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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언어라는 불투명한 거울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대중매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러한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가치관 및 자아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 때 사람들이 접하는 매체들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 형태에 따라 보고 듣는 이의 사고에 막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즉, 어떤 단어나 어떤 표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문구를 접한 사람들의 사고의 방향이 무의식중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대중 매체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언어와 사유(여기서는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한 내용, 사물에 대한 느낌, 기억, 추상적 사고 등을 모두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간주한다)의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첫 번째 관점은 우리가 이미 전(前)언어적으로 이해한 어떤 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 언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유가 언어에 선행한다. (정확히는 사물이나 사태로 이루어진 세계→이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이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언어의 순서일 것이다)우리가 자신의 생각에 맞는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려고 애를 쓸 때, 새로운 물건이나 세태를 표현하려고 신조어를 만들 때, 사유는 언어에 앞서 이미 존재한다. 그리고 이때 언어는 사유를 전달하는 매체일 뿐이며 사유의 내용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그러나 두 번째 관점 즉 언어가 사유를 규정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스펙트럼인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깔로 지각하는 것은 무지개의 색깔을 일곱 가지로 표현하는 언어의 영향 때문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남녀차별적인 생각을 가졌던 근본적 이유도 그들의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역사와 전통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전술한 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 할 때나 신조어를 만들 때에도 우리는 ‘다른 단어들을 가지고’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television이라는 신조어도 tele라는 접두사와 vision이라는 명사의 합성어이다.)즉,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 느낌, 사유는 언어의 틀 속에서 세계를 해석한 결과물이다. 갓난아이들처럼 언어라는 매체 없이 바라보는 세상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무지개의 색깔처럼 미분화된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첫 번째 관점, 즉 사유와 언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에 따르면 언어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의식이 이 세계를 맑고 굴곡 없는 거울처럼 비출 수 있다.가령 무지개를 바라볼 때 무지개가 가지는 스펙트럼이 우리의 의식에 그대로 반영될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언어는 사고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고 언어 역할을 이차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플라톤(Platon), 데카르크(R. Descartes), 로크(J, Locke), 칸트(I. Kant) 등이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그러나 두 번째 관점, 즉 언어와 사유는 분리불가능하며, 나아가 언어에 의해 사유가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언어의 규정을 받으며 이 세계를 해석한다. 언어의 규정을 받는 의식이라는 거울은 일그러지고 불투명한 거울이어서 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의 의식은 스펙트럼 형태의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깔의 무지개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는 우리의 경험 혹은 감각적 지각은 사유에 바로 닿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필터를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사정은 이성적 사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진자운동 또는 낙하법칙이라는 이론(이러한 이론들도 언어로 되어 있어 우리들의 사유를 규정함을 명심하자.)을 가지고 끈에 매달린 돌의 운동을 관찰(엄밀히 말하면 해석)할 수 있을 뿐, 돌의 운동을 굴절되지 않은 형태로 의식 속에 그대로 비출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훔볼트(W.v Humboldt),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등이 있다.미국의 현대철학자 로티(Rorty)는 “우리는 피부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듯이 언어의 바깥으로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라는 안경 없이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며, 언어라는 안경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이상, 렌즈의 굴절률(언어 속에 담긴 편견, 전통 등)로 인해 변형(해석)되지 않은 세상을 인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 언어로부터 해방된 어떤 성찰의 순간이 절대로 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순간이 인생에서 극히 예외적인 순간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만약 여러분도 언어가 사유를 규정한다는 두 번째 관점을 지지한다면, 앞 절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감각적 지각은 물론 이성적 사유조차도 언어의 규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상, 관념과 사실의 완전한 대응을 토대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2019-12-17

허무 속에서 살아가기 - 김훈 ‘칼의 노래’를 읽고

제목을 보았을 때는 ‘이순신’의 화려한 영웅담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박진감 넘치는 전쟁 장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대에 미치는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다. 뚜렷한 줄거리도 없었고, 뚜렷한 사건도 없었다.다만, “오늘도 적은 오지 않았다.”라는 말이 주문처럼 되풀이 되었고, 적은 좀체 오지 않았다. ‘나’의 지리멸렬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책 속으로 마법처럼 빠져들었다. 소설 속에 두텁게 베인 허무와 비관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맺을지 궁금했다. ‘나’가 분명 죽을 것임을 알았음에도 그 끝이 궁금했다.“포탄과 화살이 우박으로 나르는 싸움의 뒷전에서 조선 수군은 머리를 잘랐고 일본 수군은 적의 코를 베었다. 잘려진 머리와 코는 소금에 절여져 상부에 바쳐졌다. 그것이 전과의 증거물이었다. 잘라낸 머리와 코에서 적과 아군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머리를 얻기 위해 코를 얻기 위해 아군과 적군은 싸운다. 피난민들은 다만 얼굴 가운데 코가 있기 때문에 죽었다.”‘나’가 인식하고 있는 전쟁, ‘나’가 생각하는 전투는 ‘부지런히 잡초를 뽑는 농사일’ 과 같다. 전쟁은 잔악하며 참담하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싸울 뿐이며, 서로를 죽일 뿐이다. ‘나’에게 전쟁은 끼니와도 같다.“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그 연장선상에 있는 삶은 다만 허무할 뿐이다. 비 오는 날 면사첩의 면사(免死) 두 글자를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어땠을까?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 않겠다는 것’임을 생각하며, 비 오는 밤을 뒤척이는 ‘나’의 심정은 어땠을까?‘나’를 죽이고 임금에게 갈 적은 동시에 나를 살려주고 있기도 하다. 이 모순, ‘나’가 뒤로 물러나도 앞으로 나아가도 죽음은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다. 결국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인정하고 그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가?“마침내 적의 전체로 맞아야 하는 날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수영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섬 앞 바다가 막힌데 없어서 죽기에 편한 자리였다.”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죽음을 향하여 있음’을 이야기한다. 현존재가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죽음의 알 수 없음, 죽음의 서로 다름은 “고유한 존재 가능성”임을 역설한다.소설 속의 ‘나’는 ‘죽음과 관계 맺은 고유한 존재의 가능성’보다는 죽음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 끊임없이 적의 전체를 기다리며 죽을 장소를 찾고 있다. 장인처럼 죽음을 다듬으며, 그 죽음을 탐닉한다.소설을 읽으며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저 죽음을 떨쳐버리고 조금 더 치열해지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소설 속엔 끝끝내 죽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죽음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나약한 ‘나’ 외에 더 무엇은 없었다.김훈의 거개의 소설들은 삶의 끝자락으로 몰린 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왕명 속에 깃든 것들이 헛것임을 알면서도 그 헛것을 놓지 않는다. 삶은 수많은 헛것으로 이뤄졌더라도 그 헛것을 놓지 않는 일이라고, 그 헛것이 끝끝내 헛것으로 스러져 버리더라도 그 헛것을 끝끝내 지켜내는 그 부질없음이 삶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김훈은 그 지독한 허무를, 그토록 담담하게 그려냈던 것이다.김훈의 소설에 등장하는 허무한 이순신이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삶과 죽음은 타원형과 같다. 그 타원형은 양극을 가지고 있으며, 그 극과 극의 양상은 다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하지만, 그 극에서 조금이라도 비껴서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삶의 극에 서 있는 자는 죽음으로, 죽음의 극에 서 있는 자는 삶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삶의 극을 약간 비껴나 있는 것 같다.몇 해 살지 않은 삶,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그 잘못들이 내 머리 속을 헤매는 것이다. 며칠 째 고열로 혼자 앓다가 애써 밥을 먹을 때, 벌겋게 부은 편도를 스치는 밥 알갱이들의 질감과도 같이, 삶 킬 수도 없고, 눈물이라도 나면 좋을 테지만,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칼의 노래’의 ‘나’가 삶을 당당히 헤쳐 나가길 원했는지 모른다.

2019-12-10

자동차의 짧은 역사

△최초의 자동차 아니, 최초의 자동차 사고1769년, 오스트리아의 육군 공병 니콜라 퀴뇨는 들뜬 마음이 무척 들떠 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이상한 탈 것을 몰고 나왔다.그가 타고 있는 것은 앞에는 한 개, 뒤에는 두 개의 바퀴가 달려 있는 세발차다. 그렇다. 이것은 증기기관 자동차다. 이 최초의 자동차는 그 무게가 무려 5t에 이르렀고, 속도는 무게만큼이나 느려서 시간당 3.2km를 달렸다. 이 정도면 보통의 성인보다 느리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퀴뇨는 이 거대하고 육중한 증기기관 자동차를 끌고 나왔다. 육군 대신에게 이 경이로운 작품을 보여준 후 무거운 대포를 운반하는 모습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명민한 육군대신이 당박에 퀴뇨가 만든 자동차의 용도를 알아보고 막대한 사례금을 줄 것이라는 건 퀴뇨 생각이었다.퀴뇨는 그런 기대를 품고 몸소 파리교외의 방생숲까지 시범운전을 나갔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최초의 드라이브인 셈이다. 거기까진 좋았다. 받은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날이 너무 좋아 깜빡 졸았던 것일까?퀴뇨는 이 중요한 순간,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만다. 그리하여 퀴뇨는 최초의 증기기관 자동차 발명자이자 동시에 최초의 자동차 사고를 낸 운전자라는 오명을 가져야 했다.퀴뇨 덕분에 자동차는 태동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는 또 다른 후원자를 찾기 위해 이것을 타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다 두 번이나 체포되고,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종국에는 추방당해 객사했다.△19세기, 자동차의 전성시대자동차는 퀴뇨의 삶만큼이나 우울했다. 17∼18세기를 주름잡은 것은 증기기관차였다. 증기기관차는 유럽 전역에 철도문명시대를 열었다. 기차는 더 빨리 달리게 되었고,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기차는 사람만 운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문화까지 운반했다. 유럽의 산업문명은 기차와 함께 더 빨리,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가 아시아의 동쪽 끝인 우리나라에까지 와 닿을 수 있었다.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판세는 역전되었다. 유럽에는 증기기관 차량이 버스로 쓰일 정도로 많이 보급되었으며, 미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도 생산됐다. 100년 가까운 동안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1906년 플로리다에서 개최된 ‘스피드위크’ 경기(현재 ‘데이토나 500’)에서 시속 203km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증기기관 자동차는 강력했다. 하지만 물을 끓여서 달려야 하므로 물도 실어야 했고, 물을 끓일 수 있는 연료인 석탄도 실어야 했고, 증기를 배출하는 장치까지 만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갖추려다 보니 자동차는 무겁고 커야만 했다. 이러한 문제는 가솔린이나 디젤 연료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에 의해 극복된다.가솔린 엔진은 1864년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August Otto, 1832∼1891)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이를 실용화한 것은 현대 자동차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칼 벤츠(Karl Friedrich Benz, 1844∼1929)와 고틀립 다임러(Gottlieb Daimler, 1834∼1900)에 의해서였다. 1885년에 고틀립 다임러는 가솔린 엔진을 자전거에 부착하여 최초의 오토바이를 만들었으며, 1886년 벤츠는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들어 이를 특허 등록했다. 두 사람이 다임러-벤츠Daimler-Benz 자동차회사를 창업하면서 본격적인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가 열리게 된다.1889년 독일의 스퍼거는 자전거의 핸들처럼 생긴 조향장치를 원형으로 바꾸었고, 스포츠카의 대명사가 된 포르쉐의 창업자 페르디난드 포르쉐는 1899년에 전기와 가솔린 엔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들기도 했다. 1898년 윈톤 자동차 운송회사는 최초로 자동차를 광고했는데, 자동차 가격이 1천달러에 달했다. 당시 미국에서 50달러 정도면 집과 토지까지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하니, 가히 파격적인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짧은 시간 동안에 자동차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일반 대중에게 자동차는 먼 곳에 있었다. 그랬던 자동차는 헨리 포드에 의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910년경 포드는 신시네티의 도축장에서 컨베이어벨트시스템의 일괄작업에 영감을 얻어, 이를 자동차조립공정에 도입하였다. 장인 몇 명이 자동차를 만들던 기존의 생산 방식을 과감히 바꾸었다. 모든 부품을 표준화했고,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하여 전문분업화함으로써 대량생산시대를 열었다.당시 차량 한 대당 생산비가 2천달러 가량 들던 것을 250달러인 거의 1/10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다른 회사보다 싼 값에 자동차를 공급했고, 이렇게 되자 시장점유율을 8%에서 50%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한때 포드사의 자동차는 세계의 모든 길을 달렸다. 포드 자동차는 동방의 먼나라 대한제국에까지 들어와 고종임금이 타는 어차로 쓰기도 했다. ‘마이 카(My Car)’시대의 여명은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2019-12-03

