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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암각화를 찾아서

벌써 7년이나 지났다. 하루는 더뎌도 한 해는 잘도 흘러간다.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가던 그 해 겨울, 울주군 천전리와 대곡리에 있는 암각화를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내려가 며칠씩을 묵고 돌아왔다.천전리 암각화에는 주로 석기 혹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추상적인 문양과 신라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과 글자가 새겨져 있다. 법흥왕의 동생과 그 부인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銘文)이 적혀 있어 서석(書石)이라고도 부른다.대곡리에는 거북이가 엎드린 듯한 모양을 한 바위라는 뜻의 반구대가 있다. 여기에는 주로 고래, 사람, 소, 호랑이 같은 동물을 그려놓아서 반구대 암각화라고 부른다.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는 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었다. 겨울에는 물이 적어 잠기진 않지만, 뭍에서 반구대까지는 물이 가로막고 있어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다.이 두 개의 암각화는 아득한 시절에 새겨졌는데,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새겼는지 알 수 없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역시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분명히 저기에, 수천 혹은 수만 년 동안 존재하고 있음에도 알 수 없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우리가 계속해서 모른다는 것이 가능하다니 참 이상하다.우리는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태어났다는 것도 알고 있고, 심지어 100분의 1초로부터 탄생 직후 3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 알고 있으며, 앞으로 우주가 어떤 모습이 될지 역시 추론할 수 있다. 우주의 탄생이라는 그 까마득한 시간, 137억년이라는 그 까마득한 시간, 너무도 까마득해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는 저 암각화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기껏 몇 만 년도 채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물론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를 잡는 모습,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래서 문화재청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이 맞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선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어떤 습관과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항상 궁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먹을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여기에는 선사인들은 지적인 활동이나 정신적인 활동 같은 것들은 없었으며, 원시인이나 야만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더 깊은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이런 편견에서 벗어나 선사시대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더욱 지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암각화를 찾아다녔던 것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을 제기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따라다녔던 선생님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그분은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그런 사유가 좋았다.그곳에서는 주로 사진을 찍으며 서석과 반구대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하루는 아침 9시에 도착해서 해가 지도록 사진을 찍을 때도 있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선생님은 암각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먼저 돌에 새겨진 형상 바깥을 볼 필요도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많은 고래들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 고래의 형상을 주목한다. 그런데 그림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부분, 그러니까 고래와 고래가 만나는 여백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에 집중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암각화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창도 보이고, 뿔 모양의 그릇도 보인다. 또 다른 방법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서석은 커다란 배를 닮았고, 반구대에서는 큰 얼굴과 스핑크스 모양의 사람도 찾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선사인들이 의도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의도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것이 맞다고 장담하긴 어렵다.그런데 서석 아래에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고 의미 있는 암각화를 하나 발견했다. 이 암각화는 학계에 보고된 적도 없는 그야말로 발견에 해당하는 암각화다. 여기에는 집처럼 생긴 암각화가 그려져 있고, 샤먼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집의 오른편에 서 있다. 집은 한옥처럼 생겼는데 지붕이 있고, 기둥도 있다. 큰 기둥은 총 네 개가 있다. 그렇게 해서 세 개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바닥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방마다 다른데 제일 왼쪽은 대청마루처럼 바닥이 높고, 가운데 방은 바닥이 가장 낮다. 집 옆에 샤먼은 만세를 하는 듯 팔을 치켜들고 있다. 머리에는 뿔 같은 것이 양쪽으로 삐죽 솟아있고, 두 개의 눈이 정확히 찍혀 있고, 팔등신 미녀처럼 긴 다리를 가지고 있다.새기는 기법으로 봐서는 천전리나 대곡리에 새겨진 것과 같고, 형상을 표현하는 방식도 유사하다. 이것이 선사인들이 만든 것이라면 정말 큰 발견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선사시대의 집이 움막형태였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암각화가 정말 선사인들이 그린 것이라면 당시의 집은 한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이런 주장이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운 것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배움은 우리의 사유를 더 넓은 곳으로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사유를 배움이라는 한계 속에 가두기도 한다.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데 뭐 어떤가. 선사인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무식한 원시인이 아니었다고 상상한다고 해서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구석기 시대는 무려 70만 년이나 된다. 인간은 기원 후 기껏 2000년 밖에 살지 않았으며 현대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축적해 왔고 말도 안 되는 발전을 이룩해왔다. 그런데 70만 년 동안 구석기인들은 마냥 멍청하게만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현대인의 오만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난다면 이런 암각화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2017-02-17

혼란 속에 머물기

우리 집 강아지 `열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전화기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열무는 전화기를 향해 짖지 않는다. 곧장 현관으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으면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 털레털레 내 옆으로 돌아와 털썩 소리가 나도록 누워버린다. 열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온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나 보다. 아마 열무는 밖에 나갔던 엄마가 돌아왔고, 그 목소리는 현관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모르긴 몰라도 열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비록 자기 방식이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관에 엄마가 없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걸까, 열무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열무는 이 혼란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라고 간단히 생각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열무는 내 옆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눕는다. 열무는 내가 컴퓨터를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열무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오래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혹은 외면함으로써 혼란을 최소화한다.그러나 인간은 혼란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혼란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뭐 이런 식이다.“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루마니아의 민속학자인 콘스탄틴 부라일로이우는 마라무레쉬라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민요 하나를 채집할 수 있었다. 산의 요정이 젊은 남자에게 홀렸는데, 그 남자의 결혼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질투심에 불탄 요정이 남자를 바위 꼭대기에서 아래로 떠밀어버린다. 그 다음날, 목동들이 남자의 시신과 함께 나무에 걸려 있는 모자를 찾아낸다. 목동들이 시신을 마을로 가져오자 남자의 약혼녀가 보러 온다. 약혼자의 목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장송곡 하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랫말은 신화적인 암시들로 가득한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제례용 가사이다”-엘리아데`영원회귀의 신화`, 57면이것은 마라무레쉬 마을의 아름다운 민요에 관한 이야기다. 결혼식을 앞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산에 올라갔다, 그랬다가 그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하지만 요정이 젊은 남자에게 홀렸다거나 그래서 요정이 젊은 남자를 죽였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젊은 남자가 죽을 때는 옆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시신은 사고가 있었던 그 다음날이 아닌 바로 그날 찾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젊은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모르는 빈 칸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이 높다.민속학자 부라일로이우도 이렇게 생각했을려나? 여하튼 그는 이 민요의 유래가 무척 궁금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요라고 말했다. 부라일로이우는 집요하게 탐문한 결과 이 민요에 등장하는 젊은 청년과 실제로 약혼했던 여성을 만나게 된다.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오래된 민요라더니 어떻게 약혼했던 여성을 만날 수 있었던 거지?이 민요는 사실 아주 평범한 비극이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어느 날 저녁 부주의로 절벽에서 미끄러진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비명 소리를 들은 산사람들이 그를 마을로 데려오고, 그 얼마 뒤에 그는 목숨을 거둔다. 장례식에서 남자의 약혼녀는 마을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평범한 장송곡을 되풀이해서 불렀지만, 그 노래에 산의 요정에 대한 언급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요정 같은 건 없었다. 젊은 남자는 산에 올라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고 며칠을 앓다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젊은이의 죽음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젊은 남자에게 찾아온 불운을, 그것도 결혼을 앞둔 이에게 찾아온 불운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우연처럼 찾아오는 사고의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민요와 그 내력담을 만들어냈을 것이다.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2008년 `광우병 사태`를 어떤 사람들은 `광우뻥 소동`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뻥`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 미국산 수입 소고기 협상에 대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충분히 주지 않았고, 국민들은 여기에 반발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유독 `이야기`가 많았다. 메르스 사태, 세월호 사태, 최순실 사태, 사드 배치 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이것이 정부에 의해 유언비어나 괴담으로 규정되었다. `이야기`든 유언비어든 괴담이든 그 출처와 유포의 가장 큰 조력자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정권 자신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다. 세월호와 잠수함의 충돌설, 세월호가 핵폐기물을 싣고 있었다는 주장, 부재한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방과 관련된 각 가지 추문들이 그러하다. 가라앉은 세월호를 인양하고, 대통령이 자신의 행적을 명확히 밝힌다면 유언비어나 괴담은 유포되지 않을 것이다. 위협과 협박은 유언비어를 증폭시키지 근절시키지는 못한다. 의혹이 있다면 감추지 말고 투명하게 밝히면 된다.박근혜 대통령은 특검 수사를 성실히 받겠다더니 수사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어제는 수사 날짜가 합의되었다는 뉴스가 들리더니, 오늘은 특검이 대면조사 날짜를 유출했다는 이유로 조사가 무산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혼란한 정국이 계속될 것이다. 이 혼란을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혼란을 정리하려는 노력, 그것이 유언비어나 괴담을 만들 수도 있지만, 혼란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진실은 인양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더욱이 우린 사람이니까.

