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만 더 디디면 벼랑인데 바로 거기서 뿌리를 내리는 소나무가 있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는 늘 바르르 떨고 있는데, 에멜무지로 금방 새로 변해 날아가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아슬함으로 잔뜩 발돋움한 채 바르르 떨고 있는데, 아직도 훌쩍 날아가지 않고 서 있는 저 나무가 기다린 것은 무어냐벼랑 위에서 비바람을 버티며 푸르게 살아가는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예찬하고 있다. 아슬아슬한 벼랑의 돌틈에 뿌리를 내리고 생육하는 소나무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깊은 시심을 본다. 사람들 중에는 벼랑 위의 소나무처럼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삶의 여건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시인은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무얼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깊은 생에 대한 사념에 드는 것이다.시인
2016-12-23
스물셋,늦은 겨울과 이른 봄 사이구룡포 바다,빨간 등대에 붙여 놓은긴 편지와 하얀 입맞춤참, 이뻤던그때 ….가장 아름답고 고왔던 청춘의 시간들을 뒤돌아보며 그 시간에 다시 입맞춤하는 시인을 본다. 스물셋, 피어나는 생명이 가장 아름답게 꽃 피는 시절이 아닐까. 누구나 세월 지나 그 이뻤던 청춘의 순간들을 추억하며 미소 지어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휘어진 세월의 언덕 저 너머에는 차곡히 쌓여 있다. 그리운 아침이다.시인
2016-12-22
반대하라지금 사막은 잠들지 못한다지금 메소포타미아의 아이와 어머니는외진 울음도 나누지 못하고 죽어간다기원전 유적은 동트면 또 잿더미지금 지구는 야만의 행성이 되어버렸다오직 토마호크만이스텔스만이무도의 세습침략만이 있고다른 것은 없다반대하라반대하라우리들이 세운 기둥마다 새겼던 말정의와 자유해방아직도 진한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중동의 전쟁으로 고귀한 인명들이 무수히 살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래 빛날 고대 역사 유물들과 유적지들이 파괴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시인은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이념과 정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렇듯 가슴 아픈 일들이 끝없이 반복되고 심화되어 가는 것을 시인은 결사반대한다고 외치며 진정한 세계 평화와 정의, 자유와 해방의 도래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6-12-21
노랗고 붉게 혹은 갈색으로 푸른빛을 잃은 나뭇잎들, 언제라도 땅으로 내려설 자세다이미 수많은 낙엽들이 덮은 땅 위로 바람 한 자락 없는데도또 떨어지는 잎들흔들흔들 노 저어 나아가는 조각배가 되어가지에서 땅으로 흘러내린다그러니 가지에 남은 잎새들의 저 가벼움그런데 저 가벼움이 왜 이리 엄숙한 것이냐혹은 고요한 것이냐강원도 산골에서 은거하며 시를 쓰는 시인이 나뭇잎들이 계절별로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바라보며 인생의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사념의 시다. 자연사로 본다면 인간의 죽음 또한 자연의 한 현상에 불과하고 사소한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떨어지는 나뭇잎의 가벼움과 추락의 엄숙함을 느끼며 청춘의 때를 거쳐 늙고 병들어 죽는 우리네 한 생이 여기에 비해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시인의 육성에 가만히, 깊이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6-12-20
아침에 서리가 내렸다톱날 같은 날카로움이 섬뜩하다가을은 더 오를 수 없는 절정에서 무너지듯감나무 가지의 새소리처럼 냉랭하다어두운 그림자로 빛나는 겨울 부릅뜬 눈으로송림 사이 바람으로 뒤섞이며 상암천을 지나간다추락하는 것은 날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잃어버린 날개를 타고 상승하는 것은쓸려가는 낙엽, 아니면 바람인가?멀리 시청 지붕의 깃발이 너풀거린다산길을 내려와 방문을 열자방안 수석에 학이 날아내린 듯평안한 고요가 심신을 안정시킨다문 밖에는 찬바람 혼자 울고상강(霜降) 입동(立冬) 지난 초겨울 풍경 하나를 펼쳐보이며 시인은 쓸쓸하고 허전한 속내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이맘 때는 모든 것이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바람도 사람도 모두가 냉랭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차가움을 견디며 따숩고 정겨운 시간들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평안과 고요가 깃드는 따스한 겨울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6-12-19