거대한 전환: 과학을 입은 인간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가 태어나면서 “거대한 전환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가 말한 거대한 전환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파괴한다”고 보았으며, 이때부터 “인간의 삶이 비극적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머지않아 자본주의가 자신의 문제를 노정하며 결국 도태되거나 붕괴될 것이다”고 보았다.자본주의는 그가 활동했던 제2차 세계 대전 무렵보다 현재 더 깊이 우리의 삶에 침투해 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예견은 여전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존의 삶의 방식을 폐허로 만들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갈 것인가를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미래사회에서 신재생에너지와 대용량전기저장장치의 급속한 발전은 화석연료의 의존도를 낮출 것이며, 인공지능과 로봇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다. 자율주행자동차는 자동차 수를 격감시키며, 자동차와 연관된 운송과 금융, 보험과 같은 서비스산업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킬러로봇의 등장은 전쟁, 대테러, 범죄예방과 같은 국가안보와 치안을 새로운 형식으로 정립할 것이다. 동시에 인간에게 위협을 가할 것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발전은 대규모 정보를 기반으로 지식노동자에게도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방대한 양의 법률과 판례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빅데이터로부터 판결을 내려주는 인공지능 판사와 변호사, 개인의 병력에 합당한 처방을 내려주는 인공지능 내과의사와 영상의학과 의사, 인공지능 기자는 신문이나 방송기사를 자동으로 생성해낼 것이다.이러한 인공지능이 들어서면 인간은 쫓겨날 수밖에 없다. 인간만 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인간의 오랜 경험과 지식, 연륜을 바탕으로 했던 영역에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인간의 단순지식노동을 밀어낼 것이다. 실제로 시카고 트리뷴지가 자사의 지역신문 기자 20여 명을 해고하고 저너틱사에 외주를 주어 기사를 작성하기로 했다.화제가 된 것은 기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아웃소싱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이 아니라, 기사작성의 주체가 로봇이라는 점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에 의한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자동으로 기사를 작성하여 뉴스를 제공해 준다. 2010년에 설립된 저너틱사는 소셜 사이트를 포함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정보와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여 자동으로 기사를 생성, 제공한다.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폴라니처럼 과학기술문명의 불길한 미래를 예측하며 이 시대가 어서 끝나기를 바랄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과학기술을 이용해 이것을 기회로 삼아 새롭게 나아갈 것인가? 다가오는 첨단기술시대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보수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 뇌의 명령인지도 모른다.거대한 전환에 맞서려면 생물학적이고, 유전학적인 차원에서 요청되는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익혀나가야 한다.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밀려올 미래는 양날의 칼이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돈 이데는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확장·축소·변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사용은 대상이나 경험의 특정한 측면을 확장시키지만 한편으로 축소시키기도 한다. 자동차의 경우 주어진 시간 안에 보다 먼 공간적 이동이 가능하도록 우리의 경험을 확장시키지만,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펼쳐진 파노라마 같은 공간을 사라지게 만듦으로써 도보여행이 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축소시켰다.걸어다니는 사람에 비해 자동차를 사용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체험한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전의 인간과 과학을 입은 인간은 동일할 수 없다. 과학기술은 우리의 경험을 확장시키며 이를 통해 정체성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새로운 과학기술을 만들지만, 과학기술이 인간과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과학기술을 입은 미래인간은 지성의 앰프(Intelligence Amplication, IA) 효과로 더 창의적이고 행복한 인간으로 변모할 것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이와 함께 과학을 입은 인간은 과학기술이 가진 양면성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겠지만, 그 변화를 무작정 따라간다면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이 양면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교육제도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제도는 공학만을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공학만큼이나 인문학·예술 등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공학자가 인문학이나 예술교양을 쌓아야 하듯 인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도 공학교양을 쌓아야 한다. 이런 융합교육이 불투명한 미래를 투명하게 만들 것이다.미래는 미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형성된다.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때 미지로 남겨진 미래는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국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몫이기도 하다. 미래의 일을 미래에 준비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준비해 나가야 한다. 오늘이 미래를 결정한다.

2019-11-26

아버지와의 등산

2주 정도 되는 긴 휴가를 받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휴가가 일할 때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녔다. 매일 술을 마셨다. 그 덕분에 몸무게가 불었다. 여름 내내 애써 뺀 살인데 며칠 사이에 허무하게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내가 간 곳은 부산, 충주, 인천, 일산 등이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거창에 있는 우리 집이다. 심정적으로 한 2년 만에 집에 내려간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한 일주일 정도 집에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하룻밤만 잤다. 오래 있다가 간다더니 벌써 가냐며 아버지가 섭섭해 했다. 아버지가 냉랭해 보여도 ‘츤데레’란 걸 알고 있었는데 막상 확인하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셨나보다.집에서 내가 한 일은 자고 먹고 하는 일이었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산은 실제로 1천200m 정도의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구름은 이 산을 넘지 못했다.둥실둥실 떠온 흰 구름이 산을 넘지 못해 그 꼭대기에 걸렸고, 자꾸만 구름이 몰려들어 나중엔 먹구름으로 변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비든 눈이든 내렸다. 그래서 그 산만 쳐다봐도 날씨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어릴 때는 이 산의 이름도 몰랐다. 동네에 워낙 산이 많아 이름도 없는 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산악회를 따라 다니다보니 이 산이 백두대간의 한 줄기이면서 갈미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굉장한 산이 우리 집 앞에 있는데 여기에 올라가지 않는 것은 뭔가 반칙인 것 같아서 이번엔 꼭 올라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들이랑 등산도 한 번 가보고 해봐야지”라며 아버지가 같이 가겠다고 하셨다.나는 사실 갈미봉을 지나 대봉, 못봉, 귀봉 등을 지나 덕유산의 향적봉까지 갈 생각이었다. 한 7시간이나 8시간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따라오신다니 아무래도 멀리 가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물, 빵, 사과 등을 챙겼다.나는 신풍령에서 올라서 능선을 따라가 갈 생각이었는데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갈미봉에 오르는 길이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 말대로 군에서 만들어 놓은 등산 안내도도 있었고, 갈미봉으로 가는 길도 정비되어 있었다.하지만 입구는 그럴 듯해보였는데 갈수록 야산이었다. 드문드문 벌목을 해놓아 작은 나무와 가시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산에 오르는 것이 곤욕이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개의치 않으셨다. 올해 일흔 둘인 아버지는 산을 꾸준히 다닌 적도 없는데도 잘 올랐다. 요즘도 달리기를 한다니 그 덕인가보다.얼마쯤 걸었을까? 아버지가 갈미봉에 오르려고 한 이유를 말씀해주셨다. 아버지는 50년도 전에 동네 친구 분과 갈미봉에 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때도 11월께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기로 한 전 날이었다고 한다.아버지와 친구 분은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하든지 말든지 당신들은 향적봉엘 가겠다고 모의를 했다고 한다. 한 2박 3일은 걸을 요량으로 솥, 쌀, 김치, 된장 이런 것을 챙겨서 저녁 즈음 산엘 올라 갈미봉에서 비박을 했다고 한다.그래서 더 늙으면 못 갈 것 같아 몇 년 전부터 그 친구 분이랑 갈미봉에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재작년 추석께에는 다 준비까지 해서 막상 가려고 했는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년에도 올해도 그 친구 분이 기력이 쇠해서 엄두를 못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가 갈미봉에 간다니까 얼씨구나 하고 같이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다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돌아오자면 갈미봉에서 하룻밤을 샌 아버지와 친구는 못봉까지는 용케 걸었나 보다. 그런데 등산이 목적이 아니라 동네에 일하기 싫어 도망친 것이니 향적봉까지 가는 것은 애저녁에 포기했다고 한다. 조금만 걸으면 배가 고프고 그래서 라면하나 삶아 먹고 또 얼마 안 걸으면 배가 고파서 또 라면 하나 삶아 먹고 그렇게 걸으니 얼마 가지도 못했었나 보다. 냇물에 된장을 풀어 가재를 잡아 구워도 먹고 삶아도 먹으며 사흘 밤을 밖에서 자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추억이 있던 곳이니 정말 얼마나 다시 와 보고 싶으셨을까.아버지와 나는 길도 없는 비탈을 올랐다. 멀리서 볼 땐 가파르게 보이지 않았는데, 기듯이 산을 올라야 했다. 길 없는 길에서 저기만 오르면 정상이겠거니 하며 그렇게 2시간도 더 오른 것 같다. 혼자였다면 벌써 갈미봉을 찍고 못봉까지는 달아났을 시간이었다.그래도 기어이 정상에 올랐다. 아버지 연세에 힘들었을 법도 한데 당신이 비박을 했던 곳을 찾겠다며 갈미봉 이쪽저쪽을 헤매며 아마 여기쯤에서 불을 피워놓고 잠을 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에 젊었을 적 모습이 언뜻 비취기도 했다.정상에서는 우리 동네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다. 저 산을 넘어가면 어디가 있고, 저 산엔 어쩌다 오르게 되었는고, 저기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지, 뭐 이런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아버지는 내가 처음 이 동네에 온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셨다. 나도 다 아는 곳이었지만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했다. 더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9-11-19

