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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 듣는 산행

아침에 시계를 보고 한 말은 “앗, 늦었다!”도 아니고, “큰일났네”도 아니었어요. “아니, 시간이 왜 이래!”였죠. 그도 그럴 것이 오전 6시12분이었거든요. 산악회 버스는 오전 7시에 출발해요. 제가 있는 곳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적어도 오전 6시22분 지하철은 타야 해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택시를 타야 하나, 비도 오는데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침대에 앉아 1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럴 시간이 없다구, 발딱 일어났네요. 자기 전에 씻은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옷부터 꿰었어요. 가지고 갈 짐은 대충 냉장고에 넣어두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방에 담아보니 제법 많더군요. 레몬 맥주 두 캔, 장수막걸리 하나, 지평막걸리 하나, 공주밤막걸리 하나, 그리고 이온음료 두 개, 생수 세 개, 거기에 데친 토마토, 체리, 머루포도 따위를 넣었어요. 그것만으로도 30ℓ짜리 제 가방은 꽉 차더군요.그렇게 준비해서 나온 시각이 오전 6시19분. 지하철을 향해 냅다 달렸어요. 거의 1km 넘는 거린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어요. 오전 6시34분에 있다던 지하철이 31분에 도착했어요. 일요일 아침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제가 산행에 늦을 걸 염려해서 그랬는지 지하철이 쌩하니 시원하게 달려주었어요. 산악회 회장님께 늦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웬걸 회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역에 내리면 택시를 타고 버스를 따라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6시56분, 거기에서부터 뛰어 버스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58분! 휴우 다행이다.45석 버스에 사람이 꽉 찼네요. 저는 제일 뒷좌석 구석에 앉았어요. 아, 행선지를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오늘은 상주시 내서면과 공성면을 잇는 백학산을 종주할 예정예요. 산 높이는 617.6m. 그렇게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고 해요. 대신 산행거리는 20.7km로 상당히 먼 편예요. 날씨도 덥고 비도 올 것 같아 아마 초죽음이 될 것 같아요. 괜히 따라온 건 아닌지 벌써 후회가 몰려오네요.버스가 상주로 들어서자 회장님은 큰재로 갈까, 지기재로 갈까 고민을 했어요. 비가 오면 지기재에서 씻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더군요. 회장님은 기상청에 전화를 했는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지 비 올 것을 확신했어요. 그래서 저희의 산행 코스는 정해졌어요. 보통은 거꾸로 오른다고 하는데 저희는 지기재에서 출발해서 개머리재, 백학산, 윗왕실재, 개터재, 화룡재를 지나 큰재로 내려오기로 했어요. 벌써 지기재에 왔나 봐요. 도착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산우들이 우루루 몰려 내렸어요.우리 산악회는 이게 문제야. 내리면 말야 같이 간단히 맨손체조든, 도수체조든, 3억 5천을 주고 만들었다는 늘품체조든 뭐 그런 것 좀 하면 좋잖아. 그러면 나같이 굼뜬 인간도 여유롭게 준비도 하고 그럴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무꾼 님(이분의 닉네임이랍니다)이 “막내 어서 따라가” 하는 바람에, 스틱도 안 맞추고, 장갑도, 물도 안 꺼냈지만, 눈물을 머금고 출발!이젠 저도 이 산악회에 몇 번 나왔다고 사람들을 거의 다 알아볼 것 같아요. 그 중에는 저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선배님도 있어요. 반갑게 인사를 하며 길을 재촉했어요. 농로를 따라가다가 산으로 올라갔다가 도로를 건넜다가 임로를 따라갔다가 갈림길에서 분명 왼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하고 혼자 엉뚱한 길로 들어섰어요. 뒤에 따라오신 분이 “거기가 맞아요?” 하네요. 혼자 엉뚱한 길로 갈 뻔했어요.가방은 무거웠고 비는 올 듯 말 듯 어정쩡했고요 습기가 많아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부패해 가는 느낌이었어요. 아 벌써 백학산이네요. 저도 모르게 두 시간을 걸었나 봐요. 그런데 제가 도착하자마자 선두그룹은 벌써 먹을 것 다 먹고, 제가 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횅하니 가버리는 거예요. 앗, 제가 싸온 술 좀 드시면 안 되나요. 과일만 먹고 선두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으로 후다닥 일어났어요.백학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였던가요. 무슨 소리지? 나뭇잎 위로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싱그러운 잎들에 튕기는 빗소리는 맑고 부드럽기 그지없었어요. 비가 오는 것도 `듣다`라고 하는 거 아시죠? 비가 듣는다고 처음 말했던 사람은 비가 오는 걸 촉감이나 시각이 아니라 소리로 먼저 알았나 봐요. 빗줄기가 듣는 소리를 듣는 일이라니! 그렇게 감격하는 사이 굵은 빗줄기가 무성한 잎들을 헤치고 제게로도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세찬 빗줄기에 두드려 맞듯 흠씬 젖었는데, 아, 이렇게 좋다니요. 어떤 걸 청우(淸雨)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게 그런 비가 아닐까요. 비 속에서 산도 들도 저까지도 더불어 청아해지고 있었으니까요.저는 산속에서 홀로 “우와 우와” 소리만 연거푸 내며 뒷말을 잇지도 못한 채 반은 날고 반은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갔어요. 산우(山雨) 속에서 산우(山友)를 지나치며, 어이쿠 산에서도 뵙고 수영장에서도 뵙네요, 이랬던가요. 아니면, 수영은 할 만하세요, 였던가요? 전 새처럼 물고기처럼 단숨에 윗왕실재에 이르렀어요.산에서 비를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봐요. 이러려고 아침에 씻지 않았던 걸까요. 상선약수(上善若水)! 그 말이 딱이더군. 언젠가 박완서는 소나기가 오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어요.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 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 피마자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2015, 30면).정말이지 비는 군대처럼 쳐들어왔고, 저는 폭발적인 환희 속에서 산과 나무와 길과 함께 젖어 그들과 구분할 수 없었어요. 산 속에서 비 듣는 소리를 들으며 온갖 소리를 맡고 맛 볼 수 있었어요. 그동안 왜 사람들이 등산이 아니라 산행이라 하는지 몰랐어요. 익숙해질수록 알겠더군요. 등산은 애써 산을 오르는 것이지만, 산행은 산과 어우러지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2017-07-14

도래할 노동의 풍경

△빅데이터와 인공지능대통령 선거 때 많은 대선후보자들이 현재의 실업과 노동 문제에 대해 저마다의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공학기술이 발전하는 현 상황을 고려하여 `노동`을 생각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현재 노동은 변화하고 있고, 미래의 노동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일 보일 것입니다. 변화하는 노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의 과학과 공학기술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앞으로 도래할 과학기술의 근간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입니다. 두 기술은 연동되어 있습니다. 자율주행자동차를 중심으로 이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아, 그 전에 자율주행자동차와 무인자동차의 차이부터 말하는 것이 좋겠군요. 무인자동차는 말 그대로 무인이어서 자동차에 사람이 타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자율주행자동차는 사람이 타고 있는 상태에서 자동차가 스스로 주행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드론은 무인자동차에 해당하고, 자동항법장치로 운행되는 여객기는 자율주행자동차로 볼 수 있습니다.이러한 자율주행자동차가 실현되려면 우선 지도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도로를 스캔하고, 이것을 지도로 만들고, 또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로 상황에 맞게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맵핑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이런 데이터를 관리하고 생성하는 것을 `빅데이터`라고 부릅니다. 데이터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유통되고 저장되는 공간이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 사이트입니다. 전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는 구글이 자율주행자동차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빅데이터를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지도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자율주행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운전을 하면서 일어나는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신호등에서 멈출 것인지 갈 것인지, 도로에 있는 방해물을 피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인공지능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한 것을 토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 이것이 지능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지능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곧 `인공지능`입니다.마쓰오 유타카는 지능의 핵심은 수많은 정보들을 정리하고 공통점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인공지능과 딥러닝`, 동아 엠앤비, 2015). 인간의 지능은 수천 년간의 진화과정을 통해 축적된 지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를 컴퓨터 속에 전부 밀어 넣으면 그 정보를 조합하고 결합하고 압축하는 과정 속에서 컴퓨터 역시 스스로 지능을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요? 벌써 30년도 전에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이런 상상력을 토대로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다 자의식을 갖게 된 인공지능을 다룬`공각기동대`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고위험군 직업그런데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상상해봤나요? 미래학자들은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면 단순 작업을 하는 직업은 사라지고 창의적인 직업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4차 산업혁명`의 저자 클라우스 슈밥 역시 고위험 직업군으로 텔레마케트, 비서직, 배달직 등을 들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컨대 바둑의 모든 기보를 습득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죠? 프로기사가 단순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나요? 인공지능은 결국 정보의 축적을 기반으로 하는 직업, 법률가, 의사, 심지어 소설을 쓰는 작가까지 대체하게 될 것입니다. 알파고의 최종적인 목표는 병을 진단하는 의사를 대체하는 것이니까요.제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을 때 인간만 고유하게 할 수 있는 창의적 노동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창의성 역시 정보의 집적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니까요.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창의성을 보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실용적 낙관론자로 자처하는 클라우스 슈밥은 기술 혁신 속에서 인간은 더 부가가치가 높은 노동을 창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그는 “자본화 효과가 파괴 효과를 앞지르는 타이밍과 범위, 그리고 이 두 효과의 치환이 얼마나 빨리 진행될 것”(`제4차 산업혁명`, 새로운 현재, 2016, 66면)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렵게 들릴지 모르나,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 기술 혁신의 속도보다 새로운 노동을 창출하는 속도가 더 빨라야 미래가 낙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화 효과 즉 기술 혁신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것, 기계 스스로 노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계에게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고, 임금을 주지 않으면 수익은 훨씬 늘어날 것이고, 기술 혁신을 이룩한 사람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도래할 노동과 정치의 역할▲ 공강일 서울대 강사문제는 이렇게 돈을 번 사람이 돈을 기술에 투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술이 뒤처지면 새롭게 등장한 기술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수 있으니 기술에 투자할 수밖에 없겠죠. 부를 소유한 사람과 기술 사이로 돈이 오고 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왜 문제냐고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투자가 이뤄지면 생산력이 증대되고 생산품의 질이 향상되고 무엇보다 고용을 창출할 수 있게 됩니다. 투자된 돈은 사회 구성원 즉 노동자에게로 돌아가고, 노동자는 이 돈으로 소비하고 그 소비는 다시 투자자에게 되돌아옵니다. 이것이 경제의 선순환입니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투자는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닌 기술을 위한 것입니다. 노동자가 경제 주체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기술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죠. 노동자는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노동자가 없으면 소비자도 없고,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기술발전이 상품의 질을 향상시키지만 그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것이 현대 사회의 기술발전이 직면한 모순의 핵심입니다. 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입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노동은 단순히 노동자가 투자한 노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의 성과물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임금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환산 불가능한 노동은 없습니다. 이것이 전통적 의미의 노동입니다.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은 이제 임금을 받는 노동을 폐기시킬지도 모릅니다. 절망적인가요? 속단하긴 이릅니다. 한편으로는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요. 전통적 노동은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한 것이었고, 그 임금을 바탕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래할 노동은 임금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위해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자아를 만족시키는 것을 노동의 목표로 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생계유지는 어떻게 하냐고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생계유지를 걱정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주면 되니까요. 이런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정치인이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2017-07-07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사랑·운동·공부