2017-02-10

명절 그리고 거룩한 아득한 슬픔

“할아버지 집이 멀어서 니리 온다꼬 지엽재?”조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봅니다. 할아버지는 한 번 더 똑같이 말하지만, 서울에 사는 조카가 이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저는 “태호야, 너무 멀어서 내려오느라 지겨웠지?”라고 번역해줍니다. 조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아니요”합니다. 평소에 3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5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태호는 동생 소현이와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겠지만 정작 지겨운 것은 형과 형수였던 것 같습니다.`지겹다`의 어원은 `직엽다`로 여겨집니다. 그랬던 이 단어는 두 가지 형태로 분화하였을 것인데, 먼저 `ㄱ`을 이어쓰기 하면서 `지겹다`가 되었고, 이것이 표준어로 정착한 듯합니다. 이와 달리 경상도 사투리는 (아니 정확히 제가 사는 지역의 말은) `ㄱ`이 탈락하여 `지엽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몰개`였던 것이 `모래`가 되었듯, 혹은 `남그`가 `나무`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지만 “지엽재?”라는 말에는 아직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보았을 때 이 말은 “지겨웠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동네 사투리로 바꾸면 `지여밨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ㅂ`이 `워`로 바뀌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지금 국어수업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조카는 스스로 지겨워진 것이 아니라 차가 막혀 지겹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지겹다`라는 동사는 `지겨웠지`라는 사역형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현대어는 행위의 주체를 명확히 구분합니다. 그런데 과거로 갈수록 이런 구분은 불명확했습니다. 고어라 할 수 있는 한자나 라틴어는 아주 기본적인 문법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언어들은 동사의 어형변화 없이도 변화합니다. `지겹지`가 `지겨웠지`로 이해되듯이 말입니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고, 정보가 다양하며 복잡하고 어려워질수록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점점 문법은 세밀하고 자세하고 복잡하게 갈라져 의미전달에 도움을 줍니다.사실 일상생활에서 이런 복잡하고 자세한 문법은 크게 쓸모가 없습니다. “지겨웠지?”를 “지겹지?”라고 말해도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습니다. 현대인은 애써 이렇게 세분화된 문법을 사용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옛날 사람의 습관에 젖어 있어 옛날 말을 씁니다. 아버지는 옛날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조카가 그런 할아버지를 만났으니, 공간적으로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이동한 셈이 됩니다. 현대에 이르러 명절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탈 것의 발전으로 공간적 제약이 아무런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이 시대에 명절은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만들어 주는 다리가 아닐까요?옛날의 명절은 일가친척이 모여 조상님에게 한 해가 왔음을 알리고, 복을 빌고, 음식을 나눠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석의 시는 이런 명절과 제사의 풍경을 `여우난곬족`과 `제사`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여우난곬족` 부분)친척들이 다 모이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친척들은 명절 준비를 하고 밤이 깊으면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를 하며 하룻밤을 보냅니다. 날이 밝으면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지르터 맨 늙은 제관의 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교우 우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촛불 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 위에 떡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 과일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끊는 통곡과 축을 귀애하고 그리고 합문 뒤에는 흠향 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것”(`목구`부분)위의 시가 비록 제사를 모실 때 쓰는 `목기(木器)`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제사`로 바꾸어도 상관은 없습니다.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줌 흙과 한 점 살과 먼 넷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목구`부분)`아득한 슬픔`은 `목구`만이 아니라 제사라는 행위 전체로 보아도 될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슬픔이 담기는 것일까요? 제사는 그지없는 정성과 공손함을 바치는 것이지만 `옛 조상`과 `먼 후손`들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아 서로에게 닿을 수 없습니다. 그 안타까움이 `슬픔`의 정체는 아닐까요?▲ 공강일 서울대 강사지금의 명절은 이런 `슬픔`과 거리가 멉니다. 제사 음식도 간소화되었고, 심지어 명절을 쇠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명절의 전통적 의미는 사라지고 이제 빈껍데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껍데기로부터 옛날의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은 아닐까요? 현대사회의 변화는 너무도 빨라 흔적도 없이 자꾸만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며, 현재가 전부인 양 살아갑니다. 명절은 그런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저에게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에겐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목구`부분) 그런 유구한 과거가 우리의 내면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명절은 현재 속에서 옛날을 잇는 다리가 되어줍니다. 그것이 명절의 현대적 의미는 아닐까요?

2017-02-03

참 다행이어라

▲ 공강일 서울대 강사혹시 여러분은, 1936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 제목이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당시에는 `메밀`을 `모밀`로도 불렀는데 한글맞춤법 원칙이 바뀌면서 `메밀`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제6차 교육과정(1996년)에 따라 국정고등교과서 국어(상)에 실리면서 `메밀꽃 필 무렵`은 이 소설의 제목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언어도 변한다. 원래 `모밀`이었던 것이 `메밀`로 바뀌었으니 작품 속의 단어들 역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 실제로 어떻게 바뀌었을까?“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아니나) 달빛에 감동하여(야)서였다. 이즈러는졌(ㅈㅓㅆ)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느)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녀)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니)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닢)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여)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곰)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ㅤㅇㅒㅆ었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낭)딸랑(낭) 메밀밭께로 흘러(너)간다. 앞장 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녔)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었)다.” 인용한 부분은 한국소설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회자되곤 한다. “()”(괄호)는 처음 발표되었을 때 표기된 것인데, 예컨대, `짐승`은 `즘생`이었고 `소금`은 `소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과거의 단어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현대어에 맞게 바꿀 것인가? 이게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인용문에 있는 “[ ]”(대괄호) 부분은 최초 게재본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옮김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출판된 책에서는 `흐붓`이라고 해놓을 자리에 `흐뭇`을, `흐뭇`이라고 해야 할 자리에 `흐붓`을 표기해 놓았다. 또는 `흐붓`을 없애고 모두 `흐뭇`으로 바꿔놓은 것도 있다.다시, 이게 무슨 문제냐고? 당연히 큰 문제다. 그 문제를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이효석은 `흐붓`이라고 썼지 `흐뭇`이라고 쓰지 않았다. 작가가 쓰지도 않은 것을 마음대로 바꾼다면 그것을 이효석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더 큰 문제는 의미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흐뭇하다`는 `흡족하다, 만족스럽다`의 뜻이지만, `흐붓하다`는 `흐벅지다`에서 파생된 말로 여겨지며, “탐스러울 정도로 두툼하고 부드럽다 또는 양이 많다”의 뜻을 지닌다. 그래서 `달빛이 흐뭇하다`는 것은 `달빛이 흡족할 만큼 만족스럽다`는 뜻이지만, `달빛이 흐붓하다`고 하면 `달빛이 탐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포근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둘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느껴진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긴 몰라도 이효석은 그 어감과 의미를 생각해서 `흐뭇`이 아니라 `흐붓`을 썼다. 이런 아주 미미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고려해서 작가는 단어를 선택한다. 그런데 마음대로 단어를 바꿔버린다면 작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며, 그만큼 작품의 느낌도 상쇄된다. 작가는 이런 것들에 매달린다. `이런 일`, 그러니까 `흐붓`과 `흐뭇`을 구분하는 일은 경제학적으로나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별 볼일 없는 일`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며, 세월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그 뿐인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평창군은 봉평에서 매년 `이효석 문화제`를 열어 수만의 관광객을 유치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사에 이런 걸출한 작품이 기록되며, 이를 통해 학생들은 문학의 아름다움과 우리말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도 이것을 `별 볼 일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얼마 전 `이효석전집`(총6권)이 출판되었다. 이 작업은 2012년 5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거의 5년이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효석이 최초로 게재한 작품과 또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수정한 작품들을 일일이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효석이 쓴 것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에 사시든 이효석의 아드님이신 이우현 선생님이 한국으로 귀국하셨고, 이 작업에 드는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셨다. 또 작업에 직접 참여하여 고언을 해주셨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신 이상옥 선생님은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청년보다 더 큰 열정을 가지고 편집과 교감의 책임을 맡아 가장 성실하게 이 일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채정 선생님, 이지훈 선생님, 나보령 선생님이 교정작업에 참여하여 실무를 해주었다.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효석전집`의 출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작가도 그렇지만 학자 역시 이런 `별 볼 일 없는 일`을 위해 노력한다. 가장 지루하고, 가장 볼품없으며, 인기도 없고, 아무런 영광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그런 일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참여한다. 그리하여 작품은 새롭게 거듭나며, 시간이라는 거대한 파도와 싸워 이겨낸다. 여전히 온몸과 마음을 받쳐 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작가들의 노고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첨단과학과 공학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문학은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과 감동을 안겨준다.

2017-01-20

새해에 세운 계획을 실천하는 방법

▲ 공강일 서울대 강사한 해가 시작되면 으레 계획을 세우게 된다. 물론 그 계획은 어긋나거나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느슨하고 모호하게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 같다. 정유년에 내가 세운 계획은 여행, 글쓰기, 몸에 관한 것들이다.여행계획은 이렇다. 알래스카 여행, 동유럽 여행, 그리고 국내의 더 많은 곳 다니기. 이런 것들은 돈과 시간이 있으면 되는 것이니 크게 어렵지는 않겠다. 그리고 글쓰기 계획은 논문 쓰기, 예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책 출판하기, 지면을 좀 더 넓혀 다양한 글쓰기다. 덧붙여 더 많은 강의를 했으면 좋겠고, 삶도 조금 여유로워지면 좋겠다. 이런 것은 지금 상태에서 조금 더 노력을 하면 될 테니까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정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주로 내 몸과 관련된 것들인데 살을 파격적으로 빼고, 금연을 하고, 술을 줄이고, 운동 시간을 늘리는 것들이다. 금연을 하려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글을 조금 덜 써야 한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술을 마시면 꼭 담배 생각이 나니까 말이다. 술을 줄이려면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런 일이 있을까, 벌써 걱정이다.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뭘 하지?오랜만에 만났으니 당구나 한 게임하지 않겠나?무슨 당구인가? 나는 요즘 수영을 배우고 있는데, 수영이나 하러 가세.허, 이 친구 많이 변했군. 수영복이 없으니 그건 어렵겠고, 10km 달리기를 하는 건 어떤가?아주 좋은 생각이네.자, 그렇게 해서 공원을 한 두 바퀴 돌았다고 치자. 그 다음엔 뭐하지?덕분에 운동 잘 했네. 그럼 다음에 만나면 히말라야나 한 번 정복해보는 게 어떤가? 라고 말하고 헤어질까? 아니지, 열심히 운동을 해서 땀을 뺐으니 술 생각이 더 간절할 테고, 밀린 이야기도 있을 테고, 결국 이래나 저래나 술집으로 가게 될 것이 뻔하다. 술을 줄이지 못하니 금연을 할 수 없고, 더불어 살을 뺄 수도 없다. 술만 해도 열량이 높은데 안주까지 먹어야 하니 살이 안 찔래야 안 찔 수 없다. 대략 난감이다.왜 나의 근사하고 멋진 계획들은 항상 이렇게 어긋나는 걸까. 혹시 생각해보셨는지? 물론 의지가 약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자면,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 안심이 되셨다면 좋겠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다른 사람들도 계획을 잘 못 지킨다고 말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주위를 둘러보시라. 계획을 지킬 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은 열에 하나, 백에 하나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럼 다시, 왜 우리의 계획은 일그러지기 일쑤일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나`는 `계획을 세우는 나`와 `실천하는 나`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는 나`는,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이상적인 결과를 낼 수 있도록 계획을 짠다. 일주일에 3일은 운동을 하겠다, 술은 일주일에 한 번만 마시겠다, 집에 돌아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찍 잠들어 일찍 일어나겠다, 와 같은 계획 말이다. 하지만 `실천하는 나`는 실제적인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만나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한다. 현실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널려 있고, 그것들은 또 뒤엉켜 있다. 계획할 때는 이런 복잡한 것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계획은 일그러지고 어긋나고 종국에는 폐기처분되고 만다.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고려해서 계획을 세우면 되지 않을까?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디까지나 미래니까 말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일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운다면 어떨까? 지금 나의 삶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계획이 세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계획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세우는 것인데, 현실을 모두 고려했으니 달라지지 않을 것은 뻔하다.그래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나의 의지에만 의존하지 않고, 계획을 실천하기 적합하도록 나의 주변을 바꿔야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면, 일찍 일어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알람, 이를테면 제대로 끌 때까지 도망 다니는 알람이라든지, 30회 아령을 해야 꺼지는 알람 같은 것들을 준비하면 된다. 또 술을 줄이고 싶다면, 나의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 평소에 자주 술을 마시는 친구나 동료와 함께 이런 계획을 세운다면 실천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그러니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계획을 세워서 삶의 변화를 주고 싶다면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계획이어야 한다는 결론 말이다. 그렇게 될 때 계획은 지켜지고, 나의 삶도 비로소 변화하게 된다. 나는 나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나와 맞닿아 있는 것들 역시 나의 일부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 곧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 말이다.나의 계획이 나의 주변을 변화시키고, 그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우리나라 전체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그런 것을 작년에 경험했다. 광장에 모인 `촛불`이 그 증거일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명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그 후 다시 10년 동안 나아진 것은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최고로 높은 국가가 되었고, 소득불균형 현상도 더욱 심해졌으며, 삶에 대한 만족도도 최하권으로 떨어졌다. `헬조선`, `흙수저`는 현재의 우리나라를 잘 보여주는 말들이다.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된다면 나의 삶도 좋아질 것이다. 반대로 나의 삶이 좋은 쪽으로 바뀐다면 우리나라 역시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기댈 것은 국가가 아니라 바로 `나`인 것 같다. 그러니 새해에는 꼭 좋은 계획을 짜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할 수 있도록 `나`의 주변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길 바란다. 그러할 때 `나`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조금씩 바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7-01-13

