떠올리는 것이다.

2021-04-27

펜트업 효과

한국에서도 코로나 사태로 억눌렸던 소비가 폭발할 것인지 폭발한다면 언제쯤 될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크게 떨어진 우리나라의 경우 다소 비관적 전망이 많으나 연초 백화점을 중심으로 보복소비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해 꼭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최근 한국은행은 억눌린 소비가 터져나오는 펜트업(Pent up) 효과가 올해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펜트업 효과란 억눌렸던 수요가 급속도로 살아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소비개념을 더하면 보복소비가 된다. 한은은 올해 펜트업 효과가 일어날 이유로 가계소득과 고용여건이 작년보다 나아지고 감염병 확산에 대한 소비 민감도가 약해졌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특히 지난해는 전년보다 4%정도 소비가 줄어들었으나 저축률은 IMF 이후 가장 높은 10%대를 유지해 시중에는 돈 쓸 준비가 충분하다는 분석이다.전 세계적으로도 코로나 이후 소비가 급속 회복할 것이란 글로벌 컨설팅회사의 예측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은 코로나가 극심했던 기간동안 가계 저축률이 10∼20% 포인트 이상 올라갔고, 이들 돈이 풀리면 보복소비가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일자리 감소 등 저소득층에 피해가 집중된 반면 고소득층은 큰 피해가 없다는 점에서 소비회복은 고소득층부터 시작할 거란 전망이다.가장 먼저 경기회복을 찾아가는 중국의 경우는 올해 소비 성장률을 13.5%까지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고소득층의 명품소비가 가장 먼저 회복세를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한은의 예측대로 우리도 펜트업 효과가 생긴다면 우리나라는 집단면역이 형성될 11월을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4-27

혐오해도 마땅한?

피터 스완슨의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주인공 릴리는 말한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생명이 너무나 많다. 나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빈번하고 무고한 이들은 피해를 본다. 법은 약자를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하므로 누군가가 직접 나서서 단죄해야 한다.” 릴리는 심판자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살인을 실행한다. 그녀가 살해하는 대상은 무고한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저질렀으며 도덕적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그 때문에 독자는 릴리의 행동을 마음속으로 은근하게 응원하게 된다.소설은 최근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 일부 사람들은 타인에게 세상에서 사라지라고 발화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며 분명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여긴다. 나아가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기 자신이 그들을 단죄하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대상을 향해 멸시의 시선과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판단한다.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감정이며 이를 토대로 전염이나 오염의 상황을 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혐오 감정이 위험 요소가 없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게로 투사되면서 본격적인 문제가 된다.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순식간에 오염물로 치환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시선만이 존재하지 않고 주관적인 가치가 개입된다.사회적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혐오를 떠올려 보자. 그들은 시스템과 구조의 대변인으로 존재한다. 그 때문에 그들을 향한 혐오 표현은 타당성을 지닌다고 생각하기 쉽다.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문제에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들로도 난도질당하기 마련이다. 상대를 혐오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저 혐오하는 행위 자체가 동기가 되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최근 연예인들의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며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는 연예 기사면의 댓글 기능을 없애기도 했다. 일부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유명인은 마땅히 자리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늙었다, 멍청하다, 못생겼다 등 혐오에 근간을 둔 표현을 적절한 비난이나 비판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인터넷을 떠나 현실에서도 혐오 표현이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효과를 본다. 그런 점에서 혐오 표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비판과는 분명히 구분된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혐오는 인간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이것이 혐오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대상이 되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그저 오물과 같이 취급한다.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원한다. 더럽고 불결한 것들이 사라지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리라 판단한다. 쓰레기가 모조리 사라진 완벽하게 깨끗한 거리를, 청결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긴다. 정말 그럴까?혐오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특정 집단과 사람을 배척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 등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겨주었다. 증오와 폭력, 배제와 방관은 답이 될 수 없다. 고통을 고통으로 갚아주는 것, 혐오자를 혐오하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우리는 세상의 문제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한다. ‘나’와 구별되는 ‘너’, ‘우리’가 아닌 ‘그들’이 상정될 때, 나의 반대편에 있는 집단은 열등하고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치부된다. 나와 우리는 도덕적이고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상대편은 그렇지 않다. 이렇듯 선을 긋고 편을 나누는 것은 검열에 의해서다. 검열에 의해 결함이 생긴다. 납득할 수 없는 결함을 가진 타자를 반사적으로 거부하고 밀어내게 된다.혐오를 통해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일은 쉽다. 그리고 게으르다. 감정을 지탱하는 근거 역시 지극히 애매하고 추상적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혐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상대에게 가하는 하나의 폭력으로 끝날 뿐이다.그러니 ‘우리’라는 개념을 넓혀야 한다. ‘나’로부터 시작된 이해가 집단과 인종, 국가를 넘어 지구적인 공감까지 확장될 때 우리는 모두 비로소 존엄성을 가진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성실함이다.

