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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간은 어디서 오는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4년 달력이 얇아지고 있다. 10월 말이면 나이 든 사람들을 감상에 젖게 하는 유행가 ‘잊혀진 계절’(1982)이 거리를 소란스럽게 한다. 계절이 오직 10월에만 잊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어째서 유독 10월이 거명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10월에도 적잖은 비가 자주 내렸다. 그래서 ‘가을비 우산 속’(1978)이란 노래도 곳곳에서 불린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손목시계나 휴대전화에 내장된 시계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는 것이 하나이고, 달력으로 1개월 단위의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 그 둘이다. 미시적인 시간을 살면서 거시적인 시간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가 성숙한 인간이다. 어린아이들은 개미나 매미처럼 지금과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철이 들 무렵을 사춘기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시간의 흐름을 비로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광속(光速)의 시간대에서 우리는 고도로 진척된 물리학 개념을 따라잡지 못하고 끝없이 표류한다. 이탈리아 양자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1957∼)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2019)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시간 개념을 전복(顚覆)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간다는 고정된 시간 개념을 분쇄해버리기 때문이다. ‘군도’의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는 “현재는 쏜살같이 달아나고, 미래는 주춤주춤 다가오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다”라고 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시간은 미래에서 출발하여 현재를 거쳐 영원히 정지된 과거로 흘러간다. 미래는 현재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현재는 쏜살같이 과거로 달아나며, 과거는 죽음보다 견고하게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2012)에서 과학사가(科學史家) 스티븐 제이굴드(1941∼2002)는 직선적인 시간과 순환적인 시간을 지질학으로 풀어낸다. 지층은 오래된 것일수록 아래에 자리하고, 새로운 것일수록 위에 자리한다. 지층만 생각해본다면, 시간은 분명히 과거에서 출발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직선적인 흐름을 가진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직선적인 시간에는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색바랜 사진에 들어있는 어린 시절 당신의 모습을 보라. 중고교 졸업사진에 뚜렷하게 각인(刻印)돼 있는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 사진 속의 당신과 사진을 보고 있는 당신이 진정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육신은 우리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존재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오장육부, 피부, 뼈, 혈액, 세포 등등)이 순간순간 변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시라. 어제의 나와 1년 전의 나, 그리고 10년 전 나의 물질적 구성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정신 혹은 마음이라 부르는 것 또한 고정불변하지 않은 것이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 한 시간 전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항상(恒常)하지 않다는 사실과 만난다. 시간처럼 인간도 불변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사라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와 작별하고 지금과 여기를 응시하시라!

2024-11-03

불조심 강조의 달, 우리 삶의 안전 ‘방화벽’

심학수 포항북부소방서장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나들이하기 좋은 청명한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11월은 불조심 강조의 달이다. 특히 11월부터 2월까지는 전체 화재 발생의 약 40%가 집중되는 기간으로, 화재 예방의 중요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다. 11월은 난방 기기 사용이 늘어나고 공기가 건조 해지면서 화재 발생 위험이 커진다. 이에 우리 삶의 안전 방화벽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몇 가지 화재 예방 수칙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난방 기기 취급 및 사용에 주의하자. 일교차가 크고 쌀쌀해진 날씨로 인해 난방 기기나 전열기구 사용이 늘고 있으며 특히 주거시설에서의 부주의가 주 화재 원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기 난방용품은 반드시 KC인증 제품을 사용하고 주변 가연물 적치 금지, 사용하지 않을 시 전원플러그 분리, 오래된 전선 및 멀티탭 교체 등을 통해 안전하게 사용하자. 두 번째, 공동주택 화재 예방 안전 수칙을 숙지하자. 공동주택 화재는 발생 시 다수의 인명 피해가 우려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주방 화재 등 공동주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화재 예방과 더불어 피난, 대피에 대한 사전 대응 태세도 무척 중요하다. 세대별로 주택용소방시설인 소화기와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며 아파트 복도나 계단에는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전기자동차 등 충전시설 화재 예방 안전 수칙을 준수하자. 전기자동차의 보급이 늘면서 관련 화재도 증가하고 있어 전기차 화재 예방 수칙을 정확히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충전 중 차량에 이상이 있는 경우 즉시 충전을 중단하고 점검받아야 하며, 충전 장소는 환기가 잘되는 곳에서 지정된 충전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주행 중 차량에서 연기나 이상한 냄새가 발생하는 경우 즉시 차량을 안전한 곳에 정차시키고 119에 신고하자. 또한, 전기차 전용 소화기를 꼭 비치하여 긴급 상황에 대비하자. 화재는 한순간의 부주의로도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작은 부주의가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각종 화재 예방에 주의를 기울여 우리 삶의 터전에 안전 방화벽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2024-10-31

원자력 발전의 부활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몇 년간 닫혀있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지난달 30일 경북 울진의 한울원자력본부에서 신한울 원전 1·2호기 종합준공 및 3·4호기 착공식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축사에서 ‘탈원전 폐기’를 선언한 것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 고리원전 1호기의 영구 정지 선포식에서 ‘친환경적이지 않고, 값도 싸지 않고, 위험한 에너지’라며 ‘탈원전’을 외쳤고, 신규원전 백지화와 기존 원전의 단계적 감축 등으로 한국전력에 26조 원이라는 손해를 끼쳐놓은 굴레를 벗긴 것이다. 설계 수명을 다하면 폐기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미국은 80년, 유럽은 무한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운전 중인 원전은 26기이며 발전량은 세계 6위이고 국내 전력 생산량의 30%를 담당하고 있는데 2016년 새울 3·4호기 이후 8년 만에 신규 건설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발전 방식에는 수력, 화력, 원자력과 친환경인 풍력과 태양열 등이 있으며 이 중 원자력 발전은 지속 가능한 자원의 활용으로 에너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고 온실가스 방출 감소로 환경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며 엄격한 안전관리로 안정적 운영뿐만 아니라 에너지 공급의 독립성과 경제적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으며, 연료도 우라늄 1kg은 석유 9천 드럼, 석탄 3천t의 발전량을 갖는다. 물론 핵폐기물과 방사능 유출, 또 사고 발생 시 환경 파괴 등 안전에 대한 염려도 많을 것이다. 원자력 개발은 19세기 말 방사선이 발견된 후 우라늄 핵분열을 연구하여 핵폭탄이 만들어지고 2차 대전 때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트려서 전쟁을 끝내게 된다. 이에 1953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원자력 평화 이용’ 선언으로 많은 나라가 핵에너지 이용을 추구해 온 결과 미국이 최초로 원자력 시설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1956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은 미래의 힘임을 간파하고 미국과 기술협력을 맺고 원자력법을 만들어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한 덕분에 핵연료 국산화 그리고 2012년 원자력 산업기술의 자립을 이뤘다. 이로써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을 바탕으로 원전 르네상스를 기대하고 있으며 2009년 아랍에미리트에 원자로 4기를 수출했고 이어 요르단과 터키에도 기술력을 전했으며 최근에 체코와 수출계약을 하는 등 원전산업 재도약이 기대되어 K-원전이 뜨고 있다. 한국은 1971년 가압경수로를 만들었고 2011년에는 제3세대 개량형인 한국표준 원전도 제작했다. 우리의 원전 1기는 약 100만kW이며 발전 단가는 kWh당 50원 정도로 석탄 석유보다 훨씬 싸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미국 스리마일, 구 소련의 체르노빌 그리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맴돌고, 우리나라도 8년 전 경주 지진으로 인해 원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높아졌을 것이다. 원자력 발전에는 많은 공업용수와 냉각수가 필요하여 한울 6기는 울진, 월성 5기는 경주, 고리 5기와 새울 4기는 부산, 한빛 6기는 전남 바닷가에 배치돼 있다. 윤 대통령이 원전 생태 복원을 외친 ‘2050 중장기 원전산업 로드맵’을 실현하여 세계에 우뚝 서는 원전 강국을 이뤄 내기를 꿈꿔 본다.

2024-10-31

이성(理性)과 합리(合理)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인류사회가 지금 이만큼 유지되는 것은 이성과 합리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종교적 신념이나 예술적 감성도 삶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하는 요소이긴 하지만, 인간사회의 기본 구조를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합리를 먼저 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성과 합리는 철학과 심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개념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문제 해결, 개인의 판단력, 나아가 사회적·정치적 결정에까지도 깊이 관여하는 개념들로,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두 개념이 서로 얽히고 맞물려 있지만, 그 차이와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성이란 논리와 객관적 사고의 근원으로 인간의 사유 능력, 즉 생각하고 논리적 결론을 내리는 능력을 말한다. 이성적인 사고는 객관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고, 감정보다는 논리와 근거에 따라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능력은 우리가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분석하고, 상황을 예측하며, 목표를 향해 일관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성적인 사고의 장점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나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판적 사고와 연관되며, 진실을 찾으려는 진중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성만으로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적 욕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합리는, 이성적 사고와 조금 다르게 현실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가장 적합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완벽한 해결책이라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가능한 최선의 선택을 의미한다. 합리적 사고는 대개 비용, 시간, 에너지 등의 자원 제한이 있는 현실에서 실용성을 강조한다. 합리성의 장점은 현실에 근거하여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실용성만을 추구하다 보면 윤리적 가치나 인간의 감정과 같은 요소들을 놓칠 수가 있다. 이성과 합리는 서로 다른 기준으로 행동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다. 이성은 큰 그림을 보고 논리적 타당성을 갖춘 이론을 제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합리는 그 이론을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을 제공한다. 따라서 두 개념은 개인의 의사결정뿐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정책개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정국이 지금 극도로 혼란한 것은 바로 이런 이성과 합리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마땅히 폐기처분 되어야 할 구시대의 잔재가 21세기 첨단국가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이토록 창궐하고 득세하는 것은 도무지 이성적이 아니다. 더구나 온갖 범죄혐의로 수사나 재판을 받고 있는 당 대표를 ‘방탄’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이성이나 양심까지 팽개친 무리들이 나라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다. 부디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줄줄이 이어지는 재판의 결과가 신속하고 엄정하여 이 광란의 시국이 평정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2024-10-31

