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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삼태봉서 모화리까지-어둠보다 무서운 것들

#1. 경주 삼태봉:지구의 자전 속도기령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6시를 훌쩍 넘고 있었다. 마우나오션 근처에 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경주에서 자고 아침엔 시내를 둘러보고 싶었다. 삼태봉을 지나 토함산까지 여섯 시간. 거기까지 갈 순 없을 것이다. 초행길인데다 랜턴도 없고, 핸드폰 배터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아아, 달빛에 반사되어 달이 되는 호기심호기심이 소년들을 홀려 상봉에서상상봉으로 밤새도록 끌고 다닙니다”―신대철 `칠갑산1` 부분달빛에 반사되어 달이 되고 싶었을까? 상봉에서 상상봉으로 그렇게 밤새도록 끌려 다니고 싶었던 걸까? 산을 향해 발길을 놓았다. 산자락에 걸렸던 해는 빠른 속도로 기운다. 지구는 1초에 약 460m 속도로 돌지만, 나는 아무리 재게 걸음을 디뎌도 채 2m를 걷지 못한다. 이 경기는 이길 수 없다. 지구가 돌고 있는 속도를 몸으로 느낄 수 있고, 저 거대한 지구에 비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인간인 지를 이해할 수 있다. 2016년 4월 1일 경주시각으로 해는 오전 6시 9분에 떠 오후 6시 44분에 진다. 이때부터 지기 시작한 해는 그 긴 여운을 남기고 오후 7시 30분께부터 더는 빛을 내놓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거의 4km를 걸어 삼태봉과 마우나오션과 허브캐슬 갈림길에 닿았다. 허브캐슬까지 2.2km, 마우나오션까지 0.7km, 삼태봉까지 0.3km. 삼태봉을 올라 여기로 다시 돌아와 안내판을 찾아 허브캐슬로 내려갈 수 있을까? 산보다 어둠이 무섭고 어둠보다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안다.#2. 봉천동 청룡산:무서운 것들한 때는 봉천동이라 불렸다. 그곳에 연구실이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흘러내렸고, 나는 우죽거리다 버스를 놓치는 일이 허다했다. 큰 길을 따라 걸으면, 신림 9동 아무도 기다릴 리 없는 내 자취방까지 30~40분이면 족했다. 하지만 밤을 가르는 차 소리가 싫었고, 그 차들보다 느린 내가 싫었다. 굳이 청룡산을 넘었다. 청룡산은 해발 150m에 지나지 않는 산이지만, 그렇게 낮은 자세로 기어 봉천동과 신림을 가르고 낙성대까지 이어진다. 도로는 이 산 둘레를 따라 뻗어 있었다.자정을 맞은 밤은 고요했고 어두웠다. 산을 넘어가면 집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길을 알진 못했다. 산으로 들어서면 차 소리를 잊을 수 있었지만, 매번 길을 잃었다. 겨우 길만 보이는 어둠 속을 걸으며 어둠 저 편이 무서웠다. 도깨비, 여우, 귀신. 이런 것을 만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기실 무서움은 어둠 편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렁였다. 이 어두운 산을 걸어 내려오거나 오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일까, 어떤 끔찍한 일을 저 산 속에 묻어두고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은 제 마음대로 자라났고, 그런 무서운 생각들이 어둑한 사물들에 덧씌워져 실체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정말 무서운 것은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다. 나였다. 정확히는 내가 가진 상상력이었다.▲ 공강일#3. 경주 모화리:“비겁해지는 거래”초행길이었으므로 어차피 거리감각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발을 놓을 곳을 살펴야 했다. 길은 무척 가팔랐다. 가파르다고 했으나,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숫자는 객관적이지만 감각할 수 없었고, 길의 경사에 관해선 주관적이었지만 그 주관이 내겐 훨씬 도움이 되었다. 2.2km. 평소라면 30분이면 충분했겠으나, 길은 끝나지 않았고 어둠은 더 빠르게 짙어지고 있다. 무서운 생각이 나면 노래를 불렀다. 아주 깊은 야산인데도 봉분이 많았다. 그 앞을 지날 때는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이 영면하시길 빌었다. 소는 영민해서 산에서 길을 잃으면 무덤 옆에서 잔다고 한다. 그런 소를 한 마리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가 소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큰 눈을 껌벅거리며 드러누워 되새김질을 하고 싶었다. 아침이 밝으면 무를 먹으리라, 소가 된 게으름뱅이처럼.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내가 저런 곳을 내려왔네, 휴 다행이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소음처럼 들리던 차 소리가 반갑다.영화 `올드보이`의 철웅(오달수 분)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겁나) 용감해질 수 있어.” 단지 그뿐일까. 상상력은 무서움을 낳지만 동시에 상상해야만 가능한 것들도 있다. 상상력을 가진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은 기어이 나를 지나갈 것이다. 견뎌낼 수 있을까. 그와 함께 “그런 일도 있었다”고 말하는 시간을 상상한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4-15