새해가 닿는 소리

□ 2003년 1월 1일, 감포 오징어잡이 배새해 첫날에는 무엇들 하셨는지? 최근 몇 년 동안 새해랍시고 특별히 뭘 한 것이 없다. 바쁜 일상 속으로 새해가 불쑥 끼어드는 느낌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도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새해 첫날 역시 전날과 다르지 않았고, 그 다음 날도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86년에서 87년으로 넘어갈 때 짠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거기 맞춰 떡하니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걸 확신할 수도 있었다. 일기에 1987이라고 써야 할 것을 버릇처럼 1986이라고 쓰고, 지우개로 그 숫자를 지울 때면 1년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느낌이 들어 다시는 틀리지 않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해가 바뀐 뒤 한동안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신경이 팽팽해졌다. 어느 사이 그런 긴장감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작년과 올해를 가르던 문턱이 이제 흔적도 없이 닳아버렸다. 애초에 그런 경계 같은 것은 없었겠지만 어쩐지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는 건 불손하게 느껴진다.물론 새해 첫날을 특별히 보냈던 때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감포에 갔던 날이다.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취해 있었고, 들떠 있었고 친구들이 간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내 차는 친구가 운전했고, 나는 또 다른 친구의 차에서, 시트도 없는 짐칸 같은 뒷좌석에 이불을 깔고 드러누워 수다를 떨었다. 같이 간 친구들이 열 명도 더 되었던 것 같다.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이 친구들과 새해를 함께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 같은 것이 이뤄질 수 있을 만큼 삶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어찌되었건 우리는 감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새해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불꽃놀이를 했다. 총처럼 튀어나오는 연발 불꽃을 샀다. 불꽃은 하늘로 올라 바다에 떨어졌다. 한 친구가 불꽃이 나오지 않는다고 들여다보다가 눈을 다칠 뻔하기도 했다. 화들짝 놀란 친구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하마터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그런 시간을 따라 환하게 불 밝힌 오징어잡이 어선 떼가 몰려들었다. 그날은 날씨가 춥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제대로 해를 보기는 어렵겠다고들 했다. 어차피 나는 잠과 술 따위에 잠겨 있었고 그보다는 우정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들에 흠뻑 취해 있었으므로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흐린 날씨만큼이나 정신도 흐릿했으나 다만 뚜렷이 남아 있는 건 어화(漁火)였다. 검은 바다를 향해 달려간 어선들은 수평선 끝에서 학익진이라도 펼칠 것처럼 일(一)자로 늘어섰다. 새해에도 일을 해야 하는 어부들이 있다는 것, 우리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불빛은, 새해 첫날이라고 불리는 것이 또 다른 어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했다. 어화는 다가올 미래였다.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새해를 즐길 만큼 앞으로의 삶이 녹녹치 않으리라는 것, 세월에 닳고 닳아 새해를 새해로 느낄 수 있는 감각 역시 무뎌질 것이라는 그런 예감 말이다. □2017년 1월 1일, 和光同塵(화광동진)그렇게 2017년에 이르렀다. 이 2017이라는 숫자가 무척 낯설다. 나에겐 삶의 기준이 되는 연도가 있는데, 그건 대학에 들어갔던 1997년이다. 사람들이 과거 일을 이야기할 때 그 일이 1997년 이전에 일어났으면 엄청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지만, 1997년 이후의 일이라면 `에게, 얼마 되지도 않았네` 라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벌써 십년 이상 지난 일인데 그게 어떻게 얼마 되지 않았냐고 핀잔을 준다. 그러면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쌓여온 시간을 실감하게 된다. 작년에 내 강의를 수강한 학생 중에는 1997년에 태어난 학생도 있었는데, 그런 학생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혹시 여러분도 그런 `심상지리적 차원`의 연도를 가지고 계신지? 1997년에다가 나를 묶어놓은 이유는 대학 입학만큼 나를 설레게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그 때나 지금이나 삶에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한 것도, 대학원에 들어간 것도, 일을 하게 된 것도 큰 변화였는데도 여전히 1997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나보다.그런데 조심스럽게 2017년이 새로운 기준점이 되진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쩌면 외국에 나가게 될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지금껏 공부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될지도 모르고,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희망차 보이지만 사실은 암울하다. 외국에 간다면 듣도 보도 못한 구석진 나라로 가게 될 것이고, 새로 공부를 하고 싶은 이유는 이걸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며, 이직을 하는 이유는 지금 다니는 직장이 내년을 넘기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그런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명상을 한다. 가부좌를 틀려면 왼쪽 발을 먼저 얹는지 오른쪽 발을 먼저 얹는지, 또 숨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손은 어디에 어떻게 두는지조차 모르지만 최대한 정갈한 마음으로 최대한 정갈하게 앉아 본다. 다리가 굵어 가부좌를 틀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일단 앉는다. 그냥 한 30분 정도 아무것도 안하고 멍하니 앉아 있을 생각이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비울 목적이라지만, 나는 오히려 생각을 이어나갈 심산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복잡한 문제들을 생각한다고 해봤자 몇 분 가지도 않는다. 생각할 일들은 이어지지 않고 짧은 생각들이 지나치기만 한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그런 바람을 느낄 틈도 없이 자동차가 바람을 가로 지른다. 내가 명상하는 동안 가만있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열무의 움직임을 귀로 쫓는다. 열무는 몇 번씩 재채기를 하고 코를 킁킁대며 내 주변을 걸어 다닌다. 열무의 걸음은 긴 발톱이 먼저 닿고, 발바닥의 젤리 같은 물컹물컹한 패드가 닿는 식이다. 열무는 그야말로 사뿐사뿐 걷는다. 명상에 잠긴 동안 절망도 희망도 빛 사이를 떠다니는 먼지처럼 어느 틈에 내려앉아 있다.

2017-01-06

풍경 혹은 바람의 흔적

`풍경`이라는 말이 헷갈렸다. 풍경은 `경치`(風景)라는 뜻도 있지만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風磬)이라는 뜻도 있다. 풍경(風景)이 바람이 만드는 경치라면 풍경(風磬)은 바람이 만드는 소리다. 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절에서 풍경(風磬)은 그윽하게 울려, 그 소리가 절 전체로 퍼지면 하나의 풍경(風景)이 된다. 그리하여 풍경(風磬)과 풍경(風景)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風磬과 風景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은상이 작사하고 홍난파가 작곡을 한 “성불사의 밤”이라는 가곡을 알게 된 뒤부터다.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뎅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끊일 젠 또 들릴까 소리 나기 기다려져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홍난파는 이은상의 시조가 마음에 들어 곡을 붙였다고 했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구체적 밝히고 있지 않으나 그가 이은상의 시조를 좋아하긴 했던 것 같다. 홍난파는 1931년 7월 미국 유학을 떠나 1933년 2월에 귀국했고, 같은 해 5월 `조선가요작곡집`을 간행했다. 이 작곡집은`제1집 노산시조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러니까 돌아와서 거의 제일 먼저 한 것이 노산의 시조에 곡을 붙이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시조에 나오는 성불사는 어디에 있는 절일까? 물론 속리산에도 성불사는 있고, 심지어 그 절에는 `성불사의 밤`이라는 시비(詩碑)도 있다. 이 곡에 나오는 사찰은 미안하게도 속리산의 그것이 아니라 황해도 정방산의 성불사라고 한다. 이 시조는 이은상이 1932년 출판한 `노산시조집`에 실려 있으며, 시조에는 거의 모두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성불사의 밤`에는 1931년 8월 19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짐작컨대 이것은 시를 쓴 날짜이거나 시를 쓰기 시작한 날짜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은상이 성불사에 들렀던 날인지도 모르겠다.어떤 시에는 그 지명이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꼭 `영변에 약산`의 진달래꽃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는데, 정지용의 `장수산`이 꼭 장수산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이성복의 `남해금산`이 꼭 남해금산일 필요는 없다. `성불사의 밤`의 `풍경(風磬)` 역시 꼭 성불사의 풍경이 아니어도 된다.그런데 아무런 연관성 없는 것들, 처음에는 자의적으로 엮어 있던 것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면서 사회성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의 걸음마다에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뿌려야만 하며,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산은 장수산이어야만 하며, “그 여자 울면서 떠나간 돌”은 남해금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의 어느 돌이어야만 한다. 성불사의 풍경(風磬) 역시 그런 식으로 필연성을 갖게 된다. 당신과 당신의 이름이 처음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가 결국에는 당신을 생각하면 당신의 이름이 떠오르고, 당신의 이름을 떠올리면 당신이 떠오르는 것처럼 자의적인 것들이 유통되고 지속되면 어느 사이 필연성이라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런 식으로 성불사의 풍경(風磬)은 숱한 풍경 중의 하나가 아닌 유일한 풍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성불사를 찾은 `손`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이은상 자신이겠지만, 나는 이보다 더 큰 고민을 가진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본다. 아주 가는 바람 한 줄에도 흔들릴 것이 분명한 풍경 소리에 잠들지 못하는 그는, 지독한 괴로움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풍경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주승(主僧)`은 잠들어 있다. 주승과 달리 저 `객(客)`은 무명(불교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하는 고제·집제·멸제·도제의 근본의에 통달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나는 무명을 벗어던진 주승보다는 저 손님이 부럽다. 그가 앓고 있는 그의 고통이 부럽다. 도망치듯 도시를 떠났겠으나 여전히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격렬한 생각들, 그 괴로움은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리라. 생활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경제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만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저 손님의 고통은 순전히 정신적인 종류의 어떤 것이리라. 사랑이나 신념 같은 것들,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성불사에 들린 저 사람이 부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생활이 아니라 펄떡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생활이 아닌 삶. 고통과 환희, 그런 격정에 휩싸이는 삶. 더 격렬한 격정을 갈구하는 삶. 그 뜨거운 삶이 나는 못내 부럽다.

