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진 변두리 여뀌풀섶에서 물구나무를 서니 다리가랑이 사이로도 너끈하게 구름과 바람이 흘러간다 이윽고 태풍 앤의 뒷설거지로 빗방울까지 흩날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원한데 소리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나의 혀는 아스팔트처럼 굳어 있다 복개된 도시의 끈끈한 배설물이 멀쩡한 포도덩굴과 나의 틈새를 호비작호비작,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무너져 매립된다 오진 변두리 여뀌풀섶에서 물구나무를 서니 세상이 바로 보인다외진 변두리의 매립지에서 시인은 불구의 세상을 보고 있다. 아무리 추하고 엉망이 되어버려 꼴사나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도록 묻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인식에 회초리를 대고 있는 것이다. 묻는다고 묻히는 게 아니다. 물구나무 서서 바라보는 세상 속으로 구름과 바람이 너끈하게 흘러가듯이 못나면 못난대로 비록 볼품 없어 팽개쳐진 것이라도, 그런 인생이라도 그 모양 그대로의 존재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시인 정신이 칼날처럼 서 있는 작품이다.시인
2017-02-21
나무가 토해내는 모래의 잎들이 까칠까칠하다전기톱날이 갈당갈당한 목이 아니라이빨인 옹이에 박히면서밀도살꾼 형제의 후회가 시작되었다단단한 수피 속의 짐승은 음전했지만톱밥이 순교하는 피처럼 허옇게 튀면서빗줄기마저 우왕좌왕이다겨우 몸통을 넘기니까 갑자기 조용하다너무 이쁜 짐승을 잡았네 아우마저 심상해했다무덤 주위가 정리되니까소나무가 제 몽리면적을 포기했는지 앞이 잠깐 밝아졌지만어딘가 깜깜해진 것도 알겠다육신을 뺏긴 놈이 여기저기 똥을 눈 듯 송진 냄새가 진하다사람의 안에만 짐승이 도사린 것은 아니라는 하루!무덤 주변을 정리하면서 형제는 전기톱으로 소나무를 잘랐다. 흰 피를 토하며 쓰러진 소나무, 시인은 소나무를 짐승으로 지칭하며 인간의 오만함과 잔인함에 매질을 하고 있다. 소나무를 베어내어 경관이 훤해져야 하는데 시인의 눈은 도리어 깜깜해짐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잔인한 인간들이 저질러놓은 폭력 앞에서 시인은 앞이 깜깜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 만상으로 보면 소나무도 인간도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다.시인
2017-02-20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온 봄나무가지가지로 연초록 물결이 달려온다봄볕의 구걸이다사지 멀쩡한 봄볕이내게 걸어와서 어서 안아달라고구걸하는 것이다낭자한 초록의 물결그냥 거기에 잠겨 흘러가고 싶다그러나 초록의 정년(停年)은사월, 여기까지다곧 초록비가 내릴 것이다초록에도 정년이 있다는 시인의 설정이 재밌다. 엄동을 견딘 땅에는 부활의 촉들인 새순 새싹들로 연두세상이 된다. 참으로 아름다운 환희의 천지가 아닐 수 없다. 연두는 서서히 초록으로 바뀌고 초록 물결이 된다. 시인의 말처럼 사월이면 초록비가 내리고 진한 신록의 옷으로 바꿔 입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만치 오고 있는 고운 생명의 봄을 기다려본다.시인
2017-02-17
아침에 서리가 내렸다톱날 같은 날카로움이 섬뜩하다가을은 더 오를 수 없는 절정에서 무너지듯감나무 가지의 새소리처럼 냉랭하다어두운 그림자로 빛나는 겨울 부릅뜬 눈으로송림 사이 바람으로 뒤섞이며 상암천을 지나간다추락하는 것은 날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잃어버린 날개를 타고 상승하는 것은쓸려가는 낙엽, 아니면 바람인가?멀리 시청 지붕의 깃발이 너풀거린다산길을 내려와 방문을 열자방안 수석에 학이 날아내린 듯평안한 고요가 심신을 안정시킨다문 밖에는 찬바람 혼자 울고생활 속에서 느끼는 냉랭한 초겨울의 분위기를 편안하고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 시다. 가을의 끝자락이 아직 남아있는 듯 쓸려가는 낙엽을 보고, 어두운 그림자가 내리는 도심을 바라보며 차가운 계절을 느끼고 있다. 움츠리고 닫히는 계절이지만 시인은 잠잠히 스며드는 평안함과 고요로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을 극복해감을 느낄 수 있다.시인
2017-02-16
