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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추석, 곤란한 질문 대응 설명서

유한킴벌리가 추석을 맞아 `가장 듣고 싶은 말, 가장 듣기 싫은 말이란 뜻의 “듣톡싫톡”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듣톡은 “너희 보니 힘이 나”(28%), “연휴도 긴데 여행이나 다녀오렴”(17%), “갈수록 예뻐진다”(15%), “음식은 나가서 사먹자”(13%), “용돈 받아가라”(12%)가 뽑혔다. 싫톡에는 “애는 언제쯤? 둘째는?”(23%), “살쪘네”(20%), “자주 좀 보자”(18%), “결혼은 언제 할 예정이니?”(14%), “취업은 했니?”(13%) 등이 선정됐다. 나는 곧잘 “너는 언제 돈 버냐?”와 같은 말을 듣는다. “아니요, 전 아직 대학원 졸업을 못해서….”라고 말하면, “그럼 대학원 마치면 니가 쓴 소설책이나 시집이 나오는 거냐?”라고 되물으신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저는 소설이나 시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걸 연구하는 사람예요.”라고 말해보지만, 다음 해에 또 같은 걸 물어 보신다. 이런 고충을 같은 과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 친구도 마찬가지 말을 듣는다며, 이젠 설명 같은 건 그만두고, “예, 이제 곧 나옵니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명절에는 서로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궁금하더라도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 거니까, 무엇보다 나도 내가 궁금한 사람 중에 하나니까, 그러니 제발 참으시라.그럼에도 꼭 이런 곤란한 걸 물어보는 어른들이 계신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응하는 설명서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친지나 동네 어르신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곧이곧대로 말해선 안 된다. 그들은 “왜 하필 그런 일을 하냐?”고 말할 것이고, 십중팔구 당신의 직업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용적이지 않다는 말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질문에 적절하게 답하고 싶다면, 오히려 대답의 내용보다는 질문 자체를 분석하는 편이 낫다. `당황하지 않고`, 그 물음이 어떤 상황에서 던져진 것인지, 그런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성향은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의 답은 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낸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오답은 오답이기 때문에 오답이 것이 아니라, 출제자가 요구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에 오답이다.초등학교 시험 문제에 이런 문제가 출제된 일이 있다. 사슴이 손에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보는 그림이 제시되어 있다. 그 그림 아래 “사슴이 000 봅니다”라고 적혀 있다. 물론 빈칸에 들어갈 말은 `거울을`이다. 그런데 한 아이는 “사슴이 `미쳤나` 봅니다” 라고 썼다. `미쳤나`가 어떻게 오답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냥 출제 의도에 맞지 않을 뿐이다. 아이는 `봅니다`를 교육과정을 초과하는 수준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며, `미쳤나`는 학교교육과 시험제도의 한계를 향해 던지는 도발적 구호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까지 하다.학교는 천재를 양산하는 곳이 아니라 천재의 저항을 거세하는 곳이다. 그러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배속에 숨기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은 극도의 권태 속에서도 “동공이 내부를 향하여” 열리는 일을 자기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돈 꼴레오네는 다혈질의 소니에게 “머릿속의 생각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니까 말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그러니 왜 그런 일을 하냐, 따위의 말을 듣는다면 “저도 당신과 같은 일을 하였더라면 당신만큼 성공하진 못했더라도 먹고 사는 일로 난감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때는 치기어린 마음에 멋모르고 결정하게 되어 후회가 막심합니다.”라고 말을 하라. 이 말을 들은 상대는 금세 우쭐해져 자신이 어떤 계기로 그 일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돈을 벌게 되었는지 신나게 늘어놓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깝게 여길 것은 없다. 그는 지금 이런 식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중이니까, 당신은 그저 측은지심의 인륜을 발휘하여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면 된다. 이런 유의 질문이란 늘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그냥 말이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정답은 늘 질문자에게 있으니 질문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대답보다는 질문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라. 이것은 문제의 정답에 근접하는 일일 뿐 아니라, 훌륭한 처세의 전략이기도 하다. 병법과 처세의 대가인 손자가 살아 돌아와도 나와 같이 말할 것이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9-23

성주에서의 이틀

△첫날18:40. 남부터미널에서 성주로 가는 막차를 탔다. 두 시간을 달려 금강휴게소에 들렀다. 내 기억 속에 금강휴게소는 언제나 컸고 한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십여 년 만에 들른 이곳은 쇠락의 빛이 감돌았다. 과거에 비해 세상의 규모는 커졌고, 내 눈도 덩달아 변해 금강휴게소는 초라하게만 보였다.21:50. 버스가 성주읍내로 들어섰다. 성밖(이건 지명이다)에서부터 조금씩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는데 군청을 지나자 그 개수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버스에 내리니, 오는 것도 그렇다고 안 오는 것도 아닌 이상한 비가 공기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군청에서 이마트까지 일자로 뻗은, 200m가 될까 말까한 중심거리엔 좌우로 혹은 위를 가로지르며 빼꼼한 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상가에도 어김없이 사드 반대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현수막의 문구는 “사드 배치 결사 반대”와 같은 점잖은 것도 있었고, “사드가 웬말이냐! 다 죽일라카나”와 같이 직접적인 것도 있었고, “참외 사먹겠다 헛소리 말고, 사드배치 참회하라”와 같이 재미있는 것도 있었다.22:20. 저녁을 먹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긴 싫었다.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 들고 적당히 걷다가 숙소를 잡았다. 낯선 곳에서 홀로 잔을 채우며 처량했다. 술은 먹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아 뜬 눈으로 새벽을 맞았다.△둘째 날10:40.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보니 날은 부옇게 밝아왔고 비는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오락가락 하는 중이었다. 나 역시 오늘 갈지 내일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주섬주섬 옷을 꿰었다. 가까운 해장국 집에 들러 점심도 그렇다고 아침도 아닌 밥을 먹었다. 옆 테이블의 시커먼 아저씨 세 명은 소주를 네 병째 비우고 있었다. 술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질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물어 오늘도 집회가 있다는 것을 얻어 들었다. 내일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13:00. 성주초등학교를 따라 걸었다. 청사도서관에 가방을 내려놓고 군청을 한 바퀴 둘러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쉬는 날이긴 했지만 출근을 안 할 뿐 할 일은 많았다. 두어 시간만 일할 요량이었지만, 좀 채 일이 끝나지 않았고, 마침 비도 이제 마음을 정한 듯 마음 놓고 쏟아지고 있었다. 도서관 1층은 18:00까지였고, 2층은 22:00까지였다. 나는 1층에 자리를 잡은 관계로 문을 닫을 때까지만 머물기로 했다.18:00. 밖에 나오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동방사지 7층 석탑 쪽으로 갈까 성밖숲으로 갈까를 고민하다 도서관 사서에게 물었다. 성밖숲이 좋다고 했다. 성밖숲은 성주읍을 돌아나가는 이천 옆에 있었다. 벚나무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무는 가히 숲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우람했다. 이천을 따라 제2성산교까지 내처 걸었다. 이 다리를 건너 성산동 고분군을 지나 성산까지 올라갈 요량이었다. 고분까지 가는 길은 비닐하우스가 즐비했고 하우스는 대부분 비어 있었고, 간혹 하우스 바깥에서 짓무른 참외를 볼 수도 있었다.19:00. 고분군에 이르러서부터 어둠은 내려앉았다. 고분에서 바라보니 성주읍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바로 뒷산, 해발 400미터도 되지 않는 저 성산에 사드를 배치하려고 했단다. 만약 거기에 사드가 들어왔다면 성주읍을 향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핸드폰 전자파도 찜찜한데, 사드는 안전할 것이라는 저들의 안일한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저들은 알까? 그런 결정을 한 저들은, 저들 스스로의 말처럼 외부세력이었다. 성산을 오르는 것은 포기하고 성주읍을 향해 걸었다. 어디에 줄을 걸쳤는지 알 수 없는 허공의 한 가운데에서 거미는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수습하고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도 거미도 고단해보였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19:20. 군청에 도착했더니 벌써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마이크를 들고 나오는 저분이 농민회 회장이신가? 시작 멘트가 참 재밌다. “잘 들리지예? 일단 감 한 번 질러 볼까예. `악으로 깡으로 사드 배치 막아내자.`” 사람들의 소리가 좀 작았다. “와 그래 심이 없노? 밥 안 묵었으예.” 사람들 와 웃는다. 55일째 집회가 계속 되는데도 사람들은 즐거웠다. 그들은 이제 사드 성산배치 반대가 아니라 사드의 전면적 철회를 외치고 있었다. 이 집회가 우리나라 곳곳에서 축제처럼 번져가길 빌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밤은 고요했다. 이내 잠이 들었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9-09