인간이 만든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따라오려면

인공지능을 뜻하는 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어이다. AI는 말 그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능을 의미한다. 그럼 여기서 문제. 지능이 있느냐 없느냐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뭘까? 그것은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다. 단세포인 아메바도 지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먹이가 있는 쪽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장애물이 나타나면 다른 쪽으로 움직인다. 아메바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선택이라는 것을 한다. 그러니 지능이 없다고 할 수 없다.이런 것이 지능이라면 승용차도 지능을 가지고 있다. 앞차와의 거리가 너무 바트거나, 사각지대에 차가 있을 때 경고음을 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정도의 인공지능을 약한 인공지능이라 부른다. 강한 인공지능은 인간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를 강한 인공지능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바둑은 돌을 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모든 원자 수(약 10의 80제곱)를 합친 것보다도 월등히 많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최대 250의 150제곱에 달하므로 알파고의 학습능력은 바둑의 모든 경우의 수에 턱없이 부족하다. 알파고는 최선의 착점을 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계산하는데 1초에 1천조 개 이상의 명령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그렇다고 해서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뇌 역시 1초에 1천조 개의 명령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알파고는 바둑에 관한 정보만을 처리하지만, 이세돌은 바둑 외에 삶과 관련된 문제 전반에 관한 정보도 처리해야 한다. 종합적인 처리 그리고 삶에 생기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결정은 바둑이 가진 경우의 수보다 훨씬 많다.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는 3천만 개의 수를 학습하였는데, 학습량으로 따지면 인간이 1천 년동안 학습할 분량에 맞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 이를테면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고, 나무와 풀을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은 수천만 년 동안 인간의 DNA 속에 축적되어 온 지식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하찮은 이러한 능력을 현재의 인공지능은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는 정확한 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둑은 이기고 지는 것이 명확하지만 삶에는 그런 것이 명확하지 않다. 삶은 명확하지 않는 길 위에서 무수히 많은 선택과 만난다. 이 불안정한 삶 속에서 발생하는 숱한 문제는 답도 없으며 데이터도 부족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에 근접하려면 불가해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무어는 18개월마다 반도체 칩에 집적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 수가 2배씩 증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런 ‘무어의 법칙’을 바탕으로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 무렵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앞설 것이라 예언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지점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 불렀다. 이와 함께 진단의학 기술도 함께 발달해 불멸의 시대가 올 것이라 믿으며, 그날까지 살아남기 위해 하루 150개의 알약을 먹는다.어쩌면 커즈와일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특이점이 찾아오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의 주장은 어려울 것 같다. ‘무어의 법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런 존재 기반이 무너졌다. ‘네이처’지는 2016년 2월호에서 특집으로 ‘무어의 법칙’을 다루면서 이 법칙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가 ‘무어의 법칙’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바일 컴퓨팅 시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모바일 컴퓨팅은 자꾸만 작은 것을 원하고 있다.반도체 회로 크기는 계속 작아져서 지금은 14나노미터(㎚)다. 참고로 1㎚는 10억분의 1m에 해당한다. 그런데 모바일에 사용되어야 하므로 회로가 작아진 만큼 기판도 작아져야 한다. 이 작은 기판에 성능을 높이려면 더 많은 회로를 넣어야 한다. 이 회로에는 전기가 지나간다. 1초에 많게는 1만 번 정도. 작은 회로에 이 정도의 전기가 지나가면 열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도 아주 높은 온도의 열이 발생한다. 뜨거운 감자도 아닌 뜨거운 스마트폰이라니! 이런 스마트폰을 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정리하자면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에 대한 꿈을 이루기엔 무리가 있다. 우선 인간이 지닌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인간은 답이 주어지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길을 찾아낸다. 이러한 인간의 역설적이고 지난한 삶의 방식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연산능력만 인간과 동일하게 만든다면, 인공지능이 뛰어넘은 것은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인간의 계산능력에 불과할 것이다.다음으로 물리적 차원에서 특이점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다. 인간의 뇌는 1초에 1천조에 달하는 명령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빠르게 뇌가 작동할 테지만 뇌에 불이 붙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의 횟수의 전류를 흘려보내도 감당할 수 없는 반도체 기판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반도체 기판을 사용하지 않는 양자 컴퓨터와 같은 기술이 상용화되는 것 역시 요원하긴 마찬가지다.

2019-11-12

문화산업과 국가브랜드가치

△패션: 문화의 정면패션은 아주 미묘하며 미세한 차이 속에서 탄생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에서 앤 해서웨이가 입은 스웨터의 색은 푸른색이지만, 정확히는 ‘세룰리안 블루’다. 푸른색만 해도 수백 가지에 이른다. 여기에서 세룰리안이라는 수식어가 왜 블루 앞에 붙은 것일까? 그것은 수백 가지의 다른 블루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즉 세룰리안 블루는 푸른색의 한 부분이다.푸른색이 이렇게 많다 보니 특정한 옷에 어떤 색이 더 나은지를 고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훌륭한 디자이너는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골라내고야 만다. 그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고객이 그것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자신만의 미적 가치를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디자인을 찾아서 그것을 실제 제품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의 안목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곧 대중의 안목이며, 그 사회와 문화의 안목이다. 유명한 디자이너란 대중의 감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며, 학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의 감각을 하나하나 습득한 사람일 것이다.더 정확히는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가진 탁월한 안목과 감각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패션이나 디자인은 단지 옷의 모양, 색감, 질감을 고르는 차원이라고 할 수 없다. 패션은 그 사람의 경험 전체, 나아가 그 사람이 발 딛고 있는 땅의 문화 전체가 녹아들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패션의류산업이 기술적으로 선진국에 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패션을 선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와 관련이 깊다.그렇다면 이제 분명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세계 수준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정책’은 불가능하다. 그런 정책을 펼치는 것보다 우리나라를 세계인이 호감을 갖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세계인이 호감을 갖는 나라란 쿠웨이트와 같이 국민소득 수준만 높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국가경영능력과 위기 대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가안전을 보장하고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 소득수준이 높으며 그에 비견되는 사회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그리하여 세계의 많은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나라, 결국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일 것이다.△국가브랜드가치한 나라의 인지도를 결정하는 호감도, 신뢰도 등 유·무형의 가치를 총합하여 수치화한 것을 국가브랜드지수 혹은 국가브랜드이미지라고 한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한 동안 각국의 브랜드이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의 내용은 이렇다. 여러 나라가 동일한 제품을 만들었고, 그 소비자 가격이 100달러로 동일하다고 했을 때 얼마를 주고 이 물건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2012년의 경우 미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경우 소비자 가격인 100달러를 주고 사겠다고 세계인은 응답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20% 이상을 할인한 76.6달러에 사겠다고 했다. 2006년에는 66.3달러였던데 비해서 15.5% 상승했지만, 여전히 한국 제품은 다른 나라들보다 저평가받고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우리의 한복을 생각해보자. 한복은 아름답고 우아하다. 하지만 한복에 대해서 세계인은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2015년에 열린 ‘샤넬2015/16 크루즈 컬렉션’에서 한복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샤넬 크루즈 컬렉션’ 쇼는 2000년부터 매년 열려 왔다. 휴양지 옷차림과 간절기 패션을 선보이며 이듬해 봄·여름 패션 트렌드를 미리 점쳐볼 수 있어서 세계 패션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이 쇼는 파리,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베르사이유 등의 도시를 돌았고,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 두바이를 거쳐 한국에서 세 번째로 열렸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직접 참여한 이 패션쇼에 300명이 넘는 기자가 초대되었다. 라거펠트는 한복의 전통미와 서구적 세련미를 접목시켜 이제까지와는 다른 한복을 탄생시켰다.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한복은 우리 것인데도 불구하고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외국 유명 디자이너를 통해서 소개되어야 비로소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브랜드가치는 이 정도 수준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라거펠트가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한국의 전통 옷을 대상으로 디자인했다는 것, 그것이 곧 한국의 브랜드가치가 향상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기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집중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를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다. 경제적 수준이나 군사적 수준과 같은 하드파워 뿐 아니라 문화나 사회제도, 국민의식과 같은 소프트파워도 함께 갖추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 부와 국민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력이 갖춰지는 것은 물론 높은 문화수준을 바탕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때 세계인은 대한민국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문화를 모방하고, 우리나라에서 살고 싶어할 때 우리나라가 세계인의 가슴속에 새겨질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인을 끌어올 수 있는 그런 창조적 문화의 힘이 생성될 것이고, 그때 우리나라의 패션이 세계를 리드하게 될 것이다.

2019-11-05

과학은 야박해!

자연을 닮으려는 노력 속에서 과학기술은 발전해왔다. 넓은 견지에서 보자면 옷은 동물의 가죽을, 비행기는 새를, 전기는 번개를 모방하려는 노력의 일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낮은 차원에서 시작해서 자연을 개선해 자연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 나간다. 그렇게 과학기술은 도약한다.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발전 5단계설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단계를 구분한 이유는 단계를 거칠 때마다 생산력이 급격히 증대되었으며, 이러한 생산력 증대를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형태의 생산수단이 출현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사회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이란 말 그대로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이며, 사회관계란 그 도구를 소유하는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의 관계다.역사발전의 제1단계에 해당하는 원시공산사회는 생산력이 가장 낮은 단계였는데, 생산수단이라 할 만한 도구가 따로 없었다. 인간의 육체가 곧 생산수단이었는데,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채집을 했다. 이러한 생산수단은 모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계급없는 무계급의 사회였다.제2단계인 고대노예제사회에서 생산수단은 토지였으며,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래서 고대노예제사회에서 핵심적 사회관계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다. 이 시기부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대두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중세봉건사회에서 영주가 착취를 하고 농노가 피착취의 대상이었으며, 생산수단은 장원이었다.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가 자본주의 사회다. 공장을 생단수단으로 하여,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대립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은 지나치게 많이 투자하거나 지나치게 많이 축적하게 되어 결국에는 경제공황을 낳으며 스스로 자멸해 갈 것이라 보았다.마르크스의 역사 5단계설은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했다. 인간의 역사나 인식은 발전하기보다는 변화한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인간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기도 하며, 특정한 국면에서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일을 저지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때 독일이 유대인에게 행한 것이나,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서 벌인 다양한 전쟁범죄들은 차마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으며, 차마 인간으로 저지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한다. 그리하여 퇴보를 향하기도 한다.다른 하나는 마르크스가 과학기술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증기기관이 기술의 최대치로 보았던 것 같다. 노동자 중심의 공장이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1천명의 사람이 일해야 했다면 이제는 100명 아니 10명으로, 더 나아가서는 무인공장으로 바뀌고 있다.오늘날 생산수단은 더 이상 공장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심 역시 중요한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욕구가 분출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밀접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1천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 또한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에 마련된 플랫폼에는 수천 만, 수억 명의 사람이 몰려든다. 이러한 가상의 공간이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발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다시 마르크스로 돌아가 보자.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단계를 5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마다 혁명이 있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러시아혁명, 명예혁명, 미국독립혁명, 청교도혁명, 프랑스 혁명, 쿠바혁명, 4.19 혁명, 문화혁명 등이 있다. 이러한 혁명은 기존의 나쁜 지도자를 몰아내거나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했을 때, 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뀔 때를 일컫는다. 이런 식이라면 혁명은 많아도 너무 많다.그러나 과학기술은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아낀다. 예컨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엄청난 인식론적 전환 앞에 대해서도, 문명발전의 기반이 되었다고도 해도 좋을 전기가 상용화 되었을 때도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엄청난 편익을 제공한 자동차나 컴퓨터가 발명되었을 때에도 혁신(innovation)이라고 부를 뿐, 혁명이라고 명명하기를 꺼린다. 과학기술은 크게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에 국한하여 혁명이라는 지위를 허락하고 있다. 왜 이렇게 과학은 혁명이라는 말에 야박한 것일까? 과학에서 말하는 혁명은 특정한 변화가 인간 개개인의 삶을 바꿀 뿐만 아니라 집단의 변화로 나아가는 현상, 그리하여 기존의 삶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 등장하게 될 때를 혁명이라고 부른다.