영문도 모르는 눈망울들이에미 애비도 모르는 고아들이담벼락 밑에 쪼르르 앉아 있다애가 애를 배기 좋은 봄날햇빛 한줌씩 먹은 계집아이들이입덧을 하고 있다한 순간에 백발이 되어버릴철없는 엄마들이이 겨울의 끝을 물고 봄은 올 것이다. 민들레 곱게 피어나는 봄날 시인은 앙증맞게 피어난 민들레 꽃을 보며 곱고 이뻐서 눈 시리고, 엄동을 견뎌낸 싱싱한 생명력을 느끼고 있다. 봄은 모든 꽃과 처녀애들의 가슴을 부풀게 해 철없는 엄마가 되게 한다는 표현이 재밌다. 며칠 지나면 하얀 민들레 홀씨가 날리는 할머니로 변하겠지만 시인은 담벼락 밑에 쪼르르 피어난 민들레꽃들에서 희망을 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2-15
길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사물의 실체는, 늘 어둠 저 편에웅크리고 있다. 파랗게 눈에 불을 켜고족제비나 들고양이처럼아스팔트에 묻어 있는 주검의 흔적이때로는 머리털을 곤두서게 한다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전조등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달려온 세월은 너무 길었다달빛 어슴푸레한 시골길가로등 몽롱한 불빛의 포도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를 뚫고세월의 막다른 골목까지달려가야 할지도 모른다평생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시를 써온 시인의 가슴이 젖어있다. 참교육 실현을 위해 애쓰며 아이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과 바르고 정의롭게 사는 길을 일러온 시인이다. 그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지난 세월 그러했듯이 지금도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있지 않는가. 그러나 결코 주저앉지 않고 캄캄한 밤 하늘 같은 현실에서 길을 찾으며 당당히 맞서고 있는 시인 정신을 본다.시인
2017-02-14
그대가 한길에 서 있는 것은 그곳으로 가을이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빠져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는 셈이겠습니다 그대가 역두(驛頭)에 서 있다든지 빌딩 아래로 간다든지 우체국으로 가는 것도 수사가 다르긴 하되 유사한 뜻이 되겠습니다날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고바람과 햇빛이 반복해서 지나가고보이지 않게 시간들이 무량으로 흘러갑니다그대는 시간 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그대에게 나는 지금 결정의 편지를 써야 합니다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시간 위에 떠 있는 우리는 도무지 시간의 내용을알 수 없으니 결정의 내용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마음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오랫동안 같은 모습과 상태로 머물러 있지 못하다. 모든 것이 흐름 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흘러가는 시간 위에 떠 있고 계속해서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결정지을 것이며 결정할 것인가. 무량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절감하게 해주는 시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7-02-13
늘그막에 회전 톱에 손을 다친 친구평소 거절을 잘 못하는 게 흠이 되어아니할 고생까지 하며 사는 터라병문안 가는 길이 걱정 한 짐이다웃고 있는 친구 눈치를 살피다가붕대로 감싼 손을 보니 내가 더 막막한 터살기 바쁜 핑계로 한동안 보질 못했는데어느 날 오죽 땅속줄기 몇 개를 구해왔다잘려진 줄기가 뭉툭한 새끼손가락 같아함부로 약속하지 말라는 뜻이라는어떤 이의 우스개를 망으로 깔고빈항아리에 흙을 채워 심어놓았다대나무가 쑥쑥 자라듯 친구 손가락도 어느새 자라말끔하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깊은 항아리 속에서 새순이 올라오는지매일 아침 코를 박는다손을 다친 친구의 문안을 가다가 시인은 친구의 다친 육체적 아픔보다 살아오면서 다친 마음의 상처를 떠올리고 있다. 독하고 모질게 살아오지 못한 친구가 입었을 상처는 오히려 다친 손보다 더 깊고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새순이 나서 자라는 오죽처럼 친구의 다친 손은 치료가 되겠지만 가슴 속 깊은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것인가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7-02-10