황토현에 해가 기운다대숲의 죽순마다 하늘에 삿대질을 하고 있다어머니는 죽순나물을 좋아하셨다아무도 가꾸지 않아저 망각의 밀림에 버려진 무기들은비 오자마자 부드러울 때 잘라 냈어야 한다그 때 그이들은후대의 우리만큼은다시는 죽창 따위 들지 말고죽순을 맛있게 먹으라고 목숨으로 이르셨다황토현은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동학운동의 전승 터이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 때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황토현 대숲에서 시인은 죽창을 들고 의기롭게 싸웠던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소리를 듣고 있다. 민초들의 삶을 짓밟고 유린한 무리들을 향해 온 몸을 던진 그들의 의로운 궐기를 짧은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갈등과 대립을 넘어 죽창을 만들었던 대의 죽순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 사는 평화와 평등의 세상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식이 소복 담겨져 있음을 본다.시인
2016-12-16
그는 가슴 속 담겨있던 술병의뚜껑을 열면 울음이왈칵 쏟아질 것 같은데그 안에서 고통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바다는 핏빛이고밤안개는 번지고내리고, 흐르고, 피어나고, 우는데붉은 나무 가지에 목숨처럼 매달린노란 리본이 아이의 눈망울처럼바람으로 다가오는데그는오늘도 건조대에 널린 빨래처럼몸을 방파제에 걸친 채상처받은 개구리가 되어또다시 똬리를 틀고 있다필자도 지난 2월 말 진도 팽목항에 다녀온 적이 있다. 너무도 가슴 아픈 현장에서 말을 잊었었다. 아직도 물결 사이에 사랑하는 아이를 묻은 실종자 가족들이 망연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 리본이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그 절규의 현장에서 시인은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짓지도 못한 안타까움을 이 시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시인
2016-12-15
그녀를 실은 바람은 파도를 놓기 시작한다 파도가 해시시 곤두박질치는 동안 그녀가 오므려 발부터 씻는다 불길하게 따라왔을 발목이 붉다 맨손으로 제 안에 것 샅샅이 문지르는 일. 뜨물이 된 물은 서해로 흘러 쌓였을 때 이승은 화창하고 경쾌해야 했다 그녀가 다 씻김으로 흔적은 절정 중이어서 하얗게 여문 소금을 모으는 한 남자가 있다 뜨겁고 매끄러운 살은 혀로 감탄하는 어느 염부의 뻘밭 같은 생애가 드디어 달처럼 올라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씻고 발목을 적시며 시인은 이승에서의 한 생애에 대해 깊은 사념에 들고 있음을 본다. 밀려왔다 다시 밀려나는 파도는 뻘밭에 하얀 결정체인 소금을 남긴다. 염전의 염부의 삶이 뻘밭 같은 생애라면 나 또한 세파에 밀리며 뻘밭 같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성찰에 도달함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가 다하는 날 나는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함께.시인
2016-12-14
날 흐려도자귀나무 잎 열면아침밥 때비 내려도자귀나무 잎 오므리면저녁밥 때시간은 영원한 속성을 가지지만, 시인은 자연 속에 흐르는 영원의 시간이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짧은 시행에서 보여주고 있다. 문명의 시간은 인위적이고 가변적이고, 멈출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 속의 시간은 어김없이 자귀나무의 잎을 열고 오므리게 하면서 물 흐르듯 순리를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시인
2016-12-13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누추하고 고단한 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과일 파는 할머니의 하늘은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땅하늘`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시인은 자두 몇 알을 사면서 할머니의 땅하늘을 발견한 것이다. 그 땅하늘에 비가 내리고 그 속에서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평생을 가난 속에서 과일 행상을 하면서 살아온 할머니의 하늘은 머리 위의 하늘이 아니고 자신의 과일을 사주고 인사 나누는 사람들이 다니는 땅인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할머니의 하늘을 보고 있다.시인
2016-12-12