2021-04-26

80년대생도 있다

최근 1년 간 한국 대중음악계에는 몇 가지 열풍이 있었다. 첫 번째는 BTS 열풍이다. 7인조 보이그룹 BTS는 국내 정상의 자리를 뛰어넘어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며 세계 무대의 정상에 오른 바 있다. 두 번째는 트롯 열풍이다. TV조선의 미스트롯, 미스터트롯의 연이은 성공에 힘입어 여러 방송사가 앞 다투어 트롯 경연 프로그램을 내어 놓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트롯 스타가 탄생하였다. 세 번째는 본 연재를 통해 언급한 바 있는 걸그룹 브레이브 걸스의 역주행 열풍이다. 국방 TV 위문열차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폭발적인 유튜브 조회수에 힘입어 각종 음원차트와 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최정상 자리를 휩쓸었다.이 열풍들은 모두 그것을 촉발시킨 주역이 되는 세대가 있다는 게 주목할 만 하다. 먼저 BTS열풍의 주역은 현재 10대 후반부터 20년대 초반을 이루고 있는 2000년대 생이다. 트로트 열풍은 현재 40대 이상을 이루고 있는 70년대와 그 이전 출생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브레이브 걸스 열풍은 최근 몇 년 간 군복무의 대상자였던 90년대 후반 출생자들과, 브레이브 걸스 멤버들과 비슷한 연령대인 90년대 초중반 출생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여러 세대가 저마다의 성장 배경과 문화적 환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현상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그런데 이러한 열풍들 사이에서 언급되지 않은 세대가 있다. 바로 현재의 30대부터 40대 초반을 아우르는 80년대 생이다. 80년대생이 주도한 가요 열풍은 한동안 거의 찾아볼 수 없다가, 최근 2~3주 사이 눈에 띄는 현상이 하나 발견됐다. 바로 3인조 남성 보컬 그룹인 SG워너비의 역주행 현상이다.김용준, 이석훈, 김진호 등 3명으로 구성된 이 그룹이 한창 인기를 얻었던 시기는 이들이 데뷔한 2004년부터 2010년대에 접어들기 이전까지였다. 이후 한동안 잊혀진 것처럼 보이던 이들이 최근들어 다시 음원차트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계기는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하게 된 일이다. SG워너비의 유사 그룹인 ‘MSG워너비’를 만드는 프로젝트 도중 원조가수로 등장해 흘러간 그들의 히트곡들의 라이브를 선보인 것이다. 이들의 라이브는 이들의 동세대이자 전성기시절 가장 많은 지지를 보낸 팬들이기도 했던 80년대 생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리고 80년대 생들의 향수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어 SG워너비를 음원차트에 다시 불러올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국내 최대 음원사이트의 실시간 차트 Top 10 곡들 가운데 ‘Timeless’, ‘라라라’, ‘내 사람’등 이들의 곡이 세 곡이나 올라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이러한 현상은 80년대 생이라는 세대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그리고 여전히 문화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인기를 얻었던 두 책 ‘90년생이 온다’와 ‘70년대생이 운다’가 떠오른다. 두 세대 사이에 끼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는 세대인 그들 역시 현재 90년대생과 2000년대생으로 대표되는 Z세대가 그러하고 그들의 선배세대들인 Z세대가 그러했듯 그들만의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했다.이들의 선배들에게 천리안, 하이텔같은 PC통신이 있고 후배들에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같은 모바일 SNS가 있다면 이들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그들만의 독자적인 온라인 문화를 창조하곤 했다. 싸이월드는 최근 기존 운영사인 SK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스카이이엔엠, 인트로메딕 등 코스닥 상장사 2곳을 포함해 총 5개 회사의 컨소시엄, ‘싸이월드제트’로 매각됐다. 80년대생의 향수가 여전히 사업성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다.이들만의 문화를 패러디한 유튜브 콘텐츠 ‘05학번 이즈 백’(피식대학 제작)의 조회수가 최대 350만에 육박한다는 것은 여전히 이들의 문화적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한다.이 글을 통해서 필자는 동년배인 80년대생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건네고 싶다. 비록 때때로 90년대생만큼 트렌디하지 않고, 70년대생들 만큼의 권력을 지니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소외되곤 하지만, 회사에서는 신입도 아니고 리더도 아닌 위치에서 겉돌기도 하고, 가정에서는 육아와 내 집 마련이라는 거대한 과업 앞에 주눅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세대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2021-04-26

학생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린다

권윤구포항 중앙고 교사코로나19로 3분의 2만 등교를 한다. 필자의 학교에서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급별 축구대회를 실시했다. 물론 코로나 방역 수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진행됐다.점심시간과 저녁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축구를 한다. 이 시간을 기다리는 선수들 모두 이기려는 의지가 모두 강하다. 하지만 한 팀은 이기고 한 팀은 반드시 져야만 한다. 모두 경기를 하는 팀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승리하는 팀은 한 팀뿐이다. 운동장에서 체조를 한다. 사진도 찍는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남긴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발산된다. 어디에서 이런 에너지가 나올까? 바로 학교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이기는 한 방법이다.예선전에서 필자의 반은 참패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학급별 축구대회는 학생들에게 흥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담임 선생님들도 분주하다. 음료수와 빵과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승패를 떠나 승리를 한 반, 패배를 한 반,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있다. 운동장에서 선수들이 열심히 축구를 하고 골대를 향해 공을 찰 때마다 엄청난 함성이 들린다. 젊음의 소리를 들어본 사람만이 함성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하늘을 찌르는 함성으로 공을 차는 학생, 공을 막는 학생, 응원하는 학생, 가슴 조이는 선생님, 모두가 한마음이다.학급 대표 선수를 뽑는 과정도 중요하다. 학생들끼리 회의를 엄청나게 많이 한다. 학생이 감독이 되어 협의를 통해 포지션에 대한 다양한 선수기용을 배정해 본다. 학생 자치가 스스로 이뤄진다. 참 재미있다. 이렇게 바람직한 학급 회의는 없다. 이것이 살아있는 학교이다. 젊음이 부럽다. 필자도 뛸 수 있을까? 마음뿐이다. 학생들과 마음으로 축구를 하는 것도 가슴이 뛴다. 각각의 반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담임 선생님의 표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먹에 힘을 잔뜩 실어서 꽉 쥐었다가,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가, 혼자 헛발질을 하다가, 가슴을 치다가, 공이 골대로 들어가면 환한 미소에 함성의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경기 중 선수가 넘어지면 “넘어지면 안돼” “안돼 안돼 다치면 안돼” 소리를 치다가 선수가 툭툭 털면서 일어나면 소리친다. “민석아 괜찮아!” 담임 선생님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또한 승부차기의 묘미는 더할 나위 없이 재미가 있고 긴장되는 순간이다. 킥이 준비된 선수부터 한 명씩 정해지면 공수 모두 긴장한다. 공을 차는 순간 숨죽여 응원하는 학생들이 모두 엄청난 함성이 나온다. “와-” 골이 들어가도, 못 들어가도, 골을 막아도, 골을 못 막아도 엄청난 함성이 나온다. 이런 경기를 또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학교가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경기이다. 교사 대표와 학생 대표 경기로 대미를 장식한다. 축제 중의 축제였다. “와 - 와 2013 와” 학생의 함성의 소리가 지금도 들린다.코로나19를 극복하는 방법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면 자연히 극복될 것이다. 학생이 학교에 있고, 학생이 교실에 있고, 학생 앞에 교사가 있으면 학교는 건강하다. 학생은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이다.

