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쇼핑백은 파란 쇼핑백과 한통속임을 치욕으로 여길까노란 쇼핑백은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검은 쇼핑백은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파란 쇼핑백은 안이 약간 보이는데포장한 박스들이 들어있다택시는 오지 않고색깔이 다른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말없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각기 다른 색의 쇼핑백을 든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개체화 되어 있고 고립된 현대인들을 의미한다.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고 파편화 되어버린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쇼핑백 속에 혹은 포장된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관계단절 현상을 가슴아파하고 있는 것이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25
검정 스웨터를 입고자오선을 따라 건너는 사막여섯 개의 황도를 따라여섯 개의 조각난 태양이 돌고얼굴 없이 달려온 아이의부러진 손목에선 비늘들이 쏟아져검은 부리의 짐승이 되어 날아올랐다선인장 위에난데없이 꽃 된 아버지가천연덕스럽다검은 꽃잎 속에 알몸을 심은 누이아버지는 몹시도 누이를 사랑하신다사방은 밝았지만, 해는 없었다 태양은 아버지처럼 아주 멀리서 기척만 만들고 바람 무거운 무화과가 심드렁히 제 살을 찢고 있었다발갛게 익은 무화과 열매와 가난한 가족의 모습들이 겹쳐지는 풍경들이 낯설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시다. 시인의 몽상 속 풍경에는 가난의 흔적이 가득차 있다. 힘겹게 살아가는 생활을 시인은 환몽의 방식을 빌려 무겁게 표현하고 있다. 사방은 밝았는데 해는 없고, 검은색 꽃잎 속에 누이가 있다고 상상하는 부분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시인
2016-11-24
해거름 지나 돌아가는 길당신은 온다삶의 하역장 같은 오일장 시장 바닥지난 봄, 지난 겨울, 십 년 전 어는 날의 좌판참빗과 좀약과 몇 묶음의 양말그대로 온다우리가 마주쳐 아슬아슬 몸을 피하듯이 시장 바닥을 돌아가는 길은 없다손금 같은 이 길을 걸어 아버지는 여든 살에 닿았다그 세월의 절반쯤이 길을 왕복한 내 삶의참빗과 좀약과 몇 묶음의 양말십 년 전의 어느 봄, 어느 겨울처럼당신이 오는 저기 저 시장 바닥의 끝빽빽한 속옷과 생선과 사람들 틈바구니내 걸어갈 길 더듬어당신은 온다부욱북 절반의 몸통 끌며어디론가 돌아가는 사람처럼 온다이 시에는 장꾼 장씨와 아버지를 그리는 시적화자인 내가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삶의 양상들은 다르나 그리 녹록치 않은, 곤곤하고 힘겨운 한 생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우리네 인생은 어쩌면 이런 일들의 연속 혹은 반복 선상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일들을, 꾸역꾸역 그 시끌벅적한 시장통 같은 삶의 현장에 최선을 다해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시인
2016-11-23
나직한 담 밑에 분(盆)을 내 놓았다안마당이 치자 향기로 물들었다만수국(萬水菊)은 꽃 피우지 못해도연분홍 구름 국화는 꽃 피웠다주황 껍질 속의 씨를 빼고는입 안에 넣고 불던 꽈리도 심었다지갑의 수표는 늘 술로 구겨졌고수심(愁心)으로 보내는 어머니 눈길이살고 싶은 세월을 등지고 누워 있었다필자의 젊은 시절 대구의 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써온 시인을 뵌 적이 있다. 품이 너그럽고 따스하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기행(奇行)으로 유명한 재미난 선배 시인이다.술을 좋아하시고 풍류를 즐기신 선생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골목 안 울밑에 혹은 화분에 각종 꽃은 곱게 피어오르는데 그 곁에는 평생 한량으로 살아가는 아들 걱정을 하는 노모가 있다. 참 재밌고 잔잔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시다.시인