부디 그대 안녕하시라

△`옹박`과 도굴꾼2003년에 개봉한 `옹박`이라는 영화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토니 자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와이어를 사용하지 않는 리얼 액션은 액션영화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고 태국의 무예타이를 전 세계에 보급하는데 기여했다. 영화 한 편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니! 사람들이 왜 영화에 빠져드는지 알 것 같다.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옹박`은 시골마을을 수호하는 불상이다. 도굴꾼이 옹박의 머리를 훔쳐가고, 그것을 찾기 위해 도시로 떠난 팅(토니 자)의 사투를 이 영화는 그리고 있다. 나는 영화관에선 보지 못하고 집에서 비디오로 보며, 토니 자의 발차기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비디오테이프라는 것도 있었고, 그걸 빌려주는 대여점도 있었다. 어제 일 같은데, 비디오테이프와 비디오데크는 풍문처럼 떠돌 뿐 그 실체를 보긴 어렵다.토니 자의 액션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바다 속에 숨겨놓은 수많은 불상과 불상의 머리였다. 어떤 것들은 불상을 통째로 가져왔지만, 어떤 것들은 머리만 잘라다 놓기도 했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바다 속은 그야말로 거대한 박물관이었다. 불상들은 대개 순박한 시골 마을 사람들의 것이었고 그들에게 불상은 기복과 기원,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대상이었다.그런 불상이 마을 사람들의 절실함 따위와 관계없이 몇 푼의 돈으로 환산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에 아팠고, 잘 살기 위해 단지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 벌이는 도굴꾼의 악행이 무서웠고, 전 세계로 팔려나간 불상이 돈 많은 이들의 한낱 과시용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안타까웠다. 이러한 일이 결코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태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일 것 같아 찹찹했다.△약수골 불상과 환지증머리가 사라지고 몸만 덩그러니 남은 흉측한 불상들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나는 이런 불상을 경주 남산에서 본 적이 있다. 머리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불상은 반석도 없이 맨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불상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혹시 이 불상의 머리도 도굴꾼들이 훔쳐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랜 세월과 함께 땅이 깎이고 파이면서 불상은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졌을 것이고 그 와중에 가장 가늘고 약한 목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머리는 어딘가에 파묻혔거나 아니면 누군가 고이 모시고 계실지도 모른다.환지증이라는 것이 있다. 이미 잘려나간 신체의 한 부분이 여전히 있는 것처럼 느끼는 병이라고 한다. `내 다리 내놔라`며 따라오는 귀신이야기는 환지증의 비유담일는지도 모르겠다. 환지증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발가락이 가려우면 긁을 수 있지만, 없는 발가락이 가려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긁을 수 있을까. 나는 저 불상이 환지증 환자처럼 머리를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아 측은하다. 그리워하려 해도 머리가 없어 그리워할 수조차 없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아프다. 나는 환지증의 고통을 알지 못하며, 저 머리 없는 불상의 고통 역시 알지 못한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나는 환지증을 앓는 사람도 아니고, 저 불상도 아니어서 그 고통을 알 수 없다. 다만 어림짐작할 뿐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이것은 당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신이 중요한 이식수술을 받는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다. 오늘 수술 받게 될 당신의 마음은 나보다 더 복잡할 것이다. 당신과 나의 이 복잡한 심경은 죽음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을 삼킬 죽음을 생각하고, 나는 당신이 죽음 뒤편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 내게 남게 될 삶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고 당신 역시 나를 이해할 수 없다.그래도 이런 말을 할 수는 있다. 만약 당신이 잘못 된다면, 나는 환지증 환자처럼 당신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당신은 나의 머리와도 같아서 당신이 없으면, 나는 저 불상처럼 그리워도 그리워할 수조차 없이 삶 속에 버려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대 부디 안녕하시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9-02

내가 까막눈이라니

날씨가 더워 어디 가는 것도 힘든 이런 날, 추억 한 토막 꺼내어 놓는 일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지금 같아선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서도 한글을 읽지 못했다. 한글을 읽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한글을 모른다는 건 “아, 한글을 몰랐구나!”의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교는 말의 세계가 아니라 문자의 세계니까. 학교는 “닥쳐”라고 말하기보다 “정숙” 따위의 글자를 써놓길 좋아하는 곳이다. 그러니 2년 동안 글자를 몰랐다는 건 초등학교 2년 동안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나는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동네에서 누구보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로 통했다. 형들이 보는 책을 들고 곧잘 친구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아니 읽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건 책읽기가 아니라 그림 읽기 혹은 이야기 지어내기에 불과했다. 저번에 봤던 그림이긴 했지만, 저번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할 리 만무했으니 다른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그러니 삽화나 그림이 없는 책은 도대체 어떻게 읽는 것일까, 또는 삽화를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텐데 어떻게 사람들은 한 책에 있는 내용을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와 같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책읽기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읽는 것이라는 것, 이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글을 그렇게까지 늦게 깨우친 것은 오히려 자만과 오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친구들 사이에서 글을 잘 읽는 아이로 정평이 나있던 내가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기 때문이다.내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들통 난 건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다. 담임이라는 양반이 식전 댓바람부터 괘도(掛圖, 이런 말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나도 참 `대다나다`)를 펴더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글자를 따라 읽게 했다. (얼마나 억울하면 내가 그 구절을 지금도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하늘파란 하늘파란 하늘에우리 태극기겨우 이 정도 수준의 글을 읽으라니,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괘도에는 파란 하늘, 태극기, 날아가는 새 그런 것들이 그려져 있었고, 나는 누구보다 잘 읽을 자신이 있었다. 글자가 아니라 그림을 말이다. 난 `창조한글`의 선구자였으니까. 대머리였던 담임은, 그 반짝이든 양반은, 우리를 한 줄로 세워놓고 한 명씩 한 명씩 읽어보게 했다. 읽은 아이는 자리로 돌아가 쉬게 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는 줄 뒤에 섰다가 다시 읽게 했다. 이렇게 쉽고 게다가 짧기까지 한 글을 감히 `한글도사`인 내게 시키다니…. 난 수치스러웠지만, 겨우 국민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시키는 대로 하긴 했다. 나는 누구보다 의기양양했고, 누구보다 용감하고 씩씩하게 읽었다.그런데도 이 `담탱이`는 읽을 때마다 틀렸다고 오리발을 디밀었다. 나는 그 양반이 나의 `창조한글`을 시샘해서 괜히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다른 아이들이 읽으면 잘 했다고 칭찬하는데 유독 나에게만 다시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몇 살 자시지도 않은 양반이 얼마나 씌우고, 우기고, 억지를 부렸으면 머리가 발랑 까졌을까, 라고 그를 측은하게 여기며 분노를 삼켰다. 나는 창조한글 따위 집어치우고 친구들이 읽는 것을 외워서 그대로 따라했지만,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선생님은 아마 한자한자 차례대로 짚었던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글자를 짚어 내가 한글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시험했던 것 같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결국 나는 한글을 못 읽는 아이로 낙인 찍혔다. 절망은 높고 견고했다. 그렇게 태극기와 세종대왕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었다. 나는 오래도록 문맹의 바다를 유영해야 했고, 친구들이 다 집으로 가는데 나만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한글을 알게 되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말이다. 글 읽는 것도 글 쓰는 것도 좋아져 국문학과에 가긴 했지만, 사는 건 녹록치 않다. 언젠가 베냐민은 글자를 배운 아이는 다시 글자를 배울 수 없다고 말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 말은 깊고 막막하다. 나는 글자를 다시 배울 수도 없고, 글자를 배웠던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림을 보고 글을 읽던 어린 날이 더욱 그리운지도 모르겠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8-26

생각하라, 이 세월을―`등대지기` 가사와 호미곶등대에 대해

△ `등대지기` 노랫말과 `거룩함`“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모질게도 이 바람이 저 바다를 덮어산을 이룬 거센 파도 천지를 흔든다이 밤에도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거룩한 손 정성이여 바다를 비춘다”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테고, 그럼 이 노래의 작사자는 누구인지 아시는지? 혹 고은의 시로 알고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고은의 노래로 알려진 이유는 1981년, 그러니까 4차 교육과정이 시행되면서부터 이 노래가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는데 그가 작사자로 기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7년에 일본의 초등 교과서에도 이 노래가 실렸고 작사자는 가쓰 요시오(勝承夫)로 적혀 있다. 물론 가사는 번안도 아닌 번역이라 할만큼 비슷하다. (여기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김동환의 동요 `등대지기`의 원곡을 찾아서라는 글을 참고하시길. 구글에서 검색하면 이 기사를 볼 수 있다.)등대나 겨울 바다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였는데 왠지 시들해진 느낌이다. 작사자가 명확하지도 않은 노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 놓았으니 말이다. 36년이나 일본에 휘둘려 놓고 그걸로도 모자라 일본 교과서를 베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노벨문학상을 받겠다고 떠드는 고은이라는 양반도 답답하다. 자기가 작사도 안한 노래에 자기 이름이 붙었는데도, 그걸 바로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니 말이다. 참, 이거야 원!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곡의 작사자가 누구이든 가사가 좋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작은 섬으로 파도가 몰아친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 섬이 그 파도를 불러들인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작은 섬이 사나워진 파도를 모으면, 어두운 밤 길 잃은 배들은 파도를 따라 섬으로 떠밀릴 것이고, 그러다 암초에 부딪쳐 배들은 부서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작은 섬에 홀로 등대를 지키는 사람이 있어, 섬이 파도를 모으는 반대 방향으로 빛을 비춰 줄 테고, 그러면 길 잃은 배들은 그 빛을 길잡이 삼아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 테다.△국립등대박물관과 호미곶등대포항 호미곶에는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체험관, 등대관 등이 있다. 또 야외전시관에는 우도등대, 영도등대, 독도등대를 비롯하여 종류도 많고 그 모양도 다채로운 우리나라의 온갖 등대들이 미니어처로 만들어져 앙증맞게 전시되어 있다. 물론 `등대지기`의 노랫말도 고은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쪽에 부조되어 있다.이 박물관에서 가장 볼 만한 건 뭐니 뭐니 해도 호미곶등대다. 아니 정확히는 호미곶등대가 이 박물관을 이곳으로 불러왔을 것이다. 이 등대가 세워진 이유를 말하자니 또 한 번 씁쓸해진다. 일본의 수산실업전문학교 실습선이 우리나라 연안을 탐색하다가 대보리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쳐 좌초했고, 일본은 조선정부에 손해배상을 하라고 생떼를 부렸고, 힘없는 우리 정부는 이 등대를 짓는 것으로 손해배상을 대신했다고 한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어찌되었건 26m에 달하는 이 등대는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만으로 지은, 팔각으로 된 순백의 건물이다. 굴욕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건물은 미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득, 이제 곧 들어오게 될 사드는 오랜 시간이 지나 유명무실해질 때 얼마나 흉측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겨지고, 또 얼마나 추악하게 추억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8-19

