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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 선희’에게 부쳐

등록일 2018-08-31 20:40 게재일 2018-08-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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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희극적으로 비극적인 삶에 대해
▲ 작렬하는 사막을 걷는 것. 그것이 삶의 형상인지도 모른다. 이소라는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 그대는 내가 아니다 /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고 말이다. 어쩌면 삶이 비극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며, 우리의 삶은 누구와도 같지 않다. 하여 우리의 삶은 고독하다.
▲ 작렬하는 사막을 걷는 것. 그것이 삶의 형상인지도 모른다. 이소라는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 그대는 내가 아니다 /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고 말이다. 어쩌면 삶이 비극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며, 우리의 삶은 누구와도 같지 않다. 하여 우리의 삶은 고독하다.

2011년 개봉한 ‘북촌방향’에서 중원(김의성)은 영호(김상중)와 예전(김보경)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원 : 내가 말예요, 내가 관상에 대해서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거든요. 완전 엉터리예요. 근데 사람들한테 그 뭐라 그럴까, 그 양쪽 극단을 딱 집어주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다 넘어와요. 예를 들어서 내가 여자들한테 그러거든, ‘당신은 그 겉으로 보기엔 아주 외향적인 아주 밝은 성격 같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아주 우울하고 슬픈 그런 걸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바로 나예요. 어머 어머머 정말 맞다. 이런 식으로 나오거든 그러니까 극단을 짚어주면 믿게 돼 있어.

영호 : 사람이 원래 안(내면)에 극단이 있는 거지. 그런데 넘어가는 게 그래서 그런 거야.

중원 : 그렇 테니까….

예전 : 그면은 전 어때요? 전 어떤 사람 같아요?

중원 : 아, 글쎄 제가 관상을 잘 볼 줄은 모르지만

겉보기에는 아주 깔끔하고 실용적인 그런 사람 같지만 속 깊은 데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면이 있는 사람 아닌가? 뭐 그런 것 같은데, 아닌가?

나 진짜 그런데, 어머 소름끼쳐. 아, 저 정말 그래요. 정말 이거 이상하다.

중원은 관상이 지닌 메커니즘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양극단을 가지고 있고, 그 극단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중원의 개똥철학이면서 여성을 낚는 방법이다. 예전은 이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관상을 봐 달라고 이야기한다. 중원은 다시 그 극단을 말한다. 중원의 말에 예전은 자신이 딱 그런 사람이라며 박수까지 치며 신기해한다.

2013년에 개봉한 ‘우리 선희’는 중원이 말한 관상의 메커니즘을 재인용하면서 이를 확장하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문수(이선균), 최교수(김상중), 재학(정재영)은 한 여자를 좋아한다. 그 여자가 선희(정유미)다. 선희를 좋아하는 이유는 ‘순수하고 내성적이지만, 용감한 면이 있으면서 조금 또라이 같지만, 착하고 안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순수와 내성적임의 극단에 용감과 또라이가 있고, 다시 용감과 또라이의 극단에 착함과 뛰어난 안목이 놓여 있다. 즉 이들이 좋아하는 선희는 내성적이고 착하지만 용감하다 못해 또라이 같은 기질 역시 가지고 있다. ‘북촌방향’에서 중원과 영호는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양극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신뢰한다면, 이들이 좋아하는 선희는 꼭 선희가 아니어도 무방하다. 왜? 모든 사람은 양극단을 가지고 있으니까.

선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한다. 유학을 가려는 이유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다. “만약 외국 가게 되면 맘 먹고 깊이 파보려구요.” 그런데 무엇을 깊이 파겠다는 말일까? 선희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파는 이유 혹은 목적은 분명하다. “깊이 깊이 파다보면 제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선희가 유학을 가려는 이유는 자신을 알기 위해서다. 그러하다면 꼭 유학을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학은 핑계일 뿐이다. 선희는 그냥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었던 것. 그래서 세 명의 남자를 찾아간다. 모두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영화과에서 인정받는 남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심지어 서로 친하다. 아니 친하다고 믿고 있는 남자들이다.

남자1은 대학원에 다니면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문수, 남자2는 영화과의 교수이자 이 세 명의 남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최교수, 마지막으로 남자3은 한 때 총망 받던 영화감독 재학이다. 하지만 이 세 남자들은 선희를 이렇게 생각한다.

순수하고 내성적이지만, 용감한 면이 있으면서 조금 또라이 같지만, 착하고 안목이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

선희는 ‘북촌방향’의 예전과는 달리 이 말의 의미를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다. 저 말을 믿었다면 선희는 예전처럼 세 남자 중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었을 것이다. 선희는 오히려 방황한다. 그렇다면 그 방황의 방식은? 이 영화에 삽입된 장면들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장면 1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상우(이민우)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선희의 방황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상우는 선희에게 최교수가 외국 출장을 갔다고 말하면서 선희와 데이트를 하기를 원한다. 선희는 그런 상우의 요청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렇다면 선희는 왜 바쁜 것일까? ‘어디’에 갈 때가 있어서다. 그 ‘어디’는 구체성을 띠지 않은 채 ‘어디’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선희는 우연히 학교 교정에서 최교수를 만나, 유학 갈 학교에 제출할 추천서를 부탁하게 된다.

장면 2

그렇게 최교수와 헤어진 선희는 다시 ‘어디’를 간다. 그곳은 ‘어디’였을 뿐이었고, 선희는 그 ‘어디’를 치킨집으로 정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누구’를 만난다. 그 ‘누구’는 전 남자친구였던 문수였다. 만약 그 횡단보도로 상우가 먼저 건너왔다면 선희는 상우를 만났을 지도 모른다.

장면 3

선희와 헤어진 후 문수는 재학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다. 재학은 전화조차 꺼놓았다. 문수는 재학의 오피스텔 앞에서 재학의 이름을 목청껏 부른다. 재학은 어쩔 수없이 창문을 열고 문수를 바라본다. 재학의 방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만 문수는 거절한다. 왜? 왜냐하면 재학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냥 ‘무엇’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재학이 최교수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리고 문수가 선희에게 전화를 했을 때, 최교수는 선희를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최교수는 재학에게, 선희는 문수에게, 답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선희의 방황의 형식은 분명해진다. 선희는 ‘어디’를 가게 될 것이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어디’, ‘누구’, ‘무엇’의 실체는 끝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선희를 비롯한 세 명의 남자 역시 삶의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없다. 우리도 이와 그렇게 다르지 않는다. 문수와 술을 먹던 재학이 했던 대사는 우리도 곧잘 하는 말이 아닌가.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끝까지 파봐야…. 끝까지 이렇게 파봐야 가는 거고, 끝까지 파봐야 가는 거고, 끝까지 파고 가고, 끝까지 파고 가야 나를 아는 거잖아요? 그리고 파고 끝까지 가고, 그래서……, 끝까지 파고 가고….”

그들이 파려고 하는 ‘무엇’은 그들의 내면이며, 그들이 가고자 하는 ‘어디’는 그 내면의 끝이며, 그들이 만나고자 하는 ‘누구’는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재학의 대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그리고’ 다시 파고 ‘그래서’ 가야한다. 이제 다시 ‘무엇’을 파는지, ‘어디’로 가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그 무엇과 어디와 누구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삶, 이것은 홍상수 영화에 국한된 저 비루한 남자들만의 삶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며, 비루한 이 시대의 삶일 것이다. 그리하여 홍상수의 영화는 이 시대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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