2016-11-22
반딧불이는 오래도록어둠을 쟁이며 살아온 것일까바람 잔잔한 이 밤별에 이를 수 있을까이리로저리로제 몸 던져보지만아스라이 먼 사랑까무룩 찾아든 불씨 지펴휘익스윽온몸으로 연서를 쓴다반딧불이와 별들서로 닮아가며 깊어지는 밤가장 뜨겁던 별 하나제 몸을 태워 반딧불이 된다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물인 반딧불이에게서 시인은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한다. 사랑을 위해 제 몸을 태우는 반딧불이의 헌신적이고 온전한 사랑의 방식은 조변석개하는 가볍기 짝이 없는 우리네 인간들의 사랑의 방식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연에서 이러한 이치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귀 기울여보면 무릎을 칠만한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21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가슴속에 들어가발동기가 된다는 것이다그대 내 안의 발동기 되어나를 살게 하고발동기 하나가 한 사람의삶을 바꿀 수 있다다른 세상을 만든다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라는 시인의 인식에 무릎을 친다. 발동기는 기계나 구조물이 움직이고 활동하고 생산하게 하는 힘을 만드는 기구다. 사람 사이를, 세상의 관계들을 살리는 근원의 힘은 사랑이다. 사랑은 한 사람을 살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18
꽃 줍는 아가야, 환한 백낮에 길 잃은한 점 한 점을 무슨 수로 네가 다 거둘 것이냐몸져누운 세상의 아픈 뼈들을 무슨 수로일으켜 세울 것이냐 한 번 떨어져 나온 자리로는다시 돌아갈 길 없다네가 옮긴 첫발자국이 그토록 무겁고 서러운질문이었음을 기억하거라어쩌면 불구와 불능의 세상에서 한 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인이 자신을 향해, 세상을 향해 던지는 근원적 고독의 문제를 발견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무겁고 서러운 질문을 품고 태어난 것이란 시인의 인식에 가만히 동의하는 아침이다. 한 생을 결핍과 싸우다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17
그 그림책을 펼치면 배가 고프고채워질 것 같지 않은 허기가 첫 페이지부터 몰려오고몰려오는 허기 중 앞쪽의 싱싱한 허기부터 잘라먹고잘라먹다 보면 토막토막 잘려진 철길이 줄지어오고아무리 둘러봐도 주저앉아 쉴 만한 그늘은 보이지 않고철길은 상한 엿가락처럼 시커멓게 휘어져 있고어머니는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터널 쪽으로 달려가고터널이 어머니를 허겁지겁 허겁지겁 삼키고 있고비지땀을 흘리며 꿀꺽, 삼키고 있고어머니가 이고 있던 목화솜 보따리만 뭉게구름처럼 떠 있고솜을 타야 하는데, 저걸 타야 누나가 시집가는데시인이 보고 있는 그림책 속의 이야기는 가난으로 점철되는 불행한 가족사이다. 모질게 따라붙는 이러한 결핍의 가족사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곤고하고 아픈 서사의 되물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16
간이며 쓸개를 꺼내 꿈도 꺼내고 추억도 꺼내 먼지와 소음으로 뒤범벅이 된 술집과 거리에 늘어놓고는지나가는 사람들 다 불러모아 약장수처럼한바탕 너스레를 떨다가 철 지난 유행가 가락도 섞어서저물면 주섬주섬 주워담아 넣고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새빨간 저녁노을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그것이 지금 노을이 내게 들려주는 말이리노시인이 귀가 길에서 바라본 길거리 저녁풍경 한 장을 본다. 도심의 소음 속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술과 안주를 권하다 저물면 주섬주섬 챙겨 버스에 올라 귀가하는 사람들, 눈길도 주지않고 유쾌히 길을 가는 사람들,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시인의 말처럼 서럽기도 하고 살 만하기도 한 세상인지 모른다고 노을이 가만히 일러주고 있는 것이리라.시인