날개 꺾인 것들이 모여 사는이곳은 바닥, 날개 대신 두 발을 형벌로 받았지그러니까, 제 아무리 크낙한 날개를 가진 새라도나보다 더 오래 달리진 못하지저 봐,하늘 길도 바리케이드 투성이지바닥을 향해 곤두박질하는새대가리들 툭, 툭그것 봐, 절정은날개 돋친 클라이맥스가 아니라하늘을 꼬나보며발이 안 보이게 내달리는바로 여기인간에게도 어쩌면 날개가 있었는지 모른다. 가슴 속에는 나름의 날개를, 이제는 더 이상 날아오르지 못하는 욕망과 희망의 날개들을 품고 사는 것이리라. 시인은 이러한 존재적 한계를 인식하고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 앞에서 꺾이고 상한 날개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들의 꿈과 좌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절정의 순간은 더 이상 힘차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순간이 아니라 꺾인 날개지만 끝없이 날아오르려고 애쓰고 욕망하는 그 때가 절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시인
2016-12-09
뒷모습에 불러야 할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갑자기 `어이`라는 말 밖에는그 얼굴에 합당한 기호가 그려지지 않아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는 뒤가 멀어졌다불현듯 뒤를 남기고 멀어져 가는 것들이멀리 떠나고 말았을 때 내게 남은 이름도구멍 난 양말처럼 길에 떨어져 젖었다수많은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름과 함께 깊게 각인되어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모습은 알겠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러한 인식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잊혀져가는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과 똑같이 그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을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게 인생이다.시인
2016-12-08
여기는소리가 잠들어 있는 곳눈물 그렁한 모습으로 앉아천둥소리, 바람소리를배우고 익혀해와 달이 스며드는푸른 세월을 지나에밀레, 에밀레십이만 근의 서러운 어깨꽃잎처럼 흔들면소리는 허공에 날려서바람에 날려서우둔한 자의 귀를 열어비로소 득음하는그 경지 앞에서에밀레종 앞에서 시인은 영원의 소리를 듣고 있다. 천 년 전 신라 중생들의 삶에 스며들었던 그 소리를 푸른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꽃잎처럼 흔들리며 바람에 불리어 오는 그윽한 종소리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지혜와 동력을 얻는 것이리라. 이 차가운 아침 겨울 바람을 뚫고 스미는 그윽한 에밀레 종소리를 듣는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2-07
별이 흘러내리고내가 떨어뜨린칼 조각들하늘에 떨어져 박힌다밤하늘 밤하늘내가 사랑했던 구름과내가 사랑했던 푸른 바람살갑게 쏟아지던 달빛지우고지워서나까지도 지워버리고 싶은데도망칠 수 없는 시간은칼날을 떨어뜨린다나는 우박 같은눈물을 맞는다살아가면서 가슴에 품었던 욕망의 칼날들이 있었다. 구름과 푸른 바람과 달빛을 사랑했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결도 함께 있었다. 시인은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면서 가슴 속 욕망을 지우고 또 지워내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가슴에 품었던 욕망의 칼날들이 수월하게 지워내지 못함은 무엇 때문일까. 시인의 말처럼 도망칠 수 없는 시간들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2-06
토끼는 초식성, 사람은 잡식성이라지만나물만 먹는 우리가 왜 잡식성이냐고수업시간 모두들 수군거렸다배꼽에 맴도는 허기 짓누르며하굣길 가쁘게 언덕바지를 오르면잘 자라서 오히려 죄스런 개망초 꽃대궁에삶은 계란 툭 자라놓은자잘한 계란꽃들 들판 가득 피어 있었다하늘은 슬프도록 더 푸르렀다문둥이 가족들 구걸을 다녀간 뒤황달 걸린 저녁달 올려다보며나물이 절반인 국수로 끼니를 때웠다짚 멍석에 누워 하릴없이 별 세다가식곤증에 쓰러져 초저녁잠에 들면꿈속에는 개망초꽃 대신 계란꽃 대신수천 수만 개 계란 프라이들이너울너울 지천으로 피어나곤 했다들녘의 밭둑이나 우리들 주변의 공한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꽃 중에 개망초 꽃이 있다. 꽃의 모양이 꼭 계란을 잘라놓은 모양이어서 계란 꽃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꽃을 보고 시인은 궁핍한 시대를 살아온 지난 세월을 떠올리고 있다. 지겹도록 가난이 지속되고 깊어지던 때에 우리 삶의 주변에 피어나 흔들리는 꽃. 서러움이 짙게 배이고 한스러움을 함께한 꽃을 보며 시인은 지난 아픔의 시간들을 뒤돌아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6-12-05