영화 한 편 보실래예? 좀비영화와 `부산행`

△`나는 전설이다`:전설적 `꼰대`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걸 좋아한다.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 땐 액션 영화를 본다. 때리고 깨부수고 뭐 그런 것이 좋아서기도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그 다음엔 자면 그만이다.즐겨보는 영화 중 하나는 `나는 전설이다`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순전히 도입부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뱀파이어와 좀비의 중간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낮에는 활동하지 않는다. 영화는 텅 빈 도시에 홀로 남은 로버트 네빌이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네빌은 지금, 폐허가 되어버린 빌딩 숲에서 진짜 숲인 냥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슴을 쫓고 있다. 그는 사냥이 끝나면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무전을 보내고, 버려진 전투기 위에서 도시를 향해 골프공을 날린다. 나는 네빌의 무료함과 권태와 고독이 부럽다.이 영화는 1954년 리처드 매이슨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와 소설은 주제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영화에서 네빌은 전설적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책에서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 혼자 남은 마지막 인간일 뿐이다.좀비들은 짐승처럼 날 것을 먹지만, 잉여물을 만들지도 않으며, 축적하지도 않으며, 서로를 속이는 법도 없다. 그들은 생각할 줄도, 서로를 사랑할 줄도 안다. 네빌은 그런 좀비의 모습을 보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네빌은 저 좀비들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짐승일 뿐이라는 생각을 고집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네빌은 영웅이 아니라 그냥 전설적인 `꼰대`다. 내가 부러운 건 네빌이 아니라 좀비인지도 모르겠다.△`부산행`:나는 좀비다리처드 매드슨의 소설에 등장하는 좀비는 요즘 영화의 좀비와는 다르다.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부터 좀비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낮이든 밤이든 거리를 헤매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산 사람들을 물어뜯고,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이런 식으로 좀비는 무한 증식하고 결국 세상은 좀비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좀비가 상징하는 것은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면서도 사물로 변해버린 노동자”이자(문강형준), 대량생산체계 속에서 오직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시민들이다.세계적으로 좀비를 대상으로 한 영화나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 ZA(Zombie Apocalypse)가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개봉한 `부산행`은 이런 좀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좀비로 변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좀비보다 더 모질고 잔인한 태도를 보인다.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좀비에게 쫓기기 전부터 이미 사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노숙자를 보자 용석(김의성)은 “꼬마야, 너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하고,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한 딸에게 석우(공유)는 “이럴 땐 그런 거 안 해도 돼”라고 말한다. 정부는 사태의 위중함을 숨긴 채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발표만 해댄다. 이런 추악한 사람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노숙자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석우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자기나 살지 왜 저런 사람까지 살리려고 하지`라고 생각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다른 좀비영화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사람들을 그린다면 `부산행`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비난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2014년에 일어난 세월호 사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묶여 있고,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국가를 위해서라도 그만하라고 소리친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성주군민들을 지역이기주의라고 몰아세운다. 그런가하면 메갈리아에서 파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해고시킨 사건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남성혐오든 여성혐오든 혐오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혐오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우리가 상실한 것은 공감능력이 아닐까. 아무 죄도 없이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핸드폰의 전자파에도 민감하면서 그보다 훨씬 강력한 전자파를 발생하는 사드와 함께 살아야 하는 성주 군민들을, 여자가 운전을 한다고 욕을 하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대안은 가까운 곳에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근저에 현실 정치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8-12

특성시간과 어머니

△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지?우리는 어떨 때는 시간이 빨리 간다고 말하고 또 어떨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을 개인적인 느낌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뇌과학자들은 뇌의 처리 속도가 나이가 들수록 느려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나는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특성시간`이라는 개념에 더 끌린다.`특성시간`은 동물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시간의 길이다. 특성시간을 구하려면 평균 신장을 걷는 속도로 나누면 된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살이의 특성시간을 구하면 0.00025초며, 150년을 사는 거북이는 4초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살이는 1초 동안 수없이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거북이는 1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필름영화의 경우 1초에 24장의 사진이 지나간다. 필름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이어 붙여 빠르게 돌려서 정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영화는 움직임(movie) 그 자체다. 만약 하루살이가 영화를 본다면 `뭐 저렇게 느려`라고 생각할 거고, 거북이는 `뭐가 저렇게 빨리 움직여`가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라고 아주 느리게 말할 것이다. 복장이 터질 정도로 느리게 말이다.그러면 사람의 특성시간은 얼마나 될까? 사람의 평균 신장이 1.6~1.7m 정도니까 이것을 평균적으로 걷는 속도인 3.6km/h로 나누면 되는데 약 1.7초이다. 이것은 자신의 키만큼 걷는데 걸리는 시간이므로, 빨리 걸으면 그만큼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고 걸음이 더디다면 그만큼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특성시간 때문에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거나 느리게 가는 것 같다고 느낀다.오랜만에 쉴 새 없이 뛰고 나서 시계를 보면 시간이 너무 더디게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며, 쌩쌩 소리를 내며 달리는 아이들이 빨리빨리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것도, 빨리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배부른 생각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삶은 가혹하고 나이가 들수록 더뎌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은 하나같이 거북이의 걸음걸이를 억지로 배워버리고 만다. 어쩌면 나의 어머니도 그런 어른일 것이다.△어머니보다 빨리 달아나는 시간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대구에 간 일이 있다. 못난 아들은 자동차도 한 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문제는 우리 동네에서 읍내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에 네 대 밖에 없다는 거다. 아침 9시에 첫차를 타서 오후 5시 30분에 있는 막차를 타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8시간 정도.읍내까지 40분, 읍내에서 터미널까지 10분, 대구까지 가는 데 1시간 10분, 대구터미널에서 약속 장소까지 30분, 도착해서 볼일을 보는데 두세 시간……. 이렇게 계산하면 그리 넉넉하진 않지만 그래도 두어 시간 가량의 여유는 있었다.하지만 그날 어머니는 내내 뛰다시피 하셨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볼일을 보고 나오자마자…… 마라톤 선수 같은 어머니를 경보 선수처럼 따라가며 “엄마, 그렇게 빨리 뛰지 않아도 돼요.” 그러면, 어머니는 “응 그러냐?” 라고 대답하셨지만 그때뿐, 여전히 재게 발을 디디셨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어머니보다 스무 해 이상 덜 산 나는 당신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당신은 당신의 늙음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계셨을 것이다. 어느 때부턴가 당신보다 더 빨라지기 시작한 시간 앞에서, 하루를 쪼개고 또 쪼개어 그 시간을 따라잡으려 필사적이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저런 버스가 아니라 내 차로 모시려면 지금부터 나도 더욱 필사적이 되어야 할까. 나이 든 아들의 공부는 진척되기는커녕 어머니만큼이나 속절없이 노쇠해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비좁고 답답한 삶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이 늙어가는 속도를 좀체 따라갈 수 없어 슬프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8-05

절경을 품은 산, 문장대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물화북탐방지원센터 08:40분. 매매 바른 선크림이 땀과 뒤범벅이 되었다. 칠월의 볕만 생각하고 그 빛을 다 받아낸 나뭇잎은 생각지 못했다. 불과 몇 분을 걷지 않았는데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산은 깊었다. 오르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어 산길은 고요했고, 그 속에서 그늘은 그윽했다. 속리산(俗離山), 이름처럼 산은 속세를 떠나 있었다.한참을 오른 것 같은데 푯말은 매정했다. 우리는 겨우 1.5km를 걸었다. 아직 걸어온 것보다 더 많이 걸어야 했다. 계곡에는 물이 가득했다. 세수하는 걸로는 도무지 모자라 등산화와 양말을 벗었다. 가장 깊은 곳은 허벅지까지 올 것 같았다. 두 발을 물에 내려놓고 두세 걸음을 걸었을까. 쩡한 한기가 순식간에 등을 타고 올라 머리를 때렸다.△눈썰매,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거리정말 덥긴 더웠다. 이런 여름이면 나는 몹시 추웠던 어릴 적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살았던 곳은 워낙 산골이라 눈이 내리기만 하면 며칠씩 내리곤 했다. 눈이 퍼붓고 나면, 꼭 비온 다음 날처럼 화창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마을 초입으로 모여 눈썰매를 탔다. 산마루에 있는 동네라 들어오는 입구는 무척 가팔랐다. 어른들은 눈썰매를 타는 우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이렇게 눈이 많이 온 다음 날은 찾아올 사람도 찾아갈 사람도 없어 그 가파른 길은 모두 우리 차지였다.그 해 겨울도 어김없이 그랬다. 나는 며칠 째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다. 지독한 감기 때문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점심 먹고 나간 형은 여태 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는 겨웠고,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아무리 껐다 켜도 화면조정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썰매를 타며 떠드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친구들과 함께 놀지는 못하더라도 노는 모습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눈을 기어, 기어이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는 잡힐 것처럼 또렷했고, 그 소란스러움에는 어떤 희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그랬을까, 아니면 원래 양말 따위는 없었던 걸까, 엄마의 털신은 턱없이 컸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디뎠지만 눈은 밀려 들어왔고, 맨발로는 그 차가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차가움은 아픔과 고통으로 모양을 바꾸곤 했다.저 모퉁이만 돌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 걸어갈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도착해도 이 추위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퉁이 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막연한 희망이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를 이 추위만큼 선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갔던 길을 되돌아오며, 나는 멀리 있는 우리 집이, 평소처럼 그 자리에 있는 집이, 오늘마저도 거기에 있어 원망스러웠다.견딜 수 있을 만큼의 추위가 아니라 온전한 추위, 어떤 가식도 허위도 없는 순도 100%의 추위는 절망을 동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걸을수록 분명해 오는 것은 저기 우리 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벌써 군불을 넣어 방은 쩔쩔 끓고 있을 것이고,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발을 주물러 주실 것이 분명했다. 절망과 희망은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희망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평범한 삶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평범함 그 자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정상의 절경어딜 가나 산에는 헐떡, 꼴딱, 깔딱과 같은 고개가 있다. 동행한 친구도 나도, 산이 가팔라질수록 말 수가 줄었다. 이 더운 날 여길 왜 왔냐고, 나는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친구도 그랬을 것이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싸운 것 같은 우리는 씩씩거리며 걸었다. 이제 저 철계단을 오르면 정상에 이를 것이었다. 별 게 없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꾸역꾸역 계단을 올랐다. 산은 으레 정상과 정상이 아닌 곳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기 마련이다. 정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정상 아닌 곳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문장대는 정상에서 섰을 때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측의 기암괴석은 관음봉으로 이어져 속사치를 지나 상학봉으로 달아났다. 좌측은 칠형제봉으로 시작하여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을 지나 천황봉에 닿았다. 내가 올라온 길을 덮고 있는 짙고 깊은 녹음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산은 높았다. 나는 이 문장대 정상에서 비로소, 정상은 단지 특정한 지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다시 아프도록 추웠던 어린 날의 겨울을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추위와 아픔을 참고 그 모퉁이를 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뭔가 다른 색깔의 희망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무리 그날의 모퉁이를 향해 달려가 보지만 끝내 그 모퉁이를 돌 수는 없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7-29