2021-04-26

성장과 일하는 기쁨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봄날이 깊어지니 초목의 성장이 한창이다. 가지가지 연록, 청록의 잎새가 나부끼고 군데군데 담록, 초록의 풀잎들이 손짓하는 산야는 온통 생동과 성장의 산실이다. 눈길 한번 돌리기가 무섭게 풀과 잎들은 성큼성큼 자라고 아찔할 정도로 금세 무성한 모습을 보이니, 과연 대지는 봄의 장단에 맞춰 싱그런 생동의 춤사위를 펼치는 듯하다. 생명이 깃든 온갖 만물은 이렇게 색과 빛을 드러내거나 소리와 모양으로 환호하고 몸짓하며 봄의 환희를 누리고 있다.생명이 있는 모든 물체는 움직임과 드러남으로써 성장하고 번식하며 번성해진다. 이러한 움직임과 성장은 저절로 나타나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생을 위한 노력과 일련의 작용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즉 생존하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일손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세한 움직임의 변화가 이어지고 더해져 생태계는 생장하고 번성하게 되지만, 사람이건 동, 식물이건 활동이나 성장을 멈추게 된다면 이내 모든 기능이 감쇠하고 자연순환의 법칙에 따라 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인간에게는 신체적인 발육이 일어나는 육체적인 성장과 마음의 작용이 이뤄지는 정신적인 성장이 있다. 신체적인 변화와 발달은 일정기간에 단계적으로 나타나다가 어느 시점에 멈추게 되지만, 사고와 지능에 따른 정신적인 영역은 시기나 범주에 관계없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엔 아이들의 생각이 어른들의 지식을 앞설 수도 있고,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얼마든지 젊은이 보다 참신한 생각을 던질 수도 있는 것이다. 경험과 습관, 인지와 사유에 따라 다르고 차이 나는 정신연령이나 수준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어느 때건 움직이고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고 본다. 농작물을 가꾼다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쓴다거나 취미를 계발하고 작품을 만들며 문화적인 생활을 누리는 따위의 일들은, 일의 가치와 보람을 차치하고라도 대상 자체를 즐기며 몰입과 희열을 느낄 수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성장의 폭과 깊이를 더해갈 수 있다. 육체노동이든 정신적인 감정노동이든 모두 생각하고 움직여야 실행으로 이어지며, 그러한 과정에서 수반되는 행위자의 건강, 의지, 소신, 인내, 절제, 천착, 안목 등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매번 새롭게 무장되고 온전해야만 일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나이가 들어도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일거리를 찾거나 만들어서 일하고, 꾸준한 자기계발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애씀 자체가 성장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랫동안 일하는 기쁨으로 심신의 강건함과 성숙을 가져올 수 있다면 한결 뜻있고 넉넉하지 않을까?초록의 푸르싱싱함이 성장의 활력을 부추겨선지 곡우 지난 들판엔 새로운 일 년을 준비하는 농부들의 일손이 많아지고 바빠지고 있다. 저마다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성장과 일하는 기쁨을 누려보자. 땀과 정성은 수고와 결실을 결코 배반하지 않으리라.

2021-04-26

살아 돌아온 DC 유니버스의 영웅들

2017년 한 편의 영화가 개봉된다. 코믹스를 원작으로 슈퍼히어로 세계관 구축을 위해 기존 히어로와 새롭게 등장하는 멤버들의 상견례가 이루어지는 자리다.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영웅들이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이는, 이른바 세계관을 공유하는 자리로서의 본격적인 영화였다. 바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저스티스 리그’다.영화사 워너 브라더스는 DC 코믹스를 원작으로 일찍부터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을 필두로 실사영화를 제작해 왔으며, 히어로 간의 연계되는 영화 속 세계관을 구상해 왔었다. 그러나 마블 코믹스를 기반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를 제작하던 마블 스튜디오에 밀려 뒤처지게 된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블 스튜디오는 코믹스에 등장하는 개별 히어로의 영화를 바탕으로 이들을 하나의 세계로 묶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는 세계관을 구축한다.워너 브라더스는 2016년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을 통해 통합 세계관의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이듬해 본격적인 궤도진입을 위해 제작되었던 ‘저스티스 리그’가 개연성 부족과 플롯의 산만함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어벤져스 시리즈’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취급되며 깔끔하게 안착하지 못한다.새로운 스타일의 슈퍼맨을 알렸던 ‘맨 오브 스틸’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 감독을 중심으로 DC의 세계관 확장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불행한 가정사로 인해 감독직에서 중도 하차하면서 마블의 ‘어벤져스’와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연출을 맡았던 조스 웨던 감독이 영화를 마무리 짓게 된다.DC와 마블은 코믹스를 기반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마블에 비해 DC는 확실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고뇌하는 히어로,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영웅의 등장이 그러하다. DC의 세계관에 마블의 영화를 제작했던 감독이 긴급하게 투입되면서 2017년 ‘저스티스 리그’는 마블과 DC의 중간 그 어디쯤에서 색깔을 잃어 버리고 만다.이후 ‘저스티스 리그’에 출연한 주연 배우들이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를 공개해달라는 팬들의 요구를 지지하게 되면서 마침내 2021년 감독판으로 재개봉(?)하게 된다. ‘저스티스 리그’가 개봉한 지 4년 만에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라는 이름으로 공개됐다. 기준의 차이가 있겠지만 2017년 영화와 2021년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다.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은 두 시간 남짓이던 영화가 4시간이 넘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두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은 거의 동일하지만 늘어난 시간만큼 개연성이 부족했던 새로운 캐릭터에게 배경 설명과 함께 캐릭터의 감정을 살리는 내용들로 채워지면서 가장 혹평을 받았던 부분을 보완했다. 또한 사연을 알 수 없었던 악당 스테픈 울프의 캐릭터 서사가 강화되면서 그의 행동에 개연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한층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한다.이뿐만 아니라 영화 비율이 1.85:1이었던 2017년작이 4:3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잘 사용되지 않는 비율로 수평보다는 수직적인 이미지로, 영화의 배경보다는 인물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영화가 개봉한 극장판 이후에 감독판의 경우는 재편집의 영역에 머무른다. 극장판에서 잘려 나간 촬영 분량을 삽입해 영화에 살을 붙이거나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하거나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와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단순히 감독판이라고 하기엔 전혀 다른 영역에 머무른다.2017년 영화를 2021년에 재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화를 관람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디렉터즈 컷’이 아니라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이며, 컬러풀 했던 영화 포스터가 무겁고 차분한 톤으로 만들어진 이유다. 같은 영화의 다른 버전이 아닌 유사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전혀 다른 영화로 봐달라는 강력한 시그널이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개봉으로 2017년 ‘저스티스 리그’는 가장 독특하게 잊혀지는 영화며 특이한 사례로 영화사에 남게 될 것 같다./영화기획사 엔진42 대표 김규형