신라천년 고도 휘감은 안개

일찍 일어난 탓일까? 안개가 흐리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문득 안개는 어쩌다 `안개`라 불리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 궁금함은 버짐처럼 번져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던 단어들을 낯설게 만든다. 눈, 하늘, 발, 길, 나무…. 희뿌연 안개 속에 웅크린 사물처럼 명료했던 단어들이 흐려진다. 발길은 어느새 서천교에 닿는다. 백운산과 묵장산에서 시작된 물은 경주 내남면에서 만나 형산강을 이룬다. 신라시대 수도를 가로지르던 가장 중요한 강 중 하나였던 형산강은 경주시와 포항시를 거쳐 영일만으로 유유히 흘러든다. 남상(濫觴). 배를 띄울 정도의 큰 강물도 그 근원은 술잔을 띄울 정도의 미약한 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말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아`, `어`와 같은 말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에서 시작한 말은, `아(我)`를 낳고 `여(汝)`를 낳고, `아버지`로 `어머니`로, 다시 `할아버지`로 `할머니`로 이어져 친족을 이루고 부족을 거쳐 민족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안개가 겹겹이 쌓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말 위에 말을 쌓아 위계와 윤리와 이념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아득하기만 한 생각들 너머로 벚꽃은 만개한다. 벚꽃 속에서 되뇌이던 생각을 잃고 넋마저 놓아버린다. 가냘프고 가녀린 꽃잎은 흰빛이라고도 분홍빛이라고 할 수 없는 잡히지 않는 빛이다. 그도 그럴 것이 `꽃맥`을 따라 붉은 기운이 바깥쪽을 향해 엷고 얕게 퍼져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사람에게 혈맥이 있고, 잎에 잎맥이 있다면 꽃에 있는 저것은 꽃맥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벚꽃은 스스로 둥근 천정을 만들며 형산강을 따라 김유신장군묘를 향해 이어진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소실점. 회화나 설계도 등에서 투시(透視)하여 물체의 연장선을 그었을 때 선과 선이 만나는 점을 일컫는 말이다.`만나는 점`이라고는 했으나, 그 `만남`은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길을 걸으면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라 여겨지는 지점에 이르러도 거긴 여전히 길일뿐이다. 소실점은 다시 그만큼의 거리로 달아난다. 무한이라 불리는 것은 그러한 성질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걸어도 아무래도 닿을 수 없는 곳, 늘 똑같은 거리만큼 물러나 있는 곳, 그 다가갈 수 없음. 그것은 어쩌면 죽음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삶을 살 순 있지만 죽음을 살 순 없으므로 죽음은 우리의 삶에 닿을 수 없다. 그리고 벚꽃은 기어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김수영은 이렇게 쓴다.“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오오 봄이여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오오 인생이여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절제여나의 귀여운 아들이여오오 나의 영감이여”―김수영 `봄밤` 전문▲ 공강일 수필가“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무엇을? 어쩌면 이 시는 저 벚꽃에 대한 시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일는지도. `봄밤`,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스러짐을 완성하기 위해 나아간다. 이미 스러질지라도 자신의 모두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서두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멸할 것이니 서둘러 사멸하는 것도 옳겠으나 이왕 사멸할 것이라면 그 정해진 사멸의 정면을 바라보며 사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러짐의 순간순간이 모두 사용될 때 스러짐은 스러짐이라는 빈껍데기만 남길 것이다. 사멸을 서두르지 않는 일, 사멸을 천천히 사용해감으로써 사멸을 소진시키는 일, 그것이 어쩌면 사멸이라는 그 무거운 운명, 벗을 수 없는 운명을 벗지 않은 채 벗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하여 마땅히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4-08