여름휴가에 읽을 만한 책 추천

더위가 꼬리를 말아 내린 듯하더니 다시 죽일 것처럼 기승을 부린다. 비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베트남에 갔을 때 놀랐던 건 갑작스러운 비 때문이 아니라 어디에 지녔는지 알 수도 없는 우산을 사람들은 잘도 펼쳤기 때문이다. 비에 속수무책인 사람들은 언제나 나 같은 이방인들이었다. 우리나라도 점점 이런 베트남 기후를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가 자주 온다. 이럴 때 우리가 시급하게 익혀야 할 건, 마술처럼 우산을 펼치는 베트남 사람들의 기술인 것 같다.우산을 잘 숨기진 못하지만, 가방의 한 쪽 주머니엔 항상 우산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가방 안에는 내 머리 크기를 감당할 수 있는 헤드폰과 10인치 크기의 노트북이 들어 있다. 사실 가방이 아니라 배낭이라 불러도 좋을 지경인 이 가방에는, 그러고도 열네댓 권의 책을 넣을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오갈 때 읽겠노라고 챙긴 몇 권의 책과 꼭 읽어야 하는 책들로 넘쳐나는 이 가방을 꾸준히 괴롭힌 덕분에 가방끈이 고정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린다.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여행도 좋고, 술도 좋지만 이렇게 여유로울 땐 책이 어떠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는 내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지만 책은 내가 넘기지 않으면 책장은 넘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나와 관계없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지만, 책은 내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는 결코 스스로 끝나는 법이 없다. 바쁠 땐 영화를 보더라도 한가할 땐 책 읽기를 권한다. 마침 이 큰 가방에 여러분에 권할 책을 챙겨왔다. 공교롭게도 이 책은 여행과 관련된 책이다. 책 읽기가 서툰 사람을 위해, 그래도 책 좀 읽은 당신을 위해, 고상한 독서 취향을 가진 여러분을 위해 각각 한 권씩의 책을 골랐다.먼저 당신의 독서수준이 초급이라면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을 추천한다. 글이 많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정 글 읽기가 싫다면 그림만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기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근무했던 저자는, 어느 날 홀연히 회사를 그만두고 38일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프랑스, 스페인, 리히텐슈타인, 터키 등 여덟 국가를 다녔고,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작가는 서두에 “익숙한 것들과 결별했을 때 비로소 솔직해지는 감정들, 세상을 몇 개의 선으로 표현하며 스스로 내뱉은 수많은 독백, 나에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라고 쓰고 있다. 부러우면 지는 거지만, 그래도 작가의 자유가 부럽다면 이 책을 권한다.당신이 중급의 독자라면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내용도 형식도 여행과 관련이 없다. 그렇긴 하지만 폐쇄적이고 열등감을 가진 청년이 철학자의 말에 용기를 얻고 세상을 향해 힘찬 발을 내딛는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자기계발서보다는 수준이 고급하니) `삶을 위한 여행 준비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이렇게 모순적인 제목의 책일수록 잘 팔리는 것 같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그랬고,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그렇다. 아파야 청춘이며, 얕은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지적 대화가 가능한 시대의 특징을 이 제목들은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미움받다`라는 동사가 없으므로 어법상 `미움 받을`이 맞지만, 이 책이 띄어쓰기를 무시한 이유는 `미움받다`라는 동사를 보편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과, 그러한 미움을 받아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미움을 받고 싶다면 미움 받을 짓만 하면 되지만, 미움을 받고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 미움보다 훨씬 크고 굳센 자기 신념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가 때문이다. 타인의 칭찬이나 비난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러한 용기를 가질 때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마지막으로 고급한 당신에겐 `토성의 고리`를 추천한다. 이 책은 `나`가 여행한 곳과 그 느낌을 소개한 기행 형식의 소설이다. 다른 소설과 달리 특별한 사건도 눈에 띠는 등장인물도 없다.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우울과 공허다. 정확하게는 우울과 공허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서사가 아니라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그동안 시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한 부분이 아니라, 소설로, 그것도 장편소설 전체를 가지고 시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휴가기간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언어가 만들어내는 아득하고 그윽한 적막 속에 머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7-22

행복, 그 증거 없는 투명함에 대해

▲ 공강일 서울대 강사요 며칠 참 모질게도 더운 날의 연속이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자꾸 몇 해 전에 올랐던 마니산이 떠올랐다. 그 때도 이렇게 더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해서 몹시 슬플 땐 수심가와 같은 슬픈 노래로 슬픔을 달랬다. 지독한 더위는 지독한 더위라야 잊을 수 있나보다.죽을힘을 다해 산을 올랐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다. 망할 산이었다. 필시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지, 마니산이 망할 것이 아니라 망할 놈은 나였지만, 일단 뱉은 욕이니 주워 삼킬 수도 없고, 더욱이 주워 삼킬 물도 없었다. 으레 있을 법도 한 약수터도, 계곡에 물은커녕, 계곡조차 없는 이런 산에, 왜 온 거지?7월의 볕은 살갗에 닿자마자 물로 변해 줄줄 흘러내렸지만, 마실 수는 없었다. 물도 없이 말이다, 어쩜 이 산은 돌만 이렇게 많으냐고, 그늘도 지지리도 없이 말이다, 오이 하나를 아껴 먹지 않고 단번에 먹은 것을 후회하며, 물도 없이 말이다, 그늘도 없이, 이런 날 등산을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이를 갈며, 욕을 주워섬기며, 내가 왜 여길 따라와 가지고선, 지금 내가 얼마나….어라, 정상이네!물론 이 산에는 정상에도 물이 없었는데, 단군할아버지가 먹던 우물이 있다더니, 우물 입구는 굳게 막혀 있다. 이거야 원. 팔뚝도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방금 마늘을 먹다말고 뛰쳐나온 호랑이 같은 아저씨가 병에 송글송글 이슬이 맺히는 얼음물을 들고 있었고 난 그 싱싱한 물이 탐이나 겁도 없이, 먹게 해달라고 용감하고 위엄 있게 외쳤다, 그 물병에 맺힌 이슬이라도 먹게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생각보다 비굴했나?호탕한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 물을 내 빈 생수통에, 500℉ 생수통에 무려 반이나 채워주었다. 참 호탕하시기도 하시지. 그 물을 다 마실 수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정말이지 그 소용돌이 같은 더위와 갈증 속에서도, 자랑질이 하고 싶어, 내가 이렇게 대범하게 물을 얻었노라고, 그 건강하고 호탕한 아저씨보다 더 호탕하게 일행들과 물을 나눠 마셨다. 저 아저씨는 등산을 오기 전날 냉동실에서 이 물을 얼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겠지.그럼 어제 우리는?물론 그 아저씨만큼 우리 역시 수고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강화도에 도착해 마치 종말이라도 찾아올 것처럼 술을 퍼부었으니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저씨의 수고는 저 차가운 얼음물이 증명해주지만, 우리의 수고는 탈수, 헛구역질, 입안 가득한 구린내가 말해준다는 것 정도.아저씨가 우리에게 준 그 물 덕분에 우리는 잠시나마 살아났다. 그 덕에 여지없이 찧고 까불 수 있었다.“우와! 얼음물을 마셨더니…. 우와! 이 차가운 보리차를 마셨더니 말야…. 더 갈증나!”`반전놀이`(우리는 이런 말장난을 이렇게 불렀다) 그 놀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이 모퉁이만 돌면 말야…. 또 모퉁이야! 와 같이 공분을 사는 것들도 있긴 했지만, 대개는 화기애애했고, 때론 화기`애매`했다. 학교는 다녔으나 졸업장은 없다느니, 경력도 자격증도 있지만 벌써 2년 째 놀고 있다느니, 차를 샀지만 면허증은 없다느니, 남편은 없으나 애는 있다느니,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말들 속에서 응당 슬퍼야 할 것들은 무게를 잃고 우리 너머로 흩어졌다. 우리가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은 갈증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 원초적인 갈증 앞에서 저마다 가진 삶의 무게는 중력을 무시하고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슬픔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는 이름들이 들어섰다. 산을 내려가 제일 먼저 먹고 싶은 것들의 이름들 말이다. 처음엔 물이었고, 아이스크림이었고, 어제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또 맥주였고, 그다음에도 맥주였다.하지만 정작 그런 것들을 먹고 나니 이제 갈증이 그리웠다. 참을 수 없게 만들던 그 기갈, 그 속에서 떠올린 이름들, 그 이름들은 실제보다 훨씬 시원했고, 달콤했다. 때로 이름일 때가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듯했다.그날 우리는 등산은 왔으나 물은 없었고, 물을 마셔도 갈증은 더 했고, 정상에 올랐으나 내려 갈 길은 까마득했고, 카메라는 가지고 왔으나 배터리는 없었다. 우리를 담은 그때의 사진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행복은 분명 증거 없는 투명함만으로도 증거할 수 있는 그런 것이리라.※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7-15