처음 하는 일은 힘들다.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길을 찾지 못해 처음엔 누구나 갈팡질팡한다. 이러한 헤맴은 낯섦에서 낯익음으로 넘어서는 과정이다. 생소한 것이 익숙해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이 시간은 지난하고 험난하다. 이것은 당신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어떤 처음이 그러냐고? 모든 처음이 그렇다. 금연이나 금주를 할 때 이런 괴로움을 느꼈겠지만, 반대로 처음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셨을 때에도 이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기호품도 좋아하게 되기까지 처음에는 일종의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모든 처음은 괴롭다. 그렇다면 처음이 요구하는 괴로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운동백두대간 팀을 따라 네 번째 산행을 했다. 그랬더니 베테랑들이 이제야 뭔가를 알려준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500리터 물을 네다섯 개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 물을 마실 때는 얼음물보다는 상온의 물을 마시고, 갈증이 나기 전에 미리 마시는 것이 좋다. 등산 초입에는 그냥 물보다는 이온음료를 마셔라. 스틱을 사용한다면, 평지를 걸을 때는 스키를 타듯이 몸을 끌어당겨 앞으로 나아가고 내리막길에서는 스틱에 체중을 실은 뒤 발을 내디뎌야 한다. 발을 디딜 때 앞발바닥부터 닿게 하면 무릎을 보호할 수 있다. 마치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그렇게 발을 딛는 것이 좋다. 오르막에서 빨리 가기는 어려우니 평지나 내리막에서 속도를 높이는 것이 효율적이다.수영을 배울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물에 뜨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주던 선생님은 이제 조금씩 주문의 수위를 높인다. 자유형 발차기를 할 때는 무릎이 아니라 허벅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릎을 뻣뻣하게 펴는 것이 아니라 굽혀주어야 한다. 발목도 마찬가지로 내려갈 때는 펴주고 올라올 때는 접어주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마구잡이로 발을 차는 것이 아니라 세 박자씩 끊어서 차고, 그 박자에 맞춰 손을 저어주는 것이 좋다. 팔을 돌려 힘차게 물을 밀어내되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왼쪽 팔을 돌릴 때는 왼쪽으로, 오른팔을 돌릴 땐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 자연스럽게….이런 요구사항은 수없이 많은데 그것들을 단계별로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준다. 하나가 익숙해지면 또 다른 요구사항이 생긴다. 처음엔 `도대체 이게 뭐야, 어색하잖아`라고 생각하지만 강습이 끝날 때쯤엔 할 만해진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고,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수영장 한 바퀴를 왕복할 수 있는 실력은 안 되지만, 이렇게 배우다보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믿음이 생긴다. 물론 오래 걸리겠지만 말이다.산행이나 수영을 잘하게 되더라도 힘들긴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시겠지만, 힘들 땐 힘들다. 운동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저렇게 잘하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 단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나중엔 그 힘듦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사랑식당에서 엄마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아빠가 옆에 있어도 우는 아기를 종종 보게 된다. 왜 아기들은 엄마에게 저토록 강한 집착을 보이는 걸까? 엄마가 젖도 주고, 잘 돌봐줘서 그러는 걸까. 해리 할로우(Harry Harlow)도 이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새끼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할로우의 `애착실험`이다.우선 새끼 원숭이를 어미와 격리시킨다. 다음으로 새끼 원숭이에게 두 개의 가짜 어미를 제공한다. 하나는 가슴에 우유병이 달려 있지만 철사로 만든 어미다. 다른 하나는 젖은 없지만 부드럽고 푹신한 헝겊으로 만든 어미다. 이것으로 실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새끼 원숭이는 `철사어미`와 `헝겊어미` 중 어느 것에 더 애착을 느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죠?실험 전 할로우는, 새끼 원숭이가 젖을 주는 `철사어미`에게 애착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끼 원숭이는 포근한 `헝겊어미`를 더 좋아했다. 배가 고프면 `철사어미`의 젖을 쫓기듯 빨고는 얼른 `헝겊어미`에게 달려갔다. 이 결과를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이나 원숭이는 생리적 차원에서 별반 다를 게 없다. 아기가 엄마를 따르는 것은 젖을 주기 때문도 아니고 또 자신을 친절하게 보살펴 주기 때문도 아니다. 아기는 포근하고 따뜻한 엄마의 감촉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런 육체적 접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할로우가 내린 결론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할로우는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된다. `헝겊어미`로부터 길러진 새끼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들과 섞이지 못했고, 교미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할로우는 깨닫게 된다. 사랑은 나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사회화의 과정이자 너와 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이다.`애착실험`에서 새끼 원숭이는 `헝겊어미`에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헝겊어미`는 어차피 반응이 없으니까. 새끼 원숭이는 `헝겊어미`로부터 어떤 간섭도 금지도 구속도 경험하지 못했고, 나아가 어떤 칭찬도 긍정도 이해도 받지 못했다. 새끼 원숭이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새끼 원숭이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헝겊어미`를 대했고, 어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헝겁어미`에게 길러진 새끼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 앞에서 당황했을 것이고, 결국 무리에 섞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적인 서로의 노력 속에서 형성된다.언젠가 바르트는 광기나 지나침과 같은 사랑의 정념을 상대에게 얼마나 보여줄 것인지, 혹은 얼마나 감출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사랑의 단상`, 동문선, 71면). 사랑이란 대상을 사랑한다고 해서 내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작용도 아니고 반작용도 아니다. 사랑은 작용이면서 동시에 반작용이다. 사랑은 독백도 아니고 방백도 아니다. 사랑은 대화다. 처음에 불타올랐던 사랑이 식기 시작했다면 이제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하기를 포기한다면 불장난같은 사랑만 되풀이 하게 될 것이다. 명심하라. 힘들지 않은 사랑은 없고 고독하지 않은 사랑은 없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공부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다양한 공부방법을 알려준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새벽에 공부해라, 충분히 잠을 자라, 공부하는 장소와 쉬는 장소를 구분하라, 자리에 앉으면 일어나고 싶어도 두 시간 이상은 참고 견뎌라, 앉아 있는 시간을 계속 늘려라, 스톱워치를 사용해서 공부시간을 체크하라. 하나의 문제집을 집중적으로 풀어라, 교재에는 메모를 하지 말고 따로 노트를 만들어라, 필기는 정성스럽게 하라, 등등.이런 팁들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 공부에는 정해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적합한 공부 방법을 찾는 것, 이것이 공부의 핵심이다. 사랑에는 특정한 방법이나 방향이 없다. 사랑은 언제나 개별적이고 특수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너와 내가 함께 맞춰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길이 없다. 그 길을 찾는 힘겨운 노력, 이것 역시 공부가 아닌가.나에게 맞는 사랑의 방법을 찾는 것도 공부고, 나에게 맞는 운동방법을 찾는 것 또한 공부다. 그런 점에서 공부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자 방식이다. 나에게 맞는 삶의 방법은 오직 나만이 찾아낼 수 있다. 삶이 고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물론 사랑은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것들과 달리 고독을 서로 나눠가질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하라.

2017-06-30

이름에 관한 단상

1.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름을 짓는 것만으로 내용이나 본질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한반도 운하사업`의 이름을 `4대강 사업`으로 바꾸자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잠잠해졌다. 무상급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금으로 운영되는 유상급식이지만, 무상급식이라는 이름을 선점하자 무상급식론자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대통령 선거로 한창이던 2012년 12월, (탄핵될 지도 모르는) 박근혜 씨를 위해 모처에서 국정원 요원이 댓글을 단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주당 의원들이 현장에 찾아갔을 때, 국정원 요원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이 사건은 `잠금 사건`이었지만 `감금 사건`으로 회자되었고 박근혜 씨는 민주당이 무고한 시민을 감금했다고 역공을 퍼부었다.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겠다는 주장에 노회찬은 “대신 `박정희 씨`를 `구미 씨`로 개명하는 건 찬성입니다.”라고 되받았다.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자는 주장은 이 한 마디 말로 깔끔히 정리되었다. `문자폭탄`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문자행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름이 본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2. 이름 없는 것들은 늘 이름을 요구한다. 이름을 요구하는 것들은 새롭거나 새로워지려는 것들이다. 혹은 자신을 갱신하고 싶은 사람은 이름을 개명한다. 이름을 붙일 때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거듭난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다른 아기들과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름은 대상을 유일무이하게 만든다.3. 이름에는 뜻이 없다. 고유명사들, 예컨대 이영애, 공유 같은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강타`니 `지드래곤`이니 `랩몬스터`니 하는 이름 따위도 마찬가지다. 강타라는 이름이 `강타하다`를 염두에 두고 지었다 하더라도, 강타를 보며 `강타하다`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강타`는 그저 강타일 뿐이다.4. 이름은 아무렇게나 지을 수 있지만 한 번 정해지면 고정되어 버린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한국국제예술원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본 일이 있다. 유명한 가수들의 사진이 붙고 그 아래 교수들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말이다. (힙합계의 전설) MC메타 교수, (최고의 보컬리스트) 더원 교수, (천재적인 작곡가) 돈스파이크 교수 등등.5. 이름에는 나름의 무게가 있고, 값이 있다. `MC메타`가 음악시장에서 자신의 본명인 `이재원`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MC메타`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가수로서의 이력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그 자체로 이미 물신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그 이름에 상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름은 한낱 말에 지나지 않으나 그 이름을 한낱 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6. 한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행운`, 문학과 지성사, 2012, 21~22면)7. 나의 이름은 공강일이다. 내 이름은 특이해서 사람들은 나 역시 특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특이해지려고 애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름은 나를 잠식한다.8. 모든 언술은 동어반복적 성격을 띤다. 동어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말들이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정의(定意)를 사용한다. 정의의 핵심이 바로 동어반복이다. 예컨대 나무의 사전적 의미는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 해살이 식물”이다. 나무는 목질로 된 식물 즉 나무다.`이름`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름은 붙여서 부르는 말 즉 `이르다`에 명사형 어미 `~ㅁ`이 덧붙여진 형태다. 이름은 이러지고(불려지고), 삶은 살아지고, 사람은 살아간다. 이름 즉 명사가 있기 전에 동사가 있었고, 이 동사를 축약한 것들이 이름이 된다.▲ 공강일9. 형상을 가진 것만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다`라는 동사는 어떤 행동에 대한 이름이듯 `슬프다`라는 형용사 역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명사만 `이름`인 것이 아니라 모든 품사가 `이름`이다. 그러하다면 모든 언어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나아가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서 물질적 형상을 얻게 된다, 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는 컴퓨터 운영체계에 불과한 사만다와 교감한다. 그때 그는 사만다의 얼굴을 “손끝”으로가 아니라 `언어의 끝`으로 만진다. 형체도 없는 사만다는 “내 피부가 느껴져”라고 말한다. 언어가 그녀에게 물질적 피부를 부여한다.10. `썸 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쟤들, 뭐 있는 거 아냐?”에 상응한다. `썸`은 `뭐`에 해당하는 말이다. 허나 “나 요즘 걔랑 `뭐` 있나봐”라고 말하진 않는다. `썸`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규정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뭐`와 구분된다. `뭐`는 폐기되고 `썸`은 의미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름 짓기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정치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일이 예술의 사명이라면 예술가의 예술행위를 이름 짓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춘수의 시 `꽃`은 랑시에르의 말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하략…)11. 이름은 시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지기도 한다. 이름은 그렇게 닳아 형체 없이 사라진다.

2017-06-16

찔레꽃 향기는 슬퍼요

▲ 공강일 서울대 강사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 앞에서 `뻘소리` 하는 것이 좋았고, 사람들이 웃는 것이 좋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꼭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음치에 박치라 노래만 시키면 주눅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무섭고 싫어졌다. 만약 노래를 잘 불렀다면, (잘 부르진 못해도 남들만큼만 불렀어도)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살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경이롭기도 하고 한편으로 질투가 나기도 한다. 그럼, 그런 가수 이야기를 해볼까.아니, 소리꾼이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 장사익은 마흔여덟에 노래를 시작했다. 그가 소리꾼이 되기 전까지 전전한 직장은 열다섯 개가 넘는다. 노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그의 나이 마흔여섯에 마지막으로 얻은 직장은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였다. 그곳에서 장사익은 시간을 죽이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뽑았는데 마지막으로 뽑은 패가 태평소를 부는 일이었다고. 딱 삼 년만 해보자, 그런 생각으로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찾아가 끼워만 달라고 했다. 사물놀이에 태평소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흥겹게 연주를 했다.사물놀이 공연 뒤 뒷풀이에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감탄을 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홍대 앞 극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100석 남짓한 작은 극장에, 이틀 공연을 했는데, 그 동안 공연장에 찾아온 사람이 800여 명이었다. 장사익은 불과 1992년에만 해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가 막막했는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1994년에는 행복하다, 라는 말이 자신의 입에서 절로 나왔다고 한다. 그의 삶은 뒤웅박처럼 엎치락뒤치락이다.장사익은 자신의 목소리가 정통 국악인처럼 장중하지도 않고, 대중 가수들처럼 맑고 곱지도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목소리는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흑인의 그것처럼 굵고 탁하다. 그의 목소리는 깊고 그윽한 곳에서 우러나와 우리의 슬픔까지도 위로해준다.장사익하면 딱 떠오르는 노래, 그건 뭐니 뭐니 해도 `찔레꽃`이 아닐까? 그 노랫말은 이렇다.하얀 꽃 찔레꽃 /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찔레꽃 향기는 /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 목 놓아 울었지찔레꽃 향기는 /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 밤새워 울었지(반복)아!찔레꽃처럼 울었지 /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 찔레꽃처럼 춤췄지찔레꽃처럼 사랑했지 / 찔레꽃처럼 살았지 / 찔레꽃처럼 울었지당신은 찔레꽃 / 찔레꽃처럼 울었지가사는 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찔레꽃은 하얗고, 순박하고,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럽고, 그래서 목 놓아, 밤새워 울었다는 것. 이것이 전부다. 찔레꽃이 하얗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고, 순박하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은 아니지만 대개의 흰빛을 띄는 것들이 그러하듯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이유는 가사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왜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장사익은 이렇게 말한다.“(이 노래를 지을 때) 잠실 주공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꽃향기가 진하게 나는 거예요. 빨간 장미가 활짝 피었기에 가까이 가봤더니 장미향이 아니에요. 자세히 보니까 저 안에 숨어있는 찔레꽃 향기였어요. 아유, 눈물이 팍 났네, 그냥. 나도 향기가 있는 사람인데 다들 장미만 쳐다보네. 그러니까 찔레꽃 너나 나나 똑같은 신세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한현우의 인간 정독`, 조선일보, 2015년 10월 25일)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찔레꽃과 자신의 처지가 똑같이 느껴졌다고, 그래서 오래도록 울었노라고 장사익은 고백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이런 감정은 어디까지나 장사익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이다, 어떻게 이 노래는 우리의 가슴으로까지 스미는 걸까? 장사익의 사연을 듣지 않고도 찔레꽃을 슬프다고 말하는 저 주관적이고 비약적인 말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이토록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우리 역시 울게 만드는 걸까?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하나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찔레꽃에 대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찔레꽃은 가난과 배고픔을 떠올리게 한다. 찔레꽃은 5월에 핀다. 그 때는 쌀독에 쌀은커녕 보리마저 떨어지는 그야말로 보릿고개다. 나의 어머니는 찔레꽃만 보면 아직도 배고팠을 때 생각이 난다고 한다. 나는 그런 배고픔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그래도 찔레순이 돋아나올 때면 배가 아프도록 먹어본 적은 있다. 꽃이 피기 전 찔레순은 여리고 부드러워 씹으면 씹는 맛이 난다. 또한 풋내와 함께 쌉쌀한 맛이 기분 좋게 입안을 채운다. 나야 주전부리대신 먹었지만, 정말 끼니로 생각하고 먹은 세대에게 찔레는 아리게 다가올 것이다. `찔레꽃`은 이런 공통경험 혹은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다른 하나는 이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며, 무엇보다 장사익의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사익의 어둡고 걸걸한 목소리가 느린 리듬을 타고 찔레꽃을 노래할 때, 그 술어를 듣지 않고도 `울음`으로 연결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찔레꽃은 슬프다`라는 일종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다고 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어떤 논리적인 말보다도 명백한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이 노래는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끌고 슬픔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유연히 헤엄친다. 슬플 때는 오히려 슬픈 노래가 위안이 되는 법.장사익의 노래는 논리적 구조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논리정연한 말이나 글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의 노래는 그야말로 비약적이다.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노래는 날아오르듯 솟구쳐 내면 깊숙한 곳으로 곧바로 내리꽂힌다. 모든 노래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노래들도 있다. 그런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언젠가 장사익은 손석희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시선집중`에 출연한 적이 있다(2010년 9월 25일). 손석희가 가수지망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냐는 취지의 질문에 장사익은 “노래라는 것은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을 제가 사는 것처럼 그건 알아서 터득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노래에는 길이 없고, 그 길은 자신이 만들어내야 한다. 장사익의 노래는 가요도 그렇다고 국악도 아닌 정체불명의 노래다. 장사익은 전례가 없는 자신만의 노래로 새로운 노래의 길을 만들고 있다.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2017-06-09