2016-12-30

혁명 혹은 시간의 정지

▲ 공강일 서울대 강사역 광장에는 시계탑이 있었다. 시계가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가지고 있는 시계의 시간을 믿을 수 없었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알아서 표준시간을 맞춰주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기차와 같이 시간을 꼭 지켜야할 때에는 시계탑 아래에서 만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서로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더욱 더 시계탑이어야 했다. 고층건물이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높은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려 시계 `탑`이지 않는가! 그러나 역 광장의 중심을 차지했던 시계탑은 이제 한 구석으로 물러났다. 과거의 시계탑이 볼품 없는 모양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에만 충실했다면, 오른쪽의 시계탑은 조형성을 더 중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시계대신 유려한 기둥과 근처 분수의 물줄기에서 드러나는 곡선의 관능을 바라본다. 현재와 과거는 그렇게 분리되고 있다. 언젠가 시계탑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시계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시대는 그렇게 흐른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말이다. 그러니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오른다 해도 우리는 우리가 처음 있었던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기실 흐름 속에 있으니, 처음 있었던 곳조차 없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시계탑에 대해서라면 베냐민만큼 멋지게 말하긴 힘들겠다. 그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한다는 의식은 행동을 하는 순간에 있는 혁명적 계급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대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였다. 달력이 시작하는 날은 역사적 저속촬영기로서 기능을 한다. 그리고 회상의 날들인 공휴일의 형태로 늘 다시 돌아오는 날도 근본적으로 그와 똑같은 날이다. 따라서 달력들은 시간을 시계처럼 세지 않는다. 달력들은 역사의식의 기념비들이며, 이 역사의식은 유럽에서 100년 전부터 가장 희미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7월 혁명 시절만 해도 이러한 의식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 일어났었다. 처음 투쟁이 있던 날 밤에 파리 곳곳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동시에 시계탑의 시계를 향해 사람들이 총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 목격자는 시의 운율에서 영감을 받은 듯이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누가 믿을 것인가! 사람들 말로는 시간에 격분하여새 여호수아들이 모든 시계탑 밑에서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 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혁명이 있었던 시간, 왜 사람들은 시계탑을 향해 총격을 가했던 것일까. 혁명은 일종의 정지다. 역사라는 연속적 흐름을 끊어내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이 혁명이다. 프랑스인들은 그 정지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더이상 구체제의 법이 작동하지 않는, 멈춰버린 그 진공의 시간을 사람들은 온전히 누리기 위해 시계를 박살낸 것 같다.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오로지 가능성만이 팽창해진 그 유보의 순간들을 말이다. 하지만 어김없이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그러한 가능성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들 모두가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무구와 무위의 공백들은 훼손된다. 다시 시간을 멈추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피가 필요하다.지금 전국에서는 연일 촛불이 불타오른다. 그 촛불은 대통령의 시간을 멈추어놓았다. 대통령의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일들이 촛불로 인해 멈춰졌다. 그런 점에서 촛불은 혁명이다. 대통령이 친구랑 놀았다고 잘못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친구가 연설문을 써주고, 국가 비상사태에도 그 친구들과 놀다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방기했다면, 나아가 그 친구들이 권력을 주물렀다면, 이것이 왜 잘못이 아니란 말인가? 그 친구들이 개입한 것이 1%밖에 안 된다는 말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이다. 그 1%가 무엇인지 소상하게 밝혀질 필요가 있다. 지금 촛불은 대통령의 국정농단을 넘어 대기업과 정부의 유착을 밝히라고 말하며, 재벌에게 더이상 특혜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촛불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건재할 것이다. 촛불을 들 줄 아는 현명한 국민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부디 이 현명함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2016-12-23

보이지 않는 말을 듣는 일

63빌딩 아래에서는 63빌딩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올림픽도로에서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저렇게 크고 웅장한 것을 매일 보니까 간이 큰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엔 처음으로 유럽엘 다녀왔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을 때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밖으로 나와 박물관의 벽면을 따라 차로 한참을 달린 후에야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멀리에서만 크기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에펠탑도 개선문도 그랬다. 큰 것들은 너무 커서 막상 그 곁에서는 규모를 알 수 없다. 그런가하면 떨어져 있을 때 몸서리치도록 소중해지는 것들도 있다. 9일 가량의 여행 동안 나는 몹쓸 만큼 큰 것들을 보았고, 터무니없이 소중한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내 마음은 한국도, 유럽도 아닌 곳을 떠돌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관심과 배려가 가진 힘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긍정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내가 좋아하는 로맹가리는 언젠가 “조금 시적이긴 하지만….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터.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12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 10월, 나도 한 자락 참여한 공학 책이 출간되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저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 3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저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공학이 언젠가 우리의 삶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즈음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인간은 100년도 채 존속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이 내 생각을 눌러 완고한 믿음으로 굳어졌다.그런데 나는 알프스의 한 자락에 불과한 리기산에서 이 불안을 조금은 씻을 수 있었다. 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혹은 알 수 없는 미래든 망연자실해지고 말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 알프스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 크기는 물론 그 경관까지 말이다. 루체른의 리기산은 1800m에 미치지 못했으나, 인간이 머무는 곳은 턱없이 낮았다. 카메라는 깊이를 담지 못했고 눈으로는 도무지 새길 수 없었다. 결국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었는데 비로소 인간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마음을 긍정할 수 있었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절로 숙연해졌다.파리에서 벨포트까지는 기차를 탔다. 옆에는 한 여성이 앉았다. 나는 되지도 않는 영어로 말을 붙였는데 그녀의 영어는 유창했다. 그녀는 페루에서 파리로 유학을 왔다고 말했고, 나는 나스카 라인을 이야기하며 아는 체를 했다. 그래서였는지 `해를 품은 달`과 같은 한국의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그녀는 말했고,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한국의 자연경관을 무척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반가웠다. 그녀의 나라에서 산이라 불리는 것들은 해발 6000m가 넘는다는 것을 얻어 들었고, 그녀가 가본 유럽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곳이 스웨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로스쿨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있으며, 특히 인권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공항의 경찰들이 유독 유색인종들의 신분증을 검색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는 말을 했다.명사만 늘어놓는 내 말들을 그녀는 잘도 알아들었고, 답답해 하는 내색도 없이 내 말을 들어주었다. 또 아주 편안하고 쉬운 영어로 답해 주었다. 그녀가 내 말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듣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더딘 말을 지긋이 들어주었고, 신경을 써서 내 말을 완성해주었다. 어쩌면 대화는 말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상대를 배려해주는 마음씀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랑시에르는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공동 공간의 거주자로 자리 잡기에 필요한 시간을 가질 때, 자신들의 입이 고통을 표시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공동의 것을 발화하는 말을 내보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가질 때 발생한다. 자리와 신분의 이러한 배분과 재배분은, 공간과 시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소리와 말의 이러한 절단과 재절단은 내가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라고 했다(`미학 안의 불편함`, 55면). 그의 말처럼 우리가 시간을 내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준다면 알아듣지 못할 말은 없을 것이며, 누군가가 침묵 속에 서성거리는 일 역시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 당신도 우리가 되어 우리는 홀로 태어나지 않아도 될 것이며 홀로 죽지 않아도 될 것이다.시간을 내어서 내게 말을 붙여준 산과 머뭇거리는 내 말을 성실히 들어준 안니에게도 고맙다. 나도 이제 그만 여행의 언저리에서 떠돌고 삶으로 돌아와 가까운 곳의 말들을 들어야겠다. 더불어 소중한 당신의 말에 모든 오감을 기울여야겠다.