‘원전 메카’된 경북, 첨단기업 유치 쉬워진다

경북 원전의 르네상스를 여는 울진 신한울 원전 1·2호기 준공식과 3·4호기 착공식이 그저께(30일) 신한울 원전 부지에서 열렸다. 신한울 1·2호기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로 완성한 원전이고, 3·4호기는 처음 착공하는 원전이다. 신한울 3·4호기는 발전사업 허가까지 받은 상황에서 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2017년부터 건설이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원전 생태계의 완전한 정상화에 박차를 가하겠다. 정치로 인해 원전산업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원전 로드맵을 마련하고, 원전 산업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었던 지난 2021년 12월 신한울 원전 건설 현장을 방문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폐기를 선언했었다. 윤 대통령이 이날 원전 르네상스를 맞아 1000조원의 글로벌 원전 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했지만, 망가진 국내 원전생태계를 복원하려면 갈 길이 멀다. 최우선 과제는 전문인력 양성이다. 국내 원전 인력은 전 정권의 탈원전 정책으로 급격하게 이탈했다. 단적으로 카이스트 원자력양자공학과의 전공자 수를 보면, 2016년 22명에서 7년 연속 한자릿수로 줄었고 올 1학기 입학생은 3명뿐이다. 원전산업 지원을 위한 법제화도 큰 숙제다. 한시가 급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은 아직 국회에 계류중이다. 현재 울진 한울원전과 경주 월성원전의 경우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 안에 임시로 저장하고 있지만, 곧 포화상태에 이르러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경북도는 이제 신한울 원전 준공으로 원전산업 메카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됐다. 국내 가동중인 원전 26기 중 13기가 경북에 있다. 향후 8년간 11조6000억원이 투입되는 신한울 3·4호기가 완공되면 경북은 국내 최대 전력생산 기지가 된다. 오는 2026년부터 차등요금제(발전소 밀집 지역 전기요금 인하)가 시행되면, 경북도는 전력수요가 많은 첨단 산업 유치도 한층 쉬워질 것이다.

2024-10-31

무주택 서민 등치는 분양사기 엄단해야

최근 몇 년에 걸쳐 전세 사기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많은 무주택 서민들이 절망감에 빠졌다. 정부가 특별법을 만들고 피해주민 구제에 나섰지만 피해가 완전 회복되기가 쉽지 않다. 사법당국도 전세사기는 서민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중범죄에 해당한다고 밝히고 엄벌을 선언했지만 근절까지는 우리사회의 시스템 개선에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가 인정한 전세사기 건수만 전국적으로 2만3000여 건에 달하고 피해 금액이 수조원에 이른다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임차인 상당수가 이제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신혼부부이거나 젊은층이어서 그들의 고통을 감당할 법적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한 일이다. 지난 5월 대구 남구에서는 30대 여성이 전세 살던 집이 근저당에 잡혀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세사기뿐 아니라 무주택 서민의 등을 치는 분양사기도 이와 유사한 범죄 행위다. 그저께 대구지방경찰청이 민간임대아파트 분양 사기로 100억원대 출자금을 가로챈 일당을 붙잡아 검찰에 넘겼다고 한다. 이들은 임대아파트를 정상적으로 분양할 의사나 능력도 없이 협동조합형 민간 임대아파트 조합원 225명을 모집해 놓고 출자금 143억원 상당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도 유사한 사업에 실패해 상당한 채무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의사도 매우 부족했던 것으로 경찰은 밝혔다. 분양사기 역시 무주택 서민의 등을 치는 악질적 범죄다. 피해를 당한 서민은 일시에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주택을 분양받기 전 해당업체에 대한 충분한 사전정보를 알아보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전국적으로 협동조합형 민간임대주택 사업관련 민·형사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고 밝히고 있다. 본인의 신중한 결정과 함께 사법당국의 엄중한 법 처벌로 유사범죄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침체된 지역부동산 경기를 정상화시키는 행정당국의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2024-10-31

직장 떠나는 MZ공무원

우정구 논설위원 MZ세대란 일반적으로 1980년 초반부터 2010년까지 태어난 사람을 정의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가 많다. 전 세계적으로는 출산율이 감소하는 시기에 태어난 세대라 이전세대와 구분되는 특징이 많다. 휴대폰, 인터넷 등 디지털 환경에 친숙하다. 빠른 정보수집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광고나 마케팅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만의 가치관과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세대로 평가된다. 세대간 의식의 차이는 굳이 MZ세대가 아니더라도 생기는 당연한 시대 흐름이다. 우리는 이를 ‘세대차이’라고 부른다. MZ세대 공무원들의 퇴직이 늘어나 공직사회가 비상이라 한다. MZ공무원을 붙잡기 위해 지자체마다 아이디어가 속출하지만 붙잡기가 만만치 않다. 장기재직 휴가를 늘리거나 대상 범위를 확대하고 새내기 휴가란 이름으로 재충전 기회도 제공한다. 또 가족이 병원에 진료 중이면 간병휴가도 준다. 최근 행안부는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 MZ공무원을 모아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여기서 모아진 의견을 정리해 공직사회 권고사항으로 발표했다. 근무시간외 무분별한 연락 자제, 상대방을 존중하는 언행, 눈치 야근하지 않기 등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직을 안정적 직장으로 생각하던 사회 인식이 MZ세대를 중심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낮은 보수와 경직된 공직사회 직장 분위기에 대한 MZ세대의 거부 반응이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재직 5년 이하 공무원의 퇴직자 수가 무려 1만3500여명이다. 5년 전보다 배가 증가한 것이다. MZ세대의 특성에 적합한 조치가 안 나오면 공직이 비인기 직장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31

‘大慶特別市’ 섬유패션 산업 부활의 길

신광조​​​​​​​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첨단산업과 중공업이 경제발전을 이끌어온 것 같지만 방적·나일론 의류와 신발 등 경공업 현장에서 흘린 우리 누님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사양(斜陽)산업은 없다. 인간은 과학기술로 돈을 만들고, ‘보고 듣고 맛보고 향(香)을 맡고 만지는 오감만족’을 위해 돈을 쓴다. 한국은 매력적인 이미지 문화적 유산에도, 세계에 통하는 브랜드 하나 못 만들고, ‘디올’백 타령만 하고 있다. 대구시의 ‘쉬메릭’브랜드만 해도 많은 돈을 들여 홍보한 지 몇 년이 되었건만, ‘황홀하다’는 뜻이 너무나 어렵다. 대구 의류의 브랜드로는 ‘Ambition(앰비션·야망, 포부)’ 정도가 적절하다. 삼성전자와 힙합 가수그룹 간 상표분쟁이 붙었으나, 삼성전자에서 상표등록만 하고 사용하지 않아 분쟁요소는 없다. 인간의 감성을 이용하여 너끈히 먹고 사는 경제 강국도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위스다. 대구·경북 특별시도가 ‘Ambition(야망·포부)’를 의류· 안경 등 지역 감성 상품 브랜드로 장착하였다면. 어떤 야망과 희망으로 채울 것인가? 의류 산업은 첨단 과학기술 산업이면서도 디자인 산업 즉 과학과 예술이 결합된 산업 분야이다. 의류 산업 구성요소는 뛰어난 재료인 원단 소재, 고객 만족의 디자인, 그리고 현대 산업의 특성인 유통마케팅 삼위일체로 구성된다. 10번째 유니콘 기업으로까지 성장하여, 의욕적인 도전을 펼치고 있는 ‘무신사’(‘무진장 많은 신발 사진’약자)의 젊은 조만희 대표나, “옷을 바꾸고 상식을 바꾸고 세계를 바꾼다”는 유니클로 창업주 야나이 타다시는 시대 흐름과 인간의 심리를 확실히 감지해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대구의 의류 업체들은 뛰어난 기능성 원단 제조를 빼고는, 주로 온라인에서 현란하게 펼쳐지고 있는 유통마케팅 경쟁의 장(場)에서 위 기업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묘수를 찾아야 한다. 바이오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체온1도 올리면 면역력이 5배 오른다. 내 몸의 적정체온을 36.5∼37.1도로 사수하는 의류 개발이 필요하다. 유니클로는 히트텍으로 대히트를 쳤다. 더 히트가 예상되는 것은 햇볕의 자가 치유능력을 결합시킨 첨단 의류소재 개발이다. 한국의 유력한 노벨과학상 후보인 서울대 남기태 교수팀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단백질들의 자가 치유기술을 모방해 수용액 상에서 불안정한 유무기 복합 소재를 안정화시키고, 태양에너지 수소변환 소재로 활용하는 연구 성과를 2016년 창출했다. 남기태 나노융합 신소재 개발팀을 대구시 다이텍(DYETEC) 연구원과 결합시키면 의류소재 개발에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박태영 수영복은 상어의 지느러미에서, 고어텍스 의류 방수성은 물을 튀기는 연(蓮)잎들에서 왔다. 자연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자연을 모방하면 지구 온난화 위기 해결과 인간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멘토를 가질 수 있다. 이를 발견하고 연구하며 적용하는 기술을 ‘청색기술’이라 부른다. 포항시나 경산시 같은 곳에 ‘청색기술 융·복합 연구기술재단’을 설립하여, 이 분야 일인자인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을 책임자로 앉혀 놓으면 된다. 대경권(大慶圈) 의류산업 진흥과 지구환경 보전, 지속가능 발전 금자탑이 될 것이다.