강태공과 곧은 바늘 낚시(直鉤)

▲ 공강일 서울대 강사△태공조어 원자상구(太公釣魚 願者上鉤)중국인들은 `헐후어`를 사용한다. `헐후어(歇後語)`란 “뒷부분의 직접적인 표현을 말하지 않고 `쉼`으로써, 앞부분만으로 그 뜻을 짐작케 하는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말놀이”로 설명되곤 한다. 그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고사를 전거로 삼아 만든 관용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태공조어 원자상구(太公釣魚 願者上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글자대로 풀이하면, “태공이 낚시를 하니 (죽기를) 원하는 자는 물어라”라는 뜻이나, 실제로는 “자진하여 올가미에 걸리다” 또는 “꾐에 넘어가다”라는 의미로 쓰인다.`태공조어 원자상구`는 축자적 의미와 관용적 의미의 간격이 크다. 그래서 비약적으로 느껴지지만, 여기에서 지칭하는 `태공`이 누구인지를 알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태공`은 우리가 잘 아는 강태공이다. 그리고 강태공은 낚시로 유명한 사람이긴 하나 물고기 잡는데는 오히려 젬병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강태공이 미끼도 없이, 바늘도 없이 낚시를 하였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미끼는 없었지만 바늘은 있었고, 바늘이 있긴 했지만 그 바늘이 곧았다고들 한다.강태공은 물고기를 낚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렸다. 결국 문왕을 만날 수 있었고, 문왕은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즉시 국사(國師)로 삼았다. 문왕이 죽은 후 무왕이 왕위를 승계하였고, 다시 강태공을 국사로 삼았다. 강태공은 무왕을 도와 상나라 주(紂)왕을 내쫓고 주(周)나라 건설의 공을 인정받아 제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정리하자면, `태공조어 원자상구`에서 태공은 강태공이며, 그가 한 낚시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곧은 바늘 낚시`와 같은 `바보 낚시`였다. 물고기를 잡을 마음도 없는 강태공의 낚시에 물고기가 걸린다면, 그 물고기는 틀림없이 스스로 낚시에 걸리는 `바보 물고기`일 것이다. 이런 물고기처럼 남에게 기꺼이 이용을 당하는 사람을 일컬어 `태공조어 원자상구`라고 한다.△곧은 바늘 낚시의 출전(出典)그런데 궁금하다. 정말 강태공은 `바보 낚시`를 한 것일까, 그가 이런 종류의 낚시를 했다면 그 출전은 어디일까? 사람들은 강태공의 낚시 이야기가 `여씨춘추`나 `사기`에 있다고들 말한다. 과연 그럴까?여불위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여씨춘추`에는 강태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태공망(太公望)은 동이(東夷)의 사(士)로서 온 세상을 안정시키고자 바랐지만 자신의 주군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왕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서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면서 관망하였다.”(`효행람제이(孝行覽第二)`) (`태공망`의 `태공`은 문왕의 아버지 `계력`을 말하며, 계력이 강태공을 만나고자 오래도록 기다렸다고 해서 이와 같이 불렸다고 한다.) `여씨춘추`에서 강태공의 출신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고 있을 뿐 낚시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사마천의 `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여상(呂尙, 강태공의 이름)은 일찍이 궁핍했고 나이도 아주 많았던 듯한데, 낚시질을 하면서 주나라 서백(문왕)을 만나고자 했다. …중략… 이에 주나라 서백이 사냥을 나갔는데 정말로 위수 북쪽에서 태공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매우 기뻐 하였다.” `사기`에서 역시 강태공의 낚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후진(後晉) 때 기괴하고 음란한 이야기를 모은 `습유기(拾遺記)`(10세기)에도 강태공의 이야기가 있긴 하나, `사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그렇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강태공의 낚시 이야기를 얻어 들은 것일까? 이 이야기는 원나라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무왕벌주평화(武王伐紂平話)`(12세기)라는 소설에 실려 있다. 강상(姜尙) 즉 강태공은 위수에서 곧은 바늘에 미끼도 달지 않고 낚시를 했다. 심지어, 수면 위로 낚시대를 들어 올리고선 “목숨을 버릴 놈만 물 위로 올라와 물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姜因命, 守時, 直鉤釣渭水之魚, 不用香餌之食, 離水面三尺, 自言曰, “負命者,上釣來”). `무왕벌주평화`는 후에 삼국지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던 명나라 때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14세기)에 영향을 주었고, 이를 통해 강태공의 곧은 바늘 낚시 이야기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나라를 낚는 낚시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글쓰기 방식 중에는 사물을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이라는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임춘이 지었으며 돈을 주인공으로 한 `공방전`, 또 술을 의인화한 이규보의 `국선생전`이 있다. 이 중에 여름에 끼고 자는 `죽부인`을 소재로 한 이곡의 `죽부인전`도 있다. 이 짧은 소설에는 강태공이 왜 `곧은 바늘 낚시`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흥미롭게 적고 있다. 죽부인의 먼 윗대 할아버지뻘 되는 간(竿)이, 강태공과 함께 위수로 낚시를 가게 되었다. 강태공이 바늘을 휘어 갈고랑을 만드는 것을 보고 간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큰 낚시질을 할 때에는 갈고랑이 없이 한다고 하였다. 작은 것을 낚느냐 큰 것을 낚느냐 하는 것은 꼬부라진 갈고리를 매다느냐 매달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갈고리 없는 낚시를 해야만 나라를 낚을 수 있지, 갈고리 있는 낚시를 하면 고작 물고기나 잡을 뿐이다.”라고 했다. 태공이 간의 조언을 따랐고, 그 결과 제후에 봉해질 수 있었다(竿曰, “吾聞大釣無鉤, 釣之大小在曲直, 直者可以釣國, 曲者不過得魚也.” 太公從之, 後果爲文王師, 封於齊).`간`은 대나무로 만든 낚시대를 말한다. 낚시대는 살기 위해 필요한 도구지만 죽부인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불편한 정도의 물건이다. 낚시대가 생존도구라면, 죽부인은 편의도구다. 그런 점에서 죽부인이 더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간은 죽부인보다 훨씬 윗대 조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 낚시꾼의 대명사인 강태공을 불러와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시시껄렁한 우화 같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솜씨가 무척 교묘하다.갈고리 없는 낚시, 즉 곧은 바늘 낚시를 할 때 나라를 낚을 수 있다는 말은, 결국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 대한 조언일 것이다. 사사로운 몸가짐과 남을 속이려는 마음으로는 결코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한동안 조용하던 나라가 청문회로 시끌벅적하다. 청문회의 후보자들이 그동안 굽은 바늘을 사용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라도 그 바늘을 버려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로 검증하는 사람들 역시 곧은 바늘을 사용하여 국가를 위해 온힘을 쏟길 진심으로 원하는 후보자를 낚아 올려야 할 것이다. 인사청문회를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다.

2017-06-02

나는 이해한다, 고로 붕괴한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컨택트`: 과거이면서 미래인 현재예전엔 뉴스를 보면 분통이 터졌는데, 요즘은 눈물을 흘리게 돼요. 슬픈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거든요. 제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 간절히 듣길 바랐던 이야기를 한다랄까, 정치가 나를 이해해주고 위로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정치가 내 생활의 일부라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돼요.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컨택트(Contact)`라는 영화를 본 건 분명 올해 초인데, 마치 작년에 본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져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쓸데없이 수다스러웠네요. 혹시 보셨나요? (헷갈릴지도 모르겠지만, 1997년에 조디 포스터 주연의 `콘택트`와는 다른 영화랍니다.) `컨택트`(2017)는 먼 우주의 우주인이 지구로 와서 지구인과 우주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SF라기보다는 차라리 언어, 더 정확히는 시간에 관한 통찰을 다룬 영화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아요.`컨택트`는 `미래를 훤히 아는데도 당신은 살 수 있나요?`라고 묻고 있어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루이스는 외계인을 만나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시간관을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알게 돼요. 그래서 루이스는 언제 죽을지, 어떻게 이혼을 하고, 어떻게 아이가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는지를 알게 돼요.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살 수 있을까요, 결혼할 수 있을까요,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이런 가혹한 질문들을 이 영화는 던지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하고 아이를 떠나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답니다.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요? 생각해보세요.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않는다면 결코 장맛을 볼 수 없을 거예요. 미래가 무서워 현재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어떤 미래도 만날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을 깨달은 루이스는 미래를 알지만 닥쳐 올 불행에 겁먹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게 됩니다. 더 강렬하고 더 열정적으로 현재를 살아낸다는 것. 이것은 현재의 모든 순간을 특별하고 특징적인 순간으로 변화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재가 미래라는 특정한 시점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순간이 특별하고 특징적이라면 미래의 만큼이나 소중할 것이고, 그러하다면 그 소중한 현재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순간이 원인이며 동시에 과거이자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모든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시간의 통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이해`: 양립 불가능한 것의 양립`컨택트`에 대해 길게 말한 건, 이 영화의 원작이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소설이고, 그 작가가 테드 창(Ted Chiang)이고, 그의 또 다른 소설인 `이해`에 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해`도 곧 영화로 만들어질 거라고 하네요. `컨택트`를 재밌게 보셨다면, 이 소설에 대해 알아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작가는 `시간`에 대해 탁견을 보인 것처럼 이 소설에서 `이해`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요.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요? 그럼 `이해`를 이해해볼까요?이 소설은 완벽하고 탁월한 전투 능력을 가진 제임스 본이 CIA의 수사망을 교란시키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 `본 아이덴티티`를 닮았어요. 한편으로는 명석한 두뇌로 상황을 분석하여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셜록 홈즈가 그와 맞수인 모리아티와 대결하는 영국 드라마 `셜록`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그리고 (인공)지능의 역량에 대한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트렌센던스`, `공각기동대`와 같은 과학적 요소가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있어요. 그래서 통쾌하고, 짜릿하면서도 흥미롭고, 신선하게 느껴집니다.중심서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요. 어떤 이유로 인간의 수준을 초과하는 지적능력을 지니게 된 주인공이, 그와 비슷한 조건의 대립적 인물과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내용이죠. 천재들의 이야기는 늘 흥미롭답니다. 그럼 좀 자세히 들여다볼까요. 주인공인 리언 그레코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됩니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호르몬 K`라는 신약이 투여되는데, 그로 인해 리언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지적능력을 갖게 되죠. (앗, 그러고 보니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과도 비슷하군요.) 지적능력은 판단력, 분석력은 물론 신체적 능력까지 향상시킵니다. 어느 정도냐면 맥박수, 혈압, 신장 기능, 호르몬 분비까지 스스로 조절하며,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수준이랍니다. 리언의 위협적인 능력을 알아챈 CIA는 그를 잡아들이려고 하지만, 그들의 모든 행동은 리언에게 간단히 간파당하고 리언은 유유히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이런 점에서 확실히 `본 아이덴티티`를 닮았군요.) 리언은 지적 능력을 통해 궁극적인 자아 인식에 이르고 존재의 의미와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죠. 그러려면 인공 뇌가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혼자서 인공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인류가 가진 과학기술의 진행 방향을 바꾸고 경제구조 역시 재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세계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죠.이런 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리언보다 뛰어난 레이놀즈가 등장하여 그와 대립합니다. 둘은 만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중을 확인합니다. 리언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레이놀드는 인류 전체를 사랑합니다. 리언에게 지능은 목적이며, 인류는 그의 지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하죠. 반면 레이놀드는 인류의 행복이 자신의 목적이며, 지능이 그 수단이라고 생각하죠. 둘은 서로의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다르며,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이제 목숨을 건 한판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물리적 충돌과는 조금 다릅니다. 리언은 레이놀즈의 물질대사를 조절하여 뇌의 모세혈관을 파괴하려 합니다. 이 공격을 막아낸 레이놀즈는 반격합니다. 리언의 마음을 공격하여 레이놀즈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리언이 레이놀드를 이해하게 되면, 리언은 자신의 존재목적과 존재기반을 잃게 되겠지요. `이해`하라는 레이놀드의 말과 함께 리언의 마음은 레이놀드를 이해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반응합니다. 리언이 그런 작동을 막기 위해 완벽한 마음의 방어벽을 만들려고 하지만, 완벽한 방어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레이놀드를 더 깊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리언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채 죽어갑니다. 그의 죽음이 파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리언은 레이놀드의 사유를 이해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진정한 이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나를 죽이고 너를 받아들이는 일, 동시에 너 역시 너를 죽이며 나를 받아들이는 일. 그래서 상대를 이해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위협적인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17-05-26