2016-12-16

유년의 겨울, 풍경 셋

△하나, 눈 오는 날은 짐승이고 싶어라우리 동네는 해발이 600m가 넘는다. 동네 우측으로는 삼봉산(1천254m)이 있고, 좌측으로는 갈미봉(1천210m)이 있고 정면으로는 신풍령(910m)이 있어서 구름이 모여들기만 하면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렇게 구름이 몰려드는 날, 아침은 습기에 젖고, 동네 사람들의 몸도 젖어 누구하나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나는 아침이 오는지도 모른 채 늦잠을 잤다.눈은 한 번 오기만 하면 쉴 새 없이 쏟아져, 버스는 그 눈 속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렇게 눈 오는 아침은 몸이 먼저 알아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두껍고 게으른 솜이불에 눌려 일어날 수가 없었노라고 내가 내게 핑계를 대었다. 그러는 사이 나무에는 희고 두터운 눈이 쌓여 쩍쩍 가지 벌어지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와 함께 천재지변으로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이장님의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눈은 그렇게 오기만 올 것이었다. 나머지는 눈의 몫이 아니었다. “눈이 푹푹 나리는 날”, 이 산골의 눈 속에서 농부들은 농부일 리 없었고 아이들도 아이일 리 없었다. 아이들도 감히 눈썰매를 탈 엄두를 못냈고, 바쁘기만 한 어른들도 일손을 놓았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까닭에 `나타샤`가 올리는 만무했다. 이제 누구나 할 것 없이 군불을 활활 지피고, 등을 지지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은 온종일 짐승처럼 웅크렸다가 다음 날 눈이 그칠 때쯤 일어날 것이었다. 눈이 그치면 사람들은 그제야 눈 쌓인 길을 치우리라. 아무도 올 리 없는 길이었으나, 김훈의 말처럼 길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것이기에 언제나 마을에서 마을로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김훈 `섬진강 기행` 중). 동네 사람들은 눈 덮인 길을 쓸며, 짐승이었던 흔적 역시 쓸어낼 것이었다.서울에 처음 왔을 때 무척 신기했던 것은 눈 오는 날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비도 아니고 눈을 맞기 싫어 우산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눈에 아랑곳없이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여전히 나는, 눈 오는 날이면 되도록 등을 지지는 짐승이고 싶다.△둘, 군불과 풍구와 눈물불아궁이는 늘 땅보다 낮은 곳에 있어 해가 지기도 전에 어둑신해졌다. 굵은 장작은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겹씩 타들어갔고 불길은 불아궁이 깊은 곳까지 길을 내고 있었지만, 더 먼 곳까지 닿을 수 없어 늘 윗목이라 불렸다. 방바닥은 평평했는데도 말이다, 윗목이 있었고 아랫목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웃어른이었는데 아랫목에 계셨다.위와 아래만큼이나 구분이 어려웠던 건 앞집과 뒷집이었다. 어머니가 말하는 앞집이란 동네 입구를 기준으로 했지만, 나는 동네 입구를 나갈 일은 없었고 동네 뒷산을 누볐기에 나에게 동네 입구는 동네 뒷산이었다. 커서도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때면 두려움이 먼저 일었는데, 그 두려움의 역사는 이토록 길다. 어머니가 뒷집에 심부름을 보내면 나는 앞집 밀양할매네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뒤늦게 돌아와 군불을 넣는 할아버지 옆에서 불을 쬐었다.할아버지는 풍구를 돌려 불을 붙였다. 불이 잘 붙는 날은 불이 활활 타올라 아궁이 바깥으로도 불길이 뻗어 나왔고, 불이 붙지 않는 날의 아궁이는 연기를 내뿜었다. 불이든 연기든 한 한결같이 `내다`라는 말을 썼다. 불이 내고 연기가 냈다. 연기가 낼 땐 매워 눈물을 흘렸다.말들이 사라지면 기억의 자리까지 희미해진다. 아궁이 앞에서 벌겋게 익어가던 내가, 벌건 장작을 뒤적거릴 때 쓰던 불쏘시개며, 불아궁이로 기어나온 낸 연기를 향해 힘차게 돌아가던 풍구며, 그런 단어들과 더불어 기억들이 아스라해진다. 그 아련함 속에서 유년의 아랫목은 여전히 따사롭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셋, 집덫골우리 동네 뒷산은 지도에 있긴 하지만 이름은 없다. 이름이 없어도 이 산은 1천m가 넘는다. 아버지는 이곳을 `집덫골 날망`이라 했다. 집덕골인지, 짚덕골인지, 짙덮골인지 알 길이 없다. 아버지 역시 `집덧골`이라는 말로 들어서 배웠으니 그 정확한 표기를 알리는 없을 것이며, 결국 누구도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저 지명은 한글보다 먼저 태어나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이야 어찌되었던 나는 이 골짜기에 홀로 머문 후 `집덫골`로 부르기로 했다. 나는 이곳에서 집채만 한 호랑이를 생각하며 무서웠고, 집채만 한 덫을 생각하며 안심했다.잔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저 아련한 것들 사이로 일곱 집 우리 동네 골터가 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남은 사람들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언젠가 우리 동네도 이름 없을 것을 생각하니 슬프다.

2016-12-09

국민총화와 국민대통합

1979년 12월 31일 희자매가`실버들`로 MBC에서 십대가수상을 받을 때, 성우가 그네들의 좌우명이 (무슨 새마을 운동이라도 되는 듯) “언제나 최선을 다하자”라는 것을 낯도 안 붉히고 잘도 말했다. `노오력`(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하라는 말)과 `열정페이`(열정을 빌미로 한 저임금 노동을 이름)가 유일한 가치였던 시대, 정태춘은`촛불`로 신인가수상을 받았다.성우의 짧은 설명과 함께 노래가 시작되고, 정태춘은 머쓱함을 숨기기 위해 심취한 것으로 가장하여 노래 속으로 숨어버린다. 노래가 마지막에 이르면 돌연 여자가수들이 출현하여 그네들의 팔뚝만한 초를 들고 트롯풍으로 몸을 흔든다. 그 몸짓이 이 노래의 가사와 얼마나 어울리지 않을지 상상해보시라.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외로움을 태우리라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이 밤이 다 가도록사랑은 불빛아래 흔들리며내 마음 사로잡는데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촛불처럼 타오르네…후략…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정태춘이 무대를 빠져나가면 당시 사회자였던 변웅전은 기다렸다는 듯 이런 말을 날린다. “융화와 총화의 80년대를 앞두고 이렇게 서로서로 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과연, 명불허당! 도대체 이 노래의 어디에 융화와 총화가 있다는 말인가. (정태춘의 성향과 그의 이력을 보건대, `나를 버리신 님`이란 민주주의와 같이 정치적 지향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융화와 총화! 이 노래를 이렇게 가져다 붙일 수 있을 만큼 변웅전은 날렵했고, 그는 이때부터 보수적인 색채를 드러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러 변웅전은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여 3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선진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2012년 11월 이회창과 더불어 새누리에 들어가면서, 그리고 다시 `박근혜`를 `박근혜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진정한(?) `국민총화`를 실현하였다. 그러니까 `국민총화`라는 말은 `국민대통합`이라는 말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 번 결실을 맺은 셈이다.그렇다면 국민총화라는 말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백승종(`국민총화`를 기억하라), 1933년 일제의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내선일체를 역설하기 위해 `국민력(國民力)의 총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 후 해방 전까지 실로 `총력전`의 시대였다. 1969년 4월, 이미 4·8항명으로 공화당에서 쫓겨난 김종필은 불현듯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력과 함께 `총화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그와 함께 이 말은 부활한다. 1971년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가 `국가비상사태`가 이 시대의 숙명인 것처럼 큰소리 칠 때도 이 말은 함께 했다. 그리하여 “국민의 총화와 단결”이라는 말이 유행의 급물살을 타고 1970년대를 도도히 흘렀다. 박정희는 `국민총화`라는 말을 밀었다. 그가 `흉탄`을 맞고도 두 달이 지났지만, 이 말만은 죽지 않고 되살아나 1970년대의 마지막 날에도 잊지 않고 사용되었으며, 1980년대 다시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이 말은 유전하였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1930년대부터 숱한 변화와 격변 속에서도 이 말은 `각설이`의 우편에 앉았다가 죽지도 않고 또 찾아왔다. 이 말은 실로 꿀과 젖같이 흘러, 저들에게 젖과 꿀이 되어 온갖 쇠하고 쇄할 것들을 살찌웠다. 무슨 일만 있으면, 정확히는 자신에게 불리한 일만 있으면 국민대통합을 외치던 대통령께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3차 대국민 담화문에서 처음으로 퇴진을 이야기하였다.국민을 존경한다고 말씀하시며, 이제 그 무거운 직을 내려놓으려 하신다. `국민 대통합`, `창조 경제`, `문화 융성`을 외치시던, 그리하여 “단 한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 오신 분이, 이제 퇴진을 말씀하신다니 늦은 감이 있지만 참 다행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는 분이, 그럼에도 스스로 내려오지는 않고, 국회에게 맡긴 것이 찜찜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다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참 다행스럽다. 그와 더불어 총화, 융화, 통합과 같은 낡은 말들도 함께 쓸려가길 바란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2-02

물구나무 선 가을 - 가을과 홍상수의 영화에 대해

이 예민한 상황에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감독 홍상수의 이혼조정 신청이 이슈가 되고 있나보다. 중년의 감독이 낯선 여자를 만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는 내용의 영화를 무던히도 찍더니, 이제 홍상수는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삶을 살려고 하나보다.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니까. 홍상수의 영화는 실제로 그런지 아니면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개가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에 있는 느낌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십 대에 내가 느꼈던 낯설면서 낯익은 정체모를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20대 전체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도 공부도 연애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집 앞 카페를 찾았던 그 날, 사람이 다니는 길 쪽의 넓은 창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고 비스듬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오기엔 너무 이르고, 비가 오기엔 너무 찬 그런 날, 그런 오후였다. 그때 형이 내 옆을 지나갔다. 밖에서 보는 형은 집에서 보던 형과는 달랐다. 나보다 더 궂긴 얼굴을 하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차마 형을 불러 세우지 못했다. 그날 형이 낯설게 느껴졌던 건, 그가 집에서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형이 나처럼 고뇌하고 나처럼 젊음을 헤쳐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동질감보다는 일종의 배신감을 같은 것을 느꼈다.홍상수 영화는 낯선 공간을 낯익은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를테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화성행궁, `옥희의 영화`의 아차산,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남한산성, `우리 선희`의 창경궁, `북촌방향`의 북촌 등 홍상수가 배경으로 삼는 공간은 모두 다르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모두가 같다. 그래서 낯선 공간은 낯익어지고, 그런 낯선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낯익음 때문에 낯설어진다.나는 이것이 불만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화성행궁은 나에게는 매우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20대의 끄트머리에서 무엇이든 실패했고, 수원에 있던 친구의 집으로 도피하여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화성행궁을 배회하며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홍상수는 영화를 찍기 위해 일부러 수원을 찾아 화성행궁을 영화의 중심배경으로 삼은 주제에, 이것이 가진 세월의 두께와 의장을 걷어내고, `그저 그렇고 그런 곳`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 때문에 화성행궁이 더 낯설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느낀 것은 낯섦이 아니라 모욕감인지도 모르겠다.홍상수는 늘 이런 식으로 맨 얼굴을 들이민다. 그래서 한동안 그의 영화가 불편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사람을 웃기게 만드는 재주가 있긴 하지만, 그 웃음을 유발하는 어이없는 행동은 다름 아닌 나의 행동이었고, 내가 알던 누군가의 행동이었다. 처음 본 여자 앞에서 눈물을 짜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함춘수(정재영)는 나였고, 프라이버시를 콕콕 집어내어 상대를 민망하게 만든 방수영(최화정)은 너였으며, 그런 낯 뜨거운 질문 앞에서도 낯 두껍게 앉아있던 함춘수는 그였다.사건 속에 있을 땐 그 기만과 허위를 몰랐는데,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었고, 그 가소로운 말에 속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홍상수는 그런 나를 사건의 바깥으로 끌고 나와, 허망과 기망을 기어이 보게 만들고, 그런 것들의 실체를 알게 만든다. 홍상수는 나의 삶이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내 귀에 속삭인다. 그러니 불편할 밖에.▲ 공강일 서울대 강사하지만 언제부턴가, 정확히는 `우리 선희` 이후부터, 그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애잔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만과 허위가, 살아가고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홍상수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거개가 영화감독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때 탁월한 영화를 만들었고, 대단한 열정을 가졌고,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뜨거움이 식어버린 뒤, 그들은 과거를 껍질처럼 뒤집어쓰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때로, 그 열정 가득한 삶 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척하며, 슬픈 척하며, 방황하는 척한다. 그것이 `척`이라는 것을 자신도 알겠지만, 그것을 `척`이라고 인정해버리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들은 살아내기 위해 더욱 진지하고 의욕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연기한다. 그러다보면 자신까지 감쪽같이 속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의 과장과 과시는 웃기기보다 슬프다.“내 귀는 소라껍질 /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고 노래했던 시인이 콕토였던가. 홍상수의 등장인물은 화석처럼 굳은 과거의 껍질을 집어 들고, 이글거리는 과거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사이 눈이 내려 그들이 걸어온 길이 하얗게 덮이고 있다. 그들도 우리도 왔던 길로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25

