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넓얕과 알쓸신잡의 공통점‘지대넓얕’(2014, 한빛비즈)과 ‘알쓸신잡’(2017.6, tvN). 이 둘의 공통점은? 앞에 것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줄인 말이고, 뒤에 것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다. 하나는 책이지만 다른 하나는 TV프로다. 둘의 공통점은 네 자로 된 줄임말이다,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아주 확실한 눈썰미만 가졌군요.이런 것들이 유행하는 현상을 두고 한 비평가는 인문학적 재미가 위안을 주고, 이런 위안은 ‘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정지우, ‘인문학적 교양과 예능의 결합, ‘쇼양’의 문제’). 아하, 그렇다면 당신은 이 둘의 공통점이 인문학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군요? 세상에, 자본주의 시대에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어디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인문학을 상품화했다고 비판하다니, 이 분도 보통 ‘꼰대’는 넘는다.공통점도 조금 초점이 빗나갔다. ‘지대넓얕’이 숨긴 말이 ‘잡학’이라면, ‘알쓸신잡’이 감춘 말은 ‘대화’다. 둘은 ‘대화를 위한 잡학적 지식’을 전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화가 ‘쇼통’이라면 그건 맞겠지만, 이들은 인문학이 아니라 잡학을 다룬다. ‘지대넓얕’은 역사, 경제, 윤리, 과학, 신비 등을 다루며, ‘알쓸신잡’에는 유희열(작곡가), 유시민(경제학자), 황교익(음식전문가), 장동선(뇌과학자) 등이 출연한다. 이 정도면 인문학이기보다는 잡학이라고 불러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죠?△잡학의 시대‘잡학’이란 잡스러우며 잡다한 지식을 말한다. 하나에 집중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수다한 지식들’. 한때 이런 잡식을 많이 아는 사람을 ‘다식’한 사람, ‘박학’한 사람이라 불렀다. 하여 ‘박학다식’! 이것이 초기 자본주의 사대의 인재 유형이었다. 싸움, 추리, 연애에도 능수능란한 셜록홈즈 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나를 깊이 아는 전문가형 인재가 인기였다. 화학과 물리학에 능통한 맥가이버 같은.잡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다. ‘지대넓얕’과 ‘알쓸신잡’이 유행이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복사기는 복사는 기본이고 프린터, 스캐닝, 네트워크까지 가능하며, 스마트폰은 전화기이면서 MP3이면서 사진기이면서 간단한 문서작업까지 할 수 있다. 다만 과거의 잡학이 사실의 나열처럼 백과사전적 지식에 그쳤다면, 오늘날의 잡학은 사실을 해석하고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잡학은 깊이 있는 박학이다.특이하게도 “지대넓얕”과 “알쓸신잡”은 ‘잡학’을 스스로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얕다’거나 ‘쓸데없다’고 스스로 명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본심은 아닐 것 같다. “우리도 ‘잡학’이 쓸데없다는 것쯤 알아요, 그러니 우리가 다루는 소재에 대한 공격은 그만! 우리는 재미를 추구한답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평가절하함으로써 비판을 무마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이들이 ‘잡학’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분명하다. 잡학을 개의치 않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 그동안 우리는 지식을 습득하여 이것을 어딘가에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왔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것들이 시험에 도움을 준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스펙’으로는 작용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지식은 무용한 것이었다.‘지대넓얕’과 ‘알쓸신잡’은 무용하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면서 재밌으면 그만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여가와 놀이의 영역 속에 ‘지식’이 들어서고 있다. 사람을 사회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었던 지식, 그래서 ‘교양’이라고 불렸던 것들이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니! 김복남씨가 살아돌아 온다면 “아, 정말 판타스틱하고 어메이징 한 일이에요”라고 말했겠다.△쓸모 없음의 쓸모지식, 교양, 인문학 같은 것들까지 자본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았지만, 이런 것들이 놀이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놀랍다. ‘잡학’이 쓸모없는 놀이라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인문학이 행동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믿음은 얼마나 구태며, 교양이 좋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얼마나 구차한가.이런 말들은 지식과 놀이를 구분 짓고, 지식과 행동을 경계 짓는다. 모든 것들은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배움은 모두 놀이다. 말을 하는 것도 옷을 입고, 젓가락질을 하는 것까지 아이들은 모두 놀이로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친구가 싫어하는지,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지와 같은 사회적 규칙을 놀이를 통해 배운다. 배움과 놀이 사이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우리는 때로 직관적으로 행동한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가진 비의적인 능력이 아니다. 직관은 “인간 지성의 엄청난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다 계산해 정확히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원해야 했던 인간 지성의 약점”에 가깝다(감동근, ‘바둑으로 읽는 인공지능’). 직관이란 결국 경험으로 축적된 지식이다. 행동을 통해 지식은 축적되고, 축적된 지식은 행동을 더욱 세련되게 만든다.그런데 ‘쓸모없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쓸모없음’이라는 단어는 이미 ‘쓸모’라는 말을 품고 있다. 즉 ‘쓸모’를 먼저 떠올리지 않고 ‘쓸모없음’을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쓸모없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쓸모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장자 식으로 말하자면 잡학은 쓸모없음이라는 쓸모를 가지고 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잡학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잡학에 포함된 수다한 학문들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는 사실이다. 학문의 공통점은 당연한 것들, 너무도 자명해 보이는 것들에 의문을 던진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 스스로 그러해서 그러하다고 여겼던 것들 속에서 이유를 발견하고야 만다.역사는 사라진 것들의 파편을 주워모아 사라진 것들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물리학은 현실과 달리 예측불가능한 양자의 움직임을 이해하려 애쓴다. 시인은 모든 인간이 이미 한 번씩은 사용했을 것 같은 이 넓은 언어의 지평에서 새로운 언어의 배열을 기어코 길어 올리며, 공학자는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분위기 속에서 기필코 새로운 기술을 발견해 내고야 만다.실록에서 지워진 광해군의 15일을 추적하고, 힉스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내고, 이상이나 말라르메와 같은 시인은 시를 쓰고, 잡스나 엘론 머스크와 같은 공학자가 기술 전체를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시킨다. 인문학자든 과학자든 공학자든, 이들은 공통적으로 당연해 보이는 것들 앞에 질문을 던질 줄 알며,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미로 속을 헤매다 수없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지만 탈출의 꿈을 멈추지 않는다.이들은 모두 ‘불가능’이라는 상황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다. 불가능함을 알지만 그 불가능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는 사람에게 불가능은 무의미해진다. 불가능을 그냥 버려두면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 불가능에 끝없이 부딪칠 때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가능하기도 한 것으로, 즉 (불)가능한 것으로 바뀐다.잡학을 안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잡학의 쓸모란 어떤 것도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일, 결국 모든 것들은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라 할 수 있다.
2018-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