조반(造反)과 항산항심(恒産恒心), 그리고 5월

▲ 임재현 편집국장`민주주의로서는 쓰레기통인 한국에서 도저히 꽃필 수 없다`던 그 장미의 계절 5월을 지나고 있다. 지금 한국은 65년 전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가에 불손한 저주를 던진 어느 영국인 기자를 마치 비웃어 주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나날들이다. 경험하지 못했던 5월 장미대선에서 진보 진영의 승리가 이런 절묘한 케미를 낳을 줄 어찌 상상했겠는가? 인수위원회도, 거창한 국회의사당 앞마당도 아니었지만 5·18의 망월동, 아니 빛고을 광주는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 드넓은 취임식장이었다. 그뿐인가. 로버트 레드포드 스타일의 대통령이 대인배다운데다 소탈한 품성까지 겸비했으니 논어가 가르친 `정자정야`(政者正也)의 모범을 보고 있는 듯하다. 염려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의 참모들이 대선 노정의 고단함을 풀 겨를도 없이 언제 저런 인재들을 발탁했는지 경탄케 하는 인사들도 발표되고 있다. 이전 정권의 인수위가 2개월여의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어제 역사적 법정에 섰던 대통령의 수첩에 의존했다가 망신만 당하던 시절과도 대비된다.이제 2주째를 넘긴 새정부의 대국민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일정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디테일한 보도가 나가서 여론이 열광하면 뒤이어 인사가 발표된다. 여기에는 물론 조국, 김상조, 장하성 등 보수가 닭살 반응부터 내고 보는 소위 문제적 인사들도 포함됐다. 대통령의 몇호 업무지시라는 이름의 조치들이 그 전율할 정치적 의도에 비해 진도가 낮게 감지되는 건 새 정부의 참모진이 그만큼 노련하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혼돈과 갈등의 긴 겨울 터널을 거쳐온 국민의 입장에서 그들이 청년군주 세종을 보필해 조선의 융성기를 이뤄낸 집현전 학자들처럼 종횡무진, 밤낮 없이 활약해주기를 바랄 뿐이다.하지만 어제 4대강 사업을 사실 상 적폐로 규정한 대통령의 업무지시에서는 새 정부가 일처리의 요체인 우선순위를 오판하고 있다는 허점이 보였다. 부패와 정책 오류에 대한 확신이 있고 죄가 그리 크다면 정치보복의 비난을 받더라도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1년간의 조사를 거쳐 필요하다면 보를 철거하겠다는 대목에서는 접근이 벌써 한참 어긋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1년으로 치수사업의 효과와 문제, 그에 부가된 수질의 변화를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는가. 정치적 고려에서 비롯돼 구성된 조사단의 객관성은 어떻게 담보하는가. 이를 거쳐 천문학적 사업비를 들여 준공한지 10년도 안 된 강 속의 구조물을 다시 국가재정으로 헐어낼 수 있다는 발상은 과연 어떻게 입안됐는가. 북핵사태와 동북아 정세, 주력산업이 도태될 위기 속에서 국정 공백을 만회해야 할 이 골든타임에 정쟁과 재정을 거덜낼 카드부터 꺼내 들어야 한단 말인가.결국 새 정부는 정치의 과잉이라는 출범 전후의 우려에 대해 다시 자기점검의 칼날을 가슴에 얹어봐야 한다. 우리의 지난 7개월은 이미 국민 모두가 촛불과 태극기라는 정치 행위에 몰입한 시기였다. 대의민주주의의 한 도구인 대선은 그에 비하면 이벤트에 불과했다. 세월호에 우리 아이들을 수장시킨 낡은 대한민국의 적폐가 아무리 밉더라도, 김기춘의 장막 뒤에서 블랙리스트나 만지작 거린 박근혜가 아무리 밉더라도 이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386의 참모들은 1987년 6월 항쟁의 저 뜨거운 도로 위에서 최루탄, 사과탄 세례를 맞으며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네크라소프의 싯구를 이념의 표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제는 분노를 승화시켜 좌우가 공존해야 하는 이 땅에서 좋은 나라를 다시 재건해야 하는 역사적 임무를 맡고 있다. 그들이 10년만에 다시 청와대에 입성해서 `홍위병` 비난을 또 들을 수는 없다. 모택동의 `조반유리`(造反有理, 모든 저항에는 이유가 있다)는 역사의 박제가 돼야 한다. 이제 필요한 미덕은 `항산항심`(恒産恒心,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이다. 현실 안주가 아니라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얘기다.

2017-05-24

노력의 천재

▲ 공강일 서울대 강사요즘 수영을 배우고 있다. 사실 수영을 처음 시작한 건 벌써 오래 전이다. 그동안 매년 한 번씩은 수영을 배우겠노라고 다짐을 하고서 강습을 신청했지만, 세 번도 채 못가고 포기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수영하는 모습과 내 모습을 비교하면서 “내가 이러려고 수영을 시작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어디에서 근거한 믿음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물개처럼 수영을 잘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상 물속에 들어가면 `물개`가 아니라 그냥 `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반복을 십 년이나 했다. 그러니까 나의 자괴감은 `근자감`에서 비롯한 자만심에 불과했다. (지난 대통령님도 그래서 자괴감이 들었던 걸까?)반복적인 포기 속에서도 수영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도 태어났으면 적어도 접영 정도는 해봐야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영법에는 자유형도 있고 배영도 있고 평영도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배우는 접영을, 나는 어쩌자고 인간의 기본적인 소양쯤으로 생각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는 뇌종양 말기 환자인 마틴과 골수암 말기 환자인 루디가 바다를 보기 위해 병원을 탈출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모험을 그리고 있다. 왜 이들이 하필 바다를 보고 싶어 했냐고? 그건 마틴이 어디에서 주워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 때문이다. 천국은 너무 무료해서 사람들이 바다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이야기도 할 게 없다는 것. 사고뭉치 마틴의 꾐에 순진한 루디는 넘어가고 만다. 왜 하필 접영이냐고? 마틴이 바다를 떠벌리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내게도 이유는 없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유가 없음에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접영은 나에게 그런 것이다.내가 수영에 열의를 보이기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한 데는 나름의 곡절이 있다. 수영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아니 정확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다시 수영은 재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노력을 해야 수영을 잘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다시 5년이 걸렸다. 그래서 도합 10년이 걸렸다.나는 수영을 잘한다는 믿음, 이것이 `근자감`이라고 하긴 했으나, 그것이 꼭 근거 없는 믿음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네 친구들과 수영을 하면 나는 꽤나 잘하는 축에 들었기 때문이다. 물에 한 번 들어가면 서너 시간 동안 물에서 놀아도 지겹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물을 좋아했고, 물도 나랑 친한 줄로만 알았다.돌이켜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어렸을 때 수영하던 개울은 폭이 채 5m도 되지 않았고, 물이 제일 깊은 곳도 2m가 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수영을 해봤자 얼마나 잘할 것이며, 거기에서 노는 애들의 수영 수준 또한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친구들이 수영 좀 한다는 말에 우쭐해 하는 꼴이라니, 그 우쭐함을 버리기 싫어 5년씩이나 붙들고 있었다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더욱 한심한 건 수영의 관건은 재능이라는 믿음, 수영과 노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말 “어이가 없네!”. 한 번은 수영장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대여섯 명이 수영장에 들어왔다. 단체로 준비운동을 하더니 차례를 정해서 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갈 때는 접영, 올 때는 배영, 그리고 다시 갈 때는 평영, 되돌아올 때는 자유형. 그들은 마치 군무를 펼치듯, 일제히 팔을 휘저었고, 발을 찼으며, 물에서 솟구치듯 날아올랐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족히 열 바퀴는 돌았던 것 같다.그들을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킥판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수영장을 나오고 말았다. 저들은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해도 저들만큼 수영을 잘할 수는 없겠구나라며 절망했다. 그런데 저들도 나처럼 수영을 배우기 시작할 때가 있었다는 것, 배운 것을 익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였으리란 것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왜? 수영은 그냥 재능이니까,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것이니까. 다시 “어이가 없네!” `그릿`이라는 책을 쓴 앤절라 더크워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그런데 네가 천재는 아니잖니!”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성공의 결정적 요인에 관해 연구했다. 그녀는 각계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그것을 데이터화해서 도표를 그리고 지우길 반복하며 수십 쪽에 이르는 도표를 만들었고, 연구자들과 함께 고민하기도 하면서 십 년이 걸려서야 이론으로 정립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성취심리학 이론은 다음과 같다. 재능×노력=기술기술×노력=성취∴성공=재능×노력2이 이론은 무지한 내가 보기에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성공을 하려면 노력하라는 것. 그런데 이 이론은 단순한 만큼이나 명쾌하다. 재능이 어떤 능력을 얻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이 이론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취를 위해서는 그 능력을 다시 갈고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성취를 위해서는 재능보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어떤 일에서 `좀 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다. 언젠가 가수 김윤아가 `위대한 탄생`이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그녀는 한 가수 지망생의 멘토로 참여했다. 그 지망생은 말이 지망생이지 수천 명의 경쟁자들을 뚫고 예선에 오른 실력자다. 그런데 이 지망생이 자꾸 연습을 안 해오자 김윤아는 독설을 내뿜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는 변명에 대해 김윤아는 `노래를 하고 싶지 않아도 노래해야 할 순간이 온다`며 일침을 가한다. 가장 강렬했던 말은 그렇게 아무런 연습 없이, 멋있는 척 노래를 부르면,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 좀 잘 부르는 친구”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말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그냥 노력도 아니고 피나는 노력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세상에 천재가 있다면, 재능의 천재가 아니라 노력의 천재일 것이라는 생각. 물론 `노오력`만으로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데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아닐까.

2017-05-19

자아감각 “살아 있네”

▲ 공강일 서울대 강사1.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시죠? 내일까지 해야 할 과제가 세 가지가 있다면, 그런데 쉬지 않고 꼬박 밤을 새어도 그 일을 다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될 때, 레드불이나 핫식스 같은 카페인 음료를 들이키며 피로를 털어낸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일을 다 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 일은 손도 못 댄 채 마감시간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알 때,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물론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일이 겹치는 상황을 만들지도 않겠지만, 그런 현명한 사람은 교과서에만 나오니까, 일단 제쳐 두고, 그보다 조금 덜 현명한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시간이 닿는 데까지 그 일을 해내겠지. 또 어떤 사람은 셋 다 대충대충 해낼 수도 있겠지.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이럴 때, `아 해야 하는데`라며 한숨을 쉬면서, 손은 자꾸 마우스 스크롤을 돌린다. 인터넷 뉴스나 쇼핑을 하면서, 혹은 유튜브의 시시껄렁한 영상을 보면서, 낄낄거리면서 그러면서도 `아, 벌써 새벽 2시구나`라고 말하면서, 그러면서 이것만 보고 해야지 하면서, 최대한 몸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든 뒤에, `아 어쩔 수 없네. 내일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해야겠다`라고 생각한 뒤 잠든다.왜 이러는 걸까?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 그 일을 못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지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혹시 그 중압감을 압박감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지금 `나`가 바쁘다는 사실, 해야 할 일이 겁나 많다는 사실, 그런 무게감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가 이 세상에서 몹시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겨우 이런 행동을 통해 `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건 아닐까?이런 예라면 얼마든지 많다.약속 시간이 아침 9시인데, 마침 30분 전에 일어났네. 지금 후다닥 준비를 하면 조금은 늦겠지만 그래도 늦지 않고 갈 수는 있다. 이럴 때,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러면서 또 씻지는 않고,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고민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흘러 보내고선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야 늦을 것 같다고 상대방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는지.카드 한도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한도를 넘기면 월급까지 열흘도 넘게 남았고 그동안 쓸 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더욱이 이번 달 월급으로는 카드값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도가 달랑거릴 때, 그 한도의 끝을 보고 말겠다는 듯 돈을 쓰며, 그 때 찾아오는 압박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어떻게 이런 변태적인 상황을 즐길 수 있냐구요?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은 아닐까, 그런 것들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아닐까, 그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나를 자꾸 궁지로 몰아가려는 것은 아닐까. 2.`범죄와의 전쟁`에서 하정우, 최민식, 조진웅, 김성균, 그들이 모두 한 번씩은 치는 대사.“살아있네!”`나쁜 놈 전성시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말은 어쩌면 더 나쁘고 더 못된 짓을 할 때, 그리고 그 일의 귀결과 대가를 알게 될 때, 그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아닐까. 살아있다니? 이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 일인가.저들이 사악한 사람들이기 때문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오히려 나쁜 짓을 일삼는다, 살아있네!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나`가 이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각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나`의 존재를 느끼고 싶은, 그 간절하고 혹은 순수하기까지 한 (이런 것까지 노력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런 행동을 낳는 것이 아닐까.자신의 살아 있음, 오직 중요한 것이 이것이기에, 기형적이고 변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3.내가 좋아하는 그림, 틴토레토의 `미네르바와 아라크네`.베 짜기의 명수 아라크네는 베 좀 잘 짜는 것에 우쭐해져서는, 베틀의 신이자 질투의 신인 미네르바(아테나)에게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린다. “여신 아테나와 승부를 겨뤄도 지지 않는다.” 이 말에 화가 난 아테나는 아라크네와 `맞장`을 뜬다.자, 어디 너의 능력을 보여주시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라크네는 아테나를 이겼다. 그러자 아테나는 더 분기탱천하여 그 오만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아라크네를 평생 실이나 뽑으라며 거미로 바꿔버린다.그런데 여기서 잠깐! 아라크네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 경기에서 지면 졌다고, 이기면 이겼다고 엄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아라크네는 베를 짠다.틴토레토는 이런 아라크네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아라크네의 저 도취된 듯한 눈빛, 꿈꾸는 듯한 눈빛을 통해서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락의 음험한 어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틴토레토는, 아라크네의 마음속에서 들끓는 흥분, 그리고 곧 닥쳐올 끔찍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 그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감각들로 들끓고 있는 아라크네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모르긴 몰라도, 아라크네가 저 높은 다락에 올라 베를 짜는 이유, 그녀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베를 짜는 이유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살아 있는 자신을 보라고,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 속에서 치명적으로 솟구치는 자신의 매력을, 더 긴장되고 두려울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베 짜기 솜씨를 베풀고 있다.이것을 보라! 틴토레토는 사람들이 아라크네를 우러러 보아야만 볼 수 있는 다락으로 경기 장소를 설정했을 테지.이것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이것을,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파멸에 이르게 되는 이것을 자아감 혹은 자아감각이라 부르려 한다. 여러분은 이런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어떤 모순적인 행동을 하시죠?