2019-10-29

배움과 학문

△배움과 학문의 차이배움과 학문의 차이는 뭘까? 하나는 한자, 하나는 한글?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문과 배움은 둘 다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을 말한다. 사전적으로 보면 학문은 새로운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운다는 의미가 덧붙어 있다.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과연 그럴까?배움은 필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걷는 법, 밥 먹는 법, 글을 읽는 것, 자전거를 타는 것, 수영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배움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체화된다. 결국 체화된다는 것은 몸의 일부가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예를 들어 컴퓨터를 배울 때는 자판부터 익힌다. 처음 배울 때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고 키를 누르지만 다 배우고 나면 정작 키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해도 글을 쓸 수 있다. 자판으로 문서를 작성하거나 글을 쓸 때 특정 자음이나 모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인다.몸과 완전히 일체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 배운 것은 잊어버릴 수 없다. 글을 배운 사람은 다시 글을 배울 수 없으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사람은 다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우리의 삶의 일부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처음 배울 때가 가장 중요하다.학문은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체계적이란 일정한 순서와 규칙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수학을 배우려면 수학의 기호를 알아야 하고, 그러한 기호들이 사용되는 규칙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을 배운 후에 이를 활용한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사고를 필요로 하는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지식이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젓가락질을 아무리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배워봐야 젓가락질은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수학이나 물리학을 깊이 있게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너무도 크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깊이 있게 배운 사람은 바람의 특징을 토대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낼 수 있으며, 태양의 고도와 그림자를 활용하여 산의 높이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깊이를 지향한다.그런데 이런 학문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배움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학문은 경험만으로 구축되지는 않는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현상이라는 경험에서 비롯하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일은 지적 능력과 관련이 있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하더라도 산의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산의 높이를 구할 수는 없다. 학문을 하는 사람, 즉 학자는 경험을 종합하고 정리해 하나의 이론을 구축한다. 학문은 현상의 종합이며, 다양한 현상들 속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추출해 내는 일이다. 이것을 이론이라 부르고 이런 이론을 학문이라고 부르며, 이런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을 학자라 부른다.즉 학자는 현상을 탐구해 이론을 구축한다. 이렇게 정립된 이론은 실제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산의 높이를 구할 수 있다면 피라미드나 나무의 높이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을 몰라도 사는 데는 지장은 없다. 하지만 산의 높이를 알면, 다른 산을 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얼마나 힘이 들지, 산 정상이 날씨는 어떨지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예측을 바탕으로 산을 넘을 때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이러한 지식은 살면서 좋든 싫든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작정을 하고 익혀야 한다. 젓가락질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도 포크처럼이라도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수학이나 물리적 지식은 배우려고 마음먹지 않으면 결코 이 지식을 익힐 수 없다. 그래서 학문은 자발적으로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수준으로 거듭하여 도약한다.△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학문은 의식적인 체계화다. 그래서 학문을 개척한 최초의 사람이 존재한다. 학문은 새로운 배움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을 열어가는 일과 같다. 이런 학문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무수히 새롭게 생겨나고 필요가 다하면 소멸되기도 한다.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수백만 년 동안 사냥과 채집을 잘 할 수 있는 지식이면 충분했고, 농경사회에서는 농경과 관련된 지식이면 충분했다.고대의 그리스, 중국, 이집트 등과 문명권에서는 철학과 자연과학, 수사학, 군사학 등이 필수과목이었고, 그 경계가 따로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군사학이 중요했던 것은 그만큼 전쟁이 잦았기 때문이다. 즉 교육은 필수 학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꼭 배워야만 하는 것들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그럴 때마다 교육의 필수과목도 달라진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지금의 교육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가기에는 낡은 감이 있다. 지금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우리는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한다. 미래는 미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있다. 예견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준비할 때만 우리가 바라는 미래로 다가올 것이다. 이제는 대학이 지식 플랫폼으로 거듭나 투명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회와 소통하며, 국민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2019-10-22

사랑하기와 용서하기-‘멜로가 체질’을 뒤늦게 보고

안재홍(범수)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천우희(진주)는 잘 모르는 배우인데 연기를 잘 한다.그리고 난 이런 느낌의 드라마가 좋다. 가볍고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은 영화. 아무런 무게도 교훈도 없는 그런 내용. 그런데 말이다. 이 드라마는 정말 감동이다. 왜냐고? 내 모습하고 비슷하니까. 내가 범수였으니까. 드라마라는 게 그런 것 같다. 결국 내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진주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손을 잡아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져. 안아도 될 것 같고. 후회하지 않을 것 같고. 뭐 그런 믿음이 깨져가는 과정이 연애지만….”그래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당신을 만나고 열심히 일을 하고 싶어졌고, 무슨 일이든 가능할 것 같았던 때가 있었다.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모두 당신에게서 비롯되었던 때가 있었다.그런데 진주의 말처럼 연애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깨져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은 느낌. 당신을 사랑하면 왠지 내가 착해지는 듯한 느낌. 그런 느낌에 하늘을 걷는 듯한 느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죽을 것 같은 느낌, 착해지는 듯한 느낌이 일상이 되어 버리고, 내가 들떠 있는 상태가 평상의 상태가 되어 버릴 때 우리의 사랑은 조금씩 식어 간다.그런데 그런 좋았던 느낌들이 일상이 되어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면 이제 당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객관적 상태에서 당신에게 싫은 부분이 많은지 좋은 부분이 많은지를 비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여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이 드라마가 내게 와 닿았던 이유는 이런 부분 때문이다.범수: 정신이 없었어요. 오만가지 컨펌을 하느라.진주: 핑계~범수: 근데 나는 이게 왜 핑계가 되는 줄 모르겠는데? 일이잖아. 내가 동호회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술을 퍼마시고 논 것도 아니고. 바쁜 와중에 이렇게 틈내서 만나는데 어떻게….진주: 틈내서?범수: 틈내서라는 말이 기분 나쁜 말인가? 작가님도 나도 지금 너무 바쁘잖아. 그 와중에 틈내서 만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야.나도 범수처럼 항상 바빴고 상대방은 그런 바쁜 나를 이해해주지 못했고. 바쁜 걸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짜증을 냈고. 상대는 더 짜증을 냈고.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가는 거다. 여기서 범수의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범수: 말을 그렇게 해요? 빨래라니. 처리라니. 아니 바쁜 거 뻔히 알면서 왜 항상 이런 식으로 기분 상해해요?진주: 항. 항상이라뇨? 난 그런 적 없어요. 처음인데?범수: 맞아요.진주: 내가 감독님 전 여친한테 바통 이어받은 건가요?범수: 내가 그렇게 들릴 수 있게 말을 한 것 같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 실수예요. 미안해요.진주: 난 내 출발선에서 출발했어요.범수: 맞아요.진주: 제가 오늘은 좀 실망을 해야겠어요. 갈게요.진주가 화가 난 이유는 범수가 진주를 옛날 연인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옛날에 바쁜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했던 과거의 연인과 진주를 동일시한 것이다. 그래서 진주는 화가 났다. 진주는 범수에 실망했다고 말하며 돌아선다. 그러면서 많은 잔고 끝에 “니놈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게 더 많은 놈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범수를 용서한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지금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후에야 겨우 알게 되었는데 진주는 어떻게 이런 걸 알게 된 거지?그래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계산의 결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싫음을 참아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싫음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다면, 헤어지면 된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그런데 그 사람의 싫음을 참아낼 수 있는 정도라면, 지금 화나는 기분을 억누르면 된다. 그리고 사과하라. 사과할 일이 아니라면 솔직하게 말하라. 무엇이 그렇게 싫은지. 그런데 내 경우에는 내가 싫다고 생각한 당신의 싫음은 더러운 내 성격 때문이지 당신의 잘못이 아니더란 거다. 결국 내가 이상한 놈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다. 그래서 사랑에는 또 다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자신의 상태를 바라볼 줄 아는 노력. 상대가 아니라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노력 말이다. 사랑이 노력 없이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망상이다.결국 사랑의 최종 단계에서 보게 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다. 당신이 아니라 ‘나’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용납할 수 있는 싫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니 이유 불문하고 사랑하라.

2019-10-15

플랫폼의 시대

△도시는 시장이다킨들버거는 1500년부터 1990년까지 경제강대국의 흥망사를 기술한 일 있다. ‘경제강대국 흥망사’라는 이 책에서 언급한 도시와 국가들로는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의 도시국가들과 포르투갈, 에스파냐, 브뤼주 등을 들고 있다.킨들버거는 자원, 무역, 고업, 농업, 금융 등의 요소를 통해서 경제흥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속에서 그가 한 가지 빼놓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도시 혹은 국가의 흥망과 관련해 인구변동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오늘날 메트로폴리탄이라 불리는 1천만이 넘는 도시는 제조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런던은 산업혁명과 함께 성장하였다. 방직, 석탄, 철광석 등의 공장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세워졌다.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렇게 공장이 세워지자 일하기 위해 다른 곳의 사람들까지 유입되었고, 그렇게 유입된 사람들과 비례해 공장이 늘어났다. 뉴욕, 도쿄 등이 그러했다. 서울만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다. 구로공단에는 IC회로 조립공장과 함께 방적공장이나 가발공장이 넘쳐났다. 문래, 종로 등에는 철공소가 모여들었고, 신대방동, 성수동에는 방직공장이 들어섰다. 그렇게 서울은 확대되고 커져 지금 천 만이 넘는 메트로폴리탄이 되었다.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었다. 서울로 가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먹고 살 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많으면 일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축제가 벌어지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 몰려드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장사꾼들이 몰리는 것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많은 만큼 그들의 욕구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아무 짝에도 쓸데 없다고 여겨지는 능력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겐 대단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도시는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며 생명체처럼 성장해나간다.1970년대 서울이 제조업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1980년에는 제조업과 함께 서비스업이 함께 성장하며 더 커졌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제조업은 다른 곳으로 밀려나고 금융, 법률, 정보, 교육, 의료, 미디어 등과 같은 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또 다른 일자리가 등장했다. 소멸과 탄생을 거듭하며 도시는 변모했고, 사람들은 떠나거나 다시 유입되었다.그런 점에서 도시는 거대한 시장이다. 사람들의 유동 속에서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고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시장은 새롭게 변모한다. 새로운 시장이 생겨나면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거나 기존의 시장은 저항하면서 쇠퇴한다. 시장은 거대한 바다처럼 물결치고, 물은 흘러들어오고 흘러간다. 그런 점에서 도시는 ‘플랫폼’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플랫폼 안에는 거대한 빌딩, 광장, 대학, 주거밀집지역 등과 같은 하위 단위의 플랫폼으로 이뤄진다.플랫폼이 플랫폼을 낳는다. 오늘날 도시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주 내의 총생산량은 프랑스의 GDP와 거의 맞먹는 2조5천억 달러이며, 텍사스와 뉴욕은 1조5천억 달러를 육박한다. 이것은 브라질이나 캐나다와 같은 국가와 맞먹는 수준이다.△도시를 위협하는 플랫폼도시는 거대한 시장이다. 비록 도시를 플랫폼이라고 했으나 진짜 플랫폼만큼 유연하지는 않다. 도시의 시장 기능을 위협하는 ‘진짜’ 플랫폼은 우리의 컴퓨터 속에, 우리의 스마트폰 속에 있다. 본래 플랫폼은 컴퓨터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도스, 리눅스, 윈도우, 브라우저, 자바와 같은 운영체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사전적으로 ‘사람들이 기차를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평평하게(flat) 만든 장소(form)’라는 뜻이었다.그런데 어느 날 컴퓨터 공학은 플랫폼을 ‘많은 사람이 쉽게 이용하거나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정의한 방식대로 플랫폼을 현실화하고 있다. 오늘날 플랫폼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과 같은 SNS, 구글이나 네이버와 같은 포털, 앱을 판매하는 애플 앱스토어나 삼성 앱스토어, 유통과 관련된 아마존이나 알리바바, 새로운 교통과 숙박 산업을 열어가는 우버와 에어비앤비, 다양한 영상콘텐츠를 제공하는 유튜브와 넥플릭스, 교육과 관련된 테드 등 그 종류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이러한 플랫폼에는 도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린다. 세계에 천 만이 넘는 도시는 총 34개이며, 동경은 3천800만 명의 사람이 거주하는 가장 거대한 도시다. 이러한 수치는 페이스북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페이스북은 전세계 인구의 22%의 인구가 사용하고 있으며, 한 달 동안 서비스를 이용한 순수한 이용자 수(Monthly Active Users)는 약 21억에 이른다. 신규 사용자는 분당 400명 정도 증가하며, 매일 1억 시간 분량의 동영상 콘텐츠가 업로드 된다. 6천500만 이상의 기업이 비즈니스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500만 명의 적극적인 광고주가 있다.이제 거대 도시는 저물고 거대 플랫폼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이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플랫폼을 가져야한다. 시대는 그렇게 변화한다.