예상 밖이다누구나 예상은 하고 있지만쏘아 떨어뜨려야 할 것들은언제나 갑자기 날아온다는 사실목표물은 한순간도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빈 하늘을 빠르게 횡단한다허공에 걸린 표적을 향해 총을 겨눈다그러나 내가 쏘는 것은마른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체가 아니다그가 도착하지 않은몇 백분의 일초 후그곳에 도착할지 아닐지 알 수 없는허공의 한 점불안과 희망이 만나는무한한 공간과 찰나의 시간이 만나는 그 곳으로총알을 마중 보내는 것이다허공에 날아가는 표적물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사격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클레이 사격이다. 시인은 무한한 공간과 찰나의 시간이 만나는 것을 떠올리고 있다. 불안과 희망이 만나는 무한한 공간과 찰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희열을 느낄 수 있고 행복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우리네 삶이란 때로는 이런 클레이 사격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시인
2017-02-09
언젠가 나는 반드시잔가지 다 잘라내고몸통 하나로만 남겠다뿌리도 한 가닥만 땅에 박고이파리도 달랑 하나만 달고그렇게 단정한 아침을 맞으리가장 가벼운 몸을 이루어수직으로 홀로 깊어지면그 어둠 속맑은 물줄기 소리도 들으리남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써온 시인은 자기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이랄까 생의 태도에 대해 다짐을 하고 있다. 온갖 세상의 명예와 잇속에 대한 욕망을 다 내려놓고 청빈하게 남은 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어떤 유혹이 닥쳐오더라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결의가 강하게 전해져 오는 시다.시인
2017-02-08
아프다, 나는 쉬이 꽃망울을 터트렸다한때는 자랑이었다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를 불러모아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아무런 죄도 없이, 상처도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이제 내가 부른 꽃들모두 졌다아프다,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꽁꽁 얼어붙은내 몸의 수만 개 이파리들누가 와서 불러도죽다가도 살아나는 내 안의 생기가무섭게 흔들어도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한 때 사회 변혁을 꿈꾸며 강단진 목소리로 시를 써온 시인이 좌절을 맛보고 쓴 시다. 절망의 심정으로 자기 성찰의 목소리에서 시인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오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꺾이고 밟혀서 져 다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 오거나, 새로운 힘으로 일어설 수 있다해도 꽃으로 피지 않겠다는 깊은 좌절의 심정을 토로하지만 이것은 반어적 표현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더 단단히 일어서서 활짝 꽃 피우는 일에 나아가겠다는 결의가 묻어 있는 것이다.시인
2017-02-07
시린 바람 앞에 서다한 닢 잎 새흔들리는 고요시간의 무늬 새기며비어지며 아득해지는 것을갈 볕떠나야 할 것들을 어루만지다추억처럼 쓸려오는떨궈진 이파리들 몰려드는 저녁머물듯 스치는 시간의 플랫폼뭉툭해진 날개 짓붉은 노을 삼키며 떠나가는데바람 이는 중년의 언덕서걱이는 심장 하늘 모퉁이에 새기며흔들리는 세월억새길 따라 나선다차가운 바람 속 화석으로 쌓여진 내청춘의 시간들하 고운 무늬들아직 사랑해야할 시간은 남은 걸까!늦은 가을 상강(霜降) 무렵 시인은 쏜살같이 가버리는 시간을, 그렇게 스러져간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들을 돌아보고 있다. 머물 듯 스치는 플랫폼에서 수없이 떠나보내고 떠나와 버린 시간들이었다. 점점 차가워져 오는 바람 앞에서 속절없이 화석으로 변해가는 시린 시간의 떼를 바라보며 아쉬워하고 있는 시인을 본다, 어쩌랴. 붙잡아 둘 수 없는 것들, 노을 따라 바람 따라 억새길 따라 허망하게 가버리는 것들. 그게 인생이다.시인