2017-05-12

거대한 침묵―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바`

▲ 공강일 서울대 강사대선 정국 속에서 TV토론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토론회를 보며 `정치란 편 가르기`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보수와 진보, 호남과 영남, 남성과 여성, 이런 것들에서부터 사드 배치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일자리 창출은 민간에서 해야 한다는 사람과 정부에서 해야 한다는 사람, 동성애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또는 찬반논란의 대상일 수 없다는 사람까지. 토론을 보면서 나 역시 누가 나와 생각이 같은지, 누가 나와 생각이 다른지 따지고 나누게 된다.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정치는 우선 이렇게 사람들을 분열시켜야 한다. 통합은 그 다음이다. 정치가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골치 아픈 정치에서 떨어져 머리 좀 식혀야겠다. 그래서 `폴리 베르제르의 바`라는 그림 한 점을 준비했다. 마네가 죽기 한 해 전에 그린 그림으로 그가 천착한 도시에서의 생활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림의 전경에 위치한 여성의 난해한 표정과 특이하게 왜곡된 공간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내가 이 그림을 알 게 된 것은 십 년 전인데 요즘 들어서 이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볼까?그림의 전경에는 바텐더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고, 그녀의 뒤에는 벽 전체를 덮는 전면 거울이 있다. 그녀의 왼쪽 팔과 몸 사이의 금색 띠가 거울의 테두리다. 이 거울에는 카페를 찾은 사람들로 북적된다.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웅성대는 소리가 카페를 가득 메웠을 법도 하다. 그러나 거울 속은 그림처럼 조용하다. 그림이어서 조용한 것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 아닐까? 이 여성의 모호한 표정은 모든 소란을 빨아들이고 있다. 아니 그 소리를 모두 튕겨내고 그녀만 정적 속에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이런 침묵을 강요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공허한 눈빛의 여성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거울에 비친 사람들을 경유하는 것이 좋겠다.거울에 비친 사람들은 이 바텐더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앞에서 카페라고 했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작은 카페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곳은 카페 콩세르로 마네가 살았을 당시에 실제 하던 장소다. 이곳에서는 술만 마셨던 것이 아니라 발레에서 서커스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파리 최고의 사교장이었다. 1층에는 넓은 홀이 있고 2층은 왼쪽과 오른쪽이 발코니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홀을 내려다볼 수 있다. 2층 손님들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홀을 가로질러 그들의 맞은편 바텐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딱히 이 바텐더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 중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누구일까?그층 제일 앞, 갈색 옷을 입은 여성은 바텐더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앉아 있다. 비록 그녀가 오페라 안경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그것이 곡예사는 아닐 것이다. 곡예사는 이 그림의 좌측상단에 녹색 신발을 신고 공중그네를 타고 있다. 그녀가 곡예사를 보려면 고개를 더 뒤로 젖혀야 한다. 이 여성을 따라 살짝 왼쪽을 볼까. 색감을 잘 살려 옷을 입은 또 다른 여성이 앉아 있다. 이 여성이 쓴 검은색 모자는 흰색 블라우스와 대비를 이루고, 이 블라우스는 팔목까지 오는 노란색 장갑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녀는 두 팔을 예쁘게 모아 턱을 바치고 왼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아니 또 왼쪽을? 우리는 어쩐지 자꾸 왼쪽으로만 가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신사가 앉아 있다. 이 남자도 왼쪽을 보고 있나? 아니 이 남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 남자다. 우리가 찾고 있던 그 사람, 바텐더를 바라보는 사람 말이다. 그는 비록 앉아 있지만, 키가 크고 몸은 호리호리해 보인다. 그를 무심코 신사라고 불렀지만,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사의 차림이다. 크라운이 긴 모자를 쓰고 검은색 슈트를 입었다. 슈트 위로 언뜻 비치는 흰색을 통해 그가 입은 셔츠의 색깔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팔(八)자 모양의 콧수염이 인상적이다.그런데 이 기시감은 뭐지? 어디서 이 남자를 본 걸까? 멀리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바텐더의 오른쪽, 거울에 비친 남자를 닮았다. 지팡이를 들고 뚫어지게 바텐더를 바라보는 이 남자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그림은 이상하다. 거울에 비친 남자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남자는 여성을 살짝 비낀 왼쪽에 서 있어야 한다. 거울에 비친 술병을 보면 실제의 술병보다 45도 정도 꺾여 비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남성도 바텐더에게 살짝 왼쪽으로 비켜 서 있어야 한다.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화가는 두 개의 사건을 중첩시켜 놓은 것 같다. 이 신사가 바텐더에게서 칵테일을 주문했을 때와 노란 장갑의 여성에게로 돌아왔을 때, 이 두 개의 시간을 한 공간에 그려놓은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발코니의 신사 앞에 놓인 것이 칵테일 잔처럼 생겼다. 이 그림은 공간을 사실 그대로 재현한 그림이 아니란 말일까?그렇다. 화가는 거울에 비친 술병에 그런 단서를 남겨 놓았다. 실제로 바에는 높이가 거의 같은 붉은 병이 갈색 병의 살짝 뒤쪽에 있다. 그렇다면 거울에는 붉은 병이 먼저 오고 갈색 병이 그 뒤에 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붉은 병이 갈색 병 훨씬 뒤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병의 높이도 확연히 붉은 병이 크게 그려져 있다. 이제 사실적 공간을 그림으로 재현했다는 생각은 것이 좋겠다.드디어 이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바텐더에게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바텐더는 바에 양손을 집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을까? 앞에서 말한 신사가 칵테일을 사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바텐더의 흰 팔이 빨갛게 변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저 신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라크(Kenneth Clark)는 이 그림을 마네가 활동했던 당시 파리의 카페 분위기와 관련지어 분석한 적이 있다. 그의 연구는 얼마나 치밀한지 저 바에 놓인 술병의 이름까지 알아낼 정도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의 바텐더는 술만 판매했던 것이 아니라 성매매도 겸했다고 한다. 클라크의 이런 분석을 참조한다면 저 점잖아 보이는, 그렇지만 코끝이 붉은 신사는 바텐더에게 성관계를 요구했을 것이다. 비록 지금 그녀가 바에 양팔을 벌려 커다란 이등변삼각형을 만들어 매우 안정감 있고 완고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녀가 막상 이 신사를 대면했을 때는 달랐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바텐더의 기울어진 등과 축 쳐진 어깨,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가 이를 말해준다. 신사의 요구를 받아들인 뒤 바텐더는 머리를 단단히 고쳐 묶고,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회한 속으로 걸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삶의 공허함, 계속 살아야 한다는, 달라질 것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그런 공허함, 그 공허가 삶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빨아들여 거대한 침묵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7-04-28

산행의 매력-우두령에서 황악산까지

▲ 공강일 서울대 강사지난달에 송백산악회를 따라 산에 갔다가 아직 제대로 녹지 않은 비탈에서 미끄러져 목을 삐끗했다. 겨우 한 시간을 걷고 서는 말이다. 결국 산행을 포기해야 했다. 출발 시간을 잘못 알고 혼자 놀다가 한 시간이 넘어서 나타나는 바람에 산악회 대표 `진상`이 되었다.이번엔 절치부심하고 연습을 했다. 우선 제대로 된 등산화를 구입했다. 시원찮은 목수가 연장을 탓하는 법이니까. 다음으로 한 시간 정도의 산행코스를 매일 걸으며 속도를 높였다. 늘 천천히 걸어서 그런지 빨리 걷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 빨리 걷기 위해서는 무릎보다는 허벅지를 써야 하고 팔도 흔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안 쓰던 근육이라 그런지 허벅지와 팔이 심하게 당겼다.연습을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송백산악회에 여러 개의 산행팀이 있는데, 내가 따라간 곳은 백두대간 종주를 목표로 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산의 줄기다. 대간 대부분의 구간은 도계와 일치한다.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산으로는 설악산(1,708m), 오대산(1,563m), 두타산(1,353m), 태백산(1,567m), 소백산(1,421m), 속리산(1,508m), 황학산(1,111m), 삼도봉(1,177m), 덕유산(1,614m), 지리산(1,915m)이 있다. 높은 산만 이야기했는데, 그 사이에는 진부령, 대관령, 죽령, 추풍령, 육십령, 영취산 같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봄직한 곳도 있다.이 산악회에서 가이드를 하는 분들은 백두대간만 여섯 번에서 많이는 열두 번까지 종주한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무려 열 명이 넘는다. 이들은 선두, 중간, 후미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무전기로 서로의 진행상황을 연락한다. 정말 전문 산악회다. 하필이면 이런 산악회일 줄이야.백두대간을 한 번이라도 종주한 분들은 이력이 붙어서 그야말로 산을 타듯이 넘는다. 상봉에서 상상봉으로 건너뛰듯이 말이다. 걸으면서 말도 하고 사진도 찍고, 식사할 땐 막걸리도 한 잔 한다. 난 숨 쉬는 것도 힘든데.지난번엔 삼도봉을 넘었는데, 이번엔 황학산 또는 황악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걸을 예정이다. 우두령(질마재), 삼성산, 여정봉, 바람재, 형제봉, 황악산, 백운봉, 여시골산, 괘방령으로 이어지는 14km 정도의 코스다. 보통 `악(岳)` 자가 들어가는 산은 `악`소리가 날만큼 힘이 든다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죽을 맛이다. 지난번엔 거의 20km를 걸었는데, 이번엔 좀 짧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산을 탈 땐 언제가 가장 힘들까? 단호히 말할 수 있는데 모든 지점이 힘들다. 처음 시작할 땐 바로 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중간 지점부터는 많이 걸어서 힘들고, 식사를 하고 나면 배가 불러서 힘들다. 내려올 땐 어디가 끝인지 몰라서 힘들다. 우두령에서 여정봉까지는 시작하는 구간이어서 힘들었다. 여정봉은 인터넷 지도에서 찾아보면 이름도 없는 산이다. 그래서 동네 뒷산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표지석에 따르면 그 높이가 1,030m나 된다.이제 여정봉에서 황학산까지 가야한다. 산악회 회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구간이 아마 오늘 구간 중에서 제일 힘들면서 지겨운 곳이라 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고 했다. 여정봉에서 해발 800m 정도 되는 바람재까지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는 것은 좋은데 내려 온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올라가면 또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회장님의 설명과 달리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냥 힘들기만 했다.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오면 올라가며 얼마나 많은 봉우리를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황악산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준비한 점심도 다양했다. 주먹밥, 김밥, 떡, 과일, 다들 인심도 넉넉해서 충분히 많은 음식을 가지고 왔다. 그 중에서도 반가운 것은 홍어와 막걸리였다. 산에서 먹는 밥은 확실히 다르다. 이 맛에 산을 타는지도 모르겠다. 용케 선두 그룹을 따라왔는데, 그 그룹에서도 나는 제일 꼴찌로 도착했다. 완전히 쉬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먼저 출발한다. 뒤늦게 일행을 따라나섰는데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어디로 간 거지? 이정표는 이 길을 따라가면 직지사로 간다고 한다. 순간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난번과 같은 진상 짓을 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한 1km는 온 것 같은데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지만,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돌아갔더니 중간그룹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또 거기서 밥을 한 번 더 얻어먹었다. 혼자 가려고 했더니 같이 가자고 한다. 얼떨결에 중간그룹에 끼이게 되었다. 이분들은 선두그룹과는 달라서 때론 쉬기도 하고 단체사진도 찍기도 했다. 탁월한 개그 감각을 가진 분들이 내내 웃겨주었다. 덕분에 지루함도 힘듦도 덜 수 있었다.목적지에 도착했더니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지난번에 나의 진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산을 잘 탄다고 치켜 세웠다. 이런 식이면 다음번에도 따라가야 할 판이다. 오늘 식사는 회장님이 특별히 회원들 보신을 시키겠다며 백숙을 준비해 놓았다. 맛나게 먹고 막걸리도 마셨다. 오늘 산을 타며 빠진 살보다 더 찌게 생겼다.올라가면 내려올 것을 무엇 하러 등산 같은 걸 하냐는 친구의 퉁명스러운 말이 생각났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산행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일의 과정을 축적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그러나 산행의 결과물은 고작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다. 가치와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산행을 통해 무가치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알게 된다. 그러한 무가치함이 지닌 공백과 그 공백이 지닌 깊이를 말이다.

2017-04-21

끝나지 않을 이야기

△응어리(되풀이 되는 이야기의 덩어리)누구나 가슴에 응어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아버지에게는 삼십 여 년 전의 화재 사건이 그러하다. 대구 서문시장에 집과 가게를 장만해서 이제 살만해졌을 때였다고 한다. 화재보험을 들까, 굿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굿을 했다고 한다. 굿을 하고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불이 났단다. 다 타고 남은 것은 밀가루 한 포대와 거기에 들어 있던 돈 7천원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지금도 미신이라고 하면 학을 뗀다.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하필 그 시점에 불이 났는지, 왜 그 불이 아버지의 집으로 번졌는지, 왜 화재보험을 안 들고 굿을 했던 것인지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이해할 수 없나 보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혹시라도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복기해 보는 것 같다.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 이야기는 그런 것들을 수긍해가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응어리란 되풀이되는 이야기 덩어리다.그런데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일이 있고 십 년도 훨씬 지나서다. 너무 아픈 이야기,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저린 이야기는 하기 어려우며, 분분한 마음이 가라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아닌 말로 돈이야 다시 벌면 된다. 그런데 만약 그 화재로 채 백일이 되지 않았던 내가 잘못 되기라도 했다면 아버진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일이 없어 아버지도 나도 다행이다.다행이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몇 년 전 참으로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경험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 일은 2014년 4월 16일에 벌어졌다. 배가 침몰했고, 선장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승무원은 구했지만, 승객을 다 구하지는 못했다. 295명이 희생되었고, 9명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4월 11일, 참사 1091일, 세월호는 육지로 올라왔다.△공감과 배려지난 8일 목포신항에 갔다. 거기엔 뭍으로 온전히 올리지 못한 세월호가 모로 누워 있었다. 그 전날 한 국회의원은 1천억원이 넘게 든다며 세월호 인양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했다. 그는 “6·25 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 12만5천명의 유해를 아직 못 찾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9명의 시신을 1천억원을 넘게 들여서 찾느냐”고 반문했다.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꽤 많다. “내 아이가 만약 미수습자라면 국가를 위해 수색을 깨끗이 포기하겠노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인양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 그 1천억원이 넘는 돈이 우리의 세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단지 9명의 시신을 찾기 위해 그 많은 혈세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세월호 인양은 소수보다 다수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공리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익을 위해 개인이 불이익을 감수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세월호가 인양되긴 했지만, 인양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두고두고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세월호가 인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2000년 이후 침몰한 선박 중 7천t급을 기준으로 보면, 15건 중 14건은 인양이 이뤄졌다”며 당연성을 강조하거나 침몰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여 다음에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국가의 존재 이유와 관련지어 생각해보자는 의견이다. 아무리 천문학적 금액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많은 국민이 원하는 일이라면 국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고, 이를 위해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의 60% 이상이 세월호 인양을 원했다. 정부가 국민을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조정하고 조율해 나가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적 토대일 것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물론 1천20억원은 너무 많다. 구체적인 액수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뒤흔든다. 그런데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많은 국민들이 세월호 인양에 찬성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진실을 규명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 그 일의 중요성을 국민들은 알고 있다.여전히 논리적으로 설득이 되지 않는다면, 미수습자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길 바란다. 내가 목포신항에서 만난 분은 은화 어머니와 다윤이 아버지였다. 그분들은 1천일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식의 시신이라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 앞에서 목 놓아 운다. 은화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망자를 보내는 것처럼 은화를 그렇게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실종자, 미수습자 가족이라 불리는 것이 가장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여기에 실종자가 있는 분이 있다면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은화 어머니의 배려는 세심하고 깊었다.은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인양의 여부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이므로, 세월호에 남은 그들 역시 사람이므로, 그 미수습자를 기다리는 가족 역시 사람이므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그 돈을 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인간을 위해 쓰여 질 때, 그것이 돈의 가장 의미 있는 사용이 아닐까, 정말 돈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그 아홉 명과 남겨진 가족에게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세월호가 인양이 되었으니, 아직 발견되지 못한 아홉 명을 빨리 찾을 수 있길 바란다. 그들의 가족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묻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가슴 속 풀리지 않을 응어리가 더 단단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17-04-14