호미곶 상생의 손과 다비드상의 오른 손

▲ 공강일 서울대 강사◇ 서로를 갈망하는 두 손호미곶에는 엄청나게 큰 손이 두 개나 있다. 바다에는 오른손, 육지에는 왼손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데, 그 이름이 `상생의 손`이다. 1999년 12월에 완공된 이 조각에는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 상생(相生)은 “둘 이상이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 살아감”이라는 뜻이다. `나`로 인해 `너`의 삶이 행복해지고, 행복해진 `너`의 삶이 다시 `나`에게 영향을 주어 내가 또 행복해지고, 그런 식으로 행복이 끊임없이 증폭되는 선순환(善循環)의 관계, 이것이 상생이다.그런데 이상하지 않으신지? 바다의 오른손, 육지의 왼손. 이 두 손이 만나면 어떻게 악수를 할까. 악수든 하이파이브든 오른손끼리 하는 법인데 말이다. 바른손 두 개를 만들든지, 아니면 하나는 황동, 다른 하나는 청동으로 만들었더라면 두 사람의 손이라는 것을 더 쉽고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럼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손인 걸까. 물론 상생은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바다의 손도, 육지의 손도 대한민국의 것이니,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한 몸인 우리가 우리의 손을 맞잡고 하나 된 모습으로 새천년을 열어가자는 뜻으로 본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그렇다고 해도 나는 저 손이 여전히 불만이다. 손과 손은 그렇게 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갈망하지만, 발이 없는 손은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없다. 그래서 저들은 서로의 빈손만을 보고 있다. 벌써 16년째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만날 기약도 없이 기다려야 하다니 참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윗의 손에 하프를조각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뭘까, 혹시 생각해본 일이 있으신지? 나는 조각가가 아니어서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말 그럴 듯한 손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820년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된 밀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다. 하릴없는 미술사가들은 남아 있는 흔적으로 팔의 형태를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오른손은 흘러내리는 키톤(Chiton)을 부여잡고, 왼손에는 아마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팔의 흔적 밖에 없으니 그 실제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대로 상상해도 된다. 팔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군,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한 무명의 조각가가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난 비너스를 만들어놓고 손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마치 누군가의 잘못으로 떨어져 나간 것처럼 조작한 것이 아닐까. 그녀의 왼손에 어울리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인 것 같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손을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례하고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 밀로의 조각가는 이런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를 하나 더 만들기는 무리여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팔 만드는 것을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형편없다고 여기는 손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다. 3m에 이르는 거인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돌팔매를 들고 출전하는 다윗의 당당함과 긴장감을 다비드 상은 잘 표현하고 있다.(아시겠지만, 다윗을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다비드가 된다.) 그렇긴 하지만 다비드 상의 손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미술사가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는지, “원래 피렌체 대성당 지붕에 올릴 것을 고려해서,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손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기형적으로 크게 만든 것입니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다비드`상은 손이 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손 모양이 문제다. 허벅지 부근의 오른손은 실제로 네댓 개의 돌멩이를 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오른손은 무언가를 거머쥔 것도 그렇다고 쫙 편 것도 아니어서 어딘지 모르게 어정쩡해 보인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저 손이 어색한 이유는 미켈란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있는 것 같다. 성경에 따르면 골리앗과 싸우기 전 다윗은 양을 치고 하프를 타는 순박한 소년이었다. 그의 하프 연주는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두통으로 고생하던 괴팍한 사울왕도 아픔을 잊을 정도였단다. 그런 다윗이 어쩌다 갑자기 전쟁에 나가게 되었는지 성경은 이 부분을 자세히 적어 놓지 않았다. 불경스럽지만 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그 둘은 실제로 싸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설령 싸웠더라도 다윗은 돌팔매가 아니라 하프를 들고 나가지 않았을까? 그의 연주에 골리앗뿐만 아니라 적군도 아군도 모두 감동해서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흐뭇해진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 하나 쯤 있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혹시 피렌체에 들를 일이 있으시다면 다윗의 손에 하프를 들려주시길.※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7-08

미당 시의 변천

▲ 공강일 서울대 강사■연립주택 사이아무래도 서정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시단의 기린아였다. 그를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만든 시집은 `신라초`다. 이 시집에서 시작하여 `동천`, `질마재 신화` 등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역사, 경주, 화랑정신에 대해 깊이 탐구하였다.서울 남현동 예술인 마을에는 1970년부터 2000년, 그가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그의 집은 연립주택들 사이에 고립된 섬처럼 고요히 놓여 있다. 집은 이층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즐겨 마셨던 맥주의 상표가 무엇인지, 스위스 여행에서 그가 무엇을 사가지고 왔는지, 그의 손목시계의 상표가 무엇인지까지도 알 수 있다.■중년의 시(詩)들서정주는 각박한 한국사를 살아야 했지만, 역사의 현장 속에 뛰어들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4·19혁명이나 5·18민중항쟁 때 그는 민중의 편이기보다는 정권의 편에 섰다. 그런 까닭에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았다. 그는 죽은 후에 친일파로 규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실제로 `무등을 보며`와 같은 시에는 순응적이고 운명론적인 삶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역사의식의 부재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결이 있다. 서정주의 결은 비판보다는 순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결을 근거로 시인의 시까지를 얽어 말할 수는 없다.시인이었기에 그는 시를 썼다. 타계 전까지 15권의 시집을 펴냈고, 미발표작까지 포함하면 1000여 편이 넘는 시를 썼다. 시의 편수만큼이나 시의 스펙트럼 역시 다채로웠다. 초기에는 육욕과 욕정을 “스며라 배암”(화사)과 같은 시어로 발산하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에로틱한 욕망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들어내기도 하였다(`꽃밭의 독백`). 이후 `질마재 신화`와 `동천`과 같은 시집에서는 한국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정서로 시를 다듬었다.■노년의 시(詩)들미당의 시는 대부분 내용적으로 강렬했으며, 기교적으로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을 때면 긴장하여야 한다. 시의 최고의 미덕이 함축과 응축이라면 그보다 더 충실한 시를 쓴 시인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노년에 들어서면서 시인은 한껏 이완한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나,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려는 집착은 사라지고, 느슨하게 풀어지고, 여유롭고, 평안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부드럽게 펼쳐지고 자유롭게 퍼져나가는 것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말할 수 있다.그의 생가에는 `1994년 7월 바이칼 호수를 다녀와서 우리 집 감나무에게 드리는 인사`라는 시가 시화로 제작되어 정원의 감나무 앞에 놓여 있다. 이 시는 제목의 길이만큼이나 느슨하여 정갈한 노년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감나무야 감나무야잘 있었느냐 감나무야내가 없는 동안에도 언제나 우리 집 뜰을지켜늘 싱싱하고 청청키만 한 내 감나무야내가 `시베리아`로`바이칼` 호수를 찾어 가보고 오는 동안에너는 어느 사이푸른 땡감들을 주렁주렁 매달았구나!나는천칠백사십이미터 길이의이 세상에서 제일 깊고 맑은 호수를 보고왔는데너도그만큼 한 깊이의 떫은그 푸른 땡감열매들을그 사이에 맨들어 매달았구나!내 착한 감나무야-`1994년 7월바이칼 호수를 다녀와서 우리 집 감나무에게 드리는 인사` 전문 이 시는 마치 동시처럼 맑고 여리다. 시베리아에까지 가서 본 `바이칼 호수`와 자신의 집에 놓인 `감나무`를 등질적으로 바라보고, 그 호수의 깊이와 감의 떫음을 동일한 규모로 이해하고 있다. 호수 앞에서 느낀 경이를 감나무에서도 느낀다는 것은 다만 말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미 여든의 나이였으나, 어린아이처럼 사소한 것에서부터 거대한 것에까지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매 순간 경이를 경험하는 노년의 삶이 어찌 청초하지 않았겠는가.서정주는 자신의 호를 `덜 된 집` 또는 `조금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미당`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 집을 봉산산방, 즉 쑥과 마늘의 집이라 불렀다. 쑥과 마늘을 먹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던가. 서정주는 1997년에`80소년 떠돌이의 시`라는 시집을 펴냈다. 여든이 되도록 그는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미흡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소년으로 죽을 수 있었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7-01

곶과 과메기 그리고 언어의 치맛자락

□ 호미곶은 어디?구룡포에서 조금 더 가면 호미곶에 이르게 된다. 포(浦)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으로 `개`라고도 불린다. `곶(串)`은 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육지를 말한다. 바닷물은 육지를 휩쓸고 들어와 포를 만들고, 육지를 휩쓸고 나가며 곶을 만든다. 포가 있는 곳엔 곶이 있고, 곶이 있는 곳엔 포가 있다. 그래서 포와 곶은 경계가 모호하며 그 이름도 다양하다. 김훈은 한 글에서 “포구들은 대체로 포, 진, 곶, 고잔, 머리, 개, 여, 말, 들, 안, 뿌리, 게미, 배미, 끝, 너머 같은 이름을 달고” 있다고 썼다(`자전거 여행`, 233면).호미곶이라 하면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의 꼬리부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호랑이의 꼬리부분은 장기반도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그렇다면 장기반도 전체가 호미곶이라는 말일까? 한 백과사전에 따르면 호미곶은,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반도 끝, 영일만을 이루면서 돌출한 곶`으로 되어 있다. 이 설명은 모호하다. `영일만을 이루면서 돌출한 곶`이란 장기반도 전체를 뜻하며, 한편 `장기반도의 끝`이라는 설명은 장기반도 전체가 아니라 그 끝의 특정한 부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곶`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라고 되어 있다. 이 설명 역시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크게 보면 한반도 전체가, 작게 보면 장기반도가, 더 작게 보면 `상생의 손`을 둘러싸고 있는 육지가, 부리모양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도 국어사전도 도움이 안 되긴 마찬가지다. 이렇게 언어에 집착하다가 다시 언어 속을 떠돌까봐 걱정이다.□ 과메기와 언어의 바다과메기라는 것을 몇 해 전에서야 처음 먹었다. 아니 오다가다 멋도 맛도 모르고 먹다가, 그날 처음으로 그 맛에 반했고, 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제철의 과메기는 찰졌고, 함께 했던 사람들은 흥겨웠고, 11월의 쌀쌀함은 그 열기를 식혀주었다.(이제 겨우 유월인데 벌써 과메기 먹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올해 여름은 더없이 길고 더울 것 같아 걱정이다.)과메기를 먹으며, 문득 과메기가 어쩌다 과메기로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갑작스럽고 엉뚱한 질문에 사람들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는 듯 냉랭했다. 이 `썰렁`한 분위기를 누군가 반전시켜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그 때 한 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분은 배추 위에 과메기와 다시마 그리고 마늘과 고추를 느긋하게 얹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저는 이 배추가 왜 배추인지도 모릅니다.”그 말 덕분에 사람들은 웃을 수 있었고, 당혹스러운 분위기도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날의 상황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 분의 말이 내 궁금증까지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오히려 더 많은 물음을 낳았다. 그 물음들은 이렇다.우선 왜 과메기를 과메기라고 부르는지가 여전히 궁금했다. 19세기의 이규경(李圭景 : 1788~1863)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算稿)`에서 과메기는 `관목어`에서 유래한다고 밝혔다. 국어사전에 `관목`은 `말린 청어`라는 뜻으로 등재되어 있다. 청어나 꽁치를 말릴 때 눈을 꼬챙이로 꿰어서 말렸기 때문에 눈을 뚫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관목어(貫目魚)라 불렀다고 한다. 이 `관목어`를 자꾸 발음하다 보니, `관`의 `ㄴ`은 탈락하고 `목`은 메기가 되었다는 것. 억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수긍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다음 물음으로 넘어간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그렇다면 배추는 어쩌다 `배추`가 되었나? `숭채`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명도 있고, `백채`가 변하여 배추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마늘은? 고추는? 다시마는? 어쩌다 이것들은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나? 이제 그 궁금함은 자꾸 자라났고 이름의 모든 근원들이 궁금해졌다. 이름 아닌 것이 없다. 심지어 `물음`조차 이름이며, `이름`조차 이름이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다. 모든 것들은 이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고, 말을 뱉어내기 위해서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 말은 이름을 필요로 하고, 이름은 말을 필요로 한다. 말 없는 이름이 존재할 수 없고, 이름 없는 말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이름들이 낯설었고 낯선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언어의 바다에서 언어가 포를 만들고 곶을 만들 때까지 표류해야만 한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6-24