2019-10-01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정보와 아날로그아침에 눈을 뜨면 태양이 떠 있고, 알람이 울린다. 이것들은 실제로 일어났고, 이 실제적 일을 우리가 스스로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들, ‘태양이 뜬다’는 사건을 접하고, ‘아침에 태양은 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사건과 사실은 ‘나’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이 경험은 ‘나’ 뿐만 아니라 ‘너’ 혹은 ‘그’의 경험까지 포함한다. 그렇게 본다면 사건과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것들이다.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이러한 경험들 중 어떤 것은 기억된다. 기억되는 것들 중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정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유용하고 중요한 것이다.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는 연인은 일종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 신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보는 지식이기도 하다.정보는 직접 말로 전달할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로 쓸 수도 있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전파했으나 정보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다양해졌고 복잡해졌다. 축음기와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새로운 정보전달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소리를 저장하는 것 바로 녹음이다. 이것은 획기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 방법은 간단하고 어떤 면에서는 원시적이기까지 하다. 소리는 진폭을 가지는 파동이다. 즉 말을 하면 공기가 떨리게 되는데 이 진동을 감지해 함께 떨릴 수 있는 날카로운 바늘로 레코더판에 그 파동을 똑같이 새기면 된다.△정보기술의 혁명, 디지털다시 말하지만 정보는 의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녹음을 하면 잡음까지도 기록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엄밀한 의미에서 정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녹음된 것 안에는 녹음하고 싶은 것과 녹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간파한 클라우드 섀넌은 자연적인 것 전체가 아니라 정보만을 기록하고, 전달하고자 했다. 섀넌이 찾은 방법, 그것이 바로 디지털이다. 디지털의 어원인 디지트(digit)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손가락은 접었다, 폈다 하는 방식으로 수를 센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셀 때 구부린 정도에 따라 저건 0.5, 저건 0.7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셀 때 ‘0’ 다음에 ‘1’일 뿐 중간값은 없다. 이렇게 어떤 값을 딱 떨어지게 끊어서 표시하는 방식을 디지털이라고 부른다.섀넌 식으로 말하자면 중간값은 일종의 노이즈다. 그러나 어떤 중간도 없이 딱 떨어지는 값은 정보다. 섀넌은 정보만을 저장하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저장용량을 극대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은 이렇게 저장된 정보를 자유롭게 이동하고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아날로그 정보에는 소리, 그림, 사진, 문자, 필름영화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그 특징에 맞는 저장 공간이 필요하다. 그림이나 문자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종이가 필요하며, 소리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레코드판이나 테이프가, 사진이나 필름영화는 필름이 필요하다. 이렇게 정보가 저장되는 공간을 매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아날로그 정보와 달리 디지털 정보는 저장을 위한 특별한 매체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메모리 칩에 형식과 성질이 다른 정보를 한꺼번에 담아 둘 수 있다. 정보를 전송하고 공유하는 일이 간단히 이뤄진다. 아날로그 시대에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워크맨과 음악 테이프를 몇 개씩 가지고 다녀야 했다. 영상을 찍으려면 카메라, 필름이 필요했고, 이것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인화해야 했다. 하지만 CD플레이어는 음악을 듣는 것을 훨씬 간편하게 만들었으며 캠코더는 필름 없이 찍을 수 있었고, 인화하는 과정 없이도 찍은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많은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된다. 이걸로 음악도 듣고, 영상도 찍고 송신도 할 수 있다.또한 디지털 정보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이 결합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각광 받고 있는 VR여행은 집 쇼파에 앉은 채로 그랜드캐넌을 둘러볼 수 있고, 세계최대 산호초 지역인 그레이트배리어리프나 중국의 만리장성을 여행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실제로 갈 수 없는 화성이나 달 탐험도 가능하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기술이 자리 잡는 시간디지털 정보기술은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술이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편견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일상화되기 위해서는 시스템 전체가 그런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 컬러 TV를 보려면 기존의 수신 방식을 바꿔야 하고, 핸드폰을 사용하기 위해서 기지국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이 비싼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공학자의 노력과 자본은 이런 기술을 우리의 삶으로 끌어올 수 있다.문제는 사람들은 아무리 편해도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기를 처음 본 사람들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을 빨아들인다고 거부했다. 핸드폰이 등장했을 때 전자파가 사람에게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사용을 꺼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공학은 기술의 발전만을 생각했다면 이제 공학은 인간의 사고나 행동방식과 인식까지로 그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다.

2019-09-24

제1차 산업혁명과 안젤루이스의 종

제1차 산업혁명, 이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채 일곱 글자 밖에 되지 않는 이 단어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먼저 ‘제1차’란 산업혁명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란 기존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쓸어 가버리는 쓰나미와도 같은 거대한 변혁이다.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학자들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고 하지만 일반화된 것은 영국의 경제사가인 아널드 토인비가 영국경제발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였다고 한다. 이후 이 용어는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왔다. 이러한 산업혁명은 ‘농경’ 중심의 사회를 ‘산업’ 중심의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삶의 중심에는 농업이 있었다. 땅에 작물을 심고 그것을 가꾸어 수확하는 삶, 이것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삶의 방식이었다. 농업 중심의 사회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 즉 삶의 방식 역시 여기에 맞춘다는 것이다. 문학, 예술, 음악 등은 농업과 그러한 농업을 가능케 하는 자연을 중심소재로 삼았다. 릴케의 ‘가을’, 드뷔시의 ‘목신에의 오후’와 같은 시와 음악들이 그것이다.또한 이것은 우리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침에 해가 뜨면 들에 나가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자연환경에 인간의 삶을 맞춘다. 변화하는 자연에 맞춰 옷을 입고, 제철 음식을 먹으며 자연의 순환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 자연을 순환시키는 정체 모를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한 순환적임을 인식하게 된다. 자연의 순환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자라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자라는 것을 보게 된다.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일은 없고 불을 때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일은 없다. 콩을 심으면 그에 비례해서 콩이 나는 것이지 이의없을 만큼 적거나 터무니없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없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것, 원인에는 그에 합당한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론적 세계관이 자리잡게 된다. 운명론, 인과론은 농경중심사회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에서 기반한 지식이며, 이것이 당대의 종교와 윤리로 자리 잡았다.산업혁명과 함께 농업이 이룩한 삶의 방식 역시 사라진다. 사람들은 들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고 공장에서 일을 한다. 낮에도 일을 하지만 밤에도 일을 하기도 한다. 밤에도 일을 하려면 어둠을 극복해야 했다. 전기와 전구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출현한다.자신이 일하는 논과 밭을 중심으로 농촌에 드문드문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공장 근처로 몰려 거대한 규모의 집성지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집성지에 새로운 공장이 들어선다. 왜냐하면 인력을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여기로 사람이 모이고, 또 그런 사람을 따라 공장이 지어진다. 공장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인간의 규모도 커져 거대한 도시를 이루게 된다.조용하고 따분한 농촌과 달리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시끌벅적하고 야단스러운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난다. 인간보다 자연을 중심으로 삼았던 예술은 이제 도시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하게 된다. 도시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낸다. 운명보다는 개인의 역량을 중시하게 된다. 개인은 노력에 비례하여 결과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연히 성공을 이룩하기도 한다. 우연히 사람을 만나 우연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필연보다는 우연을 더 믿게 된다.산업은 농업의 자리를 차지하고 군림하며 인간을 산업에 맞게 개조한다. 인간은 더 이상 운명과 필연에 매달리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섭리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운명은 스스로 헤쳐 나가고자 한다. 프론티어 정신! 산업사회는 이것을 종교처럼 섬기고 윤리규범처럼 따르고자 한다. 산업혁명은 대륙의 한 구석에서 시작하여 이제 전 세계로 들불처럼 번져나간다.‘만종’으로 널리 알려진 밀레의 ‘안젤루이스의 종’이라는 그림이 있다. 넓은 들판, 어둠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간, 멀리 교회에서 종이 울려 퍼지면 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기도를 드린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들 가운데 놓인 감자바구니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것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엑스레이로 촬영해 본 결과 밀레가 처음부터 감자바구니를 그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저들 사이에는 감자가 담긴 바구니가 아니라 강보에 싸인 아기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농부 부부는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를 묻기 위해 들판으로 나왔던 것이다. 아기를 묻기 전 그들은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들이 경건하고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사실 1857년 즈음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물이 파문을 일으키듯 유럽대륙으로 번져나갔다. 이 그림과 산업혁명의 전파시점이 유사한다는 것은 공교롭게 느껴진다. ‘안젤루이스 종’에서 보인 농부와 그의 아내의 애도는 이제 저물어가는 농경 사회에 대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019-09-17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어요. 그러니 추석에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제발 당신의 조카에게 사촌에게 취직은 했니 따위의 말은 묻지 말기 바란다. 꽤 오래된 일이지만 하이네켄은 인턴 채용과정을 동영상으로 담아 배포한 일이 있었다. 인턴지원자 1천734명 중 적합한 인재를 찾기 위해 ‘킥오프’, ‘응급처치’, ‘출구’ 라는 세 가지 면접방식을 소개했다. 먼저 지원자는 면접자의 손을 잡고 면접장소로 이동한다.인터뷰 도중 면접관이 쓰러지는 응급상황이 발생하고, 비상벨이 울려 건물 밖으로 탈출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과정을 거친 후 최종 후보자 세 명을 선발한다. 하이네켄 직원이 투표를 통해 세 명 중 한 명을 뽑는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면접자는 유벤투스 경기장에서 마지막 미션을 행하게 된다.마지막 미션은 커다란 전광판을 통해 채용 사실을 통보받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으로부터 축하를 받는 일이다. 하이네켄은 이러한 면접방식을 통해 전형적인 채용과정에서 파악하기 힘들었던 지원자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했고, 창의적인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널리 알리는 광고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여기서 꼭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여기에 지원자가 1천734명이라는 것이며, 더욱 정유한 것은 이 많은 사람 중 겨우 한 명을 뽑았다는 것이다. 1천734: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가이 루히팅이란 지원자는 좋겠지만 나머지 1천733명은 어떻게 해야 하나? 채용된 사람은 유벤투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에게 환호와 갈채를 받았겠지만, 나머지 1천733명은 어디서 어떻게 위로받아야 하는 것일까? 어쩌다 취업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일까? 취업을 했을 뿐인데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은 왜 모두 자기 일처럼 그렇게 열렬히 환호하는 것일까?‘미생’이란 웹툰은 대중의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이 드라마는 ‘미생’ 신드롬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여기에는 한국 기원의 연구생이었으나 프로입단에 실패한 장그래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장그래는 프로기사의 꿈을 접고 대기업의 계약직 직원에서 정직원으로 채용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웹툰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장그래가 꺼내놓은 일기장이다. 장그래는 한국기원 연구생 시절 두었던 대국을 기보로 남겨 왔다. 이러한 습관은 회사 생활에서도 이어져 그날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매일매일 일기를 쓴다. 문제는 그렇게 열정적이며, 성실하게 일했고, 높은 실적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는 채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 물어야 한다. 어쩌다 청년취업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일까?활판인쇄를 하던 시절, 식자공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원고대로 활자를 활자판에 배열하는 일을 했다. 인쇄술이 발전하자 식자공은 사라졌다. 통신기술이 발전하자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이 사라졌다. 증기선이 나오게 되자 뱃사공이 사라졌으며, 자동차가 보급되자 인력거꾼이 사라졌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무수한 직업이 있었지만, 기술의 발전과 함께 많은 직업이 사라졌다. 스탠퍼드대의 토니 세바(Tony Seba)는 2030년에는 현재 있는 직업의 47%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으며 미국의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Tomas Frey)는 20억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한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는 5년 후에는 현재의 일자리가 710만여 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 200만여 개 만들어져 결국 500만여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 답은 분명해진다. 취업이 어려워진 것은 기술산업의 발전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1970년대를 기준으로 근대적 자본주의(1970년 이전의 자본주의)와 탈근대적 자본주의(1970년 이후의 자본주의)를 구분한다. 그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가치가 생산과 노동이었다면, 탈근대적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가치는 소비와 자유라고 말한다. 생산과 노동이 중시되었던 시대는 일자리가 남아돌았다. 그런 이유로 언제든 노동시장에 투입될 수 있는 예비 노동 인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국가는 실업자를 부양했다. 하지만 소비를 통해 자유를 만끽하는 1970년대 이후 실업자는 골칫거리이자 ‘잉여’ 인구가 되었다. 생산자사회에선 누구건 일해야 하지만 소비자사회에선 누구건 소비해야 한다. 과거에는 일하지 않는 자가 문제였다면, 오늘날은 소비하지 않는 자가 문제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일하지 않는 자를 일하게 하고, 소비하지 않는 자를 소비하게 만들면 사회적 문제는 많이 해결된다. 그런데 어떻게 소비하게 만들 것인가? 직업은 한정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는 것마저 줄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바우만이 내놓은 대책은 노동과 노동시장을 분리하고, 소득 자격과 소득 능력을 분리하라는 것이다. 어렵게 들릴지 모르나 기업은 노동자를 채용하려고 애쓰고, 노동자는 실업자와 노동시간을 나누고, 정부는 실직자가 살아갈 수 있도록 기본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면 된다. 정부는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실직자가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다시 경제활동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었기에 제2, 제3의 인생을 설계할 필요가 있는 고령인구에 관한 정책도 같은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한다.이런 상황이니 올해만은 제발 취직을 못한 취준생을 괴롭히지 말 것!