2024-10-31

편안한 수면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인체의 삼대 욕구 중 하나인 수면욕은 건강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잠을 잘 때 척수액이 뇌를 씻어 하루 동안 쌓인 피로 물질을 씻어 낸다. 척수액은 동맥을 따라 뇌 안쪽으로 흘러들어 쌓인 독소와 필요 없는 물질을 걸러내 정맥을 통해 뇌 밖으로 나온다. 이는 인체의 피로를 줄여주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또 잠을 잘 때 깊은 수면과 얕은 수면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얕은 수면인 렘수면 중 우리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꿈도 이때 꾸게 되고 그날 있었던 일이나 나의 걱정거리가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전부 정신적인 작용과 관련이 있고 렘수면 중 이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따라서 렘수면이 부족하면 감정조절이 어려워지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는 사람들은 밤을 새면 안 되는 이유다. 깊은 수면은 비렘수면이라고 하고 렘수면과 달리 이때 육체적 휴식과 충전을 하게 된다. 성장호르몬도 이 시기에 많이 분비가 되고 낮에 쌓인 피로물질과 노폐물이 처리된다. 따라서 잠을 충분히 자게 되면 피로가 풀리고 면역력도 강화된다.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깊은 수면이 충분해야 성장기의 키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수면은 육체의 피로와 정신적 피로, 스트레스를 풀어 몸의 피로를 없애주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그러나 잠은 자고 싶다고 해서 맘껏 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심장의 기능이 약하면서 가슴에 열이 많은 사람, 큰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몇 년 동안 받은 사람들은 쉽게 잠을 들지 못하고 유지하지도 못한다. 잠을 자려고 누워도 온갖 생각이 머리를 뚫고 머리를 헤집으며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렇게 수개월 수년을 지내면 정신만 피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약해지고 면역력도 떨어진다. 잠을 충분히 자면 해결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잠을 어떻게 하면 잘 잘 수 있을까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매일 낮에 충분히 햇볕을 쬐어야 한다. 인체에는 신체 시계가 있고 태양이 떠있을 때 충분히 햇볕을 받으면 인체 시계는 정상 작동을 하게 된다. 쉬는 시간에 멍하니 컴퓨터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보지 말고 밖에 나가서 햇볕을 쬐자. 둘째, 하루 10분만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보자. 눈을 감고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며 가만히 있어 보자. 처음에는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나 익숙해지면 머리가 맑아지고 스트레스로 복잡한 머리가 가라앉는다. 잠을 잘 때도 누워서 명상을 하듯이 눈을 감고 편안히 호흡에 집중을 하면 어느새 잠을 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셋째, 산조인과 치자 대추를 같은 비율로 물에 끓여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마셔 보자. 연하게 타서 시간이 날 때 물 대신 마시면 된다. 그리고 한의원에서 자율신경을 조절할 수 있는 한약과 약침 치료 등을 병행하면 좀 더 쉽고 빠르게 스트레스를 풀고 잠을 잘 수 있으니 주변 한의원에 들러 도움을 받아도 좋겠다.

2024-10-30

사찰 순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매월 3번째 일요일이면, 사찰 순례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채비를 서두른다. 7월부터였으니 이번 달까지 4번째였다. 사촌언니가 몇 년째 다녔던 ‘청계사 108기도순례’팀에 나를 넣어주어 가게 되었다. 언니가 보여준 일정표에는 일 년 계획이 미리 짜여져 있었고, 전국 팔도를 망라했다. 낮이 긴 여름에는 대구에서 먼 곳인 전남 해남, 강원 동해나 금강산, 충남 계룡산, 경기 화성, 전북 완산으로, 해가 짧아지면 경남 밀양, 충북 영동, 경북 경주였다. 그렇게나 많은 절이 있다는 데에 한 번 놀라고, 내가 가보지 못하고 모르는 절 또한 많은 거에 두 번 놀랐다. 우리나라엔 1만7141개의 사찰이 있고, 그 중 전통사찰은 982개소라는 정보를 검색해 찾아 보기도 했다. 나는 불교도이긴 해서 새해엔 팔공산 거조암을 찾는 루틴이 있고, 일 년 한두 번 108기도하는 정도였다. 기도보다는 역사문화 답사 목적의 사찰기행이 훨씬 많았다. 나의 첫 동참인 7월 일정은 강원도 금강산 건봉사, 화암사였다. 금강산은 북한 쪽에 있는 산인데 우리 땅에도 금강산이 있다니 호기심이 컸다. 미리 검색해보니 강원도 고성에 있으며 우리나라 동해안의 최북단이자 금강산의 최남단에 있는 절이었다. 장마 끝이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고, 가는 동안 보게 된 강이나 작은 시내조차도 싯누런 큰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대구에서 거의 5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먼 곳이었다. 관광버스 두 대에 꽉 찬 동반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여신도들이었다. 절에 도착하면 그들은 모두 곧바로 대웅전, 극락전, 삼성당을 차례로 찾아들어가 정성껏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나는 삼배 정도만 하고는 절의 역사와 문화재를 찾아 기웃거렸다. 건봉사에는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기념관이 있어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화암사는 절 이름대로 우리나라 구비설화의 대표적 화제(話題)인 쌀바위 전설이 있는 절이었으며, 과연 절 건너 야트막한 산 위엔 매우 큰 쌀바위가 있었다. 50년 국문학을 공부했지만, 몰랐다. 이제야 이런 인연으로 이곳엘 올 수 있다니, 몰라서 부끄러웠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세상엔 정말 배우고 공부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 공부한답시고 안다고 나섰다간 큰일 날 뻔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첫 시작의 강렬함은 이후의 일정엔 되도록 빠지지 않는 열정을 키웠다. 더구나 먼 여행의 동반들이 재밌고 좋았다. 차 안에선 각자 챙겨온 간식들이 좌석의 앞뒤로, 옆으로 넘나들며 나누어지기 바빴다. 내가 가져간 과일 몇 개를 나누어 덜면 가벼워질 줄 알았던 가방이 더욱 무거워지는 따뜻한 마법. 얼마 되지 않은 동참금을 내면 아침과 점심을 실하게 먹고-강원도는 멀다며 저녁식사까지 챙겨주었다- 먼 길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어디 있으랴. 남편에게 자랑했더니 남자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 기억엔 남자는 없더라며 손사래를 쳤다. 팔공산 갓바위에 종종 올라 열심히 기도하시는 안사돈께 말씀드려 한 번 동행한 적은 있다.

2024-10-30

초대하지 않은 손님

피귀자 수필가 텔레비전에 흐르는 자막처럼 황금 들판이 지나간다. 풍성한 차창 밖의 풍경에 저절로 자동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네모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논 속의 벼들이 옹골차게 익어가는 모습은 농부가 아니더라도 배가 부르다. 오래보아도 질리지 않는 따뜻한 풍경. 저리 윤나게 가꾸자면 농부의 다리는 더 가늘어지고 손은 더 거칠어졌을 게다. 한집의 논인 냥 고르게 익어가는 들판에 유독 삐죽 올라온 식물이 눈에 띄었다. 고개 숙인 벼보다 한 뼘씩은 높이 고개를 바짝 쳐든 것은 바로 농민들의 골칫거리, 벼의 천적 ‘피’였다. 꽃보다 더한 열정으로 꽃밭을 점령하는 풀처럼 위세가 당당했다. 서로 다른 목소리로 합창이 되지 못하는 논. 피가 벼보다 키가 큰 이유는 햇빛을 많이 받으려고 경쟁하듯 키를 키운다는 것이다. 가을이 익으면 우수수 몸부림치며 흘러내릴 저 몸, 내년을 더 걱정하며 어떻게 저 논에만 피가 저리 많을까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농부가 게으른 탓인가, 약을 치지 않고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게 아닐까, 설전이 이어졌다. 딸의 긴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있는 흰 머리카락이 벼논의 피처럼 바짝 고개를 들었다. 아직 흰머리가 생기기엔 젊은 나이인데 임신을 하고 해산달이 가까워 몸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가 되니 더 도드라졌다. 오죽 힘들면 저리 되었을까 눈이 아리다. 골고루 챙겨 먹지 않으면서 영양분을 나누느라 머리카락까지 저리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소화가 되지 않았다. 저릿한 마음을 사위 앞이라 내색도 못하고 자꾸 딸의 머리만 쓸었다. 큰 외손자가 아홉 살이 되도록 동생을 보지 않아 무던히 애를 태웠었다. 아이 하나도 제대로 키우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라며 둘째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아, 그래도 둘은 되어야 한다고 타일러 보았지만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돈댁에서도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고 남편도 본인은 뒷전에 있으면서 나를 통해 채근을 하는 세월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라는 더딘 처방, 완화 처방이 효과를 보아 모두 감사하고 기뻐했는데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은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해산일이 가까워지자 앉기조차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써 봐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대신 해줄 수 있는 집안일과 큰손자 보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둘째 손자를 안자 힘들었던 시간은 사라지고 웃음이 떠나지 않고 활짝 핀 꽃이 되어 켜를 이룬다.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 끝나고 걸어온 길에 흔적 하나를 더 보탠 딸네 가족의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셋보다 넷의 조화가 뿌듯하다. 딸이나 사위도 참 잘한 선택임을 뒤늦게 기뻐하고 있다. 갓난아기가 뿜어내는 기쁨의 파동이 온가족을, 친척들까지 들뜨게 한다. 연일 소리 없이 봄이 핀다. 봄바람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연한 살결의 손자는 쌔근쌔근 잘 자고 엄마 젖도 잘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란다. 하지만 수유 때문에 염색도 못하니 한숨을 먹으며 자란 흰 머리카락은 얼굴이 점점 더 커져간다. 드디어 딸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해산 후 어느 정도 지나면 일어나는 현상이라지만 쓸어낼수록 늘어나는 긴 머리카락이 애잔한데 빠지는 건 검은 머리카락뿐이다. 흰색은 뻣뻣이 나 여기 있소, 기세가 더욱 등등하다. 익어가는 벼논의 불청객 피를 보는 농부의 마음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날마다 빠지는 검은 긴 머리카락을 치우며 흰 머리카락이나 빠지길 바라지만 어쩌랴. 그 흰 머리카락마저 귀해질 때가 오리니. 검고 희고를 떠나 빠지는 자체가 애석해질 때가. 벼논의 제초제처럼 흰머리에는 염색약이 있지 않은가. 먹을 것이 귀한 시절엔 요긴한 먹을거리가 되기도 했던 피(陂). 하지만 요즘은 천덕꾸러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된 지 오래다. 농부가 얄미운 피를 뽑듯 뽑아버리고 싶었던 딸의 흰 머리카락. 하지만 한 때는 찬 가슴 데워준 열정의 몸, 나이가 부피를 키워갈수록 염색할 수 있는 그 흰 머리카락마저도 소중해진다지 않은가. 부풀렸던 마음속 미운 풍선을 터트리기로 했다.

