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요금 고지서 앞에서
포항 죽도시장 인근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52)씨는 매달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한숨이 깊어진다. 에어컨과 커피 머신, 냉장고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여름철이면 요금은 평소의 두 배 가까이 뛴다. 전기요금이 오르는 이유를 물어도 ‘전력 수요가 늘어서’, ‘연료비가 올라서’라는 답이 돌아올 뿐, 정작 자신이 쓰는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같은 시간, 한국전력의 전력망 어딘가에서는 인공지능(AI)이 김씨의 동네 변압기를 지나는 전력 흐름을 들여다보고 있다. 언제 전기를 더 끌어와야 하는지, 어느 발전소를 가동해야 탄소를 가장 적게 배출하는지를 AI가 실시간으로 계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에너지·환경 분야는 AI가 가장 조용히, 그러나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는 영역 중 하나다.
■ 탄소를 숫자로 읽어내는 기술
탄소중립을 실현하려면 먼저 배출량을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그동안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사람이 직접 계측해 오차가 컸고, 국내 배출권거래제(K-ETS) 시행으로 정밀한 산정이 중요해졌다. 국내 최대 배출 기업인 포스코는 온실가스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해 MRV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왔다. 최근에는 데이터 분석 기술을 결합해 공정별 배출량을 정밀하게 추적 중이다. 포스코는 전기로 가동과 수소환원제철(HyREX),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기술을 통해 탄소 배출을 줄일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AI는 수천 개 센서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어느 구간에서 탄소가 발생하는지 짚어내는 진단의의 눈 역할을 한다.
■ 전력망에 심어진 두뇌
탄소를 줄이는 또 다른 축은 전력을 똑똑하게 나누어 쓰는 ‘스마트그리드’이다. 발전소에서 가정까지 전기가 흐르는 길 전체에 센서와 통신망을 깔고, 그 위에서 AI가 실시간으로 흐름을 조율하는 방식이다. 한국전력은 아파트 원격검침 체계를 기반으로 AI 기반 분석 및 예측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그리드 확산 사업을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연장 운영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수요 반응(DR)과 가상발전소(VPP) 기반 서비스를 확대하고, AI로 전력 소비 패턴을 분석해 수요를 예측하는 데이터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할 계획이다. 가상발전소란 발전기가 따로 없어도 가정용 배터리나 전기차 충전기처럼 흩어진 작은 전력 자원을 AI가 하나로 묶어 마치 발전소처럼 운영하는 방식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미국의 한 전력회사는 폭염으로 전력 수요가 치솟던 날, 가정용 배터리에 저장된 전기를 한꺼번에 모아 위기를 넘겼는데, 참여 방법은 전용 앱으로 가상발전소 프로그램에 가입하는 것이 전부였다. 구글 딥마인드는 한발 더 나가 미국 중부 700메가와트 규모 풍력발전소를 대상으로 36시간 앞서 바람을 예측하는 AI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으며, 기상 예측 모델 ‘그래프캐스트’를 통해 단기 기후 예측의 정확도도 끌어올리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역시 풍력·태양광 발전소와 전력망 전체를 가상의 쌍둥이로 복제하는 ‘디지털 트윈’ 기술을 통해 설비 고장을 미리 잡아내고 운영을 최적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바람과 햇빛처럼 변덕스러운 재생에너지를 안정적인 전력으로 바꾸는 일에, 이제는 AI가 핵심 역할을 하는 셈이다.