2021-04-26

600여 년의 왕궁 역사를 간직한 월성 해자

월성은 마립간기가 개시되는 4세기 중엽(내물마립간·356~402년) 전후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신라 멸망 때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신라 왕족 및 귀족, 관료들이 600여 년 동안 궁중 생활을 지낸 기나긴 세월이 월성에 남겨져 있다.하지만 아쉽게도 월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최근에 들어 본격화되는 단계라 아직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월성의 축조 시점이 문헌 기록(101년·파사왕 22년)보다 250년 정도 늦춰진다는 사실만이 확인됐을 따름이다.다만, 부분적이나마 신라 왕궁 역사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월성 성벽에 인접한 해자다.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을 일컫는다. 성벽에 부속된 방어 시설로 취급되며, 출토 유물 또한 물길에 휩쓸리거나 인근에서 폐기된 것으로 간주돼 학술적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했다.하지만 월성 해자는 기존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됐다.해자의 면적은 고구려, 백제, 가야 왕궁의 것에 비해 2~3배 이상 넓었고, 퇴적된 토사의 깊이는 2.5~3m에 달했다. 그리고 신라 월성의 해자만이 삼국~통일신라시대라는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그 기능이 방어, 배수 구조물에서 조경 시설로 변화됨이 확인된 것이다.해자 조사의 발굴 연혁을 보면 월성 성벽이나 내부 궁궐과 달리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간헐적이긴 하지만 꾸준히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중요 사적지인 월성을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하기에는 부담됐기 때문에 그 주변 일대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러한 까닭에 1984~85년 1차 시굴조사, 1985~89년 2차 발굴조사, 1999~2006년·2007~2009년 3차 발굴조사, 2015년~현재까지 4차 발굴조사로 마무리되고 있다. 특히, 4차 발굴조사는 월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성벽, 내부 궁궐 조사도 함께 진행 중이며, 융복합 연구를 위한 고환경팀, 문헌팀 등을 포함해 조사단을 꾸려 혁혁한 성과를 매년 선보인 바 있다.이렇듯 월성 해자는 꾸준한 조사 성과를 통해 삼국 통일을 기점으로 삼국시대 수혈 해자(구덩이를 파서 만든 해자)와 통일신라시대 석축 해자(석재로 만든 연못형 해자)로 구분됨이 밝혀졌다.수혈 해자는 최초에 월성 성벽의 북쪽 방면으로 너비 25~45m, 깊이 1~1.2m의 구덩이를 굴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다른 왕궁의 해자가 10~15m 정도의 폭을 지닌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대규모 면적으로 축조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설계의 배경에는 홍수 범람이나 지하수 용출에 취약한 지형 조건이 고려됐으며, 대규모 해자를 활용해 적군을 막기 위한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유로를 통제하는 배수 기능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시간이 흘러, 수혈 해자는 한 차례 보수, 정비가 이뤄지는데 해자 너비-면적 차이가 특정 구간별로 극심한 데서 발생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른 조치로 해자 바닥을 다시 굴착해 높이가 1.2~1.5m에 달하는 목제 판자벽 시설을 25~30m의 폭을 유지하게끔 설치한다. 이런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통해 건기, 우기에 상관없이 배수량, 유로 흐름의 관리를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제의 절차로 배, 방패 모양의 의례 목제품이 출토돼 주목을 끌었다.장기명학예연구사월성 해자는 삼국 통일을 맞이하면서 또 한 번 큰 변화를 겪는다. 해자는 외부의 위협이 낮아지면서 방어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 석축 원지(苑池·관상용 연못)로 개축해 조경 시설로서 새롭게 단장됐다. 조경 시설로 거듭난 석축 해자는 6개의 석축 원지가 중간 지점마다 설치된 입·출수구를 통해 물이 흐르도록 설계됨으로써 월성 왕궁의 북편 일대가 운치 가득한 정원 단지로 느껴지게끔 조성됐다.현재 경주 관광 명소로 유명한 안압지 또한 동궁에 부속된 석축 원지로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당시 ‘월지’로 불리었고 월성 석축 해자의 축소판과 같은 모습을 띤다.이후 석축 해자는 2~4차례 개축되면서 전체 면적이 대폭 축소된다. 석축 해자가 줄어들면서 확보된 공간에는 관청 건물이 일렬로 늘어서 채워졌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는 삼국 통일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풍류를 넘어 국정 운영의 현실적 고충이 우선시된 배경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또 당시는 월성 왕궁뿐만 아니라 신라 왕경 전 구역이 도시 개발의 절정기에 도달하면서 전반적으로 중요한 건축물들이 확장되고 개축되는 시기를 지나가고 있었다.신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천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현재 월성 해자에서는 천년이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그 안에 담겨진 600여 년 간의 신라 왕궁 흔적을 흙 속에서 찾고 있다. 역사의 물길이 흘러 퇴적된 흙 속에는 소그드인(실크로드로 교역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으로 추정되는 토우, 국가 주도 토목 공사에 의한 징발령이 적힌 목간, 고대에 수풀을 이뤘던 나무, 식물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머지않아 해자에 대한 발굴조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만, 흙 속에서 찾은 유물과 고환경 시료는 지속적으로 분석돼 신라 왕궁 생활을 다각도로 밝혀줄 것이라 기대된다.