2024-10-30

독도, 누가 흔드나

장규열 고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2차 세계대전을 마감하면서, 연합국들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이다. 미국, 영국, 소련 등 관련국들이 참여하여 서명하고 1952년 4월에 공표되었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대한민국과 북한은 어느 쪽이 한반도를 대표하는지 불분명하다는 핑계로 초대도 받지 못하였다.‘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제2조 이 한 줄에 ‘독도’가 들어있지 않다면서, 일본은 지금껏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남은’ 증거라는 것이다. 저 조항의 해석은 물론, 조약이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한일어업협정. IMF사태 복판이었던 1998년에 체결되어 이듬해 발표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어업협정이다. 협정이 양국 간에 설정한 ‘중간수역’에서는 두 나라의 국민과 어선이 상대국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영토여야 할 독도가 중간수역에 들어가 두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지역처럼 되어버렸다. 영토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설정하지 않고 중간수역에 빠진 꼴이 된 것이다. 일본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최소 절반이라도 흔들 수 있는 빌미를 남긴 셈이다. 중간수역에 떨어진 독도의 운명은 누가 돌아보는가. 우리가 독도를 생각하며 다분히 정서적이며 감상적인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고 있을 때, 일본이 조직적인 논리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모으며 국제적 분쟁거리로 독도문제를 준비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쟁의 참상과 IMF사태의 난관을 기억하는 일에도 몸서리를 치겠지만, 그 와중에 ‘우리땅 독도’의 운명이 위태로울 움직임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뿌리깊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섬 독도’를 흔들 수 없음을 체계적으로 조리있게 세계만방에 고해야 한다. 신한일어업협정은 그야말로 어업에 관한 나라 간의 약속으로 대한민국 독도의 영토적 지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도 분명히 짚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적절하게 반영되지 않았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나 지극히 지엽적인 어업을 대상으로 하는 신한일어업협정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침탈할 수 없음을 국제사회에 천명해아 한다. 국익의 관점에서 일본이 우리의 땅 독도의 지위를 흔드는 행태는 단호하게 막아야 한다. 일본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땅으로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독도를 일본땅으로 표기한 관광지도를 서울 한복판에서 배포하였다. 경상북도와 울릉군 등에서 확고한 독도 정책을 세우고 다양한 이벤트를 펼쳐 효과적으로 그들의 헛된 생각을 막아내야 한다. ‘독도는 우리땅!’을 끊임없는 다짐과 구호로 간직하면서,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논거와 실효적인 수호논리를 확보해야 한다. 일본 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혹 독도를 가벼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독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닌가.

2024-10-30

돈이 있어야 결혼하는 세상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20세기 한국사회. 결혼은 삶의 필수항목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20대 중후반, 늦어도 30대 초반이 되면 친구들의 결혼식 참석으로 주말이 분주했다. 부어라 마셔라 또래가 모인 피로연도 시끌벅적했다. 세태는 급격하게 변화했다. 21세기에 들어선지 24년. 이제 20~30대에게 결혼은 ‘선택’이 됐다. “월급을 모두 가져다주고, 가사까지 도우면서도 잔소리나 듣는 결혼을 왜 하냐”고 냉소하는 젊은 남성과 “내가 무엇 때문에 남의 엄마, 아버지까지 신경 써서 모실 것인가” 회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상 기자의 주변을 둘러봐도 30대, 40대 미혼남녀가 흔전만전이다. 억지로 이성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겠다는 사람들이 드물어지고 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 남녀가 함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결혼에 관한 환상이 무너진 것에 더해 갈수록 피폐해지는 한국의 경제 상황도 ‘결혼 사양’의 냉소적 분위기를 심화시킨다. 얼마 전 한 여론조사업체의 발표에 따르면 성인 남녀 10명 중 9명(89.6%)은 ‘한국은 돈이 없으면 결혼하기 힘든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같은 조사의 응답자 82.9%는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답했다. 결혼에 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응답자들은 ‘안정적 주거 마련의 어려움’(57%)과 ‘경제적 상황이 여유롭지 못함’(41.4%)을 결혼이란 장벽이 높아 보이는 이유로 지목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돈이 있어야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결혼식장에 나란히 선 신랑, 신부를 보기 힘들어진 시대가 가까워졌다. 아니 이미 왔는지도 모른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0-30

대구도 핼러윈 비상… “사고는 어이없이 발생”

핼러윈데이인 오늘(31일) 밤 대구도 비상이 걸렸다. 도심 일대는 핼러윈데이를 사흘 앞둔 지난 28일 밤부터 유령, 마녀, 히어로 등 다양한 캐릭터로 분장한 젊은이들로 붐볐다. 호박과 조명 장식을 한 상가들도 핼러윈 음악을 틀며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축제 분위기는 오늘 밤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대구시와 경찰은 오늘 오후 6시부터 클럽이 문을 닫는 새벽시간까지 비상근무에 들어간다. 서울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길거리 사고예방이 국가적 과제가 된 만큼, 대구시와 경찰은 이미 핼러윈 기간(25~31일)에 접어들자마자 동성로와 삼덕동 일대에 순찰팀을 집중배치해 시민안전을 지키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몰리는 클럽 입구에는 안전 펜스를 설치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대구경찰청과 소방청은 대구시·중구청과 함께 오늘 밤 시민들이 대거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동성로와 삼덕동 클럽골목 등을 대상으로 합동순찰을 강화할 계획이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밝혀졌듯이, 주최자가 없거나 불분명한 지역 축제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경우 경찰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장의 책임도 묻기 때문이다. 삼덕동 클럽골목에는 27곳의 클럽과 주점이 영업중이며, 대구에서 유일하게 ‘행정안전부 핼러윈데이 관리지역’에 이 골목이 포함돼 있다. 핼러윈데이는 원래 기독교 축일(祝日)인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일부 국가만 10여년 전부터 청춘들의 열기를 분출하는 축제기간으로 자리잡았다. 다양한 가면과 복장으로 분장한 청년들이 술에 취해 특정장소에 대거 몰리면, 군중심리가 어떤 방식으로 분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니 꽃다운 청춘 150여명이 숨지는 이태원 참사 같은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망자 가운데는 중학생 1명과 고등학생 5명도 포함돼 있었다. 서울 이태원처럼 대구 삼덕동 클럽골목도 폭이 좁아 인파가 몰리면 안전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 대구시와 경찰은 ‘사고는 어이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고, 축제가 끝나는 순간까지 인파 관리에 만전을 기해주길 바란다.

2024-10-30

TK통합 성공모델 구축에 정부 힘 실어 줘야

전국 광역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추진되는 대구와 경북의 행정통합은 지역의 발전은 물론 국가의 행정체제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면에서 전국적 관심거리다. 대구경북의 행정통합은 망국적인 수도권 집중에 맞서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지방소멸, 인구감소, 저출생 등의 국가적 난제를 푸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반드시 성공적 모델을 만들어야 하며 대구경북이 통합에 성공한다면 동일한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높아 다른 지역 광역단체도 관심있게 이를 지켜보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9일 지방자치의 날을 맞아 수도권 일극체제 개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대구와 경북이 행정통합에 합의 본 것을 모델로 정부가 지방시대를 여는데 적극 나설 것임을 약속했다. 그는 “과거처럼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분배해주는 시대는 지나갔다”며 “권한과 책임의 무게 중심을 과감하게 지방정부로 옮길 것”을 각료들에게 요청한 것이다. 같은 날 대한민국 시도지사협의회 회장인 박형준 부산시장도 기자간담회를 통해 “대구경북의 행정통합이 분권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대구경북이 좋은 선례가 되면 부산·울산·경남과 광주·전남 등 타지역도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과거의 창원·마산·진해 통합을 거론하며 “수평적으로 행정 범위를 넓혔다고 잘되고 효율적인 것은 아니다”며 권한 이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그는 “미국 주(州) 수준의 권한을 줘야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구경북 행정통합과 관련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 지사는 “국방, 외교 이외의 모든 권한을 이양받는 완전한 자치정부를 지향해야 지방소멸과 저출생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대구경북 통합과 관련해 지역단체장들은 권한과 책임을 성공의 요소로 꼽았다. 윤 정부도 지방시대를 열기 위해 권한의 지방 이양에 이론이 없다고 했다. 권한 이양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을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 지방시대에 대한 중앙 정부와 관료들의 의지가 분명해야 대구경북뿐 아니라 전국 광역단체의 통합 논의도 불붙을 수 있는 것이다.