2017-02-06
어느 날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1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밥상을 차리고 계신다 10년 전보다 20년은 더 젊어진 어머니는 콩나물 무치던 손으로 이제는 늙어버린 내 손을 밥상 앞으로 잡아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밖에서 또 놀다 온거냐? 젊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참아내며 늙은 내가 밥을 먹는다 어머닌 참,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줄 아세요? 그럴 때마다 이놈 자식이, 어머니의 싱싱한 손이 낡은 내 엉덩이를 후려친다 너는 커서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냐? 어머니, 난 이미 어머니만큼 살았고, 인생의 절반을 시인으로 살았으면 됐지, 뭐가 또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이놈이, 밥 흘리지 말랬더니, 그거 다 저승 가서 먹어야 해! 어느 날 부턴가 다 낡은 나에게 싱싱한 어머니는 죽지도 않는다.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새겨져 있는 작품이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의 그 고운 손과 얼굴 모습을 떠올리며 사랑과 정성의 세월들을 되씹고 있는 것이다. 평생 시인으로 살아온 시인도 이제는 생전의 어머니만큼 늙었지만 시인의 눈 속에, 가슴 속에는 오로지 자식을 생각하며 한 생을 살다가신 헌신적인 어머니를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2-03
그 자리그 자리가 맞나,시린 바람의 문 열어본다스치는 건 수많은 빛들와 닿는 건 성난 파도들들리는 건 눈물의 연가푸른 귀를 열어저기하늘소리 들어보라사정 없이 한 생을 관통하는 것이 있다. 멈추지 않고 전 속력으로 우리를 뚫고 지나는 것이 있다. 세월이다. 시인은 바람이 시간을 몰고, 몰려가는 것이라 믿고 있는 듯하다. 그 엄청난 속도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 인간들은 바쁘기 짝이 없다. 우리들 곁에서 우주는 우주대로 별빛을 내려보내고 정법대로 운행하고, 자연은 자연대로 파도를 밀어올리며 꽃들을 피우며 낙엽들이 떨어지게 하며 순리대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알량한 울타리를 치고 순리를 거스르고 역행하고 있지 않는가. 시인은 우리에게 푸른 귀를 열어 하늘의 소리, 우주와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리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고 회초리를 대고 있다.시인
2017-02-02
나는 가고 있다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기러기의 길허공중의 길을 따라 가고 있다낮게 안개 깔려발목이 푹푹 빠지는 뻘 밭해오라기 한 마리가만 가만 물 길, 바람 길을 가지 삼아댓잎 묵죽(墨竹)을 치고 간다반구대엔 반구정이 없고이미 지나온 물 길 가기러기가 집을 버린 곳학성 벼랑 가엔내가 나기도 전엔 번듯한 누대가 있었다지만그저 멋도 모르고 나는 이곳까지 왔다촛대같은 바위 그늘을 지나구름과 산이 잠긴다운동 태화강의 굽은 허리를 버리고나는 끝이 어디에 가서 닿는지울주를 적시며 흐르는 태화강 중 상류에는 사연댐이 있고 굽굽이 수려한 풍광 속에 수 억년 전 선대사람들의 흔적이 바위 벼랑에 새겨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시인의 고향과 가까운 곳으로 여겨지는 여기는 영원의 시간이 흐른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시인은 반구대에 머물러 있는 영원으로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저 멋도 모르고 이곳까지 왔다는 시인의 토로에서 깊은 성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어디에 가 닿기 위해 이리 바삐 세월의 흐름을 타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는 아침이다.시인