2019-09-10

다시 ‘태풍’이 불어 온다-최인훈의 ‘태풍’을 읽고

한국과 일본의 무역 갈등으로 감정이 격하다. 이런 가운데 최인훈의 ‘태풍’의 일독을 권한다. 이 작품은 1973년 1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 243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주인공인 오토메나크는 나파유의 장교이긴 하지만, 사실 애로크인이다. 그는 오랫동안 니브리타의 식민지였다가 나파유의 식민지가 된 아이세노딘에서 포로감찰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충직함과 충성심을 아는 상부에서 오토메나크에게 중요하고 긴요한 임무를 맡긴다. 그것은 아이세노딘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지도자인 카르노스를 보호감찰하는 일이며, 카르노스를 포함하여 40명의 니브리타 포로들을 나파유와 아이세노딘의 휴전을 위한 조건으로 석방 및 호송하는 임무다.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토메나크는 우연히 니브리타인이 숨겨놓은 비밀창고에서 비밀문서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니브리타가 아이세노딘을 지배하면서 벌였던 만행을 소상히 알게 된다. 오토메나크의 생각은 여기에서 자라나 나파유의 지배방식 역시 니브리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자신이 그토록 신봉했던 나파유의 지배담론이 지닌 허위와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토메나크는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일부러 잊으려고 했던 사실, 피식민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오토메나크는 카르노스의 독립 전쟁에 동참하여 아이세노딘를 독립시키는데 독립투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태풍의 주요 무대는 아이세노딘이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파유의 장교인 오토메나크다. 세계 어디에도 아이세노딘이나 나파유란 나라는 없다. 완전히 가상적 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첫머리에서 서술자는 “유럽인들이 극동 혹은 동북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아니크, 애로크, 나파유라고 불리는 세 나라”가 모여 있으며, 그 중 아니크는 “지구 표면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큰 대륙”이며, “에로크는 그 동쪽 끝에 붙은 반도이며, 나파유는 이 반도를 활 모양으로 바라보는 몇 개의 섬”으로 된 나라임을 밝히고 있다.이 가상의 나라들은 실제의 지명과 공명하고 있다. 아니크는 중국, 애로크는 한국, 나파유는 일본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철자순서를 바꾸어 이름을 아나그램(angram)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원래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아이세노딘’은 ‘인도네시아’를 거꾸로 표기한 것이며 ‘로파그니스’는 ‘싱가포르’이며 ‘나파유’는 일본이며 ‘애로크’는 ‘코리아’(한국), ‘오토메나크’는 ‘가네모도’(금본)이다.이 공간속으로 ‘태풍’이 불어온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태풍’은 몇 가지 의미를 내함하고 있다. 먼저, 이 소설의 말미에서 오토메나크가 탄 배를 전복시키고 표류시키는 실질적인 위력을 지닌 일반적 의미의 ‘태풍’(颱風)이 그 하나다. 둘째 오토메나크의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식민모국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오토메나크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식론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 ‘태풍’은 그러한 혼란과 그로 인한 인식의 전복을 상징한다. 셋째 ‘태풍’은 개인의 인식 전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힘으로 형상화된다. ‘태풍’이 지나간 후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상황은 약소국의 동맹을 통해 극복된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태풍’은 주인공의 철저한 자기반성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새롭게 세계질서를 재편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연재되었을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 소설은 파격적이다. 왜냐하면 친일과 반일, 협력과 저항의 이분법적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을 등치시킨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열강은 정의를 지키고 세계 평화를 유지한 국가가 아니라 단지 독일이나 일본과 다를 바 없이 식민지를 지배했던 국가라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이 보기에 독일과 일본은 파쇼적 전체주의 국가라면, 일본의 관점에서 미국과 영국은 귀축(鬼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서방의 열강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선(善)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 것이다.1990년대까지도 일본문화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고, 일본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말을 하면 ‘친일파’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아직도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 경기는 ‘한일전(韓日戰)’으로 불리며 관중들은 전쟁에 참여하듯 응원을 보낸다. 그런데 최인훈은 한일협정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던 1970년대에, 일본과 미국을 동일선상에서 다루었다. 한국을 전쟁의 포화 속에서 구했으며, 우리나라에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영원한 우방인 미국 역시 제국주의 국가이며 식민모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은 당대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식민지를 거느렸던 국가들과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탈식민주의 이론이 성행하면서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탈식민주의는 1960년대 파농, 에드워드 사이드 등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하면서 한 시대를 휩쓴 문학연구 방법이자 문학이론이다. 이 이론은 1990년대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탈식민주의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전에 탈식민주의를 관통해버린다. 많은 훌륭한 작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2019-09-03

변화를 강요당한다는 것-푸레이의 죽음에 대해

푸레이(傅雷)는 1908년 상하이에서 태어났다.프랑스 유학 후 대학에서 미술사와 프랑스어를 강의했다. 이러한 푸레이는 부인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길지 않은 그의 유서에는 그가 자살한 이유와 함께 자잘한 당부가 담겨 있다.소위 반당죄의 물증(작은 거울과 퇴색한 옛 화보 한 장)이 우리 집에서 발견된 물증 때문에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길이 없으나, 우리는 죽어도 우리 물건이란 걸 인정할 수 없네(정말 맡긴 상자 안에서 발견된 것이네). 우리에게 다른 죄가 있다면 몰라도 지금껏 반당적 사상이 없었네. 우리도 발견된 물증 때문에 입이 있어도 변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영명한 공산당의 영도와 위대한 모(毛)주석의 영도 아래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은 결코 그것 때문에 중형을 판결하지는 않을 거라 믿네. 다만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사는 시간은 감옥에 있는 것보다 더 힘드네. …략… 부탁하는 몇 가지 일은 아래에 적었네.1) 9월분 집세 55.29원을 대신 납부하여 주게(현금이 있네). …략…11) 현금 53.30원은 우리 화장 비용으로 써주게. …략…13) 기타 가구는 자네가 처리하게. 책과 글씨, 그림은 관련 부서의 결정에 따라 처리하게.자네에게 수고를 끼치게 되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지만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 이해해 주기 바라네.1966년 9월 2일 밤공산주의 국가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직전 동양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이었던 상하이, 그곳에서 주로 프랑스 문학을 번역했던 국제인 푸레이의 유서는 단호하지만, 어떤 비장함도 슬픔도 없다. 일상적이고 사무적인 일을 부탁하는 듯한 이 유서는 그래서 더욱 더 슬프다.1966년, 중국 내에 잔존하는 부르주아 세력을 타도한다는 명목 아래 실시된 문화대혁명의 열기로 뜨거웠다. 회의주의자이자 비판적 지식분자로 낙인 찍혔던 푸레이는 가택수색을 당하게 되고 ‘작은 거울과 퇴색한 옛 화보 한 장’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모택동과 대척점에 있었던 장개석과 관련된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자는 푸레이의 고모가 맡긴 상자였고, 그 상자에 원래부터 저러한 물건이 들어 있었는지 푸레이는 알 길이 없었다. 푸레이는 끝까지 그 상자의 주인을 말하지 않았고 대우파분자(大右派分子)로 몰려 사형은 아니더라도 감옥에 가야할 신세였다.그는 감옥에 가는 것보다 죄를 뒤집어쓰고 사는 시간이 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죄를 뒤집어쓰고 사는 시간’이란 개인에 국한된 시간이 아니라 중국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실제로 문화혁명 동안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모두 재갈이 물린 채 살아가게 된다. 말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일, 당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지식인은 죄가 있든 없든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을 푸레이는 단호히 거부했다.그랬다. 푸레이는 프랑스에서 4년 동안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서구의 자유로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등을 깊이 체화하였을 것이다. 그가 살아온 삶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50년 이후의 삶의 방식과는 너무도 격차가 컸을 것이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그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내려놓지 않았다. 1958년, 푸레이의 아들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부총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자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즉 우파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이후 재갈이 물린 비판적 지식인은 허무와 비관주의에 휩싸였다. 그가 죽은 것은 1966년이나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이 영국으로 망명한 1958년부터 그의 죽음은 시작됐다. 그 죽음의 완성이 1966년일 뿐 그가 죽은 해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죽은 채로 살아온 자의 유서라고 해도 그의 유서에는 덧붙일 말이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푸레이는 유서에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호소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다만 유서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자신의 물건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명시하고 있는 것은 예금, 현금가구, 시계 등 사소한 것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것들은 이미 그의 일부가 되어버린 물건, 자신의 과거가 기입된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부르주아의 사적 소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전에 이미 그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물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유서를 하나의 알레고리로도 읽을 수 있다. 공산화되기 이전에 형성된 자신의 가치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에 대한 신념, 이것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이미 자신의 몸이 되어버린 사유와 사상들, 영국으로 망명한 아들까지 버려야 하는 사회, 결코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것들마저 버리게 하는 사회에서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이전 사회에서 흘러 들어온 찌꺼기”였고, 홍위병 입장에서 보면 그는 구제불능이었을 것이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화를 강요하는 변화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변화 앞이라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2019-08-27