2021-04-26

문학적 독서의 힘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아버지가 미워요! 절대로 우릴 못 가게 했어야죠!’ 조엘이 울부짖는다. 그러나 조엘은 곧 자신 때문에 토니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토니가 수영을 못 하는 걸 알면서도 모래톱까지 수영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조엘, 너랑 아버지랑 토니는 제각각 선택을 했어. 다만 토니만이 스스로 선택하고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뿐이야.’ 조엘은 자신의 고통을 없애지도, 없애 줄 수도 없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엘은 울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가 안도한 듯 탄식했다. …. 조엘의 숨소리가 헐떡거릴 때에도 아버지는 조엘을 꼭 안고 있었다. 곧이어 조엘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아버지의 고동소리에 맞춰 숨을 쉬기 시작했다.위 장면은 마리온 데인 바우어의 ‘잃어버린 자전거’의 끝부분을 조금 줄여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136쪽의 얇은 청소년 소설이지만, 읽은 지 1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생생하다. 열네 살의 두 소년 조엘과 토니는 아기 때부터 같이 자랐다. 조엘은 토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토니의 무리한 요구를 잘 받아준다. 그날도 조엘은 12㎞나 떨어져 있는 위험한 절벽에 가기 싫었지만 토니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나선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중간에 토니가 수영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다른 곳에는 가지 말라던 아버지의 당부를 어기는 줄 알면서도 조엘은 금방 받아들인다. 그러나 토니는 익사한다.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예상하기 쉬운 부모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다른 곳에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듣지 않았느냐고 조엘을 나무랐을까?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위로할까? 조엘이 자기 몸에서 나는 강의 악취가 코를 찌른다며 냄새를 없애 달라고 할 때 아버지는 그 냄새를 없애 줄 수 없다고 한다. 토니가 자기 탓이라며 울부짖을 때 아버지는 우리는 각자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런 전개는 예상을 완전히 넘는다. 이렇게 예상을 뒤엎는 소설의 전개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최근 번역된 ‘신경미학’은 미학적 경험을 신경학적으로 분석한 여러 학자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중 데이비드 마이얼의 논문 ‘문학적 독서의 신경미학’에서는 문학을 읽을 때 독자의 경험에 대해 설명해준다.저자에 따르면,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의 상황에 참여할 때 문학적 독서가 일어나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가 ‘이화’이다. 이화라는 것은 독자의 예상을 넘는 전개를 만났을 때 생기는 낯선 느낌이다. 이 낯섦은 독자에게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도록 촉발한다. 각자 자신이 선택했을 뿐이라는 아버지의 설명은 단순히 네 책임이 아니야 하는 보통의 위로를 넘어 앞으로 조엘이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다.이런 아버지의 대응은 독자에게 낯선 느낌을 주면서 ‘지나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 않고 슬픔을 이겨내는 법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준다. 이화를 통해 독자는 직접경험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활성화된다. 문학적 독서는 힘이 세다.

2021-04-26

디지털 치매

‘디지털 치매’는 10~30대 젊은이들이 문명의 이기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치매와 유사한 인지적 저하를 보이는 일련의 증상을 가리킨다. 젊은 나이에 겪는 심각한 건망증이라 해서 ‘영츠하이머’라고도 한다.실제로 20~30대 젊은 친구들이 인터넷 검색창을 띄우자 마자 자신이 뭘 검색하려했는 지 생각이 나지 않거나 메시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 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않다.디지털 치매는 스마트폰이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마트 폰이 인간 뇌를 대신해 ‘기억’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의 연락처나 생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필요한 사소한 일들에 대한 기억도 메모기능이 대신하고 있다. 디지털 치매 진단을 위해 다음 증상 가운데 2가지 이상 해당된다면 위험성이 높다. △전화번호는 회사번호와 집 번호밖에 외우지 못한다. △전날 먹은 식사메뉴가 생각나지 않는다. △처음 만났다고 여긴 사람이 이전에 만난 적이 있던 사람이다. △같은 얘기를 반복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 있다 △아는 한자나 영어단어의 뜻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애창곡인데 가사를 보지 않으면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몇 년째 사용중인 집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이같은 디지털 치매를 예방하려면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고, 뇌 전체의 고른 발달을 위해 머리를 쓰는 다양한 취미생활과 함께 신문이나 TV 통해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술 담배를 삼가하는 것이 좋다.무엇보다 충분한 수면과 규칙적인 운동, 그리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는 게 두뇌건강에 도움이 된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한 삶은 건강한 두뇌가 있어야 가능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4-26

행복한 엄마와 아이의 미래가 있는 김천

김충섭김천시장저출산 시대다. 2019년도 국내 합계출산율은 0.92명으로 관련 통계작성(1970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가임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의 수가 1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2020년 발표된 유엔인구기금(UNFPA)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출산율은 조사 대상 201개 국가 중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데 따른 늦은 결혼, 주택문제,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양육 부담 등이 저출산 시대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김천시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출생아수는 838명으로 전년대비 4.6% 감소했다. 합계출산율은 1.27명으로 전국평균보다 0.35명 상회하고 있다. 김천시는 이 같은 인구절벽 문제 해결책의 하나로 전담부서인 인구정책팀과 출산장려팀을 운영하며 다양한 시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중에서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김천’ 만들기 공약사업으로 공공산후조리원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김천시 공공산후조리원은 인구 구조의 변화, 가족기능 약화에 따라 산모의 산후조리를 지원하여 안정적인 출산·육아환경을 조성하고, 산모와 아기가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암동 190-2외 8필지 1천689.6㎡ 부지에 70억원을 투입하여 지상 2층 규모로 지난 3월에 조달청 원가심사 및 공사발주를 시작했으며, 5월 중에 기반시설 및 건축공사도 착수하여 2022년 2월 완공 계획이다. 공공산후조리원은 12개의 모자동실과 신생아실, 모유수유실, 영유아실, 사전관찰실, 프로그램실, 급식시설을 갖추게 된다. 모자동실에는 개인 좌욕기, 거동이 불편한 산모를 위한 전용 샴푸실, 감염병예방을 위한 비대면 면회실이 있고, 신생아실에는 언제 어디서나 신생아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하는 등 다른 시군의 시설과는 차별화를 도모했다.또한 2020년부터 시작한 산모·아기 돌봄 사업은 출산 후 가장 힘든 시기인 100일까지, 총 30일의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본인부담금의 90%를 김천시에서 지원하여 초기양육의 고충을 덜어주고, 출산가정의 경제적인 도움과 행복한 육아 돌봄이 되고 있다.산모 아기 돌봄 사업은 지속적으로 신청자가 늘어나 서비스 이용률이 지난해 보다 10% 증가한 68%를 기록하였고, 출산장려금도 대폭 인상하여 출산가정의 경제적 부담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2020년 지자체 저출산 대응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상과 특별교부세 6천만원을 수상하기도 했다.2021년에도 저출산 극복과 출산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출산장려금 33억4천만원, 산모·아기 돌봄 사업에 24억2천만원 등 총 96억 2천만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다양한 모자보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김천시의 합계출산율은 전국 0.92명 보다 0.35명 높은 1.27명을 유지하고 있으나 2020년 김천시 출생아수는 전년대비 4.6% 감소한 838명이다. 인구 14만 도시 김천시에 1년 동안 출생아수가 800여명 밖에 되지 않고 그것도 매년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인구절벽이 바로 눈앞에 닥쳤음을 의미한다.그동안 지방자치단체에서 저출산 극복을 위해 추진하는 사업들을 보면, 출산지원금, 아기돌봄 서비스, 건강검진 및 진료지원 등으로 근본적인 문제해결에는 그 한계가 있다.취업, 주거 및 주택, 자녀교육, 일과 가정의 양립, 양육부담, 미혼모 및 한부모 출산, 비혼자 증가 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대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 초등학생 이하 양육비 지원, 청년주택, 신혼부부 임대주택 공급 등 중앙정부가 미래사회를 위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저출산 극복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때다.