주왕산, 산천은 유구하여라

참 이상한 산도 다 있지. 등산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산행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곳, 산보든 산책이든 그런 말로도 충분한 곳. 주왕산, 그 중에서도 `주왕계곡코스`를 걷는 일은 이런 일이지. 참 볼 것도 많지. 대전사를 지나 잘 다져진 흙길을 따라 걸으면 기암을 볼 수 있지. 병풍처럼 바위가 펼쳐졌다고 해서 병풍바위라고도 불리지. 주왕의 자식들이 달을 보았다는 망월대도 있고, 그 옆엔 그것만큼이나 높은 급수대도 있지. 물을 공급받는 곳이라니…. 신라 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이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양보하고, 신하들을 피해 이곳에 궁궐을 짓고 살았다지. 산마루에 궁궐을 짓다보니 샘도 우물도 없어 계곡 물을 퍼 올렸다지. 그래서 그곳을 식수대라 부른다지. 학이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학소대, 그 맞은편엔 떡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시루봉. 여기서부터는 이제 폭포를 만날 수 있지. 용추폭포를 지나면 절구 폭포. 절구폭포를 지나면 용연 폭포.이렇게 걸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지. 넉넉하게 서너 시간으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용연폭포를 보고 돌아 나와 후리메기삼거리에서 주봉으로 오르면 되지. 한 시간 정도가 더 걸리긴 하겠지만, 산을 올라야 하니 힘은 배로 들겠지. 더 걷고 싶다면 용연폭포에서 금은광이 삼거리로 내처 내달려 달기폭포를 지나 월외로 내려오는 방법도 있지. 족히 대여섯 시간은 걸릴 테지. 그래도 산이 높진 않아 그렇게 힘들진 않을 테지.그런데 참 이상하지. 이 산은 `주왕`이 여기에 머물렀다고 해서 `주왕산`이라고 불리지만, 그 `주왕`을 특정할 수는 없지. 어떤 사람들은 중국 상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주왕(紂王)이라고 말하기도 하지. 그런가하면 당나라의 주도(周鍍)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주도는 `주(周)나라를 다시 일으켜 왕이 되겠다`며 스스로 `후주천왕`이라 칭했다지. 결국 반란에 실패하고 이곳까지 숨어들었으나, 마일성 장군에게 최후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마지막으로 급수대를 말하면서 언급한 김주원일 것이라는 설도 있지. 이 설에 따르면 김주원은 왕위를 내어주고 이곳으로 들어와 궁궐을 짓고, 주원왕이라 불렸다지. 후에 `주원`의 `원`이 빠지고 주왕산으로 굳어졌다고들 하지.하지만 저 먼 중국의 주왕이 이곳에 왔을 리는 만무하지.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주왕은 무왕에게 정벌당하자 보옥으로 장식한 옷을 뒤집어쓰고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고 하지. 그런 그가 신라까지 와 죽을 틈은 없었을 테지. 주도의 반란은 결국 실패하고 유주(幽州)로 달아나 죄를 기다리다 삶을 마쳤다지. 이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 왕위를 찬탈당한 김주원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낭공대사(空大師)가 `주왕사적(周王寺蹟)`을 적었다지. 이 `사적`은 김주원의 파란만장한 삶을 주도의 이야기에 대입하여, 그를 `후주천왕`의 위치로 격상 시키는 일종의 가상소설이라 할 수 있지.시간이 지나고 김주원의 이름도 자취도 사라지고, `주왕사적`만 남게 되었다지. 후대 사람들은 `주왕`이라는 말만 듣고, 그것이 상나라의 주왕이겠거니, 당나라의 주도겠거니 하고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고, 그들과 관련된 이름을 산 곳곳에 가져다 붙였겠지. 어쩌면 달기마을, 달기약수, 달기폭포는 `주왕`을 상나라의 주왕으로 오해해서 생긴 이름일 테지. 그도 그럴 것이 `달기`는 주왕의 애첩이었으니 말야. 기암(旗岩)은 마장군이 대장기(大將旗)를 세웠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지. 주왕굴은 주왕이 동굴로 떨어지는 물을 받아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고 죽은 곳이라 하지.▲ 공강일 자유기고가참 이상도 하지. 주왕산은 주왕이나 주도와 어떤 관련도 없지만, 단지 `주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 이름에 현혹되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지. 기암이니, 주왕굴이니, 마치 직접 주왕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 이야기를 잘도 만들지. 주왕산은 기실 산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지 산일뿐인데도 말이지.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지. “사실은 공허하게, 움직일 수 없이, 거기 있기에 다른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실주의 예술의 뛰어난 미덕이다(황현산, `찌푸린 얼굴들`,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5, 163면.)”.주왕산은 움직일 수 없는 산으로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지. 그래서 사람들은 저 산에다 어떤 말이든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것이겠지. 그 말을 만들어낸 사람도, 그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 사라질지라도 저 산만은 오래도록 남을 테지. 산은 남아 또 다른 말을 허락하겠지. 그리하여 인걸은 가고 없어도 산천은 유구할 테지.