태평양전쟁, 그리고 경성과 상해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 그러니까 현재의 서울은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촌과 조선인이 거주하는 북촌으로 분리되었다. 그 역사는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 2월 주한 일본대리공사가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일본공사관과 영사관 주위에 집단거주를 요청하면서 거주가 시작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진고개 일대 충무로, 명동에 이르는 지역은 완전한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변모되었다. 특히, 1911년에 개설된 황금정(현 을지로)은 일본인 거주지를 청계천변까지 확장시키면서 본정통(현 충무로)과 함께 일본인 주거지의 중심가로로 성장한다.특히 본정통은 가장 먼저 일본 민간자본에 의해 형성된 지역이라는 특성상 일본식 목조2층 건축에 의한 전형적인 일본식 가로 경관을 갖고 있었다.난징조약으로 개항하게 된 상하이는 1843년 영국과 후면조약, 1844년 미국과 왕샤조약, 프랑스와 황푸조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자국의 국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치외법권 지역이 만들어졌다. 영국이 제일 먼저 토지를 빌려 와이탄 도로를 중심으로 거리를 조성했고 미국과 프랑스가 뒤를 이어 조계지를 만들었다. 그 후 1861년 화이하이루 지역에 프랑스가 단독으로 조계를 차지하게 되었고 1863년 영국과 미국이 공동 조계가 되어 와이탄과 난징루 지역을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일본과 조선은 하나의 나라라는 의미의 ‘내선일체’를 사상적으로 주입했다. 하지만 이 말의 허위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경성은 남촌과 북촌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상하이 역시 경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하이시는 조계지와 비조계지로 엄격히 분할되었다. 이러한 분리 속에서 경성과 상하이는 근대성을 대표하는 고층빌딩이 들어섰으며, 근대적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호텔, 백화점, 커피하우스, 댄스홀, 극장과 영화관, 공원과 경마장 등이 생겨났다.경성의 경우 1910년대까지만 해도 균형을 이루던 북촌과 남촌의 경제력은 1920년대에 이르면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경성부내 주요 공공건물 중 북촌에 위치한 것은 식민지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하나에 불과했으며, 주요 건축물은 남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상권성장과 변화를 주도한 것은 근대적 유통구조인 백화점의 급속한 확산이었다. 주요 간선도로에는 근대적 상업시설과 은행사옥과 지점들이 빠르게 지어졌고, 재래상권도 백화점을 필두로 하는 근대적 유통구조와 서비스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경성의 주요 간선도로변의 경관을 빠르게 변모시켰다. 카페와 함께 주목할 수 있는 것이 극장이다. 카페가 당시 지식인 교류장소의 역할을 수행했다면, 극장은 일반의 대중적 오락기능을 수행했다. 이 무렵 서울에 설립된 서대문의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1935)은 장식이 제거된 차가운 무채색으로 포장된 전형적인 근대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신파극의 중심극장이었으며, 한국 사람을 위한 극장으로는 단성사·조선극장·우미관 등이 종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밖에 일본인의 영화관으로 황금좌, 약초좌, 명치좌, 희악관, 대정관 등이 있었다.상하이의 조계지 조성 초기에는 와이탄의 스카이라인은 영국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영국영사관, 팰리스호텔과 같은 영국식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1920년대부터 파크호텔과 같이 높고 내부에 아르데코 형식이 더해진 현대식으로 설계된 미국식 건물들이 생겼다. 또 1892년 난징루에 최초의 백화점인 홀앤 홀츠가 개장을 하고 위크백화점, 레인 크로우포드 백화점 등이 잇달아 개장하였다. 1930년대 백화점은 유럽풍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적용해서 고급스럽고 웅장함을 보여주고 소비자에게 이국에 온 것 같은 환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의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성은 1937년, 일본이 군벌체제를 갖추고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하면서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경성의 철도와 철도역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전용된다.또 대공 취약성을 강화하기 위해 곳곳에 방공시설이 확충되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일정한 구역 내에서 ‘건축물의 건축금지, 제한 또는 철거’ 등 물리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상하이 조계는 1845년부터 약 100년간 계속 되다가 1937년 중일전쟁과 제2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의 통제하에 놓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은 공동 조계에 진주하면서 영국인, 미국인을 억류했다. 1943년 난징의 왕조명 정권이 공식으로 공동조계, 프랑스 조계를 접수하면서 조계의 역사는 끝을 맺었다.태평양전쟁과 함께 경성과 상하이는 일본의 영토가 되었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내부 속의 외부로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전쟁도 전쟁이었지만, 내전에도 상시 대비해야 했다. 전쟁 동안 경성과 상하이는 내부이면서도 동시에 외부로 존재하고 있었다.상하이에 살았던 장아이링은 1943년 ‘봉쇄’라는 소설 속에 식민지 도시가 처한 상황을 재현했다. 이 소설은 상하이 공습 시기의 어느 전차 위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공습으로 인해 봉쇄를 알리는 종소리가 땡땡 울리자 소심한 남자가 원래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여성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들은 점차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 가능성까지 얘기하게 된다. 몇 시간 후 공습이 해제되고, 전차는 다시 출발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는 원래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는 이를 통해 깨닫게 된다. “봉쇄 순간의 모든 일들은 발생하지 않은 것과 같았던 것이다. 상하이 전체가 잠에 빠져 들고,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이다.”이 소설은 어쩌면 전쟁 전 식민지 도시가 이룩한 근대적 발전이 꿈과 같은 것임을 알려주는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경성과 상하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식민본국인과 피식민지인과 같이 대립을 실체화하는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었다.이러한 분할 또는 이항대립은 잘못된 관념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지만 엔블록으로 구체화되었고, 엔블록은 다시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주변을 분할하여 다시 중심과 주변을 만드는 일이나, 중심을 분할해 이것을 다시 중심과 주변을 만들려는 이유는 동일한 이유에서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그것은 중심이나 주변이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중심은 현전적 존재자의 형태로 사유될 수 없다는 것, 중심은 자연적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중심은 고정된 장소라기보다 어떤 기능이며 기호의 대체가 무한히 일어나는 일종의 비장소라는 것”이다.중심으로 인해 주변이 생겨나고 주변은 중심의 영향을 받게 된다. 중심은 주변을 동질화시키려는 제스처만 취할 뿐 결코 동질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중심에서 벗어날 때 억압도 배제도 사라진다. 중심과 주변의 끊임없는 분할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런 비싼 대가를 치르고 세계는 ‘탈중심’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심과 주변을 나누려는 욕망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세계의 한 편에 도사리고 있다.

2019-08-20

칸트와 기술과학 시대

△칸트의 물음기술과학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칸트(Immanuel Kant·1724∼1804)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칸트 씨의 말을 들으려면 우선 칼리닌그라드로 가야한다. 칼리닌그라드는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령이 되면서 동유럽의 변두리 도시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한때 이 도시는 독일의 정신적 수도였다.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기 전 이 도시의 이름은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이곳은 근대 통일독일의 모태가 된 프로이센의 발상지였으므로 정치 중심지를 베를린에 둔 뒤에도 프로이센 왕들은 대관식만큼은 쾨니히스베르크를 고집했다. 동프로이센 지방의 중심이며, 해외 무역의 요지인 이 도시는 서구 근대사회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계시민도시의 성격을 띤다. 바로 이곳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태어났다.칸트는 이 사랑하는 거리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독일의 정신과 새로운 근대적 기운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칸트는 인간의 삶과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에 대해 고민했다. 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그러면서 생산방식도 변하게 만들었다.예컨대 이런 것들 말이다. 하나의 제품을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 수도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해나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주방에서 한 사람이 재료를 다듬고,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것보다는 일을 나누어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어떤 물건을 만들 때 전 과정을 습득하여 경지에 오른 사람을 우리는 장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분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일의 전체가 아닌 부분만 습득하면 된다.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이 만든 물건에는 그만의 혼이 실리고 독특한 흔적이 남지만, 노동자가 만든 물건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노동자는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능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고유성과 존엄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계몽주의는 이러한 시대에서 촉발된 철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삶을 이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비판한다”라는 자발성 철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을 펼친 인물의 중심에 칸트가 있다. 인간의 이성(순수이성비판), 실천(실천이성비판), 판단력(판단력비판), 윤리(윤리형이상학)가 중심주제였다.칸트의 철학은 인간과 인간의 이성에 관한 관심으로 귀결된다. 인간이 무엇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가진 인식 범위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식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인식 범위 안에 있다. 이 범위를 뛰어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안다고 할 수 없다.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세계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고 세계가 있다.대상을 관찰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얻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인식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인간은 유한하며 편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그 한계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인간의 윤리라고 한다.공학기술 발전은 인간을 위해, 인간의 편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기술은 수단이며, 인간은 기술의 목적이다. 이것은 이윤추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돈을 버는 일은 인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목적과 수단이 역전되는 시대다. 그래서 기술과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고, 인간이 그 수단으로 동원된다.칸트는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전도 현상을 문제삼았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목적을 잃고 이윤추구에만 집중하게 될 때 그 수단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인간은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이것을 ‘인간소외’라 부른다.△수단과 목적이 전도하는 시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수단과 목적이 뒤집힐 수 있는 시대,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 인간을 부여잡아야 한다. 과거 르네상스가 신이 아닌 인간을 중심적 가치로 두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듯이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인간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르네상스는 예술이나 인문학과 공학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인간친화 기술이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문제가 발견되기만 하면 혹은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그 답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한다. 이 말이 오만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것이 거의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날기를 꿈꾼 인간은 결국 날게 되었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와 무게의 쇳덩이를 날 수 있게 만들었다. 우주가 궁금해지자 인간은 결국 우주탐사를 떠났다. 공학은 마음먹은 것을 분명히 이뤄내고야 만다. 공학의 이 엄청난 성취 앞에 순기능과 역기능도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게임의 폭력성과 중독성이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켜도, 원자력 발전의 폭발의 위험성을 앉고 있음에도 이런 문제들이 무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사회는 이런 문제는 미뤄두고 더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기술 개발에만 몰두한다.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때 인간의 삶은 피폐해진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이런 문제에 공학이 직접 나서야 한다. 윤리사회로의 길은 정치와 교육의 몫이기도 하지만 공학의 몫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겠지만, 그 변화를 무작정 따라간다면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이 양면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교육제도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제도는 공학만을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공학만큼이나 인문학·예술 등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공학자가 인문학이나 예술교양을 쌓아야 하듯 인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도 공학교양을 쌓아야 한다. 이런 융합교육이 불투명한 미래를 투명하게 만들 것이다.미래는 미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형성된다.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때 미지로 남겨진 미래는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미래에 대한 준비는 국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몫이기도 하다. 미래의 일을 미래에 준비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준비해 나가야 한다. 오늘이 미래를 결정한다.

