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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 보실래예? 좀비영화와 `부산행`

등록일 2016-08-12 02:01 게재일 2016-08-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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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 할딱고개. 북적대는 사람을 피해 산으로 왔는데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는 생각 때문일까?
▲ 속리산 할딱고개. 북적대는 사람을 피해 산으로 왔는데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전설이다`:전설적 `꼰대`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걸 좋아한다.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 땐 액션 영화를 본다. 때리고 깨부수고 뭐 그런 것이 좋아서기도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그 다음엔 자면 그만이다.

즐겨보는 영화 중 하나는 `나는 전설이다`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순전히 도입부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뱀파이어와 좀비의 중간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낮에는 활동하지 않는다. 영화는 텅 빈 도시에 홀로 남은 로버트 네빌이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네빌은 지금, 폐허가 되어버린 빌딩 숲에서 진짜 숲인 냥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슴을 쫓고 있다. 그는 사냥이 끝나면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무전을 보내고, 버려진 전투기 위에서 도시를 향해 골프공을 날린다. 나는 네빌의 무료함과 권태와 고독이 부럽다.

이 영화는 1954년 리처드 매이슨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와 소설은 주제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영화에서 네빌은 전설적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책에서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 혼자 남은 마지막 인간일 뿐이다.

좀비들은 짐승처럼 날 것을 먹지만, 잉여물을 만들지도 않으며, 축적하지도 않으며, 서로를 속이는 법도 없다. 그들은 생각할 줄도, 서로를 사랑할 줄도 안다. 네빌은 그런 좀비의 모습을 보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네빌은 저 좀비들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짐승일 뿐이라는 생각을 고집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네빌은 영웅이 아니라 그냥 전설적인 `꼰대`다. 내가 부러운 건 네빌이 아니라 좀비인지도 모르겠다.

△`부산행`:나는 좀비다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에 등장하는 좀비는 요즘 영화의 좀비와는 다르다.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부터 좀비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낮이든 밤이든 거리를 헤매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산 사람들을 물어뜯고,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이런 식으로 좀비는 무한 증식하고 결국 세상은 좀비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좀비가 상징하는 것은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면서도 사물로 변해버린 노동자”이자(문강형준), 대량생산체계 속에서 오직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시민들이다.

세계적으로 좀비를 대상으로 한 영화나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 ZA(Zombie Apocalypse)가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개봉한 `부산행`은 이런 좀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좀비로 변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좀비보다 더 모질고 잔인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좀비에게 쫓기기 전부터 이미 사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노숙자를 보자 용석(김의성)은 “꼬마야, 너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하고,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한 딸에게 석우(공유)는 “이럴 땐 그런 거 안 해도 돼”라고 말한다. 정부는 사태의 위중함을 숨긴 채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발표만 해댄다. 이런 추악한 사람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노숙자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석우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자기나 살지 왜 저런 사람까지 살리려고 하지`라고 생각했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다른 좀비영화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사람들을 그린다면 `부산행`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비난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2014년에 일어난 세월호 사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묶여 있고,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국가를 위해서라도 그만하라고 소리친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성주군민들을 지역이기주의라고 몰아세운다. 그런가하면 메갈리아에서 파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해고시킨 사건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남성혐오든 여성혐오든 혐오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혐오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공감능력이 아닐까. 아무 죄도 없이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핸드폰의 전자파에도 민감하면서 그보다 훨씬 강력한 전자파를 발생하는 사드와 함께 살아야 하는 성주 군민들을, 여자가 운전을 한다고 욕을 하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대안은 가까운 곳에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근저에 현실 정치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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