2016-04-01

김천역에 얽힌 추억

고등학교를 마치고 처음으로 서울이란 곳엘 가게 되었다. 김천시외버스터미널과 기차역을 연결하는 육교를 지나 역에 도착했을 때 눈은 삽시간에 쌓이고 있었다. 어리고, 어리석은 마음에 기차가 운행하지 않을까봐 마음을 졸였다. 사람이 많아 입석을 끊어야 했다. 객실과 객실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는 조잡해서 기차가 달리는 중에도 문을 열 수 있었고, 담배를 피울 수도 있었다. 객실과 객실의 `사이`이기도 한 이곳에 연결통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겠다. 하지만 그때는 이곳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이름이 없었다. 이 `사이`는 그저 `거기`나 `저기`로 불렸다. 이름 없는 것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그것들은 안전이라거나 청결이라고 불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치의 대상이었던 이곳은 낭만, 젊음, 운치라고 불리는 의미들이 쌓여 그 통로를 잘 감싸 주었다. 그런 것들과 함께 서너 시간을 덜컹거려야 했지만, 거기에 피로감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상행 길은 어떤 기대와 설렘으로 흥성거렸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그런 흥분은 여독 속에 용해되어버렸다. 육교 아래엔 빵집이 있었다. 90년대의 크리스마스는 지금 보다 훨씬 더 큰 기대와 둥근 흥분 속에 빛나곤 했다. 들뜬 사람들이 빵집 문을 여닫을 때 들리는 작은 종소리가 육교 위로까지 솟아올랐다. 케이크나 빵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부러워했다. 평화육교. 시외버스터미널과 김천역을 잇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 육교가, 240m가 아니라 2천400미터처럼 멀게 느껴졌다. 한없이 긴 육교를 걸으며 다가올 삶의 무게를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그런 삶의 무게감을 피하고 싶어서였을까. 집에 내려올 때면 김천보다는 대구를 찾았다. 서울역에서 밤 11시 30분 즈음, 무궁화호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착하면 새벽 4시가 채 되지 않았다. 돈이 넉넉했다면야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갔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시간엔 어차피 버스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지하철이 다닐 때까지 시간을 지우는 것이 더 나았다. 마침 역 앞에는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직행버스를 굳이 버려두고 늦은 시간 기차를 타는 것도 이 포장마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맥주잔에 가득 소주를 따르면 딱 반병이 된다. 포장마차에는 그런 잔술을 팔았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첫잔은 으레 `원샷`을 했다. 새벽, 빈속, 찬 소주. 식도를 타고 내리는 알코올의 알싸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알싸함을 느끼는 나를 온전히 감각할 수 있었다.다시 김천역을 찾은 건 십 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순전히 육교 아래의 빵집 때문이었는데, 이미 빵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 번도 들어가 본적 없는 그 빵집이 그리워진 건 김연수의 소설 `뉴욕제과점`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뉴욕제과점`의 아들이다.`나`와 작가가 꼭 일치하란 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 속의 `나`가 작가 자신이기를 바라게 된다. 그 바람은 내가 알고 있던 곳을 김연수 역시 알고 있다는 아주 사소한 동질감에서 비롯된다. 먼발치에서 동경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던 그곳에 김연수란 작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당시 내가 육교에서 느꼈던 스무 살의 막연한 불안을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이 소설의 서술자는 `나`지만 주인공은 `나`가 아니라 뉴욕제과점이다. 1965년부터 시작한 이 제과점은 설날,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추석, 크리스마스와 같은 “대목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호황기를 누린다. 그랬던 것이 80년대를 지나며 조금씩 움츠러들기 시작하다가 90년대 기업형 빵집이 출현하면서부터 사양길을 걷게 된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김연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뉴욕제과점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제과점과 함께 삶을 견뎌온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쇠락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추억과 그러한 추억의 흔적들을 가진 공간의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러한 사라짐과 그러한 사라짐으로 인한 허탈감과 참담함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와 속절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것들과의 화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강일 자유기고가“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김연수 소설집 `내가 아이였을 때`(문학동네, 2003), 91면).사라지는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비물질적인 것일 때가 더 많다. 만질 수 없는 비물질적인 것이기에 더 오래도록 남겨질 수 있는 것이리라.

