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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판

등록일 2022-01-13 20:09 게재일 2022-01-1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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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흰 비닐로 감싼 볏짚뭉치들이 박하사탕을 뿌려놓은 것 같던 진풍경도 사라지면 겨울들판은 자유의 몸이 된다. 옛날처럼 이모작으로 보리를 심지 않으니 내년 모내기철이 될 때까지는 휴식의 기간이다. 텅 빈 들판을 불어가는 바람도 거칠 것이 없고 오가는 새들도 얽매임이 없다. 날마다 들판을 한 바퀴 돌아오는 내 발길도 자유롭고 해찰하는 마음에도 걸림이나 구속이 없다.

사방이 트인 들판에는 사철 바람 잘 날이 없다. 미풍에서 태풍까지, 삭풍에서 열풍까지, 무수한 스펙트럼의 바람이 시시때때 방향을 바꾸어 불어간다. 그래서 바람은 들판의 호흡이고 기분이다. 방한복으로 온몸을 감싸고 태풍 급의 칼바람 속을 걸어가는 것은 가슴 뿌듯한 겨울의 맛이다. 거침없이 불어가는 바람을 안간힘으로 버티며 걷다보면 원초적 존재감 같은 것이 차오른다. 찌들고 남루해진 목숨이 한 아름 벅찬 생명감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바람을 거슬러 걸어간 길을 등 떠밀려 돌아오는 건 또 다른 기분이다. 이 풍진 세상을 사는 동안 누가 이렇게 확실하게 등을 밀어 준 적이 있었던가.

겨울 들판엔 씨를 뿌린 듯 온통 참새들 천지다. 추수할 때 떨어진 낟알 때문에 겨울 동안 들판은 새들의 나라다. 비둘기나 까치 같은 텃새도 없지 않지만 가장 흔한 것이 참새다. 새 이름에 ‘참’자가 든 것은 ‘참한 새’라는 뜻인가? 농부들에게는 참하기는커녕 애써 지은 농작물을 축내는 얄미운 새이다. 허수아비를 세우거나 솔개모형의 연을 매달아 놓기도 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참새들은 잠시를 가만히 있지 않는다. 땅에 내려서도 걷는 법이 없다. 아무튼 끊임없이 날고 뛰고 재잘거리는, 한 점 어둡고 무거운 기색이 없는 그 생기발랄이 좋다.

이 들녘엔 해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청둥오리와 고니와 기러기들이다. 청둥오리는 텃새가 된 것까지 합해서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은데, 멸종위기생물 2급에다 천년기념물 20-1호로 지정된 고니는 흔하지가 않다. 기러기도 이 들에선 보기 드문 손님들이다. 편애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같은 머나먼 곳에서 이곳 한반도 동남쪽까지 찾아온 손님들이라 사뭇 반갑고 설레는 마음이다. 이번 겨울에는 고니 50여 마리와 기러기 일곱 마리가 산책길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놀라서 달아나지 않도록 멀리서 조심스럽게 바라보곤 한다. 경계를 늦추지 않다가 다가가면 후다닥 날아오르는 걸 보면 본능적으로 사람을 위험한 동물로 느끼는 것 같다.

얼핏 보면 무채색의 텅 빈 들판 같지만, 이렇듯 뜨거운 생명감이 있는가 하면 발랄한 생동감이 있고, 기쁘고 설레는 긴장감도 있다. 나는 그 모두를 통틀어 자유라 부르고 싶다. 인류가 추구하는 자유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진정한 자유란 자연스러움에 더도 덜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이 들판엔 아무런 구속이나 억압이 없다. 정치적 이념도 없고 백신패스도 없다. 누구든 틈나는 대로 겨울들판의 자유를 누려보시길 권한다. 무겁고 어둡고 복잡한 마음 다 내려놓고 겨울바람 속을 걸으며 새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힐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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