그 많았던 분노들

▲ 공강일 서울대 강사시청을 지나가는 버스인데, 시청엘 가려면 지하철을 타라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역에 내렸다. 지하철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빡빡하다. 지하철은 배가 터질 듯 사람을 태우고, 겨우 한 정거장을 지나쳐 배가 홀쭉해진다. 시청역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데만 10분이 넘게 걸린다. 두 시간 전에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전화를 주신 부모님은 연락두절이다. 농민회 분들과 행진 중이려나?사람들과 함께 떠밀리고 있다. 정말 이렇게 많은 인파라니, 사람의 파도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나는 분명 흐르고 있다. 평소 같으면 아무리 천천히 가도 1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한 시간을 넘게 걷고 있다. 핸드폰은 울리긴 하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참 이런 일이 다 있다. 2016년 11월 12일. 하야시키기 딱 좋은 날씨에, 하야시키기 딱 좋을 만큼 사람들이 모였다.불과 몇 달, 아니 몇 달이 뭐야, 정확히 10월 셋째주까지도 대통령의 지지율은 25%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4일 JTBC의 결정적 한 방, 대통령의 연설문을 최순실이 고친 정황이 보도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대통령이 다음날 바로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주일이 안 가서 다시 두 번째 사과를 했지만, 국민은 사과든 죽창이든 닥치는 대로 던질 기세였다. 우리 옆집 아저씨의 지지율을 조사해도 대통령의 그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100명 중에서 5명이라니. 이 정도면 가문의 수치라 해야 옳겠지만, 정작 수치심을 느낀 건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종로에서 서대문까지 최저 25만에서 최대 130만명이 모였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엔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이 있었다. 대통령님께서 국민대통합을 그렇게 입버릇처럼 되뇌더니, 이 어려운 때에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해내신다. 참 대단하다.그런데 찬물을 끼얹어 미안하지만, 이 사건을 조금더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그동안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행한 아주 미미한 악행에 지나지 않는다. 4대강 사업과 녹조, 2014년 4월 17일 세월호, 2015년 6월의 메르스 등에 비하면 말이다. 국민의 직접적인 안전과 생명이 직결된 일에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았나?세월호 참사로 295명이, 그것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장되었고 아직도 9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에는 화내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교통사고로 한 해 4천명 이상이 죽는다며, 세월호도 그런 교통사고 중 하나라고 말하는 파렴치한 정부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더니, 겨우 이 따위 일에 온 나라가 난리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순실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겨우 연설문 고친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어떻게 세월호와 교통사고가 같을 수 있겠어요. 생각 좀 해보세요. 배가 침몰하고 있었어요. 해경이 선원과 선장들은 다 구하고 학생들은 구하지 않았다고요. 배에서 나오라고 말만 했어도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정말 구해주지 않았다구요. 보다 못한 국민들이 온갖 대책을 다 내놓았는데 정부는 듣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냥 그 어린 아이들이 수장되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지켜봐야 했어요. 아시겠어요? 정부가 저들을 고의로 수장시킬 때 그걸 지켜본 우리 역시 공범이라는 걸 말입니다. 우리는 중 그 누구도 천국에 가진 못할 겁니다.) 메르스가 생떼 같은 서른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었나? 국가와 병원이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해서 병을 고치러 간 병원에서 병에 옮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왜 우리는 분노하지 않았나? 독감에 걸려 죽는 사람이 한 해 300명이 된다고 떠벌리는 저 벌레만도 못한 정부와 여당의 정치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하더니 말이다. 우리는 작은 일에만 분개한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의 일에 대해서만 분노하고, 분노해야 할 대상이 명확해야만 분노한다. 그래서 이제 그 분노가 목표와 방향을 찾은 것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그런데 걱정이다. 저 많은 죄인들 중 단 한 명만 처벌해도 이 많은 국민들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아서 말이다. 세월호 선장에게 무기징역을 때리고, 누가 봐도 아닐 것 같은 유병언의 시체를 찾은 것만으로도 우리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던가.대통령을 비롯한 저 확신범들이 유유히 사라지고 나면, 억울하게 죽은 세월호, 메르스의 희생자들은 누가 어떻게 달래주나. 우리는 또 이 분노를 어떻게 삼켜야 하나.※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18

우주의 어둠과 글쓰기의 밀도

▲ 공강일 서울대 강사학생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시작할 때면,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각오로 써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정작 나는 그렇게 못 쓰지만, 학생들이 나 대신으로라도 이런 글을 써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 이야기는 우주의 어둠으로부터 시작한다. 우주에는 숱한 별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은하가 존재하며, 또 태양과 같은 행성이 은하 속에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주엔 태양과 같이 빛을 뿜어내는 별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빛들에 의해 밤도 낮처럼 환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밤하늘은 어두운 것일까?이 문제는 1820년대에 활동했던 독일인 물리학자 올버스 혹은 올베르스(Heinrich Wilhelm Olbers)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올베르스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올베르스 역시 나름의 답을 내 놓았는데, 먼지와 가스층이 빛을 모두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다른 행성이 내는 열과 빛을 먼지와 가스층이 흡수하고 있다면, 이러한 먼지와 가스층 역시 빛을 방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열역학 제1법칙이 말해주듯 에너지는 보존되기 마련이며 그렇게 흡수된 빛은 어떤 식으로든 방출될 수밖에 없다. 결국 먼지와 가스층이 빛을 흡수한다고 해도 거기에 방출된 빛에 의해 밤하늘은 밝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제대로 된 답일 수 없다.이 문제에 해법의 실마리를 던져 준 사람은 물리학자도 그렇다고 과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밤하늘의 신비에 매료되었던 애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였다.“별들이 끝없이 나열되어 있다면 밤하늘은 눈부시게 빛나야 한다.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별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공간의 대부분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멀리 있는 천체로부터 방출된 빛이 아직 우리의 눈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유레카`, 1848포는 이런 답변을 내놓고 자신의 아이디어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틀렸을 리가 없다”고 당차게 말했다. 저 오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실제로도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방출된 빛이 왜 우리의 눈에 도달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정도. 대부분의 어려운 문제가 그러하듯 이러한 문제는 인식의 지층에서 몇 발자국만 벗어나도 금방 답을 얻을 수 있다.180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우주가 무한히 넓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균일하게 퍼져 있는 정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나 균일한 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태양과 같이 빛을 내는 별들 역시 균일하게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구가 태양을 등지고 있는 밤중에도 다른 항성이 내는 빛에 의해 밤하늘은 밝아야 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인식에 가로막혀 과학자들은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포는 사유를 통해, 글쓰기를 통해, 당대적 인식을 무참히 깨뜨려버렸던 것이다. “천체로부터 방출된 빛이 아직 우리의 눈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 속에는 빛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조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대의 우주관을 완전히 뒤집는 인식이다. 왜냐하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우주가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동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무한한 우주가 아닌 분명히 한계를 가지는 유한한 우주를 사유하게 되었다.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멀어지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니 행성의 빛은 멀어지는 우주공간 속에서 영원히 지구를 향해 달려오고 끝끝내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포는 이러한 사실의 언저리에 비슷하게 가닿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유가 가능했던 것일까? 오로지 언어로. 포는 언어가 만드는 아름다움에만 빠져 있었기 때문에 통념이나 상식이라는 인식 너머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가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밀고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통 `미쳤다`고 말하는 그 상태 말이다. 글쓰기는 인식 내부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바깥을 지향한다. 그것이 글 쓰는 자의 윤리이며 존재론적 사명이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법, 도덕, 윤리, 나아가 사실이라고 불리는 것들까지도 넘어서는 일, 가로막힌 인식을 문장과 문단을 이용해 도약하는 일, 그것이 글쓰기의 `허리`이며, 글쓰기의 `자궁`이다. 이런 글쓰기가 아니라면 무엇 하러 글쓰기를 감행한단 말인가.※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11

나라가 난리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한 여자 때문에 나라가 난리다. 아니 둘? 그것도 아니면 셋? 미국의 대선주자이자 막말의 대가인 트럼프가 “여자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 대통령을 보라”고 일갈했다는 루머까지 떠돌았다. 여성 비하나 일삼는 인간에게 이런 말을 들으려니 죽을 맛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트럼프까지 당선시킬 기세라며 극보수 단체 사이트에서도 비아냥거린다.주말에는 전국적으로 5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있었다. 비록 가진 못했지만, 여러 보도와 사진을 통해 그 현장이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때도 그랬다. 광화문은 거대한 군중의 가장행렬장이었다. 유모차를 몰고 나온 엄마부대, “2MB USB를 찾습니다”와 같은 피켓, 그리고 제대로 놀란 정부가 보여준 명박산성까지….이번 시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나보다. 하야, 탄핵, 퇴진 이런 팻말이 거개였지만,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곳곳에서 넘쳐났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퇴하세요.”, “간절히 빌면 온 우주가 하야를 돕는다”는 플래카드는 그나마 점잖은 축에 속했다. 잠시지만 광화문 교차로 중간에 단두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최순실이 대통령을 꼭두각시처럼 조정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한 그룹은 “대통령직을 사퇴하겠습니다”라는 가상 기자회견을 선보였다. `순siri`, `ㄹ혜`, `유라`라는 이름표를 달고 등장한 이들은 그 이름에 해당하는 가면을 썼다.(siri는 `실`이며 `ㄹ`은 자세히 보면 `근`의 축약이다.) `유라`는 가면 대신 “이모~ 잘 좀 끌어봐.”라는 말풍선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을 탔다. 그런가하면 “이게 나라입니까?”라는 현수막으로 무대를 꾸미고, 살풀이 복장으로 “시굿선언” 퍼포먼스를 펼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여기엔 선녀 코스튬을 한 팔선녀도 함께했다.주최가 있고, 그들에 따라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런 집회를 생각했다면, 글쎄?그런 시위는 애저녁에 사라진 게 아닐까. 참여자들은 한 곳에 모였을 뿐, 생각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다. 이들의 배후에는 종북세력도 없고, 불순세력도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뿐이다. 언젠가 한 시인은 이렇게 썼다.… 전략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중략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말없이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송경동 `사소한 물음에 답함` 2008년 `광우병 사태`가 잠잠해진 뒤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다고 정부는 여론몰이를 했지만 여지껏 불순세력을 찾아내진 못했다. 그런데도 이 사태는 `광우뻥 파동`이니 `광우병 난동`으로 불리곤 한다. 거기엔 정말이지 배후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었다. 정부가 국민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국민의 안위 따위는 신경도 안 쓴 채 조약을 체결한, 대통령에 대한 분노, 그건 순수한 분노였다. 배후가 있다면, 무리한 조약을 체결한 정부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자 국민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국민의 분노는 잦아들었지만, 문제의 본질, “30개월 미만 및 30개월 이상의 미국쇠고기를 수입한다는 쇠고기협상”은 바뀌지 않았다. 통렬히 반성했던 대통령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배후를 찾겠다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 우리 역시 광화문에 나갔다는 사실조차 지워버리고 불순세력에게 선동당한 일부 몰지각한 국민들이 벌인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국민의 분노는 무섭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이어서 이내 사라지고 만다. 철지난 `광우병 촛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금`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해 국민은 수치와 분노를 느끼고 있다. 감정은 한낱 감정이어서 사태의 심각성이나 본질을 망각할 때가 많다. 이 사태의 본질은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이며, 그 대안은 관련자들, 그리고 이를 방조한 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다.어쩌면 우리는 또 다시 핵심을 놓쳐버리고 분노했던 이유조차 잊어버릴지 모른다. 그건 감정이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권력을 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더 멀리 뛰기 위해 개구리가 움츠리듯 이들은 지금 웅크리고 있다. 이 사태를 얼렁뚱땅 견뎌내고 더 견고한 방식으로 탄압과 배후색출을 감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는 안녕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안녕은 집이나 술자리가 아니라 저기 거리와 광장에 있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1-04