추사(秋史)가 유배지 탐라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을 무렵, 난 필리핀 루손섬에서 세온도를 그렸다 세한도의 소나무 대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나무와 파파야나무 그려넣고 초가 대신 바파이쿠보를 그려넣었다 그가 세찬 바람과 눈 내리는 탐라에서 독한 술을 마실 때 나는 바닷가 카페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추사가 그림의 소나무처럼 변치 않는 기개를 바랐으나, 난 열매 맺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에게 주는 나무들의 풍요로움을 간히 원했다 추사(秋史)가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패러디한 재밌고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추사가 정월달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세한도를 그렸다면 시인은 따스한 필리핀 루손섬에서 세온도를 그리면서 맵찬 조선의 겨울바람 대신 열풍이 부는 열대지역에서 민중들의 양식이 되는 열대 열매들의 풍성한 결실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풍요와 행복을 간절히 바라며 세한도의 차가운 바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영역을 초월해서 민초들의 삶을 생각하는 시인의 인식이 깊고 그윽함을 느낄 수 있는 시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2-02
해가 서산 너머 퇴근하면범어 산과 신천을 오가며먹이를 나르던 새들고단한 날개를 접고막 노동자가 일을 끝내는 시각어두움이 찾아오는 순간하루치의 무게를품고 가는 저녁놀최선을 다해 하루를 산 것은 이 시에서도 나오는 막 노동자 같은 사람만이 아니다. 하루 종일 먹이를 나르던 새들도,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역할을 해온 풀들도 꽃들도, 도심의 중심을 관통하는 신천을 오르내리며 먹이활동을 한 물고기들도 하루치의 무게들을 짊어지고 저문 저녁 각자의 휴식과 힐링의 공간인 둥지로 돌아간다. 그곳은 평화가 있고 안식이 있는 곳이다. 하루치의 무게를 가만히 내려놓고 쉬면서 다시 열리는 하루를 가만히 준비하는 것이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2-01
기다림이 길어서 병이 오는가병이 너무 길어서 꽃이 피는가푸르고 푸른 잎으로 떨어져 나간 자리상처가 아물면 노래가 되는가한 몸이라도 나는 나를 만날 수 없었네한 줄기 한 뿌리라도 나는 나를 쓰다듬을 수 없었네늦여름이 가고또 한 늦여름이 가도그리움은 연붉은 자주색나는 나를 살아낼 자신이 없었네나는 내 사랑을 견디어 낼 계절이 없었네상사화(相思花)는 순결한 사랑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잎이 다 지고 난 뒤에 꽃이 나오므로 이파리도 꽃을 못보고 꽃도 이파리를 볼 수 없어서 서로 그리워만한다는 뜻에서 상사화라 부른다. 어쩌면 진정으로 순결하고 참된 사랑은 이렇게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대상에 대해 끝없이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인지 모른다. 왜곡되고 불구의 사랑이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상사화 한 송이가 건네주는 무언의 메시지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가만히 다가서는 아침이다.시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30
개펄에 게 한 마리 엎드려 있다. 뱃바닥도 뱃속도 휭 뚫렸다게가 생전에 몸뚱이를 밀어넣고 깃들었던,깊은 살과 아린 상처와 무른 뼈를 갈무리해두던 등딱지가지금은 텅 비었다게는 죽으면서 시늉을 했다집게발 두 개를 등딱지 밖으로 내밀어보인 것보인다한 발은 집게 하나가한 발은 마디 하나가 부러져 있다개펄에등딱지 한 개와 집게발 두 개가 놓여 있다집게발로 움켜서 놓칠세라빈 등딱지를 꽉, 붙안고 있다비안도 개펄에서 시인은 집게가 죽어있는 한 장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생전에 몸뚱이를 집어넣고 그의 모든 것이 깃들었던 고동 껍질집이다. 비록 광대한 자연 속의 하찮은 미물이지만 게는 그의 짧은 한 생을 마감하면서 가지런히 그를 정리하고 떠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거처였던 빈 등딱지를 꽉 붙들어 안고 죽은 게의 주검과 그 주변을 보여주면서 시인은 우리에게 뭔가를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6-11-29
중년 삶이란 것이물 속 고기의 유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찌(浮漂)인가도 싶은데인생이란 삶의 물속 깊이를 내려보며꿈이 월척을 기다리며언제 다 할 떡밥의 용해속도를 가늠도 못하면서삶이라는 물 한 가운데 열심히도 저리 꼿꼿이오늘 침묵인 채로 서서봉돌의 무게를 말하지 않으려하는중년을 넘긴 시인이 생을 관조하는 작품이다. 인생이란 삶의 물 속 깊이를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란 말에서 시인정신을 짐작케 한다. 꼿꼿이 선 채 침묵하며 신호를 기다리는 찌와 같이 꿈의 실현을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봉돌의 무게를 말하지 않고 꿈의 월척을 기다리는 낚시꾼 같은 심정으로 중년을 건너가는 시인의 심중이 읽혀지는 시다.시인
2016-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