2016-11-15
어머니 풀밭에 버려져 있다. 어둠이 와도 작동되지 않는 어머니, 엔진이 올라붙은 어머니, 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 한 어머니, 아무도 찾지 않는 어머니, 풀이 서걱거릴 때마다 기억의 뿌리가 흔들려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는 어머니, 어머니 풀밭에 버려져 있다. 대량 생산의 틈바구니에서 과열되던 눈물이며 사랑이며 그리움을 떠올리며, 어머니 저기 버려져 있다. 모터가 타버려 수리되지 않는 어머니, 한낮이 머물다간 자리가 벌건 녹으로 번진다는 어머니, 기름칠 제대로 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 저기 혼자 버려져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버려져 있다.자식들을 낳아 기르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부분들을 생산해온 어머니를 기계로 보는 시인의 인식이 눈물겹다. 어디 그뿐인가. 무한한 사랑과 정성을 생산해내고 늙고 낡아가는 어머니라는 기계는 희생과 헌신의 기계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나이들고 병들어 쓸쓸한 기계로 낡아가지만 얼마나 거룩한 기계인가. 이런 위대한 기계들이 낡고 쓸모가 없다고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시인의 말에 씁쓸한 아침을 연다.시인
2016-11-14
마을 입구 교회에는 민이가 살고요연극촌 앞 가게는 호정이네 집이에요아이들이 좋아하는 시내 돈가스 집은현세 엄마가 하고요문길이는 아내 친구의 둘째 아들이랍니다탑마트 계산대에서 반겨주는 사람은 경수 엄마고요한길주유소에서 시원시원한 목소리의 주인공은동환이 형이래요북부농협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는기원이 누난데요집에 올 때 타는 버스는 민구 작은아버지가 몬답니다참, 식당에서 먹는 향긋한 깻잎은준걸이네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거래요시인이 근무하는 학교의 아이들 가족은 학교 밖에서 그물망처럼 얽혀서 서로의 아름답고 긴밀한 관계들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재밌는 시다. 각자는 그 분야에서 전문가이고 중심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세상살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다정다감한 필치로 이런 관계들을 정겹게 펼쳐보이고 있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11
흐린 세상 물이 너무 맑아 탈이다맑은 물 속에 비로소 내가 보인다그 동안 어디를 그리 헤매었느냐며칠 전 바람처럼 휩쓸고 온유럽 천지는 괜찮더냐가도가도 양파밭과 귀리밭과 밀밭뿐인대평원의 초록에도 공황이 있고 공포가 있다니지리한 하품과 권태가 있다니초록의 심연에는 닿지 못하고 얼굴 없는 세상에발이 먼저 가 닿는 망망대해직소는 직소로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게 탈이다송사리떼가 다시 발을 간지른다맑은 물 속에 비로소 내가 보인다달이 뜨면 안심하고저 월명암까지 비껴 오르리라평생을 감동적인 필치로 구수하고 정겨운 남도 서정을 담아내온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송수권 시인은 작년에 타계하셨다. 고달픈 인생사에서 늘 우리네 삶의 힘겨움과 서러움, 한(恨)의 정서를 써 온 시인은 망설임 없이 똑바로 떨어지는 직소폭포를 보면서 걸어온 한 생의 여정을 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응시와 성찰에 이르고 있다. 남은 세월을 곧고 투명하게 살아가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시에 배어있음을 본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10
