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의 집과 노년의 詩
■연립주택 사이
아무래도 서정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시단의 기린아였다. 그를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만든 시집은 `신라초`다. 이 시집에서 시작하여 `동천`, `질마재 신화` 등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역사, 경주, 화랑정신에 대해 깊이 탐구하였다.
서울 남현동 예술인 마을에는 1970년부터 2000년, 그가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그의 집은 연립주택들 사이에 고립된 섬처럼 고요히 놓여 있다. 집은 이층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즐겨 마셨던 맥주의 상표가 무엇인지, 스위스 여행에서 그가 무엇을 사가지고 왔는지, 그의 손목시계의 상표가 무엇인지까지도 알 수 있다.
■중년의 시(詩)들
서정주는 각박한 한국사를 살아야 했지만, 역사의 현장 속에 뛰어들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4·19혁명이나 5·18민중항쟁 때 그는 민중의 편이기보다는 정권의 편에 섰다. 그런 까닭에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았다. 그는 죽은 후에 친일파로 규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실제로 `무등을 보며`와 같은 시에는 순응적이고 운명론적인 삶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역사의식의 부재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결이 있다. 서정주의 결은 비판보다는 순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결을 근거로 시인의 시까지를 얽어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이었기에 그는 시를 썼다. 타계 전까지 15권의 시집을 펴냈고, 미발표작까지 포함하면 1000여 편이 넘는 시를 썼다. 시의 편수만큼이나 시의 스펙트럼 역시 다채로웠다. 초기에는 육욕과 욕정을 “스며라 배암”(화사)과 같은 시어로 발산하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에로틱한 욕망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들어내기도 하였다(`꽃밭의 독백`). 이후 `질마재 신화`와 `동천`과 같은 시집에서는 한국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정서로 시를 다듬었다.
■노년의 시(詩)들
미당의 시는 대부분 내용적으로 강렬했으며, 기교적으로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을 때면 긴장하여야 한다. 시의 최고의 미덕이 함축과 응축이라면 그보다 더 충실한 시를 쓴 시인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노년에 들어서면서 시인은 한껏 이완한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나,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려는 집착은 사라지고, 느슨하게 풀어지고, 여유롭고, 평안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부드럽게 펼쳐지고 자유롭게 퍼져나가는 것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생가에는 `1994년 7월 바이칼 호수를 다녀와서 우리 집 감나무에게 드리는 인사`라는 시가 시화로 제작되어 정원의 감나무 앞에 놓여 있다. 이 시는 제목의 길이만큼이나 느슨하여 정갈한 노년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감나무야 감나무야
잘 있었느냐 감나무야
내가 없는 동안에도 언제나 우리 집 뜰을
지켜
늘 싱싱하고 청청키만 한 내 감나무야
내가 `시베리아`로
`바이칼` 호수를 찾어 가
보고 오는 동안에
너는 어느 사이
푸른 땡감들을 주렁주렁 매달았구나!
나는
천칠백사십이미터 길이의
이 세상에서 제일 깊고 맑은 호수를 보고
왔는데
너도
그만큼 한 깊이의 떫은
그 푸른 땡감열매들을
그 사이에 맨들어 매달았구나!
내 착한 감나무야
-`1994년 7월바이칼 호수를 다녀와서 우리 집 감나무에게 드리는 인사` 전문
이 시는 마치 동시처럼 맑고 여리다. 시베리아에까지 가서 본 `바이칼 호수`와 자신의 집에 놓인 `감나무`를 등질적으로 바라보고, 그 호수의 깊이와 감의 떫음을 동일한 규모로 이해하고 있다. 호수 앞에서 느낀 경이를 감나무에서도 느낀다는 것은 다만 말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미 여든의 나이였으나, 어린아이처럼 사소한 것에서부터 거대한 것에까지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매 순간 경이를 경험하는 노년의 삶이 어찌 청초하지 않았겠는가.
서정주는 자신의 호를 `덜 된 집` 또는 `조금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미당`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 집을 봉산산방, 즉 쑥과 마늘의 집이라 불렀다. 쑥과 마늘을 먹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던가. 서정주는 1997년에`80소년 떠돌이의 시`라는 시집을 펴냈다. 여든이 되도록 그는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미흡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소년으로 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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