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킴벌리가 추석을 맞아 `가장 듣고 싶은 말, 가장 듣기 싫은 말이란 뜻의 “듣톡싫톡”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듣톡은 “너희 보니 힘이 나”(28%), “연휴도 긴데 여행이나 다녀오렴”(17%), “갈수록 예뻐진다”(15%), “음식은 나가서 사먹자”(13%), “용돈 받아가라”(12%)가 뽑혔다. 싫톡에는 “애는 언제쯤? 둘째는?”(23%), “살쪘네”(20%), “자주 좀 보자”(18%), “결혼은 언제 할 예정이니?”(14%), “취업은 했니?”(13%) 등이 선정됐다.
나는 곧잘 “너는 언제 돈 버냐?”와 같은 말을 듣는다. “아니요, 전 아직 대학원 졸업을 못해서….”라고 말하면, “그럼 대학원 마치면 니가 쓴 소설책이나 시집이 나오는 거냐?”라고 되물으신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저는 소설이나 시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걸 연구하는 사람예요.”라고 말해보지만, 다음 해에 또 같은 걸 물어 보신다. 이런 고충을 같은 과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 친구도 마찬가지 말을 듣는다며, 이젠 설명 같은 건 그만두고, “예, 이제 곧 나옵니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명절에는 서로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궁금하더라도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 거니까, 무엇보다 나도 내가 궁금한 사람 중에 하나니까, 그러니 제발 참으시라.
그럼에도 꼭 이런 곤란한 걸 물어보는 어른들이 계신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응하는 설명서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친지나 동네 어르신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곧이곧대로 말해선 안 된다. 그들은 “왜 하필 그런 일을 하냐?”고 말할 것이고, 십중팔구 당신의 직업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용적이지 않다는 말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질문에 적절하게 답하고 싶다면, 오히려 대답의 내용보다는 질문 자체를 분석하는 편이 낫다. `당황하지 않고`, 그 물음이 어떤 상황에서 던져진 것인지, 그런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성향은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의 답은 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낸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오답은 오답이기 때문에 오답이 것이 아니라, 출제자가 요구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에 오답이다.
초등학교 시험 문제에 이런 문제가 출제된 일이 있다. 사슴이 손에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보는 그림이 제시되어 있다. 그 그림 아래 “사슴이 000 봅니다”라고 적혀 있다. 물론 빈칸에 들어갈 말은 `거울을`이다. 그런데 한 아이는 “사슴이 `미쳤나` 봅니다” 라고 썼다. `미쳤나`가 어떻게 오답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냥 출제 의도에 맞지 않을 뿐이다. 아이는 `봅니다`를 교육과정을 초과하는 수준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며, `미쳤나`는 학교교육과 시험제도의 한계를 향해 던지는 도발적 구호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까지 하다.
학교는 천재를 양산하는 곳이 아니라 천재의 저항을 거세하는 곳이다. 그러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배속에 숨기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은 극도의 권태 속에서도 “동공이 내부를 향하여” 열리는 일을 자기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돈 꼴레오네는 다혈질의 소니에게 “머릿속의 생각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왜 그런 일을 하냐, 따위의 말을 듣는다면 “저도 당신과 같은 일을 하였더라면 당신만큼 성공하진 못했더라도 먹고 사는 일로 난감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때는 치기어린 마음에 멋모르고 결정하게 되어 후회가 막심합니다.”라고 말을 하라. 이 말을 들은 상대는 금세 우쭐해져 자신이 어떤 계기로 그 일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돈을 벌게 되었는지 신나게 늘어놓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깝게 여길 것은 없다. 그는 지금 이런 식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중이니까, 당신은 그저 측은지심의 인륜을 발휘하여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면 된다.
이런 유의 질문이란 늘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그냥 말이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정답은 늘 질문자에게 있으니 질문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대답보다는 질문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라. 이것은 문제의 정답에 근접하는 일일 뿐 아니라, 훌륭한 처세의 전략이기도 하다. 병법과 처세의 대가인 손자가 살아 돌아와도 나와 같이 말할 것이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