2024-10-30

추상은 현대미술의 위대한 발견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가장 혁신적인 미학적 발견은 추상(Abstract)이다. 고전미술은 이야기나 사건을 묘사하며 인물이나 대상의 외형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모방했다. 반면 추상미술에서는 구체적인 형체를 알아차릴 수 없고 무슨 내용을 전달하는지 정확히 읽어내기 어렵다. 이처럼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모방하지 않는 미술을 추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술가들은 어떻게 대상을 그리지 않으면서도 미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을까? 추상미술을 이해하려면 추상 이전의 미술이 정립한 미술의 규범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전 미술이 수백년 동안 추구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모방’과 ‘재현’이었다. 눈으로 경험하는 세계, 우리가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대상의 외형을 그럴 듯하게 모방하는 것이 중요했다. 가령 사과를 그린다고 했을 때 누가 봐도 사과를 알아볼 수 있는 형태 그리고 그 형태에 사과의 색을 입혔다. 우리의 시각적 습관은 대상의 형태를 특정한 색과 연결 짓는다. 하늘은 하늘색, 나무는 나무색, 바다는 바다색 하듯이 하나의 대상은 그 대상의 고유한 색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전미술에서는 작품의 형식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규정되어 있었다. 고전미술을 규범화한 이른바 아카데미 미술은 회화를 주제에 따라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로 분류하고 등급을 나누었다. 성서나 신화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은 역사화가 가장 높은 등급을 차지했고 반면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풍속화는 가장 낮은 등급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현대미술은 고전미술의 이러한 틀을 하나하나 부정하며 미술 본연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예를들어 인상주의는 시각적 경험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화면에 담으려는 시도를 했고 야수파는 대상과 고유색의 경직된 관계를 끊으면서 색채가 지닌 미적 가치를 발견했다. 야수파는 원근법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적 공간을 창조했고, 표현주의는 그릴 대상을 외부에서 찾는 대신 창작자의 내면과 감정을 작품에 표현했다. 현대미술이 전개되면서 추상을 향한 움직임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추상미술의 탄생은 현대미술의 문을 연 모더니즘의 여러 발견들이 종합적으로 집결된 결과이다.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러시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한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이다. 칸딘스키는 1913년 출판한 ‘회상록 (R00FCblicke)’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기록했다. 어느 날 야외 스케치를 마치고 어둑해 질 무렵 작업실로 돌아왔는데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본 것이다. 그림에는 어떤 대상도 그려지지 않았고 오로지 색과 면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 그림을 본 칸딘스키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작업실을 찾은 그는 전날 본 그림이 거꾸로 세워진 자기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알아볼 수 있는 형체나 형태가 없더라도 선과 색의 조합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경험으로 칸딘스키는 추상 미술의 가능성을 직감하게 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칸딘스키는 음악이 지닌 추상성을 잘 알고 있었고 신지학(Theosophy)의 이론을 자신의 미술에 접목시켜 색과 색, 형태와 형태, 색과 형태가 만나 불러 일으키는 조화 부조화 긴장 균형 등과 같은 정신현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추상회화의 형식으로 표현했다. 추상미술이 출현하기까지 미술가들의 실험 못지 않게 이론가들의 저술 활동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심리학적 접근 방법으로 ‘감정이입’을 미학적으로 해석한 테오도르 립스, 예술의 내적 동인을 ‘예술욕구’로 설명한 알로이스 리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의 내적 불안이 ‘추상충동’을 일으켰다는 빌헬름 보링어의 예술이론이 추상미술 태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4-10-29

생토란 들깨나물

서리가 오기 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은 각종 채소를 말려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호박, 박나물, 토란대 등을 만들어 두기에도 적합하다. 여름철에는 햇볕이 강하고 습도가 높아 채소가 쉽게 상하기도 하지만, 가을의 신선한 기온은 채소를 말려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인 때이다. 이렇게 말린 채소는 맛과 영양이 농축되어, 제철이 지나도 그 풍미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말린 나물에는 나물의 본디 성분에 햇빛이 더해지기 때문에 천연의 비타민D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땅의 달걀이라는 토란(土卵)이 제철이다. 고사리나 산나물, 고춧잎 등 대부분의 채소를 말릴 때는 삶아서 말리지만, 토란대는 가을볕에 생(生)으로 말리는 게 특징이다. 생토란대의 고유한 향과 부드러운 식감도 이맘때가 아니면 절대 맛보기 힘들다. 경상도에서는 토란대 수확철이 되면 토란을 다듬을 때 나오는 속대를 삶아 초장에 찍어먹는 ‘토란속대 숙회’를 별미로 친다. 토란대에 둘러싸인 속대는 특유의 노란색을 띠고, 삶아 놓으면 부드러운 식감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봄철 새순나물 별미로는 두릅을 손꼽는다면, 가을철은 ‘토란속대’라고 할 정도로 귀한 나물로 대접 받아왔다. 토란에 풍부한 식이섬유는 장운동을 활성화하여 장내 불순물 배출과 염증 완화에 효과적이다. 특히 토란대에는 베타카로틴과 비타민A 등의 다양한 항산화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세포의 산화를 촉진하는 활성산소를 제거 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항산화작용은 면역력 강화에 이로울 뿐 아니라, 불면증 개선에도 긍적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란은 이러한 효능 덕분에 오래전부터 가을철 건강을 지키는 귀한 식재료로 널리 인정받아 왔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어온 토란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식문화 속에 깊이 자리해 있는 관계로 조리방식이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서울. 경기 지방에서는 토란의 뿌리인 알토란을 사용해 시원한 탕을 끓여 명절 음식으로 즐겼으며 그 맛이 특별해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리로 자리 잡았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주로 토란대 나물로 제사나 명절음식으로 올라가다가 이후 육개장이나 매운탕, 민물요리 등 찌개에 빠지지 않는 식재료로 쓰여졌다. 1670년경 조선시대에 쓰인 ‘음식디미방’에서는 토란을 이용한 독특한 ‘수증계(酥篜鷄)’라는 요리가 소개되어 있다. 이 요리는 닭고기를 삶아 그 육수에 알토란을 함께 삶은 뒤, 닭고기는 결대로 찢어 담고 그 주변에 닭 육수에 익힌 알토란을 돌려 담는 방식으로 준비된다. 시대와 세대를 거쳐 전수된 토란을 활용한 조리법은 이제 다양하다. 특히 토란 요리에 들깨 가루를 함께 넣으면 구수한 맛이 한층 더해질 뿐 아니라, 토란대에 부족한 불포화지방산인 오메가3을 보충해 줄 수 있어 맛과 영양 두 가지를 모두 챙길 수 있는 훌륭한 음식 궁합이 된다. 가을 제철에만 맛볼 수 있는 신선한 생토란을 활용해 즐겨보는 것도 가을의 또 다른 묘미다. ◆생토란들깨나물 △재료 : 데친 생토란 600g, 들깨가루 3큰술, 다진 마늘 1큰술, 국간장 2큰술, 고운 소금 1작은술, 물 2/1컵, 참기름 1큰술, 통깨 약간 △만드는 법 1. 토란 손질 : 토란의 껍질을 벗기고 한입 크기로 잘라준다. 그런 다음 끓는 물에 토란을 넣고 데친 후 찬물에 헹궈 물기를 빼준다. 2. 토란 볶기: 데친 토란 600g, 마늘 1큰술, 소금 2/1작은술, 국간장 2큰술, 참기름 1큰술을 함께 넣어 조물조물 간을 맞춘 다음 약불로 1분 정도 더 볶아 준다. 3. 들깨가루 넣기 : 2번의 토란이 부드럽게 숨이 죽으면 육수 또는 생수를 2/1컵 부어주고, 국물이 뽀얗게 돌도록 들깨가루 3큰술을 고루 뿌려 준다. 4. 마무리: 국물과 들깨가루, 그리고 토란이 서로 잘 어우러지게 저어준 다음, 약불에서 국물이 자작해지도록 5분 정도 더 끓여 준다. 5. 완성 : 국물이 자작하게 졸아들면 그릇에 담아 통깨 또는 깨소금을 고명으로 뿌려 완성한다. Tip: 생토란 손질법 토란대를 고를 때는 굵게 자라 탄력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겉면이 깨끗하고 빛깔이 진한 녹색을 띠고 있어야 신선한 토란대이다. 토란 줄기를 실온에 하루 정도 놓아두면 약간 시들면서 수분이 줄어들어 껍질을 쉽게 벗길 수가 있다 . 토란대의 껍질을 벗길 때는 비닐 장갑을 착용하는 것이 좋다. 토란대에 뮤신이라는 성분이 있어 피부에 닿으면 일시적인 가려움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장갑을 끼고 손질하는 것이 안전하다. 박정남 전통음식칼럼니스트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외식산업학 박사 △안동 1호 조리기능장 △안동종가음식체험관 연구원장 △대구가톨릭대학교 산학겸임 교수 △(주)예미정별채 수석셰프 겸 대표 /박정남 전통음식칼럼니스트

2024-10-29

경북 수협 부실채권 수천억… 특단대책 나와야

경북도내 9개 수협의 부실채권 규모가 3000억원을 넘었다고 한다. 지역조합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채권 규모여서 조합마다 비상 경영에 전전긍긍이라는 소식이다. 22대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경북도내 9개 수협의 부실채권은 3000억원을 넘었고, 영덕 소재 한 조합은 900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밖에도 600∼800억원의 부실채권을 안고 있는 조합도 있고 대부분이 100억원 안팎의 부실채권을 보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부실채권이 많은 이유는 부동산 관련 프로젝트 파이낸싱(PF)에 돈을 빌려주었다가 회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부실채권이 600억원이 넘는 4개 조합은 서울 소재 건설업체가 투자한 오피스텔 부지 등 11개 부동산 현장에 거액을 대출했다가 회수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동산업계의 무리한 PF가 새마을금고, 신협 등 서민금융업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이미 언론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경북도내 소규모 지역조합에까지 부동산 PF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수협은 수산업 종사자의 이익 증진과 금융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조합이다. 조합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좋은 투자처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수익률이 높다 해서 조합 본분에 맞지 않는 부동산 PF 투자에 지나치게 많은 대출을 몰아준 것은 옳지 않다. 결국 조합의 존폐를 위협할 지경에 이른 것은 크게 자성할 일이다. 대표적인 서민금융기관의 하나인 새마을금고는 PF 등으로 올 상반기만 1조원이 넘는 순손실을 기록했다. 창립이후 최대 규모다. 조합의 통폐합 등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으나 금융시장의 불안요소로 남아 있다. 수협중앙회가 회원조합의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부실채권이 단숨에 해결되기는 쉽지 않다. 지역수협의 건전성 유지를 위한 당국의 특단 대책이 있어야 한다. 단위조합의 자구책 강구는 물론 조합의 건전성 제고를 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부동산 PF의 리스크를 관리할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수산업의 근간을 지킬 지역수협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당국의 조속한 조치가 있길 바란다.