2016-03-25

칠포리 암각화의 문양

SNS에 글을 올린다. 글을 올리기만 하면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좋아요`의 수만큼 기분이 좋고, 그만큼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더 많은 이해보다는 더 깊은 이해를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글에 드러나지 않은 말, 일부러 쓰지 않은 말, 그래서 자신이 미처 모르고 있었던 의미까지 읽어주길 바라며 글을 올리는지도 모른다.대개 바람은 바람으로 그치기 일쑤다. SNS 공간은 언제나 정보가 넘쳐나고, 정보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글을 쓰고 몇 시간만 지나도 자신이 쓴 글 위에 새로운 글들이 쌓여 그 글은 묻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쓴다.칠포리 암각화를 보고 있다. 어쩌면 고대인들도 시간의 힘을 알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시간과 함께 켜켜이 쌓이는 정보 속에서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단단한 바위에 수천, 수만 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어떤 의미를 새겨 놓은 것이리라.후대인들 역시 암각화에 주목하길 바랐다면,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사시대에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암각화에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을 가지며, 그 의미를 찾고 있으니 말이다.이 암각화는 그 문양이 칼의 손잡이를 닮았다고 해서 `검파형 암각화`라 불린다. 한편으로 방패모양 혹은 실을 감는 실패를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더러는 그 모양에서 말머리를 보거나 사람의 얼굴을 읽어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저 모양의 의미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가하면 저 문양이 금을 사출하는 도구인 슬루이스를 닮았으며, 금사출지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새겨 놓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인과 우리의 사이는 너무도 멀고 우리는 그들에게 가닿을 수 없다. 설사 저 바위에 새겨진 것이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그 의미에 가닿을 수 없을 것이다. 백석은 이렇게 썼다.“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까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나는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 없이 떠도는데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백석 `북방에서` 중우리가 가진 것들, 우리가 소중히 여겨왔던 것들은 떠나가 버린다. 넋 없이, 의미도 없이,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 버린다. 인간은 유한하여 그 세월을 따라 흐를 수 없다. 고대인과 현대인의 간격은 벌어질 뿐이다. 그렇게 과거는 고립되어 과거 속에 묻힌다. 과거라는 무덤 속에서 의미 있는 것들은 의미를 잃고, 중요한 것들의 중요성은 퇴락한다.▲ 공강일 자유기고가노자(子)는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선한 것을 선하다고 하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의미`라고 불리는 것들,`중요성`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이와 같다. 중요한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면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아야 비로소 그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칠포리 암각화는 파편이다. 그 파편이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라도 부분만으로는 전체를 사유할 수 없다. 부분을 통해 맘모스를 유추해낼 수도 있고, 공룡을 도출해낼 수도 있다. 어느 것도 틀리지 않지만, 어느 것도 맞지 않다. 우리는 고대인과의 간격을 좁힐 수 없다.허나 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전체에 묶여 있던 파편은 전체의 압력을 벗어던지고 해방된다. 암각화는 맥락과 결별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저 의미를 채우려면 상상력을 길어 부으면 된다. 우리의 상상력은 하늘만큼 넓고, 우리는 상상력을 끝 간 데 없이 펼칠 수 있다. 오늘은 마땅히 봄이어서 모든 것들이 자글자글하다.