“힌 선 밑으로 차 바치지 마세요”에 대해

`정확한 문장쓰기` 수업에서 쓰려고 찍어두었다. 이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나는,`쓴 자`의 교육수준과 그 이기심에 대해 이야기했고, 문장 속에는 너희의 치부와 너희의 인격이 드러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 고 이빨을 까며 젠체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었던 곳을 다시 지나며 저 글을 `쓴 이`가 아닌 나의 성급함과 무지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의 성급함과 무지는 오독에서 비롯한다. 나는 `흰 선 밑으로 내 차를 댈 테다`라고 읽었다. 정확한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무식할 뿐만 아니라 이기심 많은 인간이라는 나의 선입견과 독선이 이러한 오독을 낳은 것이리라. 사진에는 잘 나와 있지 않으나, `힌 선 밑`은 빌라의 현관이다. 흰 선 아래에 차를 대면 입주자들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 흰 선 위로 차를 주차해달라는 뜻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쓴 이는 설령 배운 것이 없을는지는 몰라도 입주자와 차주인 모두를 배려하는 인격자일 것이다.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비방했던 것을 반성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신원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이 글을 쓴다.우선 정체가 모호한 `바치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문맥을 고려할 때) “바치지”가 `주/정차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단어의 기본형은 `바치다`일 수는 없다. `바치다`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다”와 같이 정중하게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로 쓰이거나, “술을 바치다”와 같이 주접스럽게 무언가를 좋아하다는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치지`의 기본형을 `바치다`로 보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그렇다면 `바치지`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 `받침목(돌)`은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다. 받침목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은 그리 멀지 않다. 1985년 경향신문에서는 “오늘 아침 승용차 바퀴 받침목 빼내자 `꽝`”이라는 기사가 실렸으며, 1998년 12월 9일자 매일경제에는 “또 차량이 어떠한 경우에도 저절로 굴러가지 않도록 바퀴 밑에 받침목이나 받침돌을 괴어놓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게는 저 혼자서 서 있을 수 없기에 받쳐야 할 작대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그것을 신뢰할 수 없었던 시절 차에는 `받침목(돌)`이 있어야 제대로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동안 사람들은 지게를 받치듯, 차를 받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를 받친다`는 말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말일 것이며, 또 시대의 변화와 함께 이 말은 사라져갔을 것이다.어찌되었던 “바치지”가 `받치지` 즉 `주/정차하지`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글을 쓴 사람의 나이다. `주차`라는 말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은 자가용의 보급과 함께이다. 1975년 포니의 출시와 함께 1987까지 주차라는 단어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신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단어의 빈도가 갑작스럽게 많아진 것은 1988년 이후로, 이때부터는 신문에서 거의 매일 `주차`라는 단어를 볼 수 있게 된다. `주차`라는 단어의 대중화는 1985년 액셀, 1986년 프라이드와 르망, 1988년 쏘나타와 같은 차량이 출시되고 이것이 대량 소비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따라서 이 문장을 쓴 이가 `주차`보다는 `차를 받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며, 1980년대 후반부터 일상화되기 시작한 `주차`라는 단어를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저 글을 쓴 사람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마시오`가 아닌 `마세요`를 썼다는 것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시오`는 격식을 갖춘 말로 구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상대를 높이는 존칭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낮추지 않으면서 상대를 높이는 특이한 형태의 높임이다. 그래서 `마시오`는 단호하다. 이와 달리 `마세요`는 상대를 더 높이면서 거추장스러운 격식을 벗어던진다. 격식에서 벗어난 “마세요”는 차주인에게 단호하게 `호소`하기보다 정감 있게 `부탁`한다. 그가 사용한 `시오`와 `세요`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김연수의 소설을 일절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낫겠다.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짜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김연수, `내가 아이였을 때`, 74면).그렇다. “마세요”는 “아니겠느냐”처럼 읽는 사람을 배려하여 단정적인 말하기를 피한다. 이 말들은 완곡하며 또한 부드럽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인격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0-28

해머링 맨 시민광장과 정지의 시간

오늘은 광화문에서 영화를 보았다. 가을은 거리에 즐비하다. 바스러지는 가을을 밟으며 쌀쌀하진 거리를 걷는다. `해머링 맨 시민광장`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2008년 8월 `도시를 작품으로 만드는 데 도전하는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시민광장에는 브롭스키가 만든 22m 높이의 `해머링 맨`과 네덜란드 건축그룹 매카누에 만들어진 `강 같은 길`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시는 이 광장의 취지가 “시민들이 도심에서 편히 쉬면서 해머링 맨과 주변 도시경관을 향유”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이곳에서 어떤 기갈과 어떤 위안을 느낀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 `해머링 맨`: 가 닿을 수 없음`해머링 맨`은 높이 22m에 50t의 무게를 자랑하는 압도적인 조형물이다. 다른 조형물과 달리 이것은 움직인다. 한번 왕복할 때마다 77초가량의 시간이 소요되며 하루에 약 660번 망치질을 한다. 그러나 해머링 맨의 그 숱한 망치질 속에서 오른손은 단 한 번도 왼손에 가 닿지 않는다. 해머링 맨은 입체적이지만, 그 망치질은 이차원적이어서 늘 오른손은 왼손을 비껴지나 간다. 닿을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하게 들리지만, 그 의미는 중층적이다. 해머링 맨의 오른손이 왼손에 가 닿을 수 없듯이 화이트 칼라의 노동은 육체적 노동에 닿을 수 없다. 이러한 노동의 이질성을 해머링 맨은 등질화시킨다. 회사원들은 퇴근 후 해머링 맨을 지날 때, 땀을 흘리지 않고도 땀을 흘린 듯한 기갈을 느끼며, 그 기갈을 채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즐비한 술집으로 들어가 단숨에 맥주를 들이킨다.이러한 목마름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의 분업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자신이 만드는 상품의 제작과정, 유통 등과 같은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리된다고 했다. 이것이 `소외(alienation)`다. 이러한 소외현상은 오늘날 공장노동자보다 오히려 사무직 노동자에게 더 직접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무직 노동자의 일은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숱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직조된 비물질적 덩어리며,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노동자는 그 연속성을 감각할 수 없다. 이러한 노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메커니즘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일할 시간은 있지만, 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다. 시간과 함께 일은 쌓인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해머링 맨의 망치질이 왼손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노동자는 그들의 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일의 쓰임 역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퇴근 뒤 엄습하는 목마름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 같은 길`:가 닿을 수 있음그렇다면 이 기갈은 해소 가능한 것일까. 오른손의 망치가 왼손에 가 닿기 위해서는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 오른손이 왼손에 가 닿기 위한 모험, 차원과 차원을 건너뛰려는 이 무모함을 혁명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윈스턴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조지 오웰, `1984` 중)해머링 맨의 망치질처럼, 우리는 우리의 일의 사용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 한다. 우리의 일을 알 때까지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의 일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해머링 맨은 이 시대의 비극적 축도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혁명은 불가능하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거기에 메카누의 강 같은 길이 길게 누워 우리를 위무하고 있다. 강 같은 길이라고는 했으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거대한 짐승의 등뼈다. 직립한 인간의 등뼈가 아닌 네 발 짐승의 구부정한 등뼈, 이것은 파괴된 것처럼 보이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 유유히 흐른다. 저 구부정한 등뼈에 올라 사족보행을 했던 유구한 과거를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을 꼭 도피나 회피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혁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닐 테니 말이다. 추억하기를 연습하는 일, 회사에서든, 현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추억에 잠기는 그 정지의 순간, 거기에 혁명이 웅크리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0-21