2021-04-25

오래된 고전을 왜 우리냐구?

빨강 머리 앤 카페에서 모였다. 오늘 토론할 책이 ‘빨강 머리 앤’이기에 이리로 정했다. 월포해수욕장에 자리 잡은 이 카페 이름은 ‘커피선’이지만 가게 안에 온통 앤의 굿즈들이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입구부터 여행 가방을 든 앤의 까만 실루엣이 우리를 반긴다. 가방 안에 커피콩이 가득 들었다.빨강 머리 앤 애니메이션은 나보다 열 살 어리다. 캐나다의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에 글로 탄생시킨 것을 일본 후지 TV에서 그림으로 우리에게 펼쳐놓았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주인공의 모습을 삽화로 책에 그려 넣어 출판했기에 세계 어느 곳에서 읽은 사람이라도 똑같은 노란 머리의 빨간 마후라를 한 어린 왕자의 모습으로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그 역할을 일본 애니메이션이 우리에게 했다. 이 카페에는 그 앤의 모습이 가득하다.고아 소녀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초록 지붕의 커스버트 남매의 집으로 오는 장면이 소설의 첫 장면이다. 소심한 모태솔로 매튜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사과꽃이 흐드러진 가로수길을 지나는 장면은 압권이다. 고작 200미터 정도의 길이인 김유신 묘 입구가 벚꽃길의 최고 명소인데, 500미터가 이어진 길이라고 하니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수다쟁이 앤이 한동안 가슴이 아픈 듯 먹먹해서 입을 다물만했을 것이다.어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빨강 머리 앤을 왜 독서토론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고전이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란 농담이 있다. 그 농담에 다 같이 웃는 것은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단 제목과 줄거리는 들려오는 풍문으로 들어 알고, 두께가 주는 중압감과 바쁘다는 핑계로 거실 책장에 비싼 장식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도 빨강 머리 앤은 술술 읽기 쉬우니 다들 읽었겠지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릴 적 TV에서 방영한 것을 보았을 뿐 원작을 읽지 않았다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2021년 토론 목록에 명작읽기 코너를 만들고 키다리 아저씨와 빨강 머리 앤을 넣었다.나는 드라마도 새로운 것보다 좋았던 것을 몇 번 더 우려서 보는 곰탕 스타일이다. 처음 볼 땐 스토리 위주로 보고 두 번째엔 캐릭터가 보이고, 서너 번 더 보면 처음에 이런 장면이 있었나 싶은 느낌이 들고 처음엔 들리지 않던 대사가 살아서 귀에 꽂힌다.빨강 머리 앤도 이번에 읽으니, 몽고메리가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 곳곳에 있었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는 그리스도’라는 석판화를 보고 앤이 화가가 예수님 얼굴을 저렇게 슬프게 그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세상의 많은 예수님 그림이 전부 저래요 한다. 아시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백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부터가 아이러니다.앤이 처음 교회 간 날, 장로님은 기도하는 게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기도를 드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나도 늘 앤처럼 느끼던 바라 그 문장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해인가, 우리 교회 장로님 중에 한 분의 기도가 진심처럼 느껴진 날이 있었다. 그 장로님은 자신이 담근 젓갈이 잘 익었으니 예수님이 오셔서 맛보고 가셨으면 좋겠다, 베란다 화분에 난이 꽃을 피웠다며 향기로운 예수님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 사실 많은 기도가 귓가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는데 비해 예수님을 가까이 사는 친구처럼 대하는 그 기도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앤이 그려진 벽화 아래서 토론은 점심때가 지나도록 이어졌다. 카페를 나오기 전 굿즈 하나씩도 사서 나왔다. 우리 집에는 작은 시계를 들고 선 앤의 옆모습 나무인형을 데려왔다. 그동안 책꽂이 한 칸을 채울 만큼의 다양한 앤을 데려 왔지만, 앞으로도 쭉 들일 참이다. 새로운 번역이 나오면 사서 또 읽고 밑줄을 그을 것이다. 덕질의 즐거움이 이런 것일 테니. /김순희(수필가)

2021-04-25

코로나 장발장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일자리를 잃고 무료급식소까지 문을 닫게 되자 배고품을 견디지 못해 삶은 계란 18개를 훔쳐 달아났다 붙잡힌 40대 남자의 사연이 경기도에서는 화제다. 누범이라는 이유로 그는 5천원 상당의 계란을 훔친 죄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의 딱한 사정이 알려지면서 검찰이 재판부에 선처를 요청했고, 해당 자치단체서도 그의 생계 지원을 위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가난이 죄일 수는 없다. 죄는 믿지만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까지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 윤리관념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이같은 생계형 범죄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우리를 암울하게 하는 소식이다.검찰청 조사에 의하면 지난해 강력, 폭력, 교통범죄 등 주요 범죄는 전년보다 6∼9% 감소했지만 절도 등 생계형 범죄가 포함된 재산범죄는 전년보다 5%가 늘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경제 사정이 나빠지며 나타난 현상으로 풀이된다고 한다. 자영업자 등의 파산신청도 한달에 1천건을 넘는다고 한다. 코로나의 위력에 또한번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서울 영등포구청에서는 ‘영원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해 3만원 상당의 생필품을 부담없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품값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0원마켓이라 명명했다고 한다,‘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가난과 굶주림으로 빵 조각 하나를 훔쳤다가 19년의 징역형을 살게 되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코로나가 우리 사회에 이같은 장발장 인생을 양산한다는 느낌에 가슴이 아프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4-25