2016-03-18

7번 국도변의 바다, 대게, 달

포항에서 7번 국도를 타기만하면 영덕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해안도로는 정말이지 해안을 따라 뻗어 있어 오른쪽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아무리 빨리 밟아도 바다를 따돌릴 순 없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에서 뇌종양 진단을 받은 마틴은 골수암 말기의 루디를 꾀어내어 바다로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는 루디가 사고뭉치 마틴과 엮이게 된 건 마틴의 이 말 때문이다. “천국은 지리멸렬해서 오로지 바다이야기 밖에 할 게 없거든.”천국에 갈 생각이라면 바다를 보는 것이 좋겠다. 아니 바다에 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바다가 일상이 된다면?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어부들은 더 이상 파도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했다. 파도소리를 늘 듣는 어부에게 파도소리는 익숙한 어떤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숨을 쉬는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매일 물을 마시는 까닭에 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것처럼…. 어느 순간 바다가 무미해지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범사에 감사하라” 아무렇지도 않게 되뇌는 이 말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바다가 있으므로 어부는 살아갈 수 있고, 직장이 있으므로 직장인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에서 언제나 달아날 준비를 한다. 일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가 곧 성자가 아닐까.밀물처럼 밀려드는 생각을 추슬러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여전히 바다는 파도쳐 푸르고, 바다 위를 너울대는 바람은 바람소리로 흩어진다.■ 영덕 대게는 대개 되게 맛있다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강구항에 닿게 된다. 이곳의 대게를 놓칠 순 없다. 대게는 되게 맛있다. `대게`는 큰 게라는 뜻이고, `되게`는 `매우, 몹시`라는 뜻이다. 가격에 대해서 말하자면, 흥정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 이곳에 대게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연인들이다. 여기서 `대개`는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조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왠지 모든 사람들에게도 조심스럽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어딘지 모르게 다소곳하게 느껴진다. 수줍은 그들이 먹는 대게의 양은 턱 없이 적어 내가 먹는 양의 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게의 가격은 대개 엇비슷하다. 여기서 `대개`는 `일반적`이라는 뜻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시내를 훑는다. 상가의 간판들은 대개 대게와 관련된 것이다. 오죽하면 운동장 이름도 대게운동장이고 노인정도 대게노인정이다. 영덕에는 대게도 많지만 대게라는 이름도 되게 많다.■ 개와 늑대의 시간집으로 돌아올 무렵, 해가 산을 넘는다. 산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은 장관이다. 해가 훌쩍 산을 넘어가면 `사이`의 시간이 찾아온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 프랑스에선 이렇게 푸른빛이 감도는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6년께다. 불문학자이며, 까뮈의 전집 번역으로 널리 알려진 김화영 선생은 오정희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평론의 제목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문학동네, 1996 여름)이라 이름 붙였다. 김화영은 이 시간을 “무엇인가 지워지고 사라지는 시간”,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려 있는 진행성 소멸의 시간”이라 정의했다.어렵게 느껴지는 이 말은 십여 년이 흘러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계기는 동명의 드라마였다. 소위 `개늑사`라 불렸던 이 드라마의 명대사는 김화영의 말을 쉽고 감각적으로 풀어쓰고 있다.“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이때는 선과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사실 이 시간은 붉지 않고 푸르다. 밝음과 어둠이 불명확한 시간, 그리하여 모든 구분이 불가능해 지는, 이 청색의 시간.(언젠가 우리는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이런 시간과 연관 지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은 무척 짧아 채 십 분을 넘지 않는다.▲ 공강일 자유기고가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밤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어둠과 함께 달빛이 내린다. 이번엔 달이 내내 차를 따른다. 달빛을 잡으려 카메라를 치켜든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선이 달만 잡을 수 있도록 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전선도 달빛도 사람 사는 곳을 향해 뻗어간다. 달빛에 젖은 세상은 저렇게 멀리에서 잠이 든다. 되도록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집으로 깃든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하루를 산다.※ 이번 주부터 매주 금요일 `공강일의 바람의 경치`를 연재합니다. 공강일씨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울대·국민대 강사를 지냈으며,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