구룡포의 천초, 하얗게 바래지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 채집과 사유재산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수렵과 채집을 했던 구석기 시대는 신석기 시대보다 훨씬 풍족하고 풍부한 삶을 누렸다고 한다. `고대병리학(Paleopathology)`자들에 따르면 구석기인들은 한곳에 정착하며 농사를 지었던 신석기인들보다 평균키도 컸고 병도 적게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영양가 많은 과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고,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속도에 맞춰 이동하며, 체력을 비축하고 동시에 체력을 키워나갔다.구석기 시대처럼 수렵과 채집으로 생활하는 원시부족들은 수렵한 것을 공평하게 나누지만, 채집한 것을 나누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언뜻 들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냥이 채집에 비해 더 어렵고, 더 많은 위험이 따른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채집한 것이 아니라 수렵한 것을 공동재산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사냥의 승패는 운에 달렸지만, 채집은 개인의 노력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채집의 성과물은 개인의 노력과 노동량에 비례한다. 그런 이유로 구석기인들은 자신의 노력과 노동이 들어간 채집물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사적 소유 혹은 사유 재산이라는 감각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은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다.□ 한가한 산골의 도로와 고사리산골 사람들은 봄이면 산나물을 채집한다. 참나물, 곰취, 고사리, 고비, 두릅, 방풍나물, 곤드레, 쑥, 냉이, 지장나물 등 그 종류를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다른 나물들은 거둬오자마자 생채, 숙채, 부침개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유독 고사리만은 그럴 수 없어서 삶은 후 바싹 말려 먹는다. 산골 마을의 봄은 할 일이 지천이어서, 정작 마을은 한산하다. 포장된 도로 역시 마찬가지여서 한가한 도로는 고사리로 빼곡하다. 어디까지가 누구의 것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고사리가 아닌 것에 손대는 법이 없다. 나의 것이 소중하듯 다른 사람의 것이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배려의 역사 역시 소유욕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다. 해질 무렵, 밭에서 돌아온 산골 사람들은 고사리를 거두어들인다. 그때서야 동네 사람들은 눈짓으로 서로의 하루를 물으며, 서로의 고단함을 위로한다. □ 바래지는 천초, 낯설면서 낯익은구룡포에서 홀로 회를 먹고, 해안을 따라 호미곶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곳은 따로 해안도로라는 것이 없어 네비게이션은 빠르고 큰 길만을 안내한다. 네비게이션을 애써 배신하고, 끊임없이 경로를 이탈하며 해안마을의 소로를 따라가고 있다. 한산한 도로의 한 쪽에는 검붉은 해초가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서 말려지고 있다. 한 아주머니에게서 그것의 이름이 천초라는 것을 얻어 듣는다. 산골 촌놈은 그 풍경이 낯설면서도 낯익어 오래도록 바라본다. 우뭇가사리라고 불리는 천초는 햇볕에 하얗게 말려질 것이다. 이렇게 말려진 천초를 끓이면 풀어질 대로 풀어져 풀처럼 끈적끈적해지고, 이것을 체에 걸러 다시 굳히면 천초묵이 된다.천초묵은 칼로리가 낮고 식이섬유가 많아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준다. 요즘에야 건강식품으로 불리지만, 옛날에는 그저 포만감만 주는 영양가 없는 음식에 지나지 않았다. 가혹한 시대의 백성들, 고기를 잡으면 먹지도 못한 채 공물로 바쳐야 했던 가난한 어촌의 사람들은 천초묵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을 것이다. 그네들은 자맥질로 어렵게 채집한 천초를 먹고, 그 영양으로 그보다 더 힘겨운 일을 감내하며 살아내야 했다.우리가 웰빙이라고 부르는 대개의 음식들, 예컨대 고구마나 보리밥, 그리고 다시마, 톳과 같은 음식들은 이런 슬픈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이제 비싼 돈을 주며 먹는다. 이러한 음식 속에는 지난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지만, 그 삶이 우리의 몸속에 스밀 시간 따위는 없다. 우리는 오직 장(臟)을 비우기 위해 이것들을 먹기 때문이다. 붉은 색을 띠는 천초가 햇볕에 하얗게 변색하듯 삶 역시 그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하얗게 바래진다. 그리하여 낯익은 것은 낯설어지고, 낯선 것은 낯익어진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6-17

도산서원, 군자의 꽃과 군자의 삶

▲ 공강일 서울대 강사□ 마당 가득한 군자의 꽃마당은 크고 붉은 꽃으로 가득하여 선비의 정신이 호호(皓皓)히 전해지는 듯했다. 저런 유의 꽃 중에 내가 아는 것은 작약밖에 없어 작약이라 하였더니 동행한 이들은 모두 문외한이라 감히 반론하는 자가 없었다. 다녀와서도 대학자의 서당에 왜 하필 작약인지 그 의미가 아득하여 홀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작약에 대해 이리저리 찾아보았더니 “복통, 월경통, 토혈, 빈혈 등의 약재”로 쓰이며, 이미 오래 전부터 관상용으로 심겨져왔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선비의 집에 작약을 심었다는 전례를 찾기는 어려웠다. 오래도록 작약꽃을 들여다보았더니 내가 찍어 온 사진 속의 꽃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그 줄기였는데, 작약은 풀이지만 내가 본 꽃은 확연히 나무였다. 또 자세히 본 즉 작약의 잎은 타원형으로 둥글었으나, 사진 속의 꽃은 그 잎이 오리발처럼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어머님이 수심 가득한 내 모습을 보고 연유를 물으셨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꽃을 보여드렸더니 어머님은 문득 “너는 글줄이나 읽었다는 녀석이 어찌 모란과 작약조차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일갈하셨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모란인줄 알았다. 군자가 으뜸으로 여기는 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 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릇된 앎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 앎에 우쭐대었으니 그 잘못을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퇴계의 자취를 살펴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 퇴계의 자취이황은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12세에 숙부 이우(李瑀)로부터 `논어`를 수학하였다. 이우의 가르침은 매우 엄하였는데, 배우는 이황의 자세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선생은 한 권을 마치면 한 권을 통하여 외우고, 두 권을 마치면 또 두 권을 통하여 외었다. 이우는 이황을 두고 “집안을 번창케 할 아이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재수에 삼수를 거듭하였고, 거의 과거시험을 포기하다시피 하였다가 서른이 넘어 급제하였다.당대에 장원급제를 아홉 번이나 한 `고시중독자` 이이(李珥)와는 달리 선생은 `고시폐인`이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과거시험에 세 번을 낙방하고 집에 돌아와 있을 때 이웃 하인이 그를 `이서방`이라 불렀다. 선생은 이에 한숨지으며 “내가 이름을 이루지 못한 탓의 수치다”고 하였다. 그러나 뒷날 선생은 “이 때 내가 사람들의 대우와 관심에 민감하였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하였다. 선생의 성찰이 대개 이와 같았다.관사와 관리를 선생은 이렇게 묘사하였다.관사는 은은한 구름 속에 숨어 절에 온 듯하고(官舍隱雲如到寺)관리는 땅 밟는 것이 병풍 위를 걷는 듯하네(吏人踏地似行屛)관사가 절에 숨은 듯하다는 것은 흉년에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지방의 관청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을 뜻하며, 관리가 병풍 위를 걷는 듯하다는 것은 관리들이 백성들의 삶을 현실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외면함이 이와 같이 심하다는 것을 뜻한다. 퇴계의 이러한 날카로운 비판은 오늘날 현실과도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선조는 퇴계를 중히 여겨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고,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가길 소원하였다. 그가 높은 벼슬을 거부한 것은 어머니의 말씀을 좇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선생의 뜻이 높고 깨끗하여 세속에 합당하지 아니한 것을 살피고 일찍이, “너의 벼슬은 한 고을 현감직이 마땅하니 고관이 되지 말 것이다.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아니할까 두렵다.” 고 하였다. 퇴계는 이 말을 잊지 않았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당을 지었다. 선생의 무욕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역책하자 후학들이 그의 뜻을 기리고자 서당 주변의 땅을 개척하여 서원을 지었다.작약을 모르고 모란을 보는 것과 작약을 알고 모란을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작약을 통해 모란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퇴계의 무욕을 알게 되니 얼마 전 안동을 다녀간 높은 관리가 다시 보이게 되었다. 그 관리에게 이르노니, 선생의 고고(孤高)하고 탁탁(濯濯)한 가르침을 따라 벼슬보기를 초개처럼 여긴다면 지금껏 쌓아온 명성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이로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6-10

