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은 빼기다. 사자를 만들려는 조각가는 바위를 앞에 놓고 바위에서 사자 이외의 부분을 조각조각 떼 내야하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자코메티는 거기서 더 나아가 형상이 실재처럼 안 보일 때까지 ‘더’ 떼 냈다고 한다. 마치 본질만 남기고 본질 이외의 것은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역설적이게도 본질 이외의 것을 떼 낸 그의 조각은 훨씬 실재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까? 많은 사람들의 고민이다. 뭔가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코로나 이전에는 성장, 더하기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면 코로나 이후에는 조각가처럼 빼기를 해야 하나? ‘욕망과 거리두기’를 하자는데 그게 가능할까? 이런 질문의 답을 고민하며 며칠 동안 자코메티의 조각상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목이 말라 숲속의 샘물을 찾아간 그리스의 철학자가 양치기 소년이 나뭇잎으로 샘물을 떠먹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바랑에서 컵을 꺼내 버렸다는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러다가 에스키모 인들의 늑대 사냥 법을 만났다. 눈벌판위에 동물의 피를 묻힌 칼 한 자루를 꽂아두면 늑대가 피 냄새를 맡고 와 칼날을 핥는다. 동물의 피를 맛있게 핥다가 자신의 혀가 칼날에 베이고 결국 자신의 피 인줄도 모르고 핥다가 늑대는 죽는다는 내용이다.
“그렇지. 우리 인간도 똑같아. ‘욕망과 거리두기’는 안 될 거야. 더하기도 만족을 못하는데 빼기라니 가당키나 한 일이야”하던 참에 이번에는 ‘아침식사로 지구 구하기’라는 부제가 붙은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책 ‘우리가 날씨다’를 만났다. 무슨 답이 있을 것 같아 읽어보니 ‘공장식 축산이 이산화탄소배출의 51%를 차지하며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는 내용이다.
샤프란 포어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여섯 번째 대멸종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인류세 멸종’이 그것이다.
1960년 공장식 축산이 시작되고 1999년까지, 메탄의 농도는 지난 2000년 중 어느 시기의 40년과 비교해도 여섯 배 더 빨리 증가했단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동물의 60%는 식용으로 대부분 공장식 농장에서 키워지는데 인간은 해마다 650억 마리의 닭을 먹으며 아마존 벌목의 91%는 축산업 때문이라고 한다. 기후변화는 당뇨병처럼 관리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며 세포가 치명적으로 퍼지기 전에 제거해야 하는 악성종양 같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국제 에너지 기구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필요한 재생에너지 기반시설을 갖추려면 적어도 53조 달러의 비용에 적어도 20년이 걸릴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그때쯤이면 기후변화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을 겁니다. 이와 달리 동물성제품을 대체품으로 바꾼다면 온실가스 배출을 급속히 줄이면서 동시에 땅을 비워 더 많은 나무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대기 중 탄소초과분을 가둘 수 있게 하는 이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물성제품을 대체품으로 바꾸는 것이 너무 늦기 전에 기후변화를 되돌릴 유일한 실용적인 방법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날씨다/조너선 샤프란 포어/민음사)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실존적 위협은 ‘우리가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삼는 법을 제시한다’고 말한 유발 하라리의 말이 현실이 되려면 적어도 하루에 두 끼는 채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육식에 대한 욕망과 ‘거리두기’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입으로 들어가느냐에 지구의 생사가 달려있다면 우리의 오래 길들여진 혀의 그 탐욕스런 미각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늦어도 2030년까지 50% 줄이고, 2050년, 이상적으로는 2040년까지 온실 가스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환경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을 지구가 자연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른바 ‘탄소 중립’이라고 불리는 상태다. 과학적으로 수립된 이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 가장 실현 가능한 방법이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된 육식을 현격히 줄이는 방법이다.
답은 나와 있다.
먼 훗날 후손들이 우리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때 뭘 하셨어요?”라고 물을 때 우리의 대답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이어야 한다.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도 했다”고 해야 한다. 칼날위의 피가 자신의 피인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늑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혀를 유혹하는 수많은 메뉴를 포기해야한다. 지구를 위해 치맥의 횟수도 줄여야 한다. 나의 건강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지구공동체가 살기위해서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각인된 육식의 욕망과 거리두기를 해야 할 때다.
뉴노멀은 빼기다. 우리는 이 슬로건을 밥상에서부터 실천해야한다. 슬기롭게 살려면 ‘매일 매일 채소롭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