느릿하고 우직하게, 그러나 긴장할 것

△야외무대 청도국악공연청도소싸움축제를 다녀왔다. 이 축제는 1999년부터 소싸움축제라 불렸고, 그 전까지는 영남민속투우대회로 불렸다. 전국규모대회로 발전하면서 2007년에 소싸움경기장이 준공되었다. 꽤나 오래된 축제다. 내가 간 날은 축제 마지막 날이었다.정오께 도착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소싸움이 벌어지는 경기장 밖 야외무대에서는 국악공연팀이 리허설 중이었다. 그동안 사회자가 관객을 웃겨 주었다. 사회자는 관객 전체와 집단 가위바위보 게임을 했다. 한 번 할 때마다 사회자에게 진 사람은 떨어져나가는 방식이다. 몇 판 안 했는데, 아주머니와 아저씨 두 분만 남았다.이 두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어 등을 맞대게 한 후 가위바위보를 시켰다. 아저씨는 보, 아주머니는 바위를 냈다. 사회자가 아저씨에게 바꿀 의향이 있냐고 묻자 아저씨는 얼른 바위로 바꾼다. 이번엔 아주머니 차례다. 사회자가 바꾸시겠습니까, 라고 묻고는 아주머니에게 자꾸 보자기를 보여준다. 관람객들이 웃는다. 사회자는 능청스럽기 짝이 없다. “아주머니가 이길 수 있을까요? 자 바꿔주세요.” 아저씨는 뒤돌아 서 있으므로 사회자의 모략을 알 리 없다. 사회자는 가위바위보만으로도 관객을 들었다놓았다 한다.그 사이 국악팀이 공연준비를 마쳤다. 곱게 한복을 입은 9명의 공연자들이 무대에 오른다. 양손에는 연꽃을 들었다. 차려 입은 옷만큼이나 고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경기장 입구 각설이 공연소리가 너무 크다. 각설이들은 트로트를 부르고 국악공연팀은 타령을 부른다. 아무래도 익숙한 쪽으로 귀가 기울어지게 마련이어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어디, 돈을 걸어볼까소싸움 경기장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베팅을 하느라 분주했다. 그런 사람들을 보니 나도 얼른 해보고 싶었다. 우권을 들고 어떻게 하는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경기참여 방식을 설명해주는 곳이 따로 있는데도 나는 어서 하고 싶다는 생각에 안절부절이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내가 딱해보였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셨다.우선 원하는 경기번호에 체크를 해야 한다. 나는 6경기에 참여하고 싶으니까 6에 체크한다. 그리고 단승식, 복승식, 시단승식, 시복승식 중 어디에 걸 것인지 체크하면 된다. 단승식은 말 그대로 6경기에서 어떤 소가 이길지를 정하면 된다. 복승식은 6경기와 다음 7경기에서 어떤 소가 이길지를 맞추어야 한다.시단승식은 6경기에서 몇 라운드에 이길지를 표시하면 된다. 라운드는 5분 단위다. 라운드가 있다고 해서 권투처럼 라운드가 끝나면 자기 코너로 돌아와 쉬는 것이 아니다.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가 5분이 지날 때마다 라운드가 올라간다. 6라운드, 그러니까 최대 30분간 싸운다. 6라운드가 지나면 무승부다. 시복승식은 6경기와 7경기의 이길 소와 몇 라운드에 끝날지까지 맞추어야 한다. 당연히 시복승식이 어려우니 배당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소를 구분하기 위해 소의 등에 각각 붉은 점과 푸른 점이 찍혀 있다. 소를 끌고 나오는 사람은 조교사다. 이들은 자기 소의 색깔에 맞게 붉은 옷과 푸른 옷을 입었다. 이들은 소들이 머리를 맞대는 동안 서로의 소를 격려하며 싸움을 북돋을 것이다.소는 경기장의 좌측에서 출전을 대기하고 있다. 소를 보고 돈을 걸어야 하는데 나는 소가 어디에 대기하는 줄도 모르고 이름만 보고 돈을 걸기로 한다. `멋쟁이`는 홍소, `고수`는 청소다. 아무래도 멋쟁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멋쟁이에게 이천 원, 고수에 천 원을 걸었다. 그런데 표시를 잘못했는지 그만 둘 다 청소에 걸고 말았다. 머리를 맞대는가 싶더니 채 2분도 못 버티고 `멋쟁이`가 줄행랑을 놓는다. 운 좋게 이기고 나니 경기가 만만하게 느껴졌다. 7경기는 운 좋게 이겼는데 8경기에서부터는 운이 다했는지 내리 졌다.△전설과 수성의 승부한 두 경기만 보고 가자는 것이 마지막 경기까지 남게 되었다. 잃은 돈을 꼭 만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홍소의 이름은 `수성`이고 청소의 이름은 `전설`이다. 이름은 전설이 더 마음에 드는데 어쩐 일인지 수성에게 정이 갔다. 거금 오천 원을 수성에게 걸었다.소들은 큰 눈을 끔벅이며 이마를 맞대고 서로를 민다. 저렇게 순박한 눈으로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소들은 머리를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들은 밀기 위해 혹은 밀리지 않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홍소 이겨라, 청소 이겨라, 구경꾼들의 소리가 높아진다. 전설이 한껏 수성을 밀어붙인다. 밀리면 그걸로 끝이다. 수성은 금방 질 것처럼 여러 발자국 밀리다가도 자신의 이름처럼 묵직하게 버텨낸다.800kg에 육박하는 소들이다. 저 정도 힘과 힘이 맞부딪힐 때는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6라운드로 접어들자 소도 싸움을 몰아치는 조련사도 지쳤다. 소의 이마에 피가 밴다. 그럴수록 경기장 안은 긴장감과 묘한 흥분 속에 들끓어 오른다. 승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질 것이다. 그러니 한 눈을 팔아선 안 된다.갑자기 전설이 바싹 허리를 구부렸다가 튕기듯 힘을 쏟아낸다. 기다렸다는 듯 수성이 뒷발에 힘을 준다. 챙, 하는 소리가 난 것 같다.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다. 아까처럼 수성은 버텨줄 것이다. 힘을 몰아 되받아쳐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라 수성은 금세 꽁무니를 빼고 줄행랑을 놓는다. 전설은 굳이 따라가지 않는다. 수성은 놀란 듯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법석이다. 오히려 승리의 세리모니를 하는 것 같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눈 큰 소들의 느릿한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난다. 나는 이제 겨우 긴 숨을 뱉어낸다. 단승식 6라운드에 돈을 건 사람은 엄청 땄을 것이다. 괜히 입맛을 다시게 된다. 다음에 올 때는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이름만 보고 걸어야지, 뭐 다음에 또? 다음에 오는 것은 상관없지만, 또 돈을 걸 생각부터 하다니 문제다. 이래서 도박이 무서운가 보다. 돈을 따야지라고 마음을 먹으면 자꾸 위험률이 높은 쪽에 많은 돈을 걸게 된다. 소싸움을 즐긴다는 마음으로 베팅을 하면 경기를 보는 것이 더 즐거웠을 텐데, 매번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렇긴 해도 이렇게 흥분되고 긴장되는 축제는 처음이다.축제가 끝나도 소싸움 겜블은 매주 주말마다 열린다. 만약 구경을 오신다면 순박한 소처럼 베팅도 순박하게 하시길 권한다.

2017-04-07

조개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요?

갯벌에는 갯지렁이가 산다. 갯지렁이는 발도 많지만, 그 종류도 다양해서 이름도 많다. 참갯지렁이,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 바위털갯지렁이, 털보집갯지렁이, 괴물유령갯지렁이. 우와 정말 많다. 쭈꾸미와 낙지 같은 연체동물도 뻘 깊숙한 곳에 산다. 그런가 하면 새우, 해삼, 개불, 말미잘도 있고 굴, 홍합, 참고둥, 큰구슬우렁이, 보리새우, 대하, 밀새우, 꽃게, 민꽃게, 밤게, 칠게, 농게, 쏙, 쏙붙이, 따개비, 바위게, 아무르불가사리, 별불가사리도 있다. 쉽게 볼 수도 있고 잡을 수도 있는 것은 백합, 피조개, 꼬막, 바지락, 가무락, 맛조개, 동죽과 같은 조개 종류다. 흠, 다들 눈치 채셨겠지만, 나는 오늘 조개를 잡으러 갈 생각이다. 백합 같은 조개가 아니라면 서해안 인근에서 바지락, 동죽, 맛조개 같은 것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조개는 날씨가 따뜻할 때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은 썩 좋은 시기는 아니다. 그래도 조개가 잡고 싶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 날이 좀 차가우니 낮 시간에 조개를 잡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무조건 낮에 간다고 조개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때표를 잘 보고 움직여야 한다.인터넷에 `물때표`를 검색하면 되는데 이것은 밀물과 썰물이 드는 시간을 알려준다. 표가 복잡해 보인다고? 그렇지도 않다. 이것저것 볼 것 없이 우선 물이 빠지는 시간을 먼저 체크하면 된다. 그 다음 괄호 안에 있는 숫자가 `0`에 가까운 때를 찾아야 한다. `0`에 가까울수록 물이 많이 빠져나가니까 바다 쪽으로 쑥 들어가서 조개를 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래도 조개를 잡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너무 믿지는 마시라.조개를 잡을 때는 세 발이나 네 발로 된 갈퀴를 사용하면 된다. 호미처럼 생긴 갈퀴면 될 것 같지만, 사용하다보면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플 것이다. 서서 사용할 수 있는 쇠스랑 같은 것이 좋겠다. `레기`라고 불리는 농사용 도구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갈퀴에 망을 달아 놓은 것도 있다. 모래는 빠져 나가고 조개는 그 망에 걸린다. 정말 교묘한 도구다.그런데 참 신기한 조개잡이 도구도 있다. 꼭 쟁기를 닮았는데, 소 대신 사람이 끌고 다닐 수 있는 일종의 휴대용 쟁기다. 삽이 달려야 할 자리에 `ㄷ`자 모양의 날이 달려 있다. 이것을 사람들은 `그레`, `끄레`, `글궤`라고 부른다. 물론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갯벌에 끌고 다니다보면 날이 조개와 덜커덕 부딪히게 된다.바로 그 자리에 조개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파는 곳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 바닷가 근처 시장에서나 파는 도구인가 보다.아참, 양동이를 하나 챙기는 것이 좋겠다. 백합 또는 상합이라 불리는 조개는 해감을 안 해도 되지만 꼬막, 바지락, 동죽 같은 것들은 해감을 꼭 해야 한다. 양동이에 바닷물을 떠 조개를 담가두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소금을 풀어서 해감을 시키기는 힘들다. 소금의 농도를 맞추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조개가 죽으면 일일이 내장을 다 떼어내는 수고를 들여야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양동이도 사고 갈퀴도 샀다면, 이렇게 된 거, 이참에 가슴장화도 하나 구입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가슴장화는 장화와 바지가 일체형으로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가슴까지 오는 장화다. 이 정도 입어줘야 아하, 조개 잡으러 온 사람들이구나, 할 거다. 그리고 옷을 버리지 않고, 무엇보다 힘들면 갯벌에 털썩 주저앉을 수도 있으니 정말 꼭 필요한 옷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팁인데 기왕 가슴장화를 사려면 망사 내피가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그래야 습기도 안 차고 몸에 달라붙지도 않는다.갯벌에서 조개를 잡으려면 이 정도 장비는 챙겨야 한다. 이건 조개를 잡는 사람의 올바른 예의되시겠다. 그럼 준비가 된 건가. 그럼 조개를 잡으러 가볼까? 아니지, 선크림을 바르고, 선크림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목이랑 얼굴을 목도리로 싸매고, 모자도 쓰고, 선글라스도 짠하게 끼고, 마지막으로 고무장갑까지 챙기면 준비 끝! 이제 정말 출발이다.그런데 이건 너무 과한가? 물론, 사서 먹는 것이 더 싸겠다거나, 괜한 수고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막상 조개를 잡으러 가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 조개잡이가 나름 운치가 있어서 여간 재밌는 게 아니다.바닷바람이 선선히 불어온다. 바람을 따라 더 멀리로 내몰린 바닷물이 찰박찰박 소리를 낸다. 갈매기는 한가롭게 선회를 하고, 때로 우리 곁에 와서는 끼룩끼룩 하고 운다. 갈퀴로 갯벌을 긁을 때 달그락 하고 조개가 걸리면 손맛도 꽤나 쏠쏠하다. 어떠신가, 이만하면 당신도 조개를 잡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신지?▲ 공강일 서울대 강사실컷 조개잡이 전문가처럼 말했지만, 내가 조개를 잡으러 갔을 때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심지어 간조시간도 제대로 보지 않고 가는 바람에 완전히 깜깜해지고 나서야 물이 빠졌다. 더 이상 조개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져서야 물이 빠졌으니 완전 허탕을 친 셈이다. 갯벌 안쪽으로 갈수록 조개가 많다는 것도 모르고 해안가 근처에서 삽질을 했다. 왜 하필 삽을 가지고 왔는지, 무슨 김장독이라도 묻을 요량이었나, 아무리 깊이 파도 조개는 나오지 않았다. 기껏 조개를 잡아 왔지만, 해감을 제대로 시키지 못해 먹지도 못했다. 이런 실패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다. 조개를 잡으려면 다양한 장비가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조개를 잡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 한 번 더 가야겠다. 그 땐 정말 잘 준비를 해가려고 한다. 그래서 쪄먹고 구워먹고 삶아 먹고 회로 먹고, 조개 잔치를 벌일 것이다. 사실 조개를 잡는 것보다 놀러 갈 생각에 벌써 가슴이 설렌다.