아편보다 더 중독성 강한 ‘權力’

심충택논설위원문재인 정권이 역대 다른 정권과 크게 구별되는 것은 노골적으로 국민을 양 진영(陣營)으로 나눠 전쟁하듯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다. 이제 국회와 법조계, 학계, 방송계, 시민단체 등 사회 전 분야를 장악하다시피 한 이 정권의 권력자들은 국가 시스템과 자원을 마음대로 주물러도 된다는 망상에 젖은 듯하다.가장 위험한 것은 법률까지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그들의 발상이다. 대표적인 게 여당 위성정당인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가 최근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것이다. 최 대표는 이동재 전 채널A 기자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정보통신망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현행 정보통신망법상 피해자의 의사표시와 상관없이 제3자의 고소로 수사 착수를 할 수 있는데, 이 법이 시행되면 피해자 고소가 있어야만 수사가 가능해진다. 최 대표에 대한 검찰의 정보통신망법 위반 수사는 피해자인 이 전 기자가 아닌 제3자인 시민단체 고발로 시작됐기 때문에, 개정안 통과 이후였다면 최 대표 사건은 수사조차 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자신의 재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전형적인 ‘셀프구제법안’이라는 비난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며칠 전 철회되긴 했지만, 민주당 설훈 의원이 발의한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도 ‘셀프특혜법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법안의 취지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만 관련자들을 국가유공자와 민주유공자로 예우하고 있는데, 유신반대투쟁과 6월 항쟁유공자까지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교육감 선거과정에서 자신을 도운 전교조 출신 해직교사 등을 부당하게 특별채용한 혐의로 감사원에 의해 경찰에 고발됐는데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권력집단의 탈법적이고 비상식적인 특권 행위는 이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서울 교통방송(TBS)이 김어준 씨에게 예외규정까지 적용하며 고액 출연료를 주고 있다는 의혹은 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들에게 절망을 주고 있다. 서울 한남동 김명수 대법원장 공관을 리모델링하는데 16억원 이상의 세금이 들어간 것, 경기도 안성 소녀상 설립 모금액 중 1천500만원이 방송인 김제동씨에 대한 강연비(2시간)로 지출된 것, 위안부 할머니들을 앵벌이 도구로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윤미향 민주당 의원 사건 등도 국민의 눈엔 기가 막힌 일로 비쳐진다.진보논객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중앙지에 쓴 한 칼럼에서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너무 많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고 언급한 부분에 공감한 적이 있다. 민주화 운동의 대명사격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는 이런 일은 없었다. 양 김 씨는 적어도 국민을 대상으로 자원을 고루 배분했고 국민세금을 남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권력을 행사하는 습관은 아편보다 훨씬 더 큰 중독성을 가졌기 때문에 멈출 줄을 모른다는 말을 요즘 실감하고 있다.

2021-04-25

포스트코로나, 디지털 치료기기 산업의 급성장

김도영포항테크노파크 첨단바이오융합센터장지난 20일 국내에서 최초로 ‘메신저 기반 불안장애 치료기기’인 ‘마음정원’이 우수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GMP) 인증을 획득했다. 디지털 치료기기 ‘마음정원’은 정기적으로 정신건강 관리가 필요한 불안장애,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대화형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해 만든 치료 서비스이며 상용화를 위해 올해 강남세브란스 병원과 임상 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발표한 ‘디지털치료기기 허가·심사 가이드라인(민원인 안내서, 2020.08)’에 의하면 디지털 치료기기를 “의학적 장애나 질병을 예방, 관리, 치료하기 위해 환자에게 근거 기반의 치료적 개입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로 정의하고 있다. 통상적인 의료기기는 질병이나 상해·장애를 진단, 치료, 경감, 처치 또는 예방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계, 장치, 재료 등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내시경, 호흡기, 혈압계, 심장 박동기 등이 해당된다.최근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인 인공지능(AI)과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과 덜불어 바이오헬스 분야의 새로운 트랜드로 디지털 치료기기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1세대 치료제인 합성 신약, 2세대 바이오의약품에 이어 3세대 치료제로 각광받고 있다.디지털 치료기기는 먹는 알약이나 주사제 대신 앱(응용프로그램), 게임, VR(가상현실) 같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치료제로 알코올이나 약물중독 치료나 정신질환 치료뿐만 아니라 최근 만성질환인 당뇨나 비만 예방·치료에까지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최초의 디지털 치료기기인 미국 페어 테라퓨틱스사의 약물중독 치료 앱인 ‘리셋(reSET)’을 비롯해 마약성 진통제 중독에 대한 디지털 치료기기인 ‘리셋-오’, 불면증 디지털 치료기기 ‘솜리스트’, 최초의 게임기반 디지털 치료기기인 ‘엔데버Rx’ 등이 FDA 허가를 받았다.국내 기업의 경우, 라이프시맨틱스사에서 호흡기질환 환자를 위한 호흡재활 프로그램 ‘숨튼’, 암 환자 예후 관리 프로그램 ‘레드필케어’ 등을 개발하고 있으며, 뉴냅스사에서는 뇌 손상으로 인한 시야장애를 치료하는 가상현실(VR) 기반 디지털 치료기기 ‘뉴냅비전’이 개발 중이다.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산업의 성장이 가속화 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디지털 헬스케어가 급부상하면서 치료 중심의 의료에서 소비자가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데이터 기반의 예방 의료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령화 및 만성질환자 증가로 인한 의료비 지출 확대, 의료데이터 급증, 스마트 기기의 보급 확산 등의 사회적 변화로 인해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의 필요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기존 신약은 개발기간이 평균 15년이 걸리며 3조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지만, 디지털 치료기기는 3.5년~5년의 개발기간에 100~200억원이 소요되는 장점이 있다. 또한 기존 치료와 달리 체내에 직접 작용하지 않아 부작용의 발생 가능성이 적고, 비대면 건강모니터링과 원격진단이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이다.최근 충북 오송(오송첨단의료재단)에서는 감염병 대응을 위해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이용한 비대면 건강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여 생활치료센터, 노인 요양원, 보건소 등에서 활용할 예정이다.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에서도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 후보물질 공동개발, 알츠하이머병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을 추진할 예정이며 일부 대형 제약사(한미사이언스, 한독)에서도 디지털 치료기기 연구개발과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실정이다.경북도와 포항시에서도 디지털 치료기기 신성장 산업을 선점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작년 6월 국내 대표적 제약기업인 한미사이언스가 포항에 3천억원 규모의 스마트 헬스케어 기반 구축을 위한 투자협정을 체결하고,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을 위해 11월 포항에 코리포항을 설립했다. 포항은 인공지능 대학원(포스텍), 디지털 데이터 수집 및 분석(한동대, 코리포항), 경북SW진흥본부(포항TP)를 비롯하여 디지털과 바이오분야 중소벤처기업 유치와 육성을 위한 포항지식산업센터, 바이오 오픈이노베이션센터(BOIC) 등 디지털 치료기기 산업 육성을 위한 필요한 핵심기술과 기반시설을 보유하고 있다.포항의 우수한 기술역량과 인프라를 활용하여 생체정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한 대사질환 및 당뇨병 치료·예측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개인별 맞춤형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을 위해 건강검진 데이터, 라이프로그(생활패턴) 데이터, 유전체 데이터와 장내 균총 데이터 등 건강 빅데이터와 다중 오믹스 분석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치료기기를 개발할 예정이다.포항은 철강산업 부진 등으로 인해 청년 유출이 약 2만명에 달하며, 청년 실업률이 11.2%로 전국 1위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경북 주도형 스마트 헬스케어 산업 육성을 통해 지역 균형발전, 인구 유출 방지 및 지역 청년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 최근 지진과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침체된 지역사회에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1-04-25