청보리 익어가는 배고픈 윤사월구조조정만이 살길이라며귀청 울리는 뼈아픈 소리 들어가며혹시 나는 아니겠지 하다가정리해고 통지 받은 K선배씁쓸한 맥주 한잔에구멍 두 개 뻥 뚫린보리건빵 하나 안주로 씹고 있다살아오면서 눈보라 비바람예고 없이 맞고도서늘한 가슴 감싸가며하늘 향한 희망만이 살 길이라며온 가족 두레 밥상 옹기종기꽁보리밥 비벼먹던지난 추억 곱씹어가며꿋꿋하게 살아왔는데, 그랬었는데그래도 K선배희망의 끈 놓지 않고황금물결 다가와 다 함께 어우러져출렁거리 그 시간을 기다리며보리건빵 하나를 곱 씹어보고 있다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직면한 우리 사회에 불어닥치는 구조조정의 파고가 높고 깊다. 시인은 정리해고 통지를 받고 실직의 나락에 빠진 선배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같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본다. 보리는 힘겨웠던 지난 시절부터 민초들의 중요한 양식이었다. 실직한 선배와 보리건빵을 씹으며 재기를 꿈꾸며 다짐하는 강단진 삶의 의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 꺾여도 일어서는 보리같은 민초들의 힘을 느낄 수 있어 환한 희망의 빛을 다시 본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09
완전 누드다와! 황홀하다가을에는하늘도저렇게 가끔호수에서옷을 벗고, 입는다하늘이 깊고 푸르다. 가을 하늘은 풍덩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파란 하늘에 새털구름이 층층이 깔려있는 풍경은 더없이 아름답다. 성장을 벗는 가을은 누드가 되어간다. 우리네 답답했던 가슴 속에도 가을바람처럼 깨끗하고 투명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으면 좋겠다.시인
2016-11-08
건너편 순대국밥집 지붕 위에 밤새 내려 쌓인 눈이 어린 계집아이 속살처럼 미답지로 반짝거린다 이런 날에는 내 무의식에도 폭설이 쏟아진다 언제 이렇게 찾아 오셨는가, 물으며 손 내밀 새도 없이 눈은 나리고 나린 후에야 떠지는 시린 눈(目)은 흰색을 노래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곧 노파가 될 계집아이들이 깜깜거리며 지나가는 순대국밥집 앞유리문, 성에 두터워진 저 뿌연 문 안쪽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나 이런 날 시린 손끝은 더 이상 통증이 아니고 순대국밥집 굴뚝에서 아이들의 쉬어버린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시인은 눈 내리는 거리에서 순대국밥집 유리창 안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다.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그 안의 세상을 보면서 눈 내리는 서대문 거리를 걷는다. 폭설이 세상을 다 덮어가는데 호호 손을 불면서 국밥집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정겨움을 느끼고 창 안과 밖의 세상 풍경에서 푸근하고 아름다운 서정을 읽어내고 있다. 차가운 눈바람이 불어 세상이 아무리 살아가기 힘들다 하여도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임을 느끼게 해주는 시인의 눈을 따라가본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07
두터운 벨벳 커튼을 걷어내고연노랑 꽃무늬 흰 레이스 커튼으로 바꿔 걸었다꽃핀으로 양쪽 귀퉁이를 살짝집어 올렸더니한 마리의 큰 나비가 생겼다팔락거리는 날개 사이로하늘과 매실나무, 대추나무, 칡넝쿨까지한눈에 들어왔다살짝 창을 열었다꼬리치는 살랑바람이데리고 온 새소리호로록 짹짹째잭 라포록 라포록자리다툼을 하는 새들로방안까지 시끌벅적하다뜻밖의 나비가 데려와 그린 풍경유월 아침 식탁에 초대된 손님들이다계절이 바뀌면서 바꿔 단 커튼에서 시인은 경이로운 발견에 이른다. 커튼에서 큰 나비를 읽어낸 것이다. 문명 속의 나비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시인은 그 나비가 데려다 놓은 하늘이며 매화나무, 대추나무, 칡넝쿨까지를 한꺼번에 얻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살랑바람이 몰고온 새소리까지 온 집안에 자욱하여 뜻밖에 찾아든 손님들 때문에 엄청난 행복감에 젖어듦을 본다.시인
2016-11-04