2017-03-31

산행 `진상`기-덕산재에서 삼도봉까지

◆해인리, 뒹구는 봄참 좋은 산행이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산악회를 따라나섰다. 마침 백두대간 종주를 전문으로 하는 송백산악회다. 무주 무풍면 덕산재에서 출발해 백수리산을 지나 충청북도, 전라북도, 경상북도가 만나는 삼도봉을 찍고 김천의 해인리로 내려올 것이다. 준비를 하며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떠 잠을 설쳤다.버스로 3시간 이상을 달려 출발지에 도착했다. 막상 따라오긴 했으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해인리 주차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나처럼 산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냉이도 뜯고 쑥도 뜯었다. 산악회 회장님도 이곳에 남아 천막 칠 자리에 물청소를 했다. 나도 가만있긴 멋쩍어 근처 마을회관에서 빗자루며 바가지를 빌려왔다. 그러다보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아직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양지바른 곳에는 새끼손톱만한 하늘색 꽃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봄까치꽃, 소식을 전하는 까치처럼 봄이 오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린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일까? 꽃 옆에 누웠다. 봄볕에 그을리면 임도 못 알아본다는데, 그런 말쯤 무시한다. 봄볕은 자글자글하다. 나는 봄날, 풀밭을 뒹구는 곰처럼 뒹굴 거린다.나는 어느새 개울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다. 어디서 난 물인지 개울은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나를 발견한 나비들이 저 멀리서도 날아 흩어진다. 저마다 갯버들이 따로 또 같이 늘어서 있다. 아직 여릿여릿한 벌 한 마리가 버들강아지 위를 기어다닌다. 자세히 보니 버들강아지는 작은 꽃들로 촘촘히 이루어져 있다. 꽃방망이쯤 되려나, 문득 벌은 아래쪽 꽃봉오리에서 더 위쪽 꽃봉오리로 날아오른다. 어디로? 덜 봄에서 더 봄으로!조금 걸은 것 같은데 벌써 정상이다. 해인리에서 삼도봉까지 3.2km. 정상 어귀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덮여 있다. 멀리 이름 모를 산은 눈으로 덮여 있다. 봄은 참으로 `봄`이어서 볼수록 보이는 것 투성이다.◆`진상`의 전말함께 한 산악회 사람들이 이런 내 글을 본다면, “개뿔이라 캐라! 어데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따라와서 온갖 진상은 다부려놓고, 뭐라꼬?”라고 말했을 것이다. 앞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산행`을 못했다고 했는데, 사실 나는 중도에 포기했으며, 산행 내내 온갖 밉상을 다 부렸다. 이제부터 진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겠다.버스가 덕산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턱없이 두꺼운 옷을 챙긴 덕분에 옷을 집어넣는다, 무릎보호대를 한다, 등산화 끈을 조인다, 혼자 분주하다. 사람들은 내리기 전에 이미 준비를 마친 모양인지, 선두가 출발한다. 후미 대장님의 시선이 곱지 않다. 어쩌라구요, 내리면 바로 출발한다는 말도 없었잖아요. 난 준비운동이라도 할 줄 알았죠. 나는 자꾸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허겁지겁 따라나선다.아직 제대로 낫지 않은 감기가 이럴땐 더 극성이다. 다친 무릎은 자꾸 시큰거리고, 벌써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왜 이렇게 빨리 걸으세요, 천천히 가요, 라고 말은 못하고 앞서가는 사람만 무작정 따라가고 있다. 갑자기 이 길이 아닌 것 같단다. 정말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없다.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출발도 늦었는데, 선두와 간격은 더 벌어졌다.왠지 내 잘못인 것 같다. 대장님, 이건 제 잘못이 아녜요. 아시죠, 예? 뒤따라오던 후미 대장님이 볼 일을 보는 모양이다. 바로 앞서 가던 두 명도 잠깐 멈췄다. 이 때다 잽싸게 치고 나갔다. 5분도 못 가 따라잡힌다. 뭐가 이렇게 빨라,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오르길 반복하고 있다.산 아래에서는 봄이었는데, 산 능선은 아직 겨울이다. 왜 그동안 봄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봄은 산꼭대기로 내몰린 겨울을 향해 치고 올라온다. 산의 북면에는 아직 눈이 드문드문 남아 있고, 완전히 풀리지 않은 땅은 겉만 살짝 녹아 있다.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나를 앞질러 간 분들은 어디까지 갔나, 후미대장님은 또 어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어이쿠! 쭉 미끄러진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뒤로 자빠진다. 일어나니 목이 뻣뻣하다. 어느새 따라온 후미대장님이 넘어지는 것부터 쭉 지켜본 모양이다. 어디 보자며 목을 주무른다. 이러다 괜찮겠지, 했더니 대장님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며, 탈출로를 따라 내려가자고 한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울고 싶다. 그런데 정말 `민폐`는 해인리에 도착해서다. 청소나 하고, 목에 파스나 붙이고 쉬었으면 되었을 텐데, 뭐, 봄까치꽃? 사실 그 꽃은 큰개불알풀이다. 이름이 하도 거시기해서 최근에 봄까치꽃이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그 꽃이나따나 보고 있을 게지 무슨 귀신에 씌였는지, 기어이 산을 기어올랐다.아무 힘도 안 들이고 오른 것처럼 말했지만, 순전히 뻥이다. 산이 얼마나 가파른지 200m 오르는데 20분도 더 걸렸다. 총 시간이 6시간 걸린다는 말이었는데, 나는 6시에 출발한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올라가다가 산악회 일행을 만나면 돌아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웬 걸, 우리 일행은 지름길로 빠져 이미 하산한 모양이었다. 일이 별나게 꼬인다.사람들은 4시에 돌아와 밥을 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노는데, 4시 50분! 나는 아직도 정상 어귀에서 곧 일행을 만나겠지 하며 미적거리고 있다. 회장님이 왜 아직 안 내려오냐며 전화를 했다. 정말 너무해요, 조금만 일찍 전화를 하시지, 3km를 뛰듯이 내려왔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나 때문에 한 시간은 늦은 모양이다. 비난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모두들 고생했다며 외려 막걸리를 부어 주신다. 급하게 마셨는지 속이 좋지 않다. 제발 차 좀 세워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그 말은 못하겠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진상은 진상이다. 다음 산행에 같이 갈 사람을 조사하고 있다. 나는 일단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을 한다. 꼭 따라가야지, 흠 두고 봐라, 꼭 따라가야지, 다짐을 한다. 한편 진상 부리다, 진상 떨다, 라는 말을 곧잘 쓰지만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진상`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못난 사람이나 행동을 일컫는 말로 쓰는데, `진짜 밉상이다`의 준말이라는 설도 있다. 더 알고 싶으면, 국립국어원의 `온라인가나다`에서 진상을 검색해보시길!

2017-03-24

평범한 삶에 대해-`카모메 식당`을 보고

감기에 걸렸다. 둔감한 편인데 감기가 온다는 것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공기를 깊이 들여 마시면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때 감기약을 먹으면 된다. 감기가 걸린 뒤에 감기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감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모르겠다, 흠, 될 대로 되라지, 뭐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감기에 걸리고 나니 정말 죽을 맛이다.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깨어 있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데, 하루가 이렇게 길까 싶을 정도로 시간은 더디다. 깨어나면 억지로 밥을 먹었다. 밥을 꼭꼭 씹으며 밥이 참 달다는 생각을 했다.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가 떠오른 것은 이 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밥과 사랑소설가 김훈은 언젠가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라고 말했다. `카모메 식당` 역시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밥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으며, 순환적 절기와 풍속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사람의 육체에 깊이 베이고 육화된 밥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원한과 치욕을 참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이 영화는 헬싱키에서 일본식 밥집을 운영하는 사치에가 주인공이다. 그녀가 왜 핀란드에 오게 되었는지 이 영화는 도무지 말하지 않는다. 사치에는 이런 감독을 닮았다. 그녀의 식당에 한 남자가 무단 침입했을 때가 그렇다. 이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가 왜 여기에 들어왔는지, 이런 것들을 묻는 대신 사치에는 그저 주먹밥을 만들어 그를 먹인다. 마치 탕자가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라도 있었다는 듯 말이다.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하지만 우리는 주제넘게 묻기를 좋아한다. “당신은 왜 배가 고픈가, 무엇이 당신을 배고프게 하는가?”우리는 밥을 먹지만, 그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슬픔 역시 밥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슬픔의 뒤편에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슬픔의 원인을 찾지 않는다. 남편이 떠나간 이유를 모르는 여자는 그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 슬픔과 함께 살아간다. 어쩌면 울음을 참는 유일한 방법이란 그 울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 슬픔을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뿐인지도 모른다.△특권적 평범함`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한 삶을 성찰한다는 점에서 `카모메 식당`의 주제에 닿아 있다. `카모메 식당`이 평범한 삶을 평범한 차원에서 다룬다면, `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함이 비범하고 특별한 삶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에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갈 무렵, 세계가 추구한 거대 시장과 그러한 자본주의의 경쟁구도에서 밀려난 사람들, 또는 그 경쟁을 거부하거나, 그 경쟁에 끼어들 능력도 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의 삶을 연민이나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간난하고 지난한 삶을 한껏 과장하고 포장하여 영웅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이를테면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에가 낡은 상자를 발견하는 장면은 마치 영웅 서사시에나 어울릴 법한 필연적 운명이나 계시처럼 느껴진다. 사소한 일들은 이런 식으로 격상된다. 낡은 상자의 발견으로 아멜리에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는 없지만, 그녀의 삶은 현실의 논리가 아닌 초월적 질서 속에 편입되며, 그녀의 모든 행위는 영웅적인 어떤 것으로 변모한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하게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애써 강조한다. 특별하게 이불을 말리는 것만큼이나 평범하게 이불을 말리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며, 라면 전문점 아저씨는 맛있는 라면을 끓일 수 있음에도 평범한 라면을 끓이기 위해 애쓴다.`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평범함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택된 어떤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범한 삶은 비범한 삶과 다를 바 없으며,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결국 평범함이 특권적 위치를 쟁취하게 된다.△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카모메 식당`도 평범함에 대한 이야기가 맞긴 하지만, 평범함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채 평범함을 그저 평범함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그런 평범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자, 가장 난해한 장면은 마사코와 사치에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다. 마사코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정말 부럽군요.”라고 말하자, 사치에는 “아뇨, 그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죠.”라며 그 말을 받는다. `원하는 삶`이란 삶에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전제가 되어야 하며, 그것과 합치될 때 비로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한다. `원하는 삶`이란 싫은 것을 무릅쓰는 삶이다.그런데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것이 곧 절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목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치에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목적이나 목표가 아닌 삶, 삶 그대로에 열중하는 삶, 그러할 때 던져진 우리는, 피조물인 우리는, 진실로 삶에 충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이 영화는 서로의 인사를 품평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마사코의 인사는 정중하며, 미도리의 인사는 투박하다. 가장 훌륭한 인사는 사치에의 것이라는데 둘은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뭐가 특별할까?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어서오십시오)” 사치에의 인사에는 어떤 특별함도 없다. 사치에의 인사는 손님에게 예의를 가장하지도 않으며, 불손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녀의 인사는 인사라는 말의 의미와 가장 일치하는 인사, 말 그대로의 `인사`다. 사치에에게 손님은 욕망의 대상도, 수단이나 목적도 아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며, 더 정확히는 인사`만`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같다. 삶에 열중 할 때, 그 삶은 평범할 뿐이겠지만, 적어도 그 평범함이 우리를 기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2017-03-17

`칸칸이 밤이 깊은` 삶 -서정춘의 삶과 시

봄이 되면 `죽편`이란 시가 떠오른다. 봄과 특별히 관련도 없는데도 말이다. 대나무의 푸름이 봄의 싱그러움을 연상시키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시를 봄에 읽었기 때문일까? 분명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분명히 장담할 수 있는 건, 여러분도 분명 이 시를 좋아하게 될 거란 거다. 어쩌면 여러분도 나처럼 봄이 되면 이 시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오늘은 저를 믿고 따라오시기 바랍니다!`죽편`이란 시를 쓴 서정춘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가난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가난 덕분에 매산중고 야간부를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한때 빨치산이었던 `외팔이 장씨`의 서가에서 정지용, 백석, 이용악, 오장환 등의 시를 읽었다. 구상 시인의 친구이자 동경 제대 출신 조율사인 `삐아노 최씨`에게서 정식 시인으로 인정받아 술을 한 상 얻어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고 시인은 말한다.서정춘은 1959년 겨울, 순천을 떠났다.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그곳이 고향이란다―`30년 전―1959년 겨울`전문“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라고 한 사람은 시인의 어머니이기보다는 아무래도 할머니겠다. `애비`는 시인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매정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행여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까봐 걱정을 했나보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고향에서 가난은 대물림 될 것이 뻔했을 테니까. 그래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라는 말을 했을 것이고, 어린 손자의 손을 붙잡은 할머니 역시 그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는 시인의 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은 얼마나 지난했던 것일까, 어린 아이를 떠나보내며 이들은 소리도 없이 얼마나 크게 울어야 했을까, 그리고 30년 후 늙어버린 아이가 떠올린 이 말은 또 얼마나 그를 울렸던 것일까?시인이 상경하여 어디서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등단은 했지만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취직을 하지 못한 채 전전하다 소설가 김승옥의 소개로 동화출판공사에 취직하게 된다. 시인은 그 직장을 1996년까지 다녔다. 그리고 퇴직하면 쓸쓸해질 것 같아 그동안 써온 시를 묶었다. 등단 후 29년 동안 써온 시는 고작 70여 편, 그런데 거기서 다시 반을 버리고 35편만으로 시집을 묶었다. 1년에 한 편을 쓴 셈인데, 게을러서가 아니라 시에 대한 그의 결벽증 때문이다.그 시집이 `죽편`이다. 이 시집이 나왔을 때, 시단에서는 “`죽편`읽어봤는가?”라는 인사말이 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과장처럼 들린다고? 신경림 시인의 말이니 믿어도 좋다. 그래도 못 믿겠다면 자, 이제 `죽편1`을 읽어보시라.여기서부터, ------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년이 걸린다―`죽편1―여행`전문자, 준비 되었다면 이제 여행을 떠나야겠다! 목적지는 대나무 꽃이 피는 마을이고, 교통수단은 `기차`다. 그런데 그냥 기차가 아니라 `푸른 기차`며 게다가 이 기차는 “칸칸마다 밤이 깊”다. 불꺼진 기차라니, 어찌된 영문일까? 이 시의 제목이 `죽편(竹篇)`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기차`가 대나무의 은유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는 마디져 있으므로 그 마디마디가 기차의 한 `칸`이다. (재밌게도 시인은 이 마디를 표현하기 위해 말줄임표 그러니까, “……”대신 “------”을 사용했다.) 그리고 대나무의 마디와 마디는 막혔으니 밤처럼 어두울 밖에.이제 기차가 출발한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냐, 고? 기차가 출발했으니 이제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미리 말을 했다면 당신은 아마 이 기차를 타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자그마치 100년이다. 대나무가 백년을 살면 꽃을 피운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다면 이 여행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여행, 일상에서 잠시 벗어났다 돌아오는 그런 여행하고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대나무가 자라 대나무 꽃을 피울 때까지, 대나무의 일생 전체를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여기서 조금 더 의미를 밀고 나갈 수도 있겠다. 여행이 대나무의 일생이라면, `대나무`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대나무의 일생이란 곧 시인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온 시인의 삶, 그 고단하고 지난했을 삶을 시인은 “칸칸마다 밤이 깊”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비록 `밤이 깊`긴 하지만, 그 어둠이 무섭거나 절망적이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푸른 기차`의 밤이니 깊은 밤의 어둠도 푸른 어둠일 테니 말이다. 푸른 기차의 여행은 곧 푸른 대나무의 삶이며, 이것은 다시 시인의 푸른 삶이다. 시인의 푸른 삶, 청운(靑雲)! 그에게 청운의 꿈이란 시가 아니었을까.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고 꼿꼿한 대나무처럼 한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4년간 80번을 고쳐 쓰는 그의 삶 말이다. 그러니 `대꽃을 피우는 마을`이란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시가 만개할 어떤 시기로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이 말을 해두는 것이 좋겠다. 청출어람! 이미지는 언어에서 나왔지만, 언어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빈약한 지식과 앎을 초과하여 작동한다. 이미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언어가 만드는 이미지는 언어에서 나왔음에도 언어를 뛰어넘어 언어가 나아가지 못하는 지점을 점유한다. 철학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날아오른다. 이러한 이미지로 하여 시는 여전히 유효하다.

