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을이 가깝지도 않은데 벌써 멜랑콜리하다. 멜랑콜리! 우울로 번역되는 이 증상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울은 일반적인 슬픔과 달리 이유가 없다. 슬픔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야 그 이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이유 없는 슬픔은 극복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 우울은 갑자기 찾아온다. 삶을 향해 열려 있던 마음이 죽음 쪽으로 불현듯 돌아서는 상태, 그래서 멜랑콜리는 위험하다. 이런 기괴한 기분이 들 때 근거도 없는 슬픔이 엄습할 때 여러분은 무얼 하시는지? 나는 달리기를 한다. 아직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어서 조금은 이 우울을 느껴야겠다. 그래서 오늘은 권여선의 `봄밤`을 다시 읽는다.
이 소설은 영경과 수환의 사랑이야기다. 이 중년의 연인은 둘 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영경은 중증 알코올 중독이며, 수환은 중증 류머티즘이다. “급작스럽게 악화될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 질환”을 앓는 이들은 같은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 요양원에서는 이들의 병명의 앞 글자를 따 `알루 커플`이라 부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딱 `신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최루성 멜로라고도 불리는 신파의 특징은, 전반부는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다루고 후반부는 둘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불치병과 같은 우연한 사건으로 죽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의 사랑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후반부의 슬픔은 커진다. 그런데 `봄밤`이 `신파`를 초과하는 부분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모두 불치병으로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간호하며 눈물을 뺄 여유 따위는 애초에 없다. 그들은 둘 다 죽어가며, 그 모습은 처량하기보다는 오히려 웃기다.
작가는 말도 안 되는 이 우연을, 너무도 소설 같은 이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결말부터 말하자면 수환은 죽고 영경은 알코올성 치매에 걸린다. 이상한 점은 수환이 죽을 때까지 혹은 영경이 알콜성 치매에 걸릴 때까지 이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들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이상하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경은 이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이를 시부모에게 빼앗겼으며, 수환은 아내에게 배신당해 모든 재산을 잃었다. 이들은 만나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고, 살아갈 의욕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었으니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이들이 사랑의 힘으로 서로 함께 위로해 가며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소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수환은 영경이 술을 마시는 것을 말리지 않으며 영경은 수환과 함께 회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수환은 영경이 술을 잘 마실 수 있도록, 자신을 걱정하지 않고 술을 잘 마실 수 있도록 아픔을 감춘다. 독한 주사를 맞으면서까지 고통을 숨긴다. 이것이 수환이 말하는 `선물`의 의미일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선물은 선물을 받는 사람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롤랑 바르트가 선물을 물신(fetish)라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수환의 선물은 긍정적인 의미의 `선물`이다. 하느님이 대가 없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은총에 상응하는 그러한 `선물`이다. 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을 위한 `선물`을 준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핵심에는 행복이 아니라 허무가 놓여 있으며,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 놓여 있다. 여기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사랑`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처럼 고귀한 사람이 파국에 이끌릴 때 카타르시스가 극대화 되듯이 최루성 멜로에서는 연인들의 사랑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공감능력이 더 커진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행복한 연애담은 없다. 이 소설은 일관되게 주어진 죽음을 완성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서로가 잘 죽을 수 있도록, 서로의 아픔이나 고통이 모두 소진될 수 있도록,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그런 것들을 모두 사용하고 죽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와준다.
수환과 영경은 서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죽어가기 위해서 만났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럽다하더라도 그 죽음을 최대한 지연시킨다. 그것은 곧 삶에 주어지는 폭력을 모두 소진시키는 일이다. 안락사는 죽음의 당사자보다는 이를 지켜보는 산 자들에 의해 요구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 이것이 이들의 사랑의 방식이다. 최루성 멜로의 경우 병에 걸린 사람은 간호하는 연인을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며, 간호하는 사람은 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므로 빨기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고통을 모두 앓고 가라고 돕는다. 수환과 영경의 죽음은 절제되고 자제되어야 하며 서둘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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