2019-08-13

감성교육과 캘리그래피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은 디지털 미디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과거는 오프라인 만남이 중심이었으나 오늘날을 컴퓨터 이메일과 메신저, 문자 메시지, SNS 등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컴퓨터, 핸드폰 단말기, 디지털 미디어 기술의 발달이라는 하드웨어적 환경과 함께 오프라인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충족하려는 욕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디지털 미디어의 대표적 예로서, 컴퓨터 미디어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글자를 입력하고 출력하는 것이 빠르고 편리하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이용하면 입출력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잘못된 부분을 빨리 고칠 수 있고, 수정 횟수에 제한이 없다. 셋째, 컴퓨터는 모니터에서 출력이 되기 때문에 주로 시각을 이용한다. 넷째, 오프라인에 비해 공간적 제약이 덜하다. 시간만 약속하면 어디서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며, 자신이 할말을 메시지 형식으로 남길 수 있으므로 시간의 제약도 적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컴퓨터는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교육적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는 시각과 청각에 국한되며 키보드와 마우스 입력 방식은 학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정형화된 컴퓨터 글씨로 제약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컴퓨터의 입력방식이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인적 표현의 욕구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비록 이모티콘, 영상, 기형화된 상징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개성과 표현 욕구를 표현할 수 있지만, 이것 역시 억압되고 왜곡된 정형화된 입력 방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것이 감성교육이다. 감성교육의 중요성은 루소에 의해 언급되었다. 루소가 비록 감성교육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감성을 통한 공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원시인들과 현대인을 비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원시인들은 자기애와 연민이라는 자연적 미덕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기애란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려고 하는 것과 같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말한다. 자기애로부터 출발한 자기보존능력은 현대인의 욕망과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사자는 배가 고프면 임팔라를 잡아먹지만 배를 채운 뒤에는 더 이상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이렇듯 자기애는 무한한 욕망이 아니라 자연적 한계를 가지는 유한한 욕망이다.의식주와 같은 본능적 욕망에 있어서 자연적 한계가 있다는 것은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될까? 자기애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원시인은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루소는 현대인과 다른 원시인의 매우 중요한 특징으로 연민 즉 공감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장한 원시인이 약한 어린 아이나 노인이 어렵게 획득한 식량을 강탈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연민 때문이다. 원시인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인 연민에 의해 타인도 자신처럼 자기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스스로의 자기애를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사회적 관계가 긴밀해지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점점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사회 상태에서 발달한 인간의 인성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여 자신을 흔들어 놓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외부의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다. 그리하여 자기애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는 자존심으로 대체되고, 자신보다 못한 자에 대한 연민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신보다 나은 자에 대한 시기심만 남게 된다고 루소는 말한다.루소의 말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현대사회에서 감성보다는 이성이,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감성지능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능력을 말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감성을 발달시키는 일은 공존과 공생을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오감을 자극해 이루어지는 감성교육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현재 교육기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리기를 통한 놀이이다. 흔히 심리학자들은 아이가 그리는 그림이 그 아이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그림 속에는 성격이 반영되기도 한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표현과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형성할 수 있으며 이러한 그리기 놀이를 통해 교육하는 이유는 놀이는 아이들의 일상생활이며 그 자체가 학습활동이 되어 놀이를 통해 정신적인 즐거움을 맛보게 되며, 다양한 감각 능력과 기능을 습득함으로서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이의 방법으로 캘리그래피를 적용할 수 있다. 캘리그래피(Calligraphy)란 ‘손으로 그린 그림문자’이다. 원래는 ‘아름다운 서체’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Kalligraphia에서 유래된 말이다. Calli는 미를, Graphy는 화풍, 서풍, 서법, 기록법의 의미를 갖고 있다(시사상식사전). 우리나라는 먹물을 묻힌 붓을 한 번의 획으로 써 내려가는 것을 예술로 여겨 서예, 일본은 이를 도의 경지라 하여 서도, 중국은 정해진 법칙대로 쓴다 하여 서법이라 칭한다. 서양의 경우, 동양권과 다르게 한자의 사용이 아닌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글씨를 쓰는 도구나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서양의 서예는 웨스턴 캘리그래피(Western Calligraphy)라고 부른다. 사실, 캘리그래피는 문자로서의 의미 전달 뿐 아니라, 조형미를 갖춘 예술로서의 역할도 한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형태, 유연하고 동적인 선, 살짝 스쳐가는 효과, 글씨의 굵기, 여백의 균형미 등 순수 조형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뜻한다. 캘리그래피의 발전은 15∼16세기 이탈리아 문화에서 중세의 고딕적 경향이 물러가고, 예술의 자율을 존중하는 시대가 오자 많은 서예, 출판, 유통과 과정이 함께 활발해 졌다. 즉, 개성적인 표현과 우연성이 중시되는 캘리그래피는 기계적인 표현이 아닌 손으로 쓴 아름답고 개성 있는 글자체이다. 캘리그래피는 기계적 입력이 아니라 자신의 손과 손의 힘을 직접 조절하고, 펜이나 붓을 자신의 통제 안에 두는 훈련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21세기는 감성이 뛰어난 창의적 인재를 기대하며 긍정의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능력 등을 필수적으로 꼽고 있다. 따라서 어렸을 때 감성을 깨우며 그러한 능력을 길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받아들여 가슴으로 충분히 느끼며, 상호 작용하여 내면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019-08-06

바람이 불어오는 곳

△도시 공간 혹은 도시 장소도시의 바람이 도시에 갇혀 유령처럼 떠돈다. 자전거를 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바람이 불었다. 시원하지 않았다. 중간에 몇 줄기의 비를 맞았음에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더운 날이다. 더운 날의 도시는 정말 최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도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우주공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우주장소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역시 도시공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도시장소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반대로 약속장소라는 말 대신 약속공간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때, 곳, 등장인물 등을 알려주는 연극의 무대지시문에서 ‘곳’은 장소로 바꿔 쓰기도 하지만 공간으로 쓰는 법은 없다. ‘곳’은 장소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나 공간을 뜻하는 순우리말은 없다.이것은 중요한 점을 내포하는데, 우리는 공간보다 장소를 더 익숙한 ‘말’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단지 언어적인 측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우주공간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며, 도시공간은 우리 삶의 공통적이고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없는, 익숙해지기 어려운 곳이다. 도시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도시 속에서 나의 생활주거지는 공간이라는 말 대신 장소라고 부른다. 공간은 언어적로도, 공간의 실제적 대상으로서도 우리와 익숙하지 않다.공간과 장소의 차이는 비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공간과 장소에 대해 깊이 탐구한 사람은 중국계 미국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이 문제를 방대하고도 치밀하게 다뤘다. 매우 복잡한 공간과 장소의 차이를 단순화 하면 그 핵심에는 시간이 놓인다.장소는 공간과 달리 시간이 작용하는 곳으로 시간과 함께 지내온 추억이나 흔적이 묻어 있다. 공간은 인간이 들어서기 위한 빈틈이지만, 장소는 그 공간을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 친숙하고 익숙해진 곳이라 할 수 있다.이렇게 보자면 공간과 장소를 나누는 핵심적 요소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객체에 사심 없이 열려 있지만, 장소는 인간을 향해서 열려 있다.공간이 장소로 변화하는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시베리아 유목민들의 집짓기일 것이다. 그들은 나무를 세워 집의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짐승의 가죽을 두른다. 건축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기도 한 함성호는 이렇게 썼다. “나무를 둥그렇게 모아 세우는 것은 곧 시간을 세우는 것이고, 거기에 짐승의 가죽으로 덮는 것은 공간을 두른다는 의미다. 즉 시간을 세우고 공간을 둘러서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을 더해 사차원 시공간이 완성되는 것”이다.1960~70년대까지 도시는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공간이 아니라 산업이 활성화되는 공간이었다. 서구의 도시성립이 그러하듯 우리나라의 도시 역시 공장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공간이 도시였다.사람들에게 도시는 일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컸을 뿐 생활을 하는 ‘장소’라는 인식은 낮았다. 산업화의 황금기가 지나면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의 성장은 멈추게 되었다.멈춤과 함께 도시는 쇠퇴하게 된다. 종로와 을지로는 조명, 인쇄, 가구, 금형 등의 점포가 과거의 흔적처럼 남아 있다. 70~8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했던 이 지역은 현재 서울의 중심부에서 가장 쇠락하고 퇴락한 곳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런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젊은이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이균진, 2016).공간으로 규정되었던 도시를 장소로 이전시키려는 노력을 도시재생(Regeneration)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시개선 및 개발과 관계된 개념으로는 재정비(Renewal), 활성화(Revitalization), 재개발(Redevelopment), 재생(Regeneration) 등이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대는 ‘재건’, 60년대 ‘활성화’, 70년대는 ‘재정비’, 80~90년대 ‘재개발’, 2000년대는 ‘재생’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재건, 재정비, 활성화, 재개발이 도시를 경제와 산업적 측면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공간’활용에 주목했다면, 도시재생은 도시를 인간의 생활과 활동에 중점을 두어 ‘장소’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슈투트가르트로 부는 푸른 바람그렇다면 성공적인 도시 재생을 이뤄낸 도시로 가볼까. 슈투트가르트(Stuttgart)는 독일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전기, 자동차, 정밀기계, 광학기계, 출판업 등이 활발한 공업도시다. 그런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도시이기 때문에 기온역전 현상이 일어나며 오염물질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아 대기오염이 심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환경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일까? 슈투트가르트는 1970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공장과 자동차 등 대기오염의 주원인에 대한 규제를 마련했다.분지 안에 머무는 공기를 확산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이것이 ‘그린 유(U)’ 프로젝트로 우리나라에는 ‘바람길 조성 정책’으로 소개됐다. 이 프로젝트는 바람을 중심으로 생성, 수혜, 이동 지역을 구분하고 이를 관리하였다. 공기가 만들어지는 지역인 산지, 숲, 하천, 공원 등을 철저히 보존하였고, 이러한 바람이 이동할 수 있도록 공기의 흐름을 막는 건물 배치를 바꾸었고, 수로와 산책로 등을 통해 바람이 수혜지역인 도심으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도로주변에는 교목을 심고 도시 중앙부는 150m 폭의 녹지를 조성하여 바람통로가 제 기능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기오염을 현저히 줄이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그 결과 슈투트가르트는 공업 도시보다 녹색도시로 더 유명해졌고, 경제적인 부를 얻음과 동시에 깨끗한 환경까지 유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05년 독일의 시사 주간지 ‘포쿠스’는 삶의 질 측면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이 도시를 뽑았다(전국지리교사모임, 2009: 188). 이를 통해 슈투트가르트는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되었으며, 도시의 인지도가 올라가 이주하고 싶어하는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도시민의 삶의 질 역시 향상되었다. 따라서 슈투트가르트의 도시 재생은 단순히 도시 환경 개선에 그치지 않고 쇠락해가는 도시 전체를 재생시킨다는 생태적 도시재생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19-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