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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침묵―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바`

등록일 2017-04-28 02:01 게재일 2017-04-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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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강일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대선 정국 속에서 TV토론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토론회를 보며 `정치란 편 가르기`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보수와 진보, 호남과 영남, 남성과 여성, 이런 것들에서부터 사드 배치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일자리 창출은 민간에서 해야 한다는 사람과 정부에서 해야 한다는 사람, 동성애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또는 찬반논란의 대상일 수 없다는 사람까지. 토론을 보면서 나 역시 누가 나와 생각이 같은지, 누가 나와 생각이 다른지 따지고 나누게 된다.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정치는 우선 이렇게 사람들을 분열시켜야 한다. 통합은 그 다음이다. 정치가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골치 아픈 정치에서 떨어져 머리 좀 식혀야겠다. 그래서 `폴리 베르제르의 바`라는 그림 한 점을 준비했다. 마네가 죽기 한 해 전에 그린 그림으로 그가 천착한 도시에서의 생활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림의 전경에 위치한 여성의 난해한 표정과 특이하게 왜곡된 공간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내가 이 그림을 알 게 된 것은 십 년 전인데 요즘 들어서 이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볼까?

그림의 전경에는 바텐더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고, 그녀의 뒤에는 벽 전체를 덮는 전면 거울이 있다. 그녀의 왼쪽 팔과 몸 사이의 금색 띠가 거울의 테두리다. 이 거울에는 카페를 찾은 사람들로 북적된다.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웅성대는 소리가 카페를 가득 메웠을 법도 하다. 그러나 거울 속은 그림처럼 조용하다. 그림이어서 조용한 것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 아닐까? 이 여성의 모호한 표정은 모든 소란을 빨아들이고 있다. 아니 그 소리를 모두 튕겨내고 그녀만 정적 속에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이런 침묵을 강요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공허한 눈빛의 여성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거울에 비친 사람들을 경유하는 것이 좋겠다.

거울에 비친 사람들은 이 바텐더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앞에서 카페라고 했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작은 카페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곳은 카페 콩세르로 마네가 살았을 당시에 실제 하던 장소다. 이곳에서는 술만 마셨던 것이 아니라 발레에서 서커스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파리 최고의 사교장이었다. 1층에는 넓은 홀이 있고 2층은 왼쪽과 오른쪽이 발코니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홀을 내려다볼 수 있다. 2층 손님들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홀을 가로질러 그들의 맞은편 바텐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딱히 이 바텐더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 중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누구일까?

그층 제일 앞, 갈색 옷을 입은 여성은 바텐더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앉아 있다. 비록 그녀가 오페라 안경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그것이 곡예사는 아닐 것이다. 곡예사는 이 그림의 좌측상단에 녹색 신발을 신고 공중그네를 타고 있다. 그녀가 곡예사를 보려면 고개를 더 뒤로 젖혀야 한다. 이 여성을 따라 살짝 왼쪽을 볼까. 색감을 잘 살려 옷을 입은 또 다른 여성이 앉아 있다. 이 여성이 쓴 검은색 모자는 흰색 블라우스와 대비를 이루고, 이 블라우스는 팔목까지 오는 노란색 장갑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녀는 두 팔을 예쁘게 모아 턱을 바치고 왼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아니 또 왼쪽을? 우리는 어쩐지 자꾸 왼쪽으로만 가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신사가 앉아 있다. 이 남자도 왼쪽을 보고 있나? 아니 이 남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 남자다. 우리가 찾고 있던 그 사람, 바텐더를 바라보는 사람 말이다. 그는 비록 앉아 있지만, 키가 크고 몸은 호리호리해 보인다. 그를 무심코 신사라고 불렀지만,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사의 차림이다. 크라운이 긴 모자를 쓰고 검은색 슈트를 입었다. 슈트 위로 언뜻 비치는 흰색을 통해 그가 입은 셔츠의 색깔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팔(八)자 모양의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기시감은 뭐지? 어디서 이 남자를 본 걸까? 멀리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바텐더의 오른쪽, 거울에 비친 남자를 닮았다. 지팡이를 들고 뚫어지게 바텐더를 바라보는 이 남자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그림은 이상하다. 거울에 비친 남자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남자는 여성을 살짝 비낀 왼쪽에 서 있어야 한다. 거울에 비친 술병을 보면 실제의 술병보다 45도 정도 꺾여 비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남성도 바텐더에게 살짝 왼쪽으로 비켜 서 있어야 한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화가는 두 개의 사건을 중첩시켜 놓은 것 같다. 이 신사가 바텐더에게서 칵테일을 주문했을 때와 노란 장갑의 여성에게로 돌아왔을 때, 이 두 개의 시간을 한 공간에 그려놓은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발코니의 신사 앞에 놓인 것이 칵테일 잔처럼 생겼다. 이 그림은 공간을 사실 그대로 재현한 그림이 아니란 말일까?

그렇다. 화가는 거울에 비친 술병에 그런 단서를 남겨 놓았다. 실제로 바에는 높이가 거의 같은 붉은 병이 갈색 병의 살짝 뒤쪽에 있다. 그렇다면 거울에는 붉은 병이 먼저 오고 갈색 병이 그 뒤에 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붉은 병이 갈색 병 훨씬 뒤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병의 높이도 확연히 붉은 병이 크게 그려져 있다. 이제 사실적 공간을 그림으로 재현했다는 생각은 것이 좋겠다.

드디어 이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바텐더에게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바텐더는 바에 양손을 집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을까? 앞에서 말한 신사가 칵테일을 사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바텐더의 흰 팔이 빨갛게 변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저 신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바`(A Bar at the Folies-Bergere): 마네가 말년에 그린 그림이다. 손발이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도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카페 콩세르(cafe-concert)의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실제로 이 카페에서 일했던 웨이트리스 쉬종(Suzon)이다. 마네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죽음이 지닌 거대한 침묵을 이 여성에게 투영해 놓은 것은 아닐까.
▲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바`(A Bar at the Folies-Bergere): 마네가 말년에 그린 그림이다. 손발이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도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카페 콩세르(cafe-concert)의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실제로 이 카페에서 일했던 웨이트리스 쉬종(Suzon)이다. 마네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죽음이 지닌 거대한 침묵을 이 여성에게 투영해 놓은 것은 아닐까.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라크(Kenneth Clark)는 이 그림을 마네가 활동했던 당시 파리의 카페 분위기와 관련지어 분석한 적이 있다. 그의 연구는 얼마나 치밀한지 저 바에 놓인 술병의 이름까지 알아낼 정도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의 바텐더는 술만 판매했던 것이 아니라 성매매도 겸했다고 한다. 클라크의 이런 분석을 참조한다면 저 점잖아 보이는, 그렇지만 코끝이 붉은 신사는 바텐더에게 성관계를 요구했을 것이다. 비록 지금 그녀가 바에 양팔을 벌려 커다란 이등변삼각형을 만들어 매우 안정감 있고 완고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녀가 막상 이 신사를 대면했을 때는 달랐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바텐더의 기울어진 등과 축 쳐진 어깨,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가 이를 말해준다.

신사의 요구를 받아들인 뒤 바텐더는 머리를 단단히 고쳐 묶고,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회한 속으로 걸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삶의 공허함, 계속 살아야 한다는, 달라질 것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그런 공허함, 그 공허가 삶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빨아들여 거대한 침묵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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