대구·경북 통합신공항과 지역발전

윤대식영남대 교수·도시공학과한때 웅도(雄道)로 자타가 인정했던 경북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 한때는 2대 도시로, 그리고 그 후 50년 이상은 3대 도시에 머물렀던 대구는 이제 4대 도시로 몰락함으로써 과거의 영광만을 자랑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대구·경북 인구의 감소는 지역의 경제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지역의 일자리 및 기회 요인의 미흡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대구·경북은 청년층의 인구유출이 심각하다. 청년층의 인구유출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눠 표출된다.첫 번째 단계의 인구유출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나타난다. 과거와는 달리 고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소재 대학으로 진학하길 희망하는 것이 현실이고, 실제로 많은 우수 학생들이 지역을 떠나 서울소재 대학으로 진학한다.두 번째 단계의 인구유출은 지역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수도권에 있는 임금이 높고 비교적 명망 있는 기업들의 끌어당기는 요인(pulling factor)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높은 주거비용과 열악한 환경에도 수도권에 있는 일자리를 선택하는 것이다.이제 대구·경북도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구·경북의 젊은이들이 고향에서 정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서도 대구·경북을 기회의 땅으로 인식하고 찾아올 수 있도록 구체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산업정책도 중요하지만,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국제공항은 지역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사회간접자본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KTX 역을 중심으로 광역경제권 혹은 광역도시권이 형성되어 왔으나 앞으로는 국제공항을 중심으로 광역경제권 혹은 광역도시권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이유는 세계적인 경제성장,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 및 소득성장, 그리고 저비용항공사들의 시장점유율 확대로 말미암은 항공요금인하 효과로 국제항공수요의 폭발적 증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을 단순히 출입국을 위한 관문 혹은 통로(gate-way)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지역발전을 위한 성장거점(growth pole)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공항건설 자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공항 주변에 공항도시(air-city) 건설을 위한 청사진 계획과 주변지역 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전문가와 시·도민들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새롭게 건설될 공항은 대구·경북 시·도민들의 아웃 바운드(out bound) 여객수요 못지않게 외국인들의 인 바운드(in bound) 여객수요를 겨냥해야 하고, 이를 위해 공항도시와 주변지역 개발계획을 수립할 때 인 바운드 해외여행객들을 위한 문화관광·쇼핑관련 인프라의 확충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대구·경북에 산재해 있는 역사문화관광자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자원 확충에 힘써야 한다. 예컨대 공항 주변에 국외여행객들을 위한 호텔, 리조트, 카지노, 테마파크, 프리미엄 아웃렛 몰 등의 유치가 필요하고, MICE 산업관련 인프라의 확충도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관광자원이 안동, 경주 등 경북지역에 산재한 역사문화관광자원과 결합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공항도시와 주변지역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긴요하다.새로운 국제공항의 건설은 주변지역의 산업생태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인천공항 주변에 국제 업무단지, 문화관광 관련 산업 외에도 물류산업과 첨단산업이 번창하는 것을 볼 수 있다.따라서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주변지역에 대구·경북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의 규모는 인천공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재 인천공항이 포화상태에 있어 새로운 기능을 확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살핀다면 통합신공항의 경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다.실제로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공항은 비록 항공여객수요는 많이 없는 소규모 공항이지만, 국제특송업체인 페덱스(FedEx) 익스프레스의 항공운송 허브(hub) 역할을 수행하면서 세계 최대의 물류공항으로 성장했다.바로 이러한 부분을 감안하면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의 경우도 전자상거래의 확대를 겨냥해서 국제 택배화물의 처리를 위한 물류허브공항으로 육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은 이제 막 시작단계에 있다. 통합신공항 건설은 새로운 공항의 건설로 종결돼서는 안 되고, 공항의 건설을 통해 지역발전을 견인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새로운 공항과 공항도시 건설, 그리고 주변지역 개발을 통해 대구·경북이 글로벌경제 환경에서 나름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제 통합신공항이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고 지역경쟁력을 확보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2021-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