■ 포항, 분산 에너지의 첫 실험장이 되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변화의 한복판에 포항이 서 있다는 사실이다. 경상북도는 지난해 12월 정부가 처음으로 추진한 ‘분산 에너지 특화 지역’ 공모사업 대상지로 포항이 최종 지정됐다고 밝혔다. 2024년 시행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에 따른 첫 특화 지역 지정으로, 포항시 흥해읍의 영일만 산업단지 약 444만 제곱미터를 무대로 그린 암모니아를 활용한 수소엔진 발전 실증이 추진된다. 쉽게 말해 화석연료 없이 암모니아로 발전기를 돌려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전기를 만들고, 이를 산업단지 안의 공장에 직접 공급하는 모델이다. 그동안 분산 에너지 정책은 전남 나주나 제주처럼 비교적 일찍 움직인 지역이 주목을 받았던 터라, 경북은 한 걸음 늦게 출발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사업은 건설사와 에너지 기업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이 분산 에너지사업자로 추진하며, AI 기반 에너지관리시스템이 발전·저장·수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묶어 전력 흐름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풍력이나 태양광처럼 날씨에 따라 출력이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와 달리, 암모니아 수소엔진은 필요할 때 원하는 만큼 전기를 만들 수 있어 AI가 수요 변화에 맞춰 출력을 정밀하게 조절하기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일만 산업단지에는 2차 전지 소재 등 전력을 많이 쓰는 제조기업이 속속 들어서고 있어, 늘어나는 전력 수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분산 전원이 필요했던 참이다. 경북도는 이번 지정이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은 물론, 2026년 시행되는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대응을 위한 무탄소 전력 확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AI와 분산에너지를 결합한 첫 국가 실증 무대를 포항이 유치한 셈이며,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경북의 다른 산업단지로도 모델이 확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 소상공인과 시민에게 다가오는 변화
이런 거대한 산업 설비 이야기가 죽도시장 카페 사장님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스마트그리드가 고도화되면 시간대별로 전기요금이 달라지는 요금제가 확대되고, AI가 가정과 상가의 전력 사용 패턴을 분석해 가장 저렴한 시간에 전기를 쓰도록 안내하는 서비스도 늘어난다. 예를 들어 새벽 시간에 매장 냉장 설비를 미리 가동해 두거나, 전력 수요가 몰리는 시간을 피해 영업 전 준비 작업을 옮기는 식으로 요금을 조금씩 줄일 수 있다. 한국전력이 추진하는 1인 가구 안부 살핌 서비스처럼, 전력 데이터를 활용해 홀로 사는 어르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사회적 서비스도 함께 자라나고 있다. 소상공인 입장에서는 당장 설비를 새로 들이지 않아도, 전력 사용 시간을 조금만 조정하면 요금을 아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다만 이런 혜택을 누리려면 관련 정보를 미리 알고 신청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지역 상공회의소나 지자체의 안내가 중요해지고 있다. 농어촌 지역의 작은 사업장일수록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 만큼, 포항시와 경북도가 운영하는 소상공인 지원센터 등을 통한 적극적인 홍보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빛과 그늘
AI가 만드는 변화에는 그늘도 있다. 전력 소비 증가와 전기차 충전, 데이터센터 수요 폭증이 전력망에 부담을 주고 있으며, AI 자체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기술이라는 역설도 존재한다. 또한 전력망이 사이버 공격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커진 만큼 보안 투자가 필요하며, 현장 인력이 AI로 대체되면서 일자리의 형태가 바뀌는 것도 지역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기술 보급과 함께 중소기업을 위한 인프라 지원, 보안 표준 마련 등 정책적 뒷받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 사람에게 남는 질문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기술의 힘이 커질수록 그 책임은 당장의 이익을 넘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까지 미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원자력과 유전공학이 화두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탄소와 전력망을 다스리는 AI에도 같은 질문이 그대로 적용된다. AI가 탄소를 정확히 읽고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능력을 갖췄다고 해서, 무엇을 줄이고 누구에게 비용을 나눌지를 정하는 책임까지 AI에게 넘길 수는 없다. 알고리즘은 가장 효율적인 답을 찾아내지만, 그 답이 누구에게는 부담이 되고 누구에게는 혜택이 될지를 가늠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다. 어느 변압기를 먼저 보강할지, 어느 산업단지에 분산 전원을 우선 배치할지를 결정하는 순간에도 결국 그 기준을 세우는 것은 정책과 시민의 합의다. 포항이 그린 암모니아 발전 실증의 첫 무대가 된 것도, 결국 그 전기를 쓰고 그 비용을 나누는 일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전기요금 고지서 앞에서 한숨짓는 시민과 막대한 비용을 들여 탄소 감축 설비에 투자해야 하는 기업, 그리고 새로운 산업단지를 유치해야 하는 지역 정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은 결국 사람의 판단으로 남는다. AI는 그 판단을 도울 정교한 도구이지, 판단을 대신할 주체는 아니다. 데이터가 아무리 정밀해져도, 그 데이터를 어떻게 쓸지 정하는 마지막 순간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을, 이번 사례는 다시 한번 보여준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