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꼬리를 말아 내린 듯하더니 다시 죽일 것처럼 기승을 부린다. 비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베트남에 갔을 때 놀랐던 건 갑작스러운 비 때문이 아니라 어디에 지녔는지 알 수도 없는 우산을 사람들은 잘도 펼쳤기 때문이다. 비에 속수무책인 사람들은 언제나 나 같은 이방인들이었다. 우리나라도 점점 이런 베트남 기후를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가 자주 온다. 이럴 때 우리가 시급하게 익혀야 할 건, 마술처럼 우산을 펼치는 베트남 사람들의 기술인 것 같다.
우산을 잘 숨기진 못하지만, 가방의 한 쪽 주머니엔 항상 우산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가방 안에는 내 머리 크기를 감당할 수 있는 헤드폰과 10인치 크기의 노트북이 들어 있다. 사실 가방이 아니라 배낭이라 불러도 좋을 지경인 이 가방에는, 그러고도 열네댓 권의 책을 넣을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오갈 때 읽겠노라고 챙긴 몇 권의 책과 꼭 읽어야 하는 책들로 넘쳐나는 이 가방을 꾸준히 괴롭힌 덕분에 가방끈이 고정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린다.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여행도 좋고, 술도 좋지만 이렇게 여유로울 땐 책이 어떠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는 내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지만 책은 내가 넘기지 않으면 책장은 넘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나와 관계없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지만, 책은 내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는 결코 스스로 끝나는 법이 없다. 바쁠 땐 영화를 보더라도 한가할 땐 책 읽기를 권한다. 마침 이 큰 가방에 여러분에 권할 책을 챙겨왔다. 공교롭게도 이 책은 여행과 관련된 책이다. 책 읽기가 서툰 사람을 위해, 그래도 책 좀 읽은 당신을 위해, 고상한 독서 취향을 가진 여러분을 위해 각각 한 권씩의 책을 골랐다.
먼저 당신의 독서수준이 초급이라면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을 추천한다. 글이 많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정 글 읽기가 싫다면 그림만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기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근무했던 저자는, 어느 날 홀연히 회사를 그만두고 38일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프랑스, 스페인, 리히텐슈타인, 터키 등 여덟 국가를 다녔고,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작가는 서두에 “익숙한 것들과 결별했을 때 비로소 솔직해지는 감정들, 세상을 몇 개의 선으로 표현하며 스스로 내뱉은 수많은 독백, 나에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라고 쓰고 있다. 부러우면 지는 거지만, 그래도 작가의 자유가 부럽다면 이 책을 권한다.
당신이 중급의 독자라면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내용도 형식도 여행과 관련이 없다. 그렇긴 하지만 폐쇄적이고 열등감을 가진 청년이 철학자의 말에 용기를 얻고 세상을 향해 힘찬 발을 내딛는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자기계발서보다는 수준이 고급하니) `삶을 위한 여행 준비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이렇게 모순적인 제목의 책일수록 잘 팔리는 것 같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그랬고,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그렇다. 아파야 청춘이며, 얕은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지적 대화가 가능한 시대의 특징을 이 제목들은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미움받다`라는 동사가 없으므로 어법상 `미움 받을`이 맞지만, 이 책이 띄어쓰기를 무시한 이유는 `미움받다`라는 동사를 보편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과, 그러한 미움을 받아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미움을 받고 싶다면 미움 받을 짓만 하면 되지만, 미움을 받고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 미움보다 훨씬 크고 굳센 자기 신념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가 때문이다. 타인의 칭찬이나 비난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러한 용기를 가질 때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고급한 당신에겐 `토성의 고리`를 추천한다. 이 책은 `나`가 여행한 곳과 그 느낌을 소개한 기행 형식의 소설이다. 다른 소설과 달리 특별한 사건도 눈에 띠는 등장인물도 없다.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우울과 공허다. 정확하게는 우울과 공허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서사가 아니라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그동안 시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한 부분이 아니라, 소설로, 그것도 장편소설 전체를 가지고 시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휴가기간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언어가 만들어내는 아득하고 그윽한 적막 속에 머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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