2024-10-29

플라잉카 시대

우정구 논설위원 2020년 호주에선 우버에어가 처음 등장해 선을 보인 적이 있다. 우버의 항공택시는 옥상에서 옥상으로 승객을 이동시키며 요금은 택시요금 정도 받는다. 멜버른 공항에서 시내까지 육로로 1시간 걸리던 거리는 항공택시를 이용하면 10분이면 도착된다. 만화나 공상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하늘을 나르는 택시가 곧 현실로 등장할 전망이다. 항공택시, 플라잉카 등으로 불리는 도심항공교통(UAM)은 이미 일부 선진국에서는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추진 중이다.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대구 2024 미래혁신기술 박람회(FIX 2024)에서는 UAM 특별관이 별도 마련됐다. 가로 14m 전장 7m의 실물 크기 UAM이 전시돼 전시장을 찾은 많은 이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UAM은 전동 수직 이착륙기를 활용해 지상 450m 정도의 저고도 공중에서 이동하는 도심교통 시스템을 이르는 말이다. 육상과 지하 등 도심교통이 한계에 달하면서 나타난 신개념 교통수단이다. 배터리나 모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친환경적이다. 초기에는 조종사가 탑승하지만 성숙기에 들면 자율비행 방식으로 운항할 것으로 전망한다. 도심에서 30∼50㎞ 거리를 오가는 항공택시지만 육지의 택시처럼 아무 곳에서나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정류장인 수직 이착륙장이 필요하다. 대형건물의 옥상과 넓은 공원 등이 정류장 후보지로 검토된다. 첨단기술의 발달은 인류를 어떤 미지의 세계로 인도할지 아무도 쉽게 예측할 수가 없다. 하늘을 나는 플라잉카 시대가 멀지 않은 시간에 현실화 될 것 같아 가슴이 설렌다. 신종 교통수단인 UAM은 우리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바꾸어 놓을 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9

세계가 人才전쟁인데 우리만 ‘의대블랙홀’

심충택 논설위원 포스코그룹이 포항시민들의 반발에도 수도권(성남 위례지구)에 미래기술연구원 분원(글로벌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주요 이유는 핵심인재 확보 때문이다. 지난해 4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 둥지를 튼 미래기술연구원 본원에서도 기술총괄(CTO) 김기수 원장의 주도하에 S급 연구원들이 AI(인공지능)컨트롤타워와 이차전지소재·수소저탄소연구소에 소속돼 미래 기술 확보에 여념이 없지만, 향후 글로벌시장에서 포스코가 생존하려면 지속적인 우수인력 확보는 필수적이다. 최근 최상목 경제부총리 일행이 포항제철소를 방문했을 때 포스코측은 2030년까지 글로벌센터를 비롯한 그룹 인프라 분야에 16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래산업을 이끌 핵심인재들을 글로벌센터에 유치한 후 수도권 우수대학과 연구기관, 미국 실리콘밸리 등 해외 연구 거점과 협업해 기업의 기술경쟁력을 키워나가겠다는 구상이다. 포스코는 최근 미래교통수단인 도심항공교통(UAM) 수직이착륙장(버티포트) 기술연구 개발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포스코뿐만 아니라 최근 국내 대기업들은 인재확보에 사운(社運)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최첨단 산업은 핵심 원천기술이나 초격차기술을 보유한 인재를 선점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순식간에 도태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분야를 예로 들면, 세계 주요국(미국 중국 일본 유럽)과 빅테크들이 이 분야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삼고초려를 하고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해야 인공지능 분야 인재를 스타우트 할 수 있다고 한다.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가 “인공지능 인재 쟁탈전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미친 전쟁이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저께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빅테크 박사급 연구원의 평균 연봉은 오픈AI가 86만5000달러, 앤스로픽 85만달러, 테슬라 78만달러, 아마존 72만달러, 구글브레인 69만5000달러로 국내 대기업보다 5~10배가량 높다. 이러니 삼성, LG, SK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도 핵심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빅테크들의 인재유치 경쟁이 치열해지자 우리나라 이공계 인재의 국외이탈도 러시를 이루는 모양이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0년간 해외로 떠난 이공계 인재가 30만명을 넘어섰다는 통계가 있다. 매년 3만~4만명에 달하는 이공계 인재가 국내 기업이나 연구소가 아닌 외국행을 택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인재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이다. 특히 올해는 정부가 내년 대입시부터 의대정원을 대폭 늘리면서 ‘의대블랙홀’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명문대 이공계 학생들이 다시 수능을 보기 위해 자퇴하는 케이스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산업계는 인재들이 너도나도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면 연구인력을 어디서 구할지 고민이 많다. 해외 빅테크들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전 세계 연구 인력을 쓸어가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오히려 이공계 인재양성의 걸림돌이 되는 일만 하고 있으니 걱정이다.

2024-10-29

TK백년대계, 치밀한 논리로 야당 설득을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정기국회 예산심의·입법논의를 앞두고 TK지역도 비상이 걸렸다. 행정통합·신공항 특별법 제·개정 같은 백년대계와 주요 국비사업이 이번 회기에 상정되기 때문이다. 그저께(28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정책협의회 자리도 이로인해 긴장감이 흘렀다. 협의회에는 홍준표 대구시장을 비롯한 주요간부와 대구지역 여당 국회의원이 총출동했다. 이날 논의된 현안은 특별법 제·개정이 필요한 TK 행정통합, 신공항 건설,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맑은물 하이웨이)사업과 국비지원이 요구되는 도시철도 4호선(엑스코선)건설, 신공항 철도 건설 등이다. 하나같이 지역 백년대계가 걸린 과제들이다. 행정통합특별법 제정은 최근 대구시와 경북도가 공동 합의문에 최종 서명하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국회상정 전에 시·도의회 동의를 거쳐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신공항 건설사업도 ‘공공 개발’ 방식으로 전환하려면 국회에서 특별법을 개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맑은물 하이웨이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받으려면 이미 국회에 상정된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 특별법 처리문제도 난항이 예상되지만, SOC사업에 대한 예산지원문제도 만만치 않다. 올해는 정부가 초긴축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국세수입이 30조원 가까이 펑크났기 때문이다. 국세가 줄어들면 자연적 지방교부세도 감소한다. 이 때문에 전북도의 경우 이번주부터 시군과 함께 예산팀을 조직해 국회에 상주하며 여야의원들을 상대로 로비전에 들어갔다고 한다. 예산정책협의회에서 홍 시장이 “여당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이 대구출신이라 든든하다”고 농담조로 말했지만, 문제는 야당의원 설득이다. 국비유치도 그렇지만, TK행정통합과 통합신공항, 맑은물 하이웨이 사업이 속도를 내려면 특별법이 이번에 통과돼야 하는데 국회다수당인 민주당의 협조가 없으면 특별법 통과는 불가능하다. 대구시와 경북도, 그리고 지역정치권은 야당의원들은 설득할 치밀한 논리를 개발해서 특별법 통과와 예산확보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2024-10-29

빈자리를 채우는 방법

최근 음악계의 동향 중 가장 반가웠던 것은 미국의 밴드 린킨파크의 복귀 소식이었다. 나는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린킨파크가 그 여정을 멈춘 까닭은 보컬리스트이자 핵심멤버인 체스터 베닝턴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린킨파크가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보컬리스트를 찾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일정하게 쭉 뻗는 가운데 적당히 목을 긁어서 파괴력을 극대화한 그의 보컬 스타일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 따라하다가는 한 곡도 채 부르지 못하고 쇳소리 섞인 기침을 연신 내뱉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었고, 기적이 두 번 일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린킨파크가 돌아온다고 했을 때 나는 밴드 저니의 사례를 떠올렸다. 체스터 베닝턴 이전에 존재했던 불세출의 보컬 스티브 페리가 저니를 떠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저니는 재기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티브 페리가 누구인가. 1980년대를 주름잡던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모여 녹음한 ‘위 아 더 월드’ 녹음 현장에서도 단연 발군의 기량을 뽐냈던 세계 최고 수준의 보컬리스트가 아니었나. 그런데 저니는 뜻밖의 장소에서 스티브 페리의 완벽한 대체자를 발견해냈다. 바로 필리핀의 식당과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무명의 보컬 아넬 피네다였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동양의 언더그라운드에 그들이 찾던 보석이 있으리라 저니의 멤버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들은 결국 찾아내고 만 것이다. 그런 기적이 또 일어났나 싶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린킨파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스터 베닝턴의 빈자리를 채워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린킨파크의 새로운 보컬리스트는 뜻밖에도 여성이었다. 새 멤버 에밀리 암스트롱의 보컬이 체스터 베닝턴의 그것과 공통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성의 보컬로 남성의 보컬을 대체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의 라이브 영상을 찾아보았더니 ‘페인트’도, ‘인 디 엔드’도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곡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과거의 향수를 잠시 미뤄두고 다시 들어 보니 나름 신선한 느낌이 들고 또 다른 매력을 가진 곡으로 재탄생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들이 함께 만들어 발매한 신곡은 여태까지 린킨파크가 걸어온 것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었지만 분명 진보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커다란 부재가 발생했을 때 과거에 존재했던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체재를 찾는다면 그것은 가장 편리한 방식의 대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반드시 그것만이 옳은 방식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린킨파크의 음악을 듣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혀 다른 성격의 대체재로 부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방안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살다 보면 소중한 무언가를 잃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형의 어떤 것일 수도 있다. 무언가 잃으면 그것과 딱 들어맞는 것을 찾게 되고,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깊은 좌절에 빠지기 일쑤인데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 상실을 기점으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때로는 그 부재를 비슷한 성격의 대체재로도, 다른 성격의 대체재로도 메우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뜸 떠오른 이들이 한국의 보이그룹 중 내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팀인 ‘샤이니’이다. 그들 역시 걸출한 메인보컬을 안타깝게 잃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중 앞에 돌아와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남은 네 명의 멤버들이 5인조 시절 때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실력과 존재감으로 메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구멍을 훌륭하게 메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메인보컬이 아니었던 모든 멤버들이 메인보컬의 역할을 수행해내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라는 노랫말이 등장한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잃고, 되찾지 못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내가 최근 찾은 것만 세 가지가 있다. 잃은 것과 딱 들어맞는 것을 찾는 것, 전혀 다른 대체재를 찾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 여전히 남아있는 자원들을 적극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것. 마냥 슬퍼만 하고 좌절만 하고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다.