2017-02-01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늦은 아침 호주머니에서 나온병뚜껑 하나구부린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서 반으로 접힌알리바이를 갖고 있는오비라거 병뚜껑 하나어두운 호주머니 속에 갇혀 있다가내 손가락에 잡혀 올라와선죽은 조개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일상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일화에서 시인은 시간을 읽어내고 있다. 출근길의 호주머니 속 병뚜껑 하나에서 지난 밤의 시간에 대한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있다. 출근길이라는 목적성과 유용성, 확실성이라는 시간과 개방성과 모호성, 불확실성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밤의 시간을 대비하는 재미난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1-31
사흘 밤 사흘 낮을 바람이 울었다섣달도 그믐께칼끝 시려 제 가슴 쥐어뜯는저 바람 소리는잠 못 들고 펄럭이는뭇 어머니들의 부르짖음이나니이 세상 어디에나 따라다니기도 하고이승에서 저승으로도 불어가고저승에서 이승으로도 불어오는쉬지 않고 헤매는어머니 그 마음의 흐느낌이니한겨울 칼바람 속에는 잠 못들고 펄럭이는 어머니의 부르짖음이 스며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깊이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 어디에도 따라다니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신이 죽어 저승에 가 있은들 자식을 향한 동동한 심정은 변함이 없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자식 사랑과 걱정에 대한 원형질이 박혀있다. 거룩한 본능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7-01-26
봄이 가려운가 보다엉킨 산수유들이몸을 연신 하늘에 문대고 있다노란 꽃망울이 톡톡 터져 물처럼 번진다번져서 따스히 적셔지는 하늘일 수 있다면심지만 닿아도 그을음 없이 타오르는불꽃일 수 있다면나는 너무 쉽게 꽃나무 곁을 지나왔다시간이 꽃보다 늘 빨랐다오랫동안 한 곳을 보지 않으면그리고 그 한 곳을 깊이 내려가지 않으면시가 꽃이 되지 못한다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가 더 많아그 그늘이 더 깊어묵호에서 태어나 광주로 내려간 시인은 1980년의 봄을 보았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니었고 꽃이 피어도 아름다운 꽃이 아니었을 것이다. 꽃의 생기와 아름다움보다 먼저 시인을 몰고가는 시간은 암담한 그늘과 상처와 아픔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는 이러한 아픔의 기억들과 치열한 시간들이 어두운 꽃으로 피어나는 나무일 것이다.시인
2017-01-25
그대 밥을 먹었는가어제는 더운 밥 먹고오늘은 어이 찬밥 신세인가누가 밥을 못 지어눈물밥을 먹었는가무엇으로 밥을 모았으며남긴 밥은 어디 두었는가지은 밥 뉘에게 앗겼는가아, 거리엔 긴 그림자주려 죽은 주검 위에배 터진 주검 널렸나니앗지도 앗기지도 말고가슴 활활 태워 밥을 지어이 시는 밥에 대한 얘기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 불구의 현상에 대해 꼬집고 있는 작품이다. 부당하게 돈을 벌고, 치부하고, 남의 재화를 강탈하는 자본 사회의 부조리를 밥을 통해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부조화와 불구의 현대사회를 향한 매서운 회초리를 대는 시정신이 날카롭기 짝이 없다.시인
2017-01-24
뚜껑 잃은 수성팬 한 자루책상 위에 홀로 누워피가 마르고 있네늘 곁에 있었기에느끼지 못했던 당신의부재(不在)살면서 못다 한 말전부 하고 가려는 듯수많은 사연허공에 날려보내고 있네죽음으로 이별한 사람의 부재는 그 자리가 크고 깊게 비어 있다. 시인은 뚜껑 잃은 수성팬 한 자루가 마르고 있음을 모티브로 해서 망자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생전에 못다한 말을 허공에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늘 가까이 있어서 못다한 사랑을 가슴 치며 바람 속에 얹어놓고 있음을 본다.시인
2017-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