오늘 나는 담장을 쌓아올리며 겨우내 잠자던 어깨 근육을 흔들어 깨웠다. 돌덩이 하나 놓고 수박만한 태양을 놓는다. 돌덩이 하나 놓고 굴참나무숲 그림자를 놓는다. 곰곰이 바람의 각도와 수평을 맞추고 또다시 돌덩이와 재미 없는 한낮의 하품을 마저 놓는다. 그때 나는 줄곧 이 담장 타기를 좋아하는 장미나 능소화의 유쾌한 질주를 생각한다나는 자명하게도 담장을 쌓는 일에 끝없는 동작으로 있는 힘을 탕진 중이다. 누가 또 돌담을 쌓아 격장(隔墻)울 이루는가. 그러나 나는 돌담처럼 맑디맑게 정다울 것이다.격장(隔墻)은 담을 사이에 두고 이웃이 된다는 뜻이다. 담장을 쌓고 그 위에 태양을 올려놓고 굴참나무 숲 그림자며, 능소화며 줄장미를 모셔오는 수평적 관계 정립에 관심을 가진다. 시인이 추구하는 유쾌하고 간결하면서도 정겨운 담 쌓기는 단절되고 간격이 분명한 현대사회에서 평평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화를 만들어가려는 시인 정신의 발로라 할 수 있다.시인
2016-11-03
트럭 위녹슨 철근들한때 단단한 척추로 건물을 지탱하던뼈들 달린다모랫바람이 일고힘든 노동에 울컥울컥 토하던 비린내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견고한 뼈를 부식시키던 시간생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굽이치던 모순과 은폐되던 의혹들실핏줄처럼 이어지던 균열어깨 짓누르던 무게를 벗고 달린다만신창이 몸을 풀고부서지지 않는 정신이 달린다이제 다시 태어나 꿈꿀 것이다시멘트 깊숙이 뼈를 세워 사랑을 할 것이다향긋한 봄바람과 시원한 물소리를단단한 몸에서 우러나오는목소리를 사랑할 것이다트럭에 실려 가는 폐건축물 철근을 바라보며 시인은 새로운 생의 다짐에 이른다. 한 때는 든든한 뼈대가 되어 건물을 지탱해 주던 철근들이지만 은폐된 의혹과 굽이치던 모순을 품고 어디론가 폐기 되어버리는 처지를 바라보면서 시인의 현실 대결의지를 세우고 있다. 모순과 불구로 가득찬 현실에 당당히 맞서리라는 시인 정신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02
깊어지는 밤, 나는 밤나무 숲으로 간다깊어지는 밤, 나는 밤나무 숲 속으로나를 보낸다속절없이 보낸 낮의 행방을 찾으러함부로 처형시킨 말들이밤송이처럼 흩어져 있는 숲 속다람쥐가 되어껍질만 남은 말을 줍는다말의 가시에 무수히 손 찔리며속없는 말을 깐다깊어지는 밤 시인은 가만히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낮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눈 수많은 말들을 곰곰이 되새겨보는 것이다. 속절없이 보낸 낮의 행방을 찾아 함부로 함부로 내뱉은 말들이 밤송이처럼 얼마나 남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했는지, 껍질만 남은 헛헛하고 부질없는 말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6-11-01
살아오는 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아내를 안아보면 남모를 공간이 출렁속살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 난다이를테면내 가슴을 찌르던 장밋빛이라던가햇살 꽉 찬 빛구슬이라던가먼발치에서도 환한 꽃사태라던가몸을 빠져나간바람은 이제 무엇으로 남는가무한대천 세상에서 인연 닿아살 맞대고 살다 갈 우리헤아려 보면 무엇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데사람살이가 저 혼자 빛나는 것은 아니어서서로 몸 부비며 사는 것이어서주름진 몸 거기 뼈 마디마디에웃음과 회한과 시끄러운 강물소리 뒤범벅이다헛헛해진 생 사이로 빠져나가는바람, 바람, 바람잡아라!청춘이 시절 천연(天緣)으로 만나 살가운 세월을 함께한 아내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이제는 주름진 몸에 새겨진 웃음과 회한과 시끄러운 강물소리를 꺼내보는 시인을 본다. 아내와의 한 생을 얘기하면서 시인은 더 나아가 그가 꿈꾸고 희망했던 이상이 이제는 이룰 수 없는 바람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회한이 진하게 나타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쉬 버릴 수 없는 이상실현에 대한 의지는 마지막 부분에서 `바람 잡아라`라는 데서 읽혀지고 있다. 시인
2016-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