2024-10-28

눈을 보고 말을 믿고

최근 새롭게 생긴 습관이 있다. 사람들의 눈을 관찰하는 것.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처음 보는 사람의 눈을 쳐다볼 자신은 없지만, 누군가와 한 뼘 가까워졌다고 느끼면 나의 시선은 거침없이 그곳으로 향한다. 눈은 누구도 속일 수 없는 명명백백한 세계처럼 느껴진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노라면 온 우주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버릇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바쁜 나날 속에서 내 안의 괴로움과 상반되게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요즘이다. 정신없이 일하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기조 때문일까.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일상을 전부 버려서라도 일에 매달리는 모습에 오히려 박수를 받으면서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강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내 안에는 웅크리고 울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겉으로는 더 크게 웃고 더 빠르게 걸었다. 엉켜있는 내부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고민 있어요?” 함께 일하는 동료의 질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업무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겉으로는 전투적인 기세로 일하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피로와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있던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타인이 그것을 눈치챌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입으로 뱉는 말은 얼마든지 거짓으로 꾸며낼 수 있다. “고민 같은 거 없어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상대는 계속해서 미심쩍음을 느꼈다. 나아가 어째서 내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괜찮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파악할 줄 안다는 것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은 언제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는가? 무엇을 선택하고 또 무엇을 피해야 안정감을 느끼는가? 그것은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선택지를 늘리거나 줄이는 일이 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일은 타인으로 확장될 수 있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시선으로 바뀌게 된다. 나는 힘들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것을 동료가 믿지 않은 이유는 내 안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오의 소나기처럼 요동치는 눈동자를 포착한 순간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말은 거짓이 된다. 나는 계속해서 내 상태를 제대로 말해보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 실패야말로 나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불명확한 감정들 사이에서 간신히 길어 올린 말은 나를 우려하는 동료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 내게도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기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지만 상대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기인한 행동이다. 그렇지만 알고 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폴 오스터가 말했던 것처럼. “누구도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바로 그 간단한 이유로.”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안희연의 시 ‘나의 시드볼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귀신같이 내 눈빛을 읽는다/누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너는 나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한 방울씩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게 너의 영원이야”,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 새는 곳은 없다/그래도 물이 떨어진다” 시인이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나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한 방울씩 물 떨어지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 물이 새고 있는지 찾아봐도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틈을 통해 우리는 매일 증발하고 있다. 그러한 기류를 눈치 채고 안부를 물어와 주는 동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오늘도 나는 상대의 눈을 바라본다. 그에 관해 무언가를 알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2024-10-28

방언이라고 모두 시어가 될 옥돌은 아니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조건어학회 사건 33인 가운데 한 분인 환산 이윤재 선생은 ‘조선어큰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사전의 올림말을 선정하는데 꼭 필요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외래어를 선정하여 외래어 표기법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사전 올림말을 표준어로 한정하였지만 실제로 다양한 지역 방언을 조사하여 사전에 싣기 위하여 전국의 방언조사를 위해 최현배 선생이 작성한 ‘시골말 캐기 잡책’이라는 방언조사 질문지를 이용하여 전국 방언을 수집하였으며, ‘한글’잡지를 통해 조사된 자료를 연재하는 동시에 방학을 이용하여 경성에 있는 팔도 출신 대학생들에게 자기 고향말 수집을 독려하였다.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만들기 위해 어떤 말을 표준어로 삼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표준어 발표식’에서 이윤재 선생이 설명한 글이 남아 있다. “이제 발표하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은 조선어 학회에서 삼 년 전부터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래 사정에 애써 오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면서 표준어를 어떻게 선정할 것인지에 대한 원리원칙을 발표하였다. 상용어를 기준으로 하되 ‘같은 말’과 ‘비슷한 말’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매우 중요한 원칙도 제시하였다. ‘잠자리’의 경우, 이를 표준어로 하되 같은 말로는 ‘잠바리’, ‘잔자리’, ‘철갱이’, ‘철기’ 등과 같이 다양한 지역방언들이 나타난다. ‘같은 말’이라 함은, 한 사물에 꼭 같은 뜻이 있어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는 것이다. ‘잠바리’, ‘잔자리’와 같이 ‘잠자리’에 대한 음운론적인 변이형을 전등어(全等語)라 하여, 그 여러 개 가운데서 하나만 뽑아 표준어로 정하고, 남은 것은 다 버려야 한다. 대사전에 이렇게 다양한 방언들을 모두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 ‘반자리’, ‘잠바리’와 같은 전등어 가운데 ‘잠자리’를 대표로 큰사전의 올림말에 싣게 되었다. 또 ‘갈구리’, ‘갈고리’, ‘갈쿠리’, ‘갈코리’, ‘갈구지’, ‘갈쿠지’, ‘갈고랑이’, ‘갈구랑이’, ‘갈코장이’, ‘갈쿠장이’ 등 십여 개나 되는 전등어도 있으나, 그중에서 한 개만 표준어로 세우고 그 밖의 것은 다 치워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음운론적으로 조금 차이가 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자리’에 대응해서 ‘철기’, ‘철갱이’, ‘철구’와 같이 형태는 전혀 다르되 ‘같은 말’도 있다. ‘범:호랑이’라든지, ‘옥수수: 강냉이’와 같이 소리가 아주 다르면서 뜻이 같은 말도 있다. ‘비슷한 말’은 얼른 보아서는 전등어로 보기 쉬우나, 실지 그 내용을 자세히 따지어 보면, 거의 같은 듯싶지만 어느 점으로든지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고, 또 달리 쓰이는 때도 있으니, 이것을 각립어(各立語)라 한다. 곧 형태론적 변이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방언형은 지역적 특성으로 언어의 변화 시기와 방법의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한반도 북방은 ‘벼’라고 하는데 동남방에서는 ‘나락’이라고 한다. ‘벼이삭’과 ‘나락이삭’, ‘볏단’과 ‘나락단’처럼 각립어는 새로운 어휘 합성을 하는 데까지 나타나 우리의 한국어를 보다 풍성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표준어 사정 원칙 때문에 지역적으로 서울지역어가 아닌 때문에 ‘나락’은 방언이 되고, 사전의 올림말에서 구축당했다. ‘강냉이’는 그 분포지역이 워낙 넓은 덕에 구제되어, ‘옥수수’와 함께 표준어로 대접을 받는 행운을 차지했다. 1933년 맞춤법통일안이 만들어지고 조선어 대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이처럼 매우 세심하게 표준어로 무엇을 올림말로 삼을 것인지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윤재 선생은 “표준어를 될 수만 있으면, 전 조선 각 지방의 사투리(方言)를 있는 대로 다 조사하여, 여기에 대조하여 놓는 것이 떳떳한 일이겠으나, 이것은 간단한 시일에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일 뿐더러, 분량이 너무 많아 인쇄에도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그리 못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라고 하면서 앞으로 방언을 살려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국어를 보다 풍족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두었다. 따라서 방언에 대한 기본적 식견이 없이 마구잡이로 방언을 소리나는 대로 문학어로 끌어다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방언을 거칠고 남루한 언어로 밀쳐내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특히 문학어로 사용하는 방언은 전등어와 각립어의 기준을 준수하여 잘 사용해야 한다.

2024-10-28

고대의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던 날

나라(奈良)현 천리시에 위치한 천리대학에서는 10월 5일부터 6일에 걸쳐 이틀간, 조선학회가 열렸습니다. 조선학회는 무려 7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있는 학회인데요. 저는 고도(古都)인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학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 나라로 향했습니다. 아침도 굶고 7시에 시나가와역에서 교토행 신칸센을 탔습니다. 10시 30분쯤 나라에 도착한 제가 처음 향한 곳은 스케일이 큰 궁터와 오래된 사원으로 유명한 나라의 니시노쿄 지역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처음 향한 곳은 나라 시대 왕궁이 있던 헤이죠(平城) 궁터였는데요. 예전의 건축물 중에서는 정전에 해당하는 대극전이나 정문에 해당하는 주작문 정도만이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궁터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1967년 유적이 발굴되어 1998년에 복원이 완료된 도인(東院)정원이었는데요. 제가 이 곳을 둘러볼 때는 관람객이 아무도 없어 아주 호젓했습니다. 혼자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때, 그 곳의 관리자가 와서 자신이 한국을 여섯 번이나 방문했으며, 자신의 아내는 한국어를 배운다며 친근감을 표시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던 그분은, 스마트폰을 꺼내 익산에서 찍은 미륵사지석탑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이 분은 도인정원이 일본식 정원의 원형이 되었으며,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의 안압지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주 핵심만 정확하게 짚어낸 좋은 설명이었습니다. 일본정원의 원형이 되어서인지, 도인정원이 일본 지폐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우지시의 뵤도인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후에는 버스를 타고 세계문화유산인 야쿠시지(藥師寺)로 이동했습니다. 야쿠시지는 국보인 동탑과 1981년에 재건된 서탑, 그리고 금당에 모셔진 약사삼존상으로 유명한데요. 처음 금당 양 옆에 있는 동탑과 서탑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목탑의 웅장함과 정교함이 정말 대단했던 것입니다. 또한 금당에 모셔진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너무나 요염하여,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시지 않는 감흥을 안고 야쿠시지를 나와, 나라 관광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나라공원으로 향했는데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옆에 토쇼다이지(唐招提寺)라는 사찰이 나타났습니다. 나라와 관련한 어떤 홍보물에서도 본 적이 없는 사찰이기에 저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더 가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글쎄 고대사를 다룬 빛바랜 책갈피 속에서나 보았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전방후원분은 전면이 네모꼴이고 후면이 원형인 형태의 무덤으로, 주위에는 해자를 두른 거대한 고분입니다. 예기치도 않게 실물로 전방후원분을 보게 되니, 저는 저 먼 고대사의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에서도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똑같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긴밀한 관계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저는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하여, 그 넓은 무덤 주위를 몇 번이나 둘러보았는데요. 그 고분의 주인공은 2000년 전에 일본에 살다 간 스이닌(垂仁) 천황이었습니다. 특히 이 고분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있었는데요. 해자의 한 곳에 떠 있는 조그만 섬이, 스이닌 천황의 신하였던 다마치마모리의 무덤이라는 것이 그 전설의 내용입니다. 스이닌 천황은 ‘불로불사의 향기로운 과일(非時香果)’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다미치마모리에게 내렸고, 다미치마모리는 죽을 고생을 한 끝에 그 향과를 구해옵니다. 그러나 스이닌은 이미 죽은 후였고, 다미치마모리는 향과의 절반은 황후에게 바치고 절반은 고분에 바친 후에 자살하고 맙니다. 이후 사람들은 ‘불로불사의 향기로운 과일(非時香果)’을 귤로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고분 주위에는 감귤 나무가 곳곳에 심겨져 있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여전히 풀지 못한 고대사의 비밀을 잔뜩 가슴에 품은 채, 나라공원에 가기 위해 버스에 급하게 올랐습니다.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요? 버스에 오른 지 10분 정도가 지난 후에야 거꾸로 버스에 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4시가 가까워진 시간, 할 수 없이 나라공원으로의 이동은 포기하고, 그냥 지나쳤던 토쇼다이지에 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 본 토쇼다이지는 결코 그냥 지나칠 절이 아니었습니다. 당나라의 고승 감진을 어렵게 초빙하여 세운 이 절은, 한 고승의 법력만으로 유지되는 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세속적인 느낌이 덜했습니다. 특히 불교 계율을 가르치던 도장답게 강당이나, 교육을 위해 사용되는 경전 등을 보관한 학교 창고 등이 더욱 경건한 느낌을 주었는데요. 푸른 주단을 펼쳐 놓은 듯한 이끼 정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토록 멋진 절이 왜 다른 절만큼 홍보가 안 되는 것인지, 혹시 절 이름에도 당(唐)이 들어가고, 감진이라는 중국 승려와 관련되어서 그런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한반도 남서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과 당나라로부터 온 고승이 세워 수천 년을 이어온 고찰을 떠올리며, 동아시아의 고대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모른다는 공상의 나래를 맘껏 펼쳐본 나라 여행의 첫째 날이었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10-28