무섬마을에서 먹은 청국장에 대해

□ 무섬마을의 청국장어제는 청국장을 먹었습니다. 꽤나 이름난 집이라 기대를 했는데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며칠 전 영주 무섬 마을에서 먹었던 청국장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제 먹은 청국장은 콩을 삶아 찧기만 했는지 국물이 맑으면서 누런색이었습니다. 무섬에서 먹은 청국장은 발효되면서 풍기는 특유의 찐득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고, 국물은 검누랬습니다. 도시는 아무래도 청국장의 냄새를 싫어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국장의 냄새가 빠진 청국장을 먹어야 합니다.□ 메주와 `아재개그`요즘 철지난 개그를 `아재개그`라 부르더군요. 기왕 메주를 말했으니 이참에 저도 그와 관련된 아재개그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 싸가지 없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비가 군불을 많이 넣었는지 어쨌는지 방문을 열어놓고 잤나봅니다. 다음 날 아비가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야야, 너그 아부지가 와 갑자기 저래 죽었노?”아들이 말했습니다.“바람은 불지예, 메주는 떨어지지예, 지가 안 죽고 배깁니꺼?”싸가지 없는 아들이 아니라 아주 몹쓸 아들놈입니다. 패륜적인 이런 이야기 앞에서 불쾌하기보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마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러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냉소적이기만 한 아들의 말은 우리의 상식을 웃돕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아들의 말 앞에서 우린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웃음은 바로 거기,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 자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은밀한 욕망이 유폐되어 있습니다.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동시에 우리를 억압하는 가부장제라는 권위적 질서에 대한 반감! 이것이 우리의 욕망의 실체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자꾸 모르려고 합니다. 욕망은 실현되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은 채, 저런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아무도 다치지도 않고, 아무도 손해 볼 것도 없는 그냥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 그것을 통해서 도저히 불가능한 우리의 내밀한 욕망을 우회적으로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억의 맛이야기를 어떻게 읽어내든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런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입니다. 이 이야기는 메주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을 때 할 수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콩으로 메주를 쑤고, 메주로 간장을 우려내고, 그 남은 건더기로 된장을 담그는 삶, 버려지는 것 없이 모두 사용되는 식문화 속에서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싸가지 없는 아들이야기`는 더 이상 구전되지 않을 것입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사실을 말하자면, 무섬 마을의 청국장이 맛있다고 느꼈던 것은 어렸을 때 제가 먹었던 그 맛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맛 때문이 아니라 그 익숙함 속에 퍼져나간 기억의 맛 때문이었습니다. 밖에서 놀다가 돌아오면 방에는 언제나 메주 냄새가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 냄새에 익숙해질 때쯤엔 저녁으로 된장찌개를 먹었고, 군불로 뜨끈해진 아랫목에서 메주도 사람도 함께 익어갔습니다. 메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 켜켜이 배인 과거였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먹으며 현재를 살았고, 그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일구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과거 속에 담긴 미래를 살아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요.시간은 흐르지만 현재의 모든 것을 가지고 흐르지는 않습니다. 과거는 시간 뒤켠에 버려집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의 향과 맛은 과거를 불러옵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기억을 드시겠습니까?※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5-27

`뜬돌` 부석사를 찾아

▲ 공강일□ 떠 있는 돌과 왼쪽으로 치우친 석등부석사의 부석(浮石)은 뜬 돌을 뜻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언뜻 보아 위아래가 서로 이어 붙은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붙어 있지 않고 약간의 틈이 있다. 노끈을 넣어보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비로소 그것이 뜬 돌인 줄 알 수 있다”라고 썼다. 부석사는 부석이 있는 곳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이렇게 보는 것이 논리적이겠지만 오히려 한 설화에 따르면 부석보다 부석사가 먼저 있었다고 전한다.이 설화는 의상을 사랑한 당나라의 선묘로부터 시작한다. 의상이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선묘는 죽어 용이 되어 의상을 따랐다.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이 지금의 부석사에서 설법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의 무리 500명이 이곳에 이미 가람을 지어놓고 있었다. 의상의 뜻을 알아차린 선묘는 허공중에 사방 1리나 되는 큰 바위가 되어 사이비 종교의 사찰 위에 떨어질 듯 말 듯 떠 있었다. 놀란 그들의 무리가 흩어지자 의상은 이곳에 들어가 설법을 베풀었다.이 설화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은 일반적인 법당과는 다른 구조로 되어 있다. 거개의 법당이 중앙에 부처님을 모신다면,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법당의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의상이 사이비 종교의 사찰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량수전의 터가 가로로 길쭉하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미타불을 중앙에 모시는 것보다 측면에 모시면 훨씬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사람들을 무량수전의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석등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석등은 일종의 이정표다. 여기에 화살표를 새기거나 글자를 써놓았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법당의 왼쪽으로 살짝 치우치게 석등을 세워놓았을 뿐이다. 안양문의 계단을 오르며 석등을 바라보면, 석등은 마치 스스로 움직이듯 왼쪽으로 비켜서며 무량수전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석등을 돌아 법당의 오른쪽 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여러 겹의 우연무량수전과 관련된 이런 설명들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란 맞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인 것이니까.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파 출신의 유능한 대사가 영주에 가람을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 이유가 궁금했을 것이다. 당대의 수도 경주를 버려두고 궁벽한 산속에 터를 닦은 이유가 왜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사람들은 감히 의상 대사에게 여쭙지는 못하고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석등이 왼쪽으로 치우친 이유에 대한 설명 역시 가설일 뿐 그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우연보다 필연을 좋아하고, 설명 불가능한 것보다는 설명 가능한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니까.그러고 보니 우리의 부석사 방문 역시 이런 우연의 연속이었다. 처음에 헌웅이와 둘이서 가기로 했었다. 토요일 날 가기로 했는데 금요일 저녁에 녀석에게서 지금 갈 수 있느냐고 불쑥 전화가 왔다. 마침 집이었다. 시팔이 하상욱의 말처럼 `불금`에는 “알고 보면 / 다들 딱히”(하상욱, `서울시`, 중앙북스, 2013.) 할 일이 없는 법이니까. 옷을 대충 챙겨 입고 가방에다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쑤셔 넣었다. 헌웅이가 운전을 했고, 나는 여행 경로와 숙박 장소를 그제야 물색했다. 꽉 막힌 길을 간신히 비집고 나와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을 때 평소에 연락도 없던 석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친정에 갔다고 했다. 녀석이 뒤늦게 합류하면서 남자 셋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홍상수는 영화 `북촌방향`에서 `성준`(유준상)의 입을 빌려 우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있다. “(우연에는)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이렇게 이유 없이 일어난 일들이 모여서 우리 삶을 이루는 건데 그중에 우리가 일부러 몇 개를 취사선택해서 그걸 이유라고 (여기면서) 생각의 라인을 만드는 거잖아요.” `성준`의 말처럼 우연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미 없음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우연을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면 때로 억지나 억측이 생기기도 한다. 헌웅이가 전화했을 때 내가 집에 없었더라면 우린 금요일에 여행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주에 석구의 아내가 친정에 가지 않았더라면 녀석과 함께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여러 겹의 우연이 겹쳐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우연이 어떤 필연을 낳은 것 같지는 않다. 필연이라고 부르기엔 우리의 여행은 평범했고, 삶은 어디든 그저 그렇고 그러했다.의상을 사랑한 선묘여, 여전히 허공중에 몸을 띄운 그대여, 슬퍼하지 말라.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만남과 헤어짐 역시 한낱 우연일지니. 애타도록 슬퍼하지 말라.※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5-20

경주 남산, 할매부처의 반듯한 발바닥

△남산, 작으면서도 큰 산워낙 촌놈이었다. 골이 좁아 작은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에는 해발 1천m가 넘는 산들이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산 모두에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었다. 산꼭대기를 `산만디` 또는 `산만당`이라 불렀다. 600m도 안 되는 낮은 곳은, 구릉이니 언덕이니 하는 곱상한 말 대신, 그냥 `만디`라 불렸다. 그런 곳에서 자랐다.경주의 남쪽에 있는 산을 남산이라 한다. 북으로는 금오봉(金鰲峰)이 있고, 남으로는 고위봉(高位峰)이 있다. 둘 다 채 500m가 되지 않는다. 우리 동네 `만디`만도 못한 곳도 산이냐고 코웃음을 쳤다. 저런 산이라면 한달음에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후회하기, 그 특기를 살려 남산을 오르는 동안 `아, 산의 높이는 한낱 숫자에 불과하구나!` 몇 번이나 후회했다.청량산, 백암산, 문수산, 이런 산의 정보를 뒤져보아도 산의 규모를 알려주는 곳은 없다. 산이 넓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능선과 능선으로 이어져 산은 시작도 끝도 없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경주 남산은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남산은 측정 가능할 정도로 작은 산인 셈이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남산을 소개한 한 사이트는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라고 말하고 있다(사단법인 경주남산연구소).작으면서도 큰 산, 남산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사골, 새갓골, 틈수골, 이름 붙여진 골짜기만 해도 43개에 이른다. 이런 골짜기마다 유물과 유적이 있다. 국보 제312호인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하여 보물 12점, 사적 14개, 중요민속자료, 지방유형문화재, 지방기념물, 문화재자료 등등이 산적해 있다. 유적과 유물이 가장 많은 곳은 장창골로 94개이며, 남산 전체로 따지면 694개에 이른다. 수많은 골짜기 중 어디로 올라가든 유적과 유물을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발에 차이는 것들이 유적이고 유물이다.△할매부처의 반듯한 발바닥이 중 가장 많은 것이 절터(寺蹟)로 150개에 이르지만, 그것들은 절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다음으로 많은 것이 불상과 석탑인데, 이것들은 다행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유물이라곤 해도 불국사나 감은사지의 세련된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남산의 불상은 거개가 거칠고 투박하며, 일정한 형식이나 규칙을 갖추고 있지 않다. 생각나는 대로, 손 가는 대로 다듬어진 것처럼 보이는 남산의 불상들은 빈궁한 사람들보다 더 곤궁한 모습을 하고 사람들을 맞아주었을 것이다.그 대표적인 불상 중 하나가 `할매부처`(보물 제198호 경주불곡마애여래좌상)다. 돌을 조악하게 파낸 후 그 내부에 부처의 형상을 부조해놓았다. 말이 불상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의 형상과는 다르다. 곱슬머리를 하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납의(衲衣)를 입고, 이마 가운데에는 백호(白毫)를 하고, 오른손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 그런 불상과는 말이다. 할매부처는 원광도 백호도 없이, 민머리에 두건을 쓰고, 양쪽 어깨를 덮으며 길게 드리워지는 옷을 걸치고, 소매에 두 손을 숨긴 채 앉아 있다.▲ 공강일잘 다듬어진 불상이 아무리 인자하고 평온한 미소를 띤다 해도 할매부처가 가진 평온함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절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그것이 갖추어야 할 요건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데, 이러한 불상에는 절제와 균형을 유지하려는 긴장이 스미어 있다. 하지만 할매부처는 어떠한 권위도 근엄함도 잊은 채, 어떠한 속박이나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무념이나 무상마저 내려놓은 채 그저 앉아 있다, 다만 어정쩡하게. 할매부처의 앉은 자세가 `어정쩡한` 이유는 저 반듯한 발바닥 때문이다. 가부좌를 틀었다면 분명 왼쪽이나 오른쪽 끝에 발등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할매부처의 한 가운데에는 오른쪽 발바닥의 정면이 돋을새김 되어있다.석가모니는 백호에서 나온 광명을 통해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거나 무량세계를 비추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백호는 석가모니의 능력과 위업의 표식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무게 전체를 견뎌야만 하는 저 발바닥은 무엇인가, 할매부처의 삶을 온전히 견뎌냈을 저 발바닥이 그녀의 표징은 아니었을까.할매부처는 반듯한 발바닥을 사람들 앞에 척 꺼내놓고 발 냄새를 피웠을 것이다. 그녀는 고단한 사람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고약한 냄새를 풍겨, 사람들이 발 딛고 있는 삶, 사람들이 기어이 견뎌내고 있는 삶,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감각케 하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에게 삶의 진의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삶 속에 있음을 깨우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긍정도 부정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의미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도 할매부처는 감실에서 감감한 표정으로 세상을 듣고 있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5-13