2017-03-10

`3·1운동`과 김천

△김천과 `만세 전`서울에 갈 땐 김천역을 이용했다. 버스를 타면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는 서울을 굳이 기차로 가고 싶었던 건 기차에 대한 근거 없는 `로망` 때문이었다. 한편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에 등장하는 김천과 김천역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만세전`은 `흥부전`이나 `춘향전`에 사용되는 `전(傳)`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 `전(前)`으로, 싱겁게도 `만세전`은 만세를 부르기 전이라는 뜻이다. 제목처럼 `만세전`은 3·1운동 이전의 조선에 대한 이야기긴 하지만, 내용은 결코 싱겁지 않다.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인화는 동경에서 기차를 타고 고베(神戶)를 지나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거기에서 다시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경부선을 타고 경성에 도착한다. 1박 4일의 고단한 여정이었다.이인화가 경성까지 도착하는 과정은 근대화의 과정을 닮아 있다. 일본에서 수입된 근대화는 가장 먼저 부산에 닿았고, 부산을 지나 경성에 종착하게 된다. 이인화가 잠깐 쉬어가는 곳이 김천이다. 김천에는 그의 큰형이 보통학교의 훈도로 재직하고 있다. 이인화의 다른 가족이 모두 서울에 사는데 큰형이 김천에서 훈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이인화의 큰형은 아버지가 정치열에 들떠 가산을 더 이상 탕진하지 못하도록 막고 짜임새 있게 집안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한학으로 다져진 촌생원”이다 보니 경성에서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작가는 다른 도시도 아니고 왜 하필 김천에서 살게 했던 것일까?김천은 3·1운동을 전후한 일제강점기 하의 우리나라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경성으로 불렸던 서울은 일본의 동경과 유사한 도시로, 부산은 조선 진출의 거점도시로 계획되었다. 이와 달리 김천은 경부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노동자가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이 소설은 당시 김천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큰형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인화는 을씨년스럽게 낡은 대문을 보며 “거진 쓰러지게 되었는데 문간이나 좀 고치시지?”라고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형님`은 이렇게 대꾸한다. “얼마나 살라구! 여기두 좀 있으면 일본 사람 거리가 될 테니까 이대로 붙들고 있다가 내년쯤 상당한 값에 팔아 버리랸다. 이래봬도 지금 시세루 여기가 제일 비싸단다.” 신도시에 집을 사서 되팔아 돈을 불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제 강점기 신시가지에는 일본인이 살고, 구시가지에는 조선인이 모여 사는 이중도시였다는 것 정도다.△훈도의 환도(環刀)당시에는 선생님을 훈도라 불렀다. 훈도의 위세나 위용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검은 제복에 망토까지 두르고 허리에는 환도라고 불리는 긴 칼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런 `형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형님은 망토 밑으로 들여다보이는 도금을 물린 검정 환도 끝이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히는 것을 왼손으로 꼭 붙들고 땅이 꺼질 듯이 살금살금 걸어 나오다가, 천천히 그 동안 경과를 이야기하여 들려준다.`환도(環刀)`는 군복에 착용하는 긴 칼로 그 길은 1.2m 정도다. 이 칼이 멋져 보일 수도 있지만 `형님`은 환도에 익숙하지 않고 그런 환도는 그의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친다. 그는 그 부딪침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주 살금살금 걷는다. 염상섭은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따르며 살아야 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형님`의 옷차림과 행동거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어색한 환도를 찬 `형님`의 모습은 조류 속에서 떠밀리는 김천의 모습을 닮아 있기도 하다.△`만세 전`과 `만세 후`이인화는 경부선을 따라 상행하며 일본식 근대화의 열기와 이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비참한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심천역, 지금으로 말하자면 영동역에 기차가 멈추자 일본 헌병의 검문검색이 벌어지고 갓장수가 붙잡힌다. 대전역에서 역시 기차는 예고 없이 30분가량 정차하고 조선인 오륙 명이 붙잡힌다. 기차에서는 헌병들의 검색이 벌어져 어수선하다. 이러한 일련의 소동을 본 이인화는 일본에서 일본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그제서야 이인화는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것을, 그리고 조선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그러한 무덤으로 가득 찬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그런 점에서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지만 무덤과도 같은 조선을 부활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세전`이 경부선을 따라 상향했다면 3·1만세운동은 경부선을 따라 하향했다. 근대화의 열기는 원한과 울분의 감정으로 바뀌어 이번엔 경부선을 따라 하행하는 셈이다. 염상섭이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는지 알 길이 없으나, 소설과 현실은 매우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3·1만세운동이 철도 노선을 따라 전파된 이유는 휴교령과 관련이 깊다. 총독부는 고종 장례가 낳을 소요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휴교령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유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들이 고향으로 가지고 간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저마다 독립에 대한 갈망은 고종의 승하를 더욱 가열시켰을 것이다.때마침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학생들의 가슴 어딘가에 욱이고 또 욱여넣었을 슬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혹은 고향에서 그들의 울분과 분노를 표출시켰다. 그런 이유로 3·1운동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짧게는 4월 길게는 6월까지 이어진 대규모의 장기적 저항운동이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이 소설이 비록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기 전해의 겨울이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긴 하지만 소설로 발표되었던 시기는 `만세`가 있은 지 3년이 지난 1922년이었다. 한 명민한 연구자는 이 소설이 “미래의 시간이 과거 속으로 삼투하는 특이한 시간구조”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만세전`에는 과거 속에 이미 다녀간 미래의 흔적이 파편처럼 존재하고 있다.어쩌면 시간은 이런 식으로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중간쯤에 현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온 시간과 미래에서 온 시간이 만나는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지점에 현재가 기입되는 것이리라. 2017년 3월 1일, 탄핵반대집회와 촛불집회가 대치하는 `지금여기`의 혼란스러움이 곧 현재의 형상일 것이다.

2017-03-03

베네치아의 골목길

△리기산과 밀라노 대성당참 운이 좋았어요. 유럽여행은 처음이었는데 여행하는 내내 날씨가 좋았거든요. 비는커녕 구름조차 낀 적이 없었어요. 가장 경이로웠던 곳이 리기산이었다면 가장 시선을 사로잡았던 곳은 밀라노 대성당이었어요.천왕봉은 리기산보다 200m 정도 높지만 리기산이 훨씬 더 웅장하게 느껴졌어요. 그도 그럴 것이 천왕봉은 소백산맥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지만 리기산은 해발 4천m가 넘는 산들을 끼고 있는 알프스 산맥의 일부에 지나지 않거든요. 천왕봉에서는 다른 산들이 시시하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리기산은 더 높은 산들에 감싸안겨 있었고, 그 먼 산들 앞에서 저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두오모는 영어로는 돔(dome)이라는 뜻인데, 반구형의 둥근 지붕을 의미한다고 해요. 그런데 밀라노 대성당은 돔 대신 찌를 듯이 뾰족한 첨탑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두오모라고 부른 답니다. 성당의 거대한 규모와 그 성당 외벽에 장식된 2천여 개의 조각상들도 대단했지만, 저를 사로잡은 것은 외관의 색감이었어요.1860년경 이곳을 방문했던 미국작가는 “입김만 불면 사라져 버릴 서리꽃 같은 환상!”(마크 트웨인 `순진한 이의 해외여행`)이라고 말했다고 해요. 대성당을 이루고 있는 백색 대리석은 저마다 명도가 달랐어요. 말이 백색 대리석이지 그것들은 희지도 검지도 않았어요. 희스무레하고 거무스레한 것들이 마치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짜 맞춰져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정말 입김만 불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베네치아의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가장 기억에 남는 건 리기산도, 밀라노도, 화려한 파리도, 유서 깊은 로마도 아니었어요. 기억 속을 서성이게 만드는 건 베네치아였어요. 그렇다고 `물의 도시` 여서도 아니었고, 산마르코 성당, 두칼레 궁전과 같은 화려한 건물 때문도 아니었고, 물을 가로지르는 느긋하면서도 날렵한 곤돌라 때문도 아니었어요.사실 전 베네치아를 처음보고 무척 실망했어요. 유럽을 여행한 사람들로부터 베네치아가 가장 아름다웠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거든요. 기대를 너무 많이 했었나 봐요. 베네치아는 낡고 쇠락한 느낌이 역력했어요. 건물들의 페인트는 빛이 바래거나 벗겨지고, 물은 썩어가는 듯 악취를 풍겼고, 이 죽어가는 도시 위로 지치거나 지나치게 들뜬 관광객들이 유령처럼 무리지어 헤매고 있었거든요. 도대체 여기의 어디가 아름답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그런데 베네치아가 왜 기억에 남느냐구요? 그날 밤에 베네치아에 한 번 더 다녀왔거든요. 가이드가 베네치아의 야경을 보여준다고 했어요. 낮에 너무 실망해서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여행을 왔는데 잠을 자는 건 너무 사치인 것 같아 따라나섰어요. 물론 전 조금만 둘러보고 맛있는 맥주나 마실 생각이었죠.우리 숙소는 베네치아가 아니라 그 인근에 있었어요. 저녁을 먹고 메스트레역에서 모여 한 정거장 밖에 되지 않는 베네치아의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했어요. 특이하게도 2층으로 된 기차라기보다는 지하철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렜어?? 그렇게 역에 도착해서는 스칼치(Scalzi)다리를 지나 베네치아의 내부로 들어갔어요.그때까진 좋았어요. 여행 내내 실수를 연발하던 가이드는 그날도 어김없이 사고를 쳤어요. 가이드가 길을 잃었거든요. 우리는 어딘지도 모르는 미로와도 같은 길에서 난감했어요. 그 난감함은 가이드에 대한 푸념으로 옮아갔고요. 가이드는 30분 정도만 둘러보고 자유 시간을 준다고 약속했지만, 우리는 거의 두 시간을 헤매다 왔던 길을 더듬어 힘겹게 기차역에 도착했어요. 막차 시간까지는 40여분이 남았지만 술집은 문을 닫고 있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차를 기다리다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마음속에 새겨지는 것들그런데 베네치아가 뭐가 좋았냐구요? 왜 베네치아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냐구요? 사실 모르겠어요. 그냥 골목길을 헤맸을 뿐인데 그 기억이 떠나가지 않아요. 길을 잃고 불평도 늘어놓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는 느낌이예요. 길을 잃은 사건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근사한 선물처럼 마음을 설레게 만들거든요.베네치아의 가로등은 가스등처럼 은은했어요. 그 빛은 매우 둥글게 느껴졌고, 그 유선형의 빛은 도시의 퇴락까지도 잘 숨겨주었어요. 숨겨진 것들 사이로 길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집은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러한 집과 집의 사이는 모두 길이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골목 속으로 들어갔어요. 할로윈 때 사탕을 받으러 나온 들뜬 아이들처럼, 우리는 한국인 코스프레를 하고 이국의 불빛과 이국의 건물 사이사이를 누볐어요.▲ 공강일 서울대 강사길을 잃었고, 다리도 아팠고, 배도 고팠지만 그런 것들이 불쾌하거나 역증을 불러일으키진 않았어요. 어쩌면 우리가 헤맨 곳이 골목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화려한 상점과 인파로 가득한 대로가 아닌 골목길 말예요. 낮과 달리 베네치아는 한적했어요. 사람들의 발길은 적당히 드물게 이어졌고, 작은 가게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삶이 흔적처럼 묻어 있었어요. 그래서 골목은 낯선 곳이었음에도 낯설지 않았고, 그렇다고 낯익지도 않았어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늘 살아왔던 곳 같은 느낌이었죠.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놀라운 것들은 마음에 작은 여백이나 여운을 남길 틈도 없이 감정을 모두 소진시켜 버려요. 하지만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은 마음에 많은 빈자리를 남겨 우리가 언제든 그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만드나 봐요. 베네치아는 그렇게 마음속에 새겨져 있어요.

2017-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