팔레스타인 소녀의 힘겨운 짐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이어 레바논과 이란으로까지 전쟁을 확장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이미 폐허가 됐고, 레바논의 무장정치조직인 헤즈볼라의 주요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폭격에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앙숙 이란과는 서로 미사일을 주고받으며 엉뚱한 민간인 사상자만 유발하고 있는 상황.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전쟁을 결정한 지도자가 아닌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을 덮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걱정도 날이 갈수록 더한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눈물 속에서 살고 있고, 정치-종교적 갈등과는 무관한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을 걱정하며 공포에 질려있다. 최근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쓰리고 아프게 했다. 8~9세로 추정되는 어린 팔레스타인 소녀가 자기만큼 큰 동생을 들쳐 메고 2㎞가 넘는 거리를 걷고 있다가 한 기자에게 발견됐다. 맨발로 황량한 길을 걸어온 소녀는 교통사고를 당한 여동생을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이로선 힘겨운 거리를 걸어왔던 것.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없었다면 보지 않아도 좋았을 장면이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불화로 현재까지 가자지구 주택의 90%가 파괴됐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곳에서 겨우겨우 버티던 팔레스타인 사람들 4만 명 이상이 죽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도 죽은 자 못지않다. 열 살도 안 된 소녀와 동생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이 광기는 언제가 돼야 끝이 나려는지. 해답 없는 질문을 받은 듯 답답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0-28

FIX 2024 성료, 대구 산업대전환 계기로

대구시가 야심차게 준비한 글로벌 기술대전인 ‘2024 미래 혁신기술 박람회’(FIX 2024)가 성공리에 폐막됐다. 23일부터 나흘간 대구 코엑스에서 열린 FIX 2024는 국내외에서 모두 463개 기업이 2071개 부스규모로 참가한 가운데 행사 기간 동안 총 참관객이 13만여 명에 이르는 대성황을 이뤘다. 당초 대구시가 목표로 삼았던 참관객 10만명을 크게 초과했을 뿐 아니라 미래 첨단기술을 지향하는 대구시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는 데도 큰 몫을 했다. 대구시는 총평을 통해 참가기업, 참관객, 일반시민 모두에게 높은 만족감을 준 행사로 평가하며 대한민국 혁신기술 대표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고 했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앞으로 대구시가 주체가 돼 미래산업을 이끌 수 있도록 FIX를 CES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신기술 플랫폼으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섬유업과 기계부품 산업이 주축이던 대구산업계가 미래 혁신첨단산업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홍 시장은 취임 후 “대구가 신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바꿔야 대구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며 모빌리티, 로봇, 헬스케어, 반도체, ABB산업 등 5대 신산업에 대한 투자를 지속해 오고 있다. 이번 FIX도 기존에 해오던 전문전시회를 통합, 대형화하면서 글로벌 혁신기술을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는 국내 최대 박람회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테슬라와 현대 모비스, SKT, 현대로보틱스 등 굴지의 국내외 대기업들이 참가해 신기술을 선보이고 각종 미래 혁신기술의 경연장이 된 것은 대단한 성과다. 대구시도 FIX 2024를 계기로 대구시 산업대전환의 계기로 삼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특히 대구에서 창업을 시작하는 스타트업에게 FIX 2024가 희망을 안겨준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대구는 지역내총생산(GRDP)이 30년째 전국 꼴찌다. 경제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꾸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산업 생태계 조성이 시급하다. FIX 2024의 성공 개최를 발판삼아 대구시가 추진하는 산업구조 개편 노력에 더한층 속도를 붙여야 할 것이다.

2024-10-28

김윤식 선생 전시회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오전 열 시 반, 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향했다. 저녁에 있을 학술상 시상식 전에 한 번 더 김윤식 선생 전시회를 둘러보겠다고 생각했다. 9월 30일 개막해서 올해 말까지 이어지는 이 특별전시회 제목은 ‘혼신의 글쓰기’였다. 지하 1층 전시실 입구는 적막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이르다. 사람들이 아직 찾아들지 않았다. 좁지만은 않은 전시실. 김윤식 선생이 쓰신 저작들과 육필원고들, 연구를 위해 준비한 자료들, 그리고 당신의 생전 서재들. 적막한 전시실에 김윤식 선생의 생전의 말씀이 흘렀다. 소리를 따라 전시실 한쪽 공간으로 향했다. 설치된 티비에서 김윤식 선생의 강연, 대담 편집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당신만의 참으로 독특한 표정들, 당신은 표정을 많이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정말 몇 개의 표정으로 당신의 삶을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적은 개수의 표정만을 가진 ‘사나이’였다. 소설 습작도 몇 편 남기신 선생은, 그러나 비평가였다. 가장 비평가다운 고독과 괴력의 사나이였다. 영상 속에서 선생이 말했다. 비평가는 자기표현을 금지당한 사람이라고. 또 자신은 ‘시체지기’처럼 남들이 쓴 것들 속에서 살아왔노라고. 나는 그 말씀 속에서 사르트르를 읽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가 비평가를 그렇게 규정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影武者, かげむしゃ)에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다케다 신겐의 ‘그림자 무사’가 등장한다. 그는 하찮은 신분의 사람이었는데, 다케다 신겐을 닮은 까닭에 죽은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세상을 속이는 사람으로 ‘채용’된다. 모든 것이 서투르기만 한 그는 살아생전의 다케다 신겐처럼 전투에까지 나가야 하는 딱한 신세가 된다. 날아오는 화살들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그림자 무사’. 옆에서 성난 꾸짖음이 들려온다. 주군은 산과 같았고,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질타에 가짜 무사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선생이 바로 그 ‘그림자 무사’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그는 진짜 다케다 신겐 같은 차림새를 얻는다. 진짜처럼, 진짜가 되려고 하면서 그는 이윽고 생전의 다케다 신겐을 꼭 닮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진짜처럼 연기할 수 있었을 때 그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든다…. 선생은 비평가란 그런 존재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설가도 될 수 있었고, 강렬한 문체를 가진 산문가였지만, 비평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숙명적 의식을 체득한 사람이었다. ‘진짜’ 비평가였다. 세월이란 무상하다. 지난 10월 25일은 김윤식 선생의 6주기 기일이었다. 저녁에 김윤식 학술상의 제3회 시상식이 있었다. 수상자는 숭실대 이경재 교수, 수장작은 ‘한국현대문학과 민족의 만화경’(2023)이었다. 이 상의 기금은 김윤식 선생의 생전의 아파트에서 온 것이다. 가정혜 선생께서 당신의 아파트를 국문학 연구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으신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한국문학관에는 김윤식 선생이 생전에 쓰신 저작들로 모아진 더 큰 기금을 내놓으시기도 했다. 미망인께서 한국문학 전체와 선생이 재직하신 곳을 위해서 각기 ‘희생적인’ 출연을 아끼지 않으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쉽게 할 수 없다.

2024-10-28

반가운 출산율 반등… 국가역량 총동원할 때

대통령실이 그저께(27일) 출산율 제고를 위해 일·가정 양립 우수 중소기업에는 국세 세무조사를 유예해주고, 현재 5일인 임신 초기 유·사산 휴가를 10일로 두배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난임 시술 중 의도치 않게 시술이 중단된 가정도 의료비 지원을 받도록 할 계획이다. 대통령실이 최근 출산율 반등에 희망이 있다고 보고, 신규정책을 속도감 있게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다. 통계청이 지난주 발표한 ‘8월 인구동향’에 따르면, 8월 출생아 수는 2만98명으로 1년 전보다 5.9% 늘었다. 지난 7월 2만601명에 이어 두 달 연속 2만명을 웃돌았다. 지금추세가 연말까지 이어지게 되면 9년 만에 처음으로 출생아 수가 반등할 가능성이 커졌다. 대구경북지역 8월 출생아 수도 1년전보다 3~4% 정도 각각 늘어났다. 대통령실 유혜미 저출생대응수석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혼인건수가 증가하는 현상을 고려해 보면, 출생아 수 증가가 올해에 그치지 않고 내년 이후에도 지속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예상했다. 출산율이 상승하고 있는 원인은 무엇보다 ‘20·30세대’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의 다양한 일·가정 양립 지원책들이 나오면서 MZ세대들이 혼인과 출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출생아 수가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수준으로 밑바닥을 쳤기 때문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혼인과 출산율을 올리는 문제는 두말할 필요 없이 국가 최대현안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최저출산율을 기록하면서 경제활력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고, 연금·의료보험 같은 사회보장제도가 큰 위협을 받고 있다. 비수도권의 경우, 자치단체마다 전 행정력을 동원하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인구소멸 징후가 뚜렷해지는 지역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출산율 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저출산율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을 때, 정부는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성과가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2024-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