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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군자의 꽃과 군자의 삶

등록일 2016-06-10 02:01 게재일 2016-06-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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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인가? 모란인가?
▲ 공강일 서울대 강사

□ 마당 가득한 군자의 꽃

마당은 크고 붉은 꽃으로 가득하여 선비의 정신이 호호(皓皓)히 전해지는 듯했다. 저런 유의 꽃 중에 내가 아는 것은 작약밖에 없어 작약이라 하였더니 동행한 이들은 모두 문외한이라 감히 반론하는 자가 없었다. 다녀와서도 대학자의 서당에 왜 하필 작약인지 그 의미가 아득하여 홀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작약에 대해 이리저리 찾아보았더니 “복통, 월경통, 토혈, 빈혈 등의 약재”로 쓰이며, 이미 오래 전부터 관상용으로 심겨져왔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선비의 집에 작약을 심었다는 전례를 찾기는 어려웠다. 오래도록 작약꽃을 들여다보았더니 내가 찍어 온 사진 속의 꽃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그 줄기였는데, 작약은 풀이지만 내가 본 꽃은 확연히 나무였다. 또 자세히 본 즉 작약의 잎은 타원형으로 둥글었으나, 사진 속의 꽃은 그 잎이 오리발처럼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어머님이 수심 가득한 내 모습을 보고 연유를 물으셨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꽃을 보여드렸더니 어머님은 문득 “너는 글줄이나 읽었다는 녀석이 어찌 모란과 작약조차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일갈하셨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모란인줄 알았다. 군자가 으뜸으로 여기는 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 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릇된 앎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 앎에 우쭐대었으니 그 잘못을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퇴계의 자취를 살펴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 도산서원의 정문에서 촬영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도산서당으로 퇴계 선생이 생전에 직접 강학한 곳이다. 군자의 꽃이 퇴계의 덕과 품성을 말해주듯 가득 피어 있다.
▲ 도산서원의 정문에서 촬영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도산서당으로 퇴계 선생이 생전에 직접 강학한 곳이다. 군자의 꽃이 퇴계의 덕과 품성을 말해주듯 가득 피어 있다.

□ 퇴계의 자취

이황은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12세에 숙부 이우(李瑀)로부터 `논어`를 수학하였다. 이우의 가르침은 매우 엄하였는데, 배우는 이황의 자세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선생은 한 권을 마치면 한 권을 통하여 외우고, 두 권을 마치면 또 두 권을 통하여 외었다. 이우는 이황을 두고 “집안을 번창케 할 아이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재수에 삼수를 거듭하였고, 거의 과거시험을 포기하다시피 하였다가 서른이 넘어 급제하였다.

당대에 장원급제를 아홉 번이나 한 `고시중독자` 이이(李珥)와는 달리 선생은 `고시폐인`이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과거시험에 세 번을 낙방하고 집에 돌아와 있을 때 이웃 하인이 그를 `이서방`이라 불렀다. 선생은 이에 한숨지으며 “내가 이름을 이루지 못한 탓의 수치다”고 하였다. 그러나 뒷날 선생은 “이 때 내가 사람들의 대우와 관심에 민감하였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하였다. 선생의 성찰이 대개 이와 같았다.

관사와 관리를 선생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관사는 은은한 구름 속에 숨어 절에 온 듯하고(官舍隱雲如到寺)

관리는 땅 밟는 것이 병풍 위를 걷는 듯하네(吏人踏地似行屛)

관사가 절에 숨은 듯하다는 것은 흉년에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지방의 관청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을 뜻하며, 관리가 병풍 위를 걷는 듯하다는 것은 관리들이 백성들의 삶을 현실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외면함이 이와 같이 심하다는 것을 뜻한다. 퇴계의 이러한 날카로운 비판은 오늘날 현실과도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선조는 퇴계를 중히 여겨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고,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가길 소원하였다. 그가 높은 벼슬을 거부한 것은 어머니의 말씀을 좇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선생의 뜻이 높고 깨끗하여 세속에 합당하지 아니한 것을 살피고 일찍이, “너의 벼슬은 한 고을 현감직이 마땅하니 고관이 되지 말 것이다.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아니할까 두렵다.” 고 하였다. 퇴계는 이 말을 잊지 않았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당을 지었다. 선생의 무욕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역책하자 후학들이 그의 뜻을 기리고자 서당 주변의 땅을 개척하여 서원을 지었다.

작약을 모르고 모란을 보는 것과 작약을 알고 모란을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작약을 통해 모란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퇴계의 무욕을 알게 되니 얼마 전 안동을 다녀간 높은 관리가 다시 보이게 되었다. 그 관리에게 이르노니, 선생의 고고(孤高)하고 탁탁(濯濯)한 가르침을 따라 벼슬보기를 초개처럼 여긴다면 지금껏 쌓아온 명성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이로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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