내연산을 걷는 일

▲ 공강일■ 끌림 혹은 내연산내연산, 이렇게 멋진 산이 있다는 걸 불과 몇 해 전에 알았다. 포항에 전시회 관련 일로 오가던 중 그녀와 친해졌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과 사귀기엔 주변머리가 없었다. 등산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를 끌고 산엘 갔다. 명색이 국문과 박사과정생이었데도, 내연산이란 말을 듣고 겨우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내연남, 내연녀와 같은 시시한 말들이었다.내연산(內延山)은 말 그대로 산의 내부 깊은 곳으로 사람을 끌어들였다. 골짜기는 완만하게 이어져 등산복이나 등산화 없이도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배려였던 것 같다. 내연산은 폭포와 기암과 산의 곡선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열 두 개의 폭포 중 내가 본 것은 겨우 일곱 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폭포 앞에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내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문득 이 산을 떠올린 것은 그 깊고 그윽한 내연산의 골짜기, 청하골 때문이었고, 이곳을 걸으며 내가 가진 삶의 무게를 조금은 벗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음에 돌을 얹고 사는 며칠이었다. 어디엘 나가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싫어 주말 내내 방구석에 박혀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내가 홀로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멀리서 들은 듯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내 울음을 다 들어준 그분은 차분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걸으라고 했다. 물 한 통 들고, 신발 단단히 매어신고 걸으라 했다. 낮게 흐르는 바람도 만져보고, 섞여 흩어지는 향기를 더듬어도 보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가만히 가라앉아 지금의 내 모습이 투명하게 비칠 것이라 했다. 일흔이 넘으신 분의 충고이기도 했지만, 나이를 잊은 정정한 목소리는 어떤 정합적이고 논리적인 말보다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전화를 끊고 그분의 말을 따라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물을 한 통 챙겼다.■울음을 참는 법언젠가 백석은 힘든 시간을 보낸 듯했다. 이 시인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애달픈 연시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방랑자의 기질이 다분했다. 한때 바람머리를 휘날렸던 모던보이는, 1930년대 말, 기자도, 교직도 버리고, 바람을 따라 만주 신경(지금의 창춘)과 안동(지금의 단둥) 등지를 떠돌았다. 그가 정확히 언제 우리나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으나,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으로 돌아와 박시봉(朴時逢)이라는 사람의 방(方)에 살게 되었을 때의 심경을 시로 남겼다. 그 시가 한국현대시사에서 절창으로 손꼽히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이다.모든 것을 버리고, 혹은 잃고, 혹은 잃었다는 것조차 모른 채 떠돌았던 불운한 시대의 시인은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 들어 화로를 껴안고 생각에 잠긴다. 어쩌다 사랑하는 아내도, 아내와 살던 집도 사라지게 되었는지, 어쩌다 살뜰한 부모와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지게 되었는지, 그런 자신의 슬픔과 어리석음을 소처럼 오래도록 되새김질하였다고 한다. 가슴이 메여오고,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흐를 때, 낯이 뜨겁도록 부끄러운 생각이 들 때, 그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황량해진 가을부터 눈이 퍼붓는 한겨울까지 백석은 그렇게 자신의 고통을 더듬었다. 그러다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려는 회피의 몸짓이 아니라 겸손의 결과일 것이다. 모든 일들이 자신에게서 비롯한다는 오만을 버린 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자의 깨달음일 것이다. 그리하여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멀리, 육안이 아닌 심안으로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게 된다고 그는 쓰고 있다. 백석은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들여다 본 것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아파하면 그 모든 `나`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얼마나 오래 웅크려야 그 모든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일까. 백석은 자신이 가진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고통을 모두 토해내고 그것을 다시 삼켜 버렸다.그럴 수도 있겠지만, 며칠 동안 고통을 부여잡고 뒹굴 자신이 없다면 걷기를 추천한다. 하늘과 빛과 녹음들 속을 걷다보면 알게 된다. 나를 무겁게 만들고, 울게 만드는 것의 속성이 뚜렷해진다. 더 오래도록 걷다보면, 아픔과 슬픔은 빛이 내려앉듯, 먼지가 내려앉듯 자욱이 내려앉게 된다. 그 걷기의 장소가 내연산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4-29

일출 보러 가는 길

1. 불국사서 석굴암까지:`처음`의 앞불국사에서 잠을 잤다. 석굴암 주차장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겠지만, 불국사에서부터 걷고 싶었다. 새벽 5시 40분께는 해가 뜰 예정이었다. 두 시간 전에 출발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나는 아무래도 산길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석굴암까지 3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였으므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랜턴을 챙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해돋이를 보러 가는 중이니까 랜턴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바보. 해돋이를 보러 가는 동안 해가 없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해가 진 후 태양은 긴 여운을 남기지만, 해가 뜨기 전 빛의 전조를 발견할 수는 없다.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를 조롱하기 위해 나는 이 문장을 인용하곤 했다. 풀이할 것도 없는 이 말을 다시 풀어쓰자면, 앞에는 아무 것도 없고, 뒤에 무언가 있는 것, 그것이 `처음`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다. 이 당연한 말의 의미를 모른 채 나는 그를 비웃어 왔던 셈이다. 처음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일출 전에 빛이 있을 리 없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말이다. 다행히 일출을 보러 온 등산객은 많아 무섭진 않았다.그러고 보니, 해돋이를 처음 본 곳도 이곳 석굴암이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은 으레 경주였으니까. 10월, 날씨는 차고 쌀쌀했다. 그러나 빛바랜 사진 속에서 늦가을 날씨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저 멀리에서 떠오른 불그스름한 빛이 석굴암 경내 구석구석을 덮고 있다. 그 빛은 아궁이 속에서 벌겋게 단 숯불과도 같다. 강렬하지도 격렬하지도 않은 빛은 그윽하게 토함산을 휘감고 있다. 그 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찍은 단체사진 속에서 담임 선생님도 친구들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단체사진은 무모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무작정 토함산을 찾은 건 아무래도 그 따스한 빛이 그리웠던 것이리라.2. 석굴암서 토함산 정상까지:검은 어둠바보 같은 일투성이다. 막상 석굴암 입구에 도착했는데, 해가 뜰 시간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석굴암 개방 시간은 오전 6시 30분부터라고 한다. 그러니 석굴암에서 해돋이를 보려면 10월 중순이나 11월에 와야 했다. 해가 뜨려면 30분도 남지 않았다. 여기에서 토함산까지는 1.4km. 40~50분 거리라고 친절하게 푯말까지 적혀 있다. 목표는 일출이었으니까, 토함산을 향해 뛰었다. 왜 나의 계획은 항상 일그러지는 것일까, 왜 나는 여행에서조차 여유를 누릴 수 없는 것일까. 토함산 정상을 지척에 남겨두고 해는 저 아래에서부터 붉은 기운을 드러내고 있다.산 정상에서 보는 해돋이는 해변에서 보는 해돋이와 그 느낌이 다르다. 바다에서는 해를 올려다보아야 하지만, 산에서는 더 넓은 시야로 해돋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갓 떠오르는 해는 강렬하지 않다. 여명이 해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 오는 무렵을 뜻하는 `여명`은 매우 모순적인 단어다. 여명의 `여`는 본래 `려(黎)`로 `검다`라는 뜻이며 물론 `명(明)`은 `밝다`라는 뜻이다. `여명`의 한자를 그대로 풀어쓰면 `검은 밝음`이 된다. 검은데 밝다? 어두운 것이 어떻게 밝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해돋이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여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첫새벽의 태양은 얇고 검은 비단 같은 막으로 감겨 있다. 이 얇은 막 덕분에 떠오르는 해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다. 이 막에 휩싸인 태양이 내뿜는 빛은 그야말로 `어둑한 빛`이다.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처럼 모순적인 말들 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여명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해를 휘감고 있다가 해의 위쪽 가장자리에서부터 천천히 풀려 내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태양은 찬연한 빛을 발한다. 이 짧은 여명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히 움직였다. 모든 연약하고 가녀린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순간적이다. 그 순간 속에 진리가 담긴다.▲ 공강일맑은 날엔 포항 앞바다까지 보인다고 한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그 수평선의 빈틈을 헤집고 떠오르는 태양은 바다에 선을 긋듯 긴 빛을 드리울 것이다. 천 년의 고도 경주에서, 천 년 전에도 솟아올랐던 해가 오늘을 향해 빛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해돋이를 보노라면 삶은 아득하고 그윽해진다. 아무리 계획이 일그러지고, 일이 꼬일지라도 해돋이를 권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해는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당신에게 토함산에서의 해돋이를 권한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