최초의 사진에 대해

▲ 공강일 서울대 강사사진 그까이 것 대충 셔터만 퍽퍽 누르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참 막돼먹은 생각이다. 사진이라는 것이 참 오묘해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야 아, 이렇게도 한 번 찍어볼 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이 후회의 뒤늦음을 좀체 앞지를 수 없다. 세상에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절로 느끼게 된다. 사진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다. 사진은 태동부터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최초의 사진`과 `인간의 형상이 찍힌 최초의 사진`에 대해서 말이다. △최초의 사진1827년 니에프스(Joseph-Nicephore Niepce)는 최초의 사진을 찍었다. 무려 8시간에 걸쳐 찍었지만, 현상된 것은 작업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비둘기 집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벽과 바닥이 전부였다. 그는 더 선명한 사진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1833년 68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사진기를 발명하는 업적을 세웠음에도 니에프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사진기에 대한 반감과 불만의 목소리가 커져 갔다. 그가 최초의 사진을 찍은 지 근 100년이 흐른 후에도 라이프치히 신문(Leipziger Zeitung)의 한 칼럼은 하나님이 만든 자연을 똑같이 모방하는 기계는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곧 신성모독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이 신문의 비난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사진기란 정말 마법과도 같은 장치다. 직접 그리지 않고 스스로 그려지는 장치!(여러분은 이런 사진기가 신비롭지 않으신가요?) 이런 것을 최초로 생각한 니에프스는 아무도 시도한 적 없고, 아무도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일에 매몰되어 고독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얼마나 많은 실패 속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던 것일까. 그는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하며 손가락질 하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비록 그것이 몰락이라 할지라도 그런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는 사진기를 발명하겠다는 노력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지만 그의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끝내 몰락했고, 그에게 영광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니에프스가 찍은 최초의 사진은 그가 느낀 절망감만큼이나 어둡고 우울하다.△인간의 형상이 등장하는 최초의 사진니에프스가 최초의 사진을 찍었다면 다게르(Louis-Jacques Mande Daguerre)는 인간의 형상이 등장하는 최초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사진을 찍은 곳은 레퓌블리크 광장에서부터 파들루 광장에 이르는 405m가량의 탕플대로(Boulevard du Temple)였다. 이 대로는 18세기부터 이 세기가 저물 때까지 유행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수많은 카페와 극장이 있었고 사람들과 마차로 즐비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다게르가 찍은 사진 속에는 군중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군중을 찍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사진기술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진은 은판을 필름으로 사용하였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은반지, 은수저와 같은 것들을 오래 사용하다보면 탄 것처럼 검게 변한다. 그 이유는 은이 빛에 민감해서 쉽게 부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감광현상(感光. photosensitization)이라 한다. 은의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사진이라는 것을 발명하긴 했지만 움직이는 것을 찍기엔 그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은판을 빛에 2~3분가량 노출시켜야 겨우 사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게르가 이 사진을 찍을 때 움직이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구두를 닦기 위해 구두닦이의 발판에 발을 얹고 있었다. 인류 최초로 찍힌 인간의 모습이 겨우 구두 닦는 모습이라니…. `웃프다`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있는 말인 것 같다. 철학자 아감벤은 이 사진을 위해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주석을 달았다.“최고의 순간에, 사람들에게는, 각자에게는 자신의 가장 소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몸짓이 영원히 주어진다. 그렇지만 사진기 렌즈 덕분에 그 몸짓은 이제 삶 전체의 무게를 지게 된다. 저 대수롭지 않고 무의미하기까지 한 자세에 존재의 의미 전체가 모이고 응축되는 것이다”(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김상운 옮김. 난장, 2010. 35면).구두를 닦는 남자의 모습은 분명 사소하고 무의미하게 보인다. 그러면 이렇게 묻자. 의미 있는 몸짓이란 어떤 것인가? 의미라고 불리는 것은 우리가 부과한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하다면 무의미란 우리가 아직 부과하지 못한 가치다. 그런 점에서 무의미는 뒤늦은 후회처럼 찾아오는 의미의 미래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0-14

소년의 단단한 고요함

황순원의`소나기`의 중심인물은 이름이 없다. 소년, 소녀로 불린다. 황순원은 이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것처럼 이들을 휘감고 있는 것은 감정 상태도 명명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수록된 교과서는 이것을 “사랑”이라 가르친다. 정말 그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소녀가 징검다리에서 소년을 기다렸다고 해서,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는 소년에게 `바보`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런 소녀를 만날 수 있길 소년이 바랐다고 해서 소년과 소녀가 사랑하는 걸까? 둘이 함께 산에 올랐다고 해서, 소년이 소녀를 위해 꽃을 꺾어왔다고 해서, 소나기를 피해 수숫단 속에서 비를 그었다고 해서, 소년이 소녀를 업고 도랑을 건넜다고 해서, 소녀가 죽기 전 검붉은 물이 든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달라고 했다고 해서,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소년과 소녀는 매우 복잡하고, 야릇하고, 미묘하고, 그래서 여리고 연약한 어떤 상태를 헤매고 있다. 이 상태에 비해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무겁고, 너무 분명한 말이다. 분명 손을 내밀거나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이 감정을 움켜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감정이 손아귀에서 아스라질지도 모르며, `사랑해`라고 말할 때 뿜어져 나오는 입김에 이 감정이 공기 중으로 흩날릴지도 모른다. 소년과 소녀는 조심스러워 감히 말조차 할 수 없다. 아니 지금 이 상태만으로도 충만해서 더는 욕심을 낼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요즘 세대들이 말하는`썸`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썸`이라는 말은 어쩐지 가볍고 얇고 장난스럽게 느껴져 소년과 소녀가 함께 앓고 있는 이 감정에 딱 맞는 말 같지는 않다. 소년과 소녀는 한없이 가벼우면서 동시에 한없이 무거운 상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이 소설이 게재된 것은 1952년,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래서 평자들은 이 소설을 순수소설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쟁을 반대하는 다른 어떤 소설보다 효과적으로 반전을 말한다는 점에서 목적성을 가지며, 전쟁과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이런 소설을 가졌다는 것은 참 행운이다.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내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장면은 사실 이것이다.이 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갔다.낮에 봐 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봐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돌아오는 길에는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아시겠지만 가을에는 호두가 익는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친구는 호두가 나무열매라는 사실에 놀란다. 아니 왜? 그렇게 단단하고 누르스름한 껍질을 가진 호두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나? 그도 그럴 것이 시중에서 파는 호두는 녹색의 외과피가 없기 때문에 그 매달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호두를 `호두송이`라 부르는 것은 마치 밤송이처럼 외과피를 포함하고 있어서다.황순원도 도시 사람인지, 아니면 양반집 도련님이었는지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깐 일은 없나보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까면 `옴`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녹색물이 손에 배어 싯누렇게 된다. 날씨가 추워지면 외과피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데 이것을 `히디기 돈다`고 한다. 아이들은 히디기가 돌기 전부터 호두를 따서는 돌에 껍질을 갈아 그 알맹이를 빼먹는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손이 싯누렇다 못해 호두물이 배어 시꺼멓게 변한 손을 꺼내놓았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년의 마음 때문이다.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소년은 호두를 서리한다. 남의 것을 훔친다는 죄책감에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디는 소년의 여린 마음을 나는 사랑한다. 끝내 소녀에게 주지 못한 저 호두는 어떻게 되었을까? 소년은 습관처럼 호두를 만질 것이고 호두는 소년의 손때가 묻어 만질만질해졌을 것이다. 아무리 만져도 만질 수 없는 그리움과 함께 소년은 호두의 내과피처럼 `단단한 고요함`을 배우며 자랄 것이다. 호두의 껍질이 단단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10-07

우울한 날 소설 읽기, 권여선의 `봄밤`

▲ 공강일 서울대 강사아직 가을이 가깝지도 않은데 벌써 멜랑콜리하다. 멜랑콜리! 우울로 번역되는 이 증상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울은 일반적인 슬픔과 달리 이유가 없다. 슬픔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야 그 이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이유 없는 슬픔은 극복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 우울은 갑자기 찾아온다. 삶을 향해 열려 있던 마음이 죽음 쪽으로 불현듯 돌아서는 상태, 그래서 멜랑콜리는 위험하다. 이런 기괴한 기분이 들 때 근거도 없는 슬픔이 엄습할 때 여러분은 무얼 하시는지? 나는 달리기를 한다. 아직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어서 조금은 이 우울을 느껴야겠다. 그래서 오늘은 권여선의 `봄밤`을 다시 읽는다.이 소설은 영경과 수환의 사랑이야기다. 이 중년의 연인은 둘 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영경은 중증 알코올 중독이며, 수환은 중증 류머티즘이다. “급작스럽게 악화될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 질환”을 앓는 이들은 같은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 요양원에서는 이들의 병명의 앞 글자를 따 `알루 커플`이라 부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딱 `신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최루성 멜로라고도 불리는 신파의 특징은, 전반부는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다루고 후반부는 둘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불치병과 같은 우연한 사건으로 죽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의 사랑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후반부의 슬픔은 커진다. 그런데 `봄밤`이 `신파`를 초과하는 부분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모두 불치병으로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간호하며 눈물을 뺄 여유 따위는 애초에 없다. 그들은 둘 다 죽어가며, 그 모습은 처량하기보다는 오히려 웃기다.작가는 말도 안 되는 이 우연을, 너무도 소설 같은 이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결말부터 말하자면 수환은 죽고 영경은 알코올성 치매에 걸린다. 이상한 점은 수환이 죽을 때까지 혹은 영경이 알콜성 치매에 걸릴 때까지 이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들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이상하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아야 한다.영경은 이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이를 시부모에게 빼앗겼으며, 수환은 아내에게 배신당해 모든 재산을 잃었다. 이들은 만나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고, 살아갈 의욕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었으니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이들이 사랑의 힘으로 서로 함께 위로해 가며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소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수환은 영경이 술을 마시는 것을 말리지 않으며 영경은 수환과 함께 회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수환은 영경이 술을 잘 마실 수 있도록, 자신을 걱정하지 않고 술을 잘 마실 수 있도록 아픔을 감춘다. 독한 주사를 맞으면서까지 고통을 숨긴다. 이것이 수환이 말하는 `선물`의 의미일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선물은 선물을 받는 사람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롤랑 바르트가 선물을 물신(fetish)라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수환의 선물은 긍정적인 의미의 `선물`이다. 하느님이 대가 없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은총에 상응하는 그러한 `선물`이다. 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을 위한 `선물`을 준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핵심에는 행복이 아니라 허무가 놓여 있으며,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 놓여 있다. 여기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사랑`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처럼 고귀한 사람이 파국에 이끌릴 때 카타르시스가 극대화 되듯이 최루성 멜로에서는 연인들의 사랑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공감능력이 더 커진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행복한 연애담은 없다. 이 소설은 일관되게 주어진 죽음을 완성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서로가 잘 죽을 수 있도록, 서로의 아픔이나 고통이 모두 소진될 수 있도록,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그런 것들을 모두 사용하고 죽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와준다. 수환과 영경은 서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죽어가기 위해서 만났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럽다하더라도 그 죽음을 최대한 지연시킨다. 그것은 곧 삶에 주어지는 폭력을 모두 소진시키는 일이다. 안락사는 죽음의 당사자보다는 이를 지켜보는 산 자들에 의해 요구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 이것이 이들의 사랑의 방식이다. 최루성 멜로의 경우 병에 걸린 사람은 간호하는 연인을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며, 간호하는 사람은 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므로 빨기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고통을 모두 앓고 가라고 돕는다. 수환과 영경의 죽음은 절제되고